내고향 안동의 同姓 마을 탐방
서안동IC-(25분)-하회마을-(10분)-가일마을-(5분)-소산마을-(10분)-오미마을-(60분)-외내마을(오천군자마을)-(10분)
-온혜마을-(5분)-퇴계마을-(35분)-법흥동고성이씨-(20분)-내앞마을-(5분)-임하마을-(20분)
-무실마을-(5분)-지례예술촌-(40분)-묵계마을-(40분)-소호마을-(5분)-남안동IC(1박2일소요)
하회(河回)마을(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풍산유씨들의 동성마을이다.
하회마을의 지형을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태극형, 행주형,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낙동강 줄기가 이 마을을 싸고돌면서 ‘S’자형을 이룬 모양이기 때문이다.
강 북쪽으로는 부용대(芙蓉臺)가 병풍과 같이 둘러싸고 있고,
마을 안에는 화천(花川)이라는 작은 개울의 흐름에 따라 남북 방향의 큰 길이 나 있는데,
이를 경계로 하여 위쪽이 북촌, 아래쪽이 남촌이다. 북촌의 양진당(養眞堂)과 북촌댁(北村宅),
남촌의 충효당과 남촌댁(南村宅)은 역사와 규모에서 서로 쌍벽을 이루는 전형적 양반가옥이다.
이 큰 길을 중심으로 마을의 중심부에는 유씨들의 양반문화가,
주변으로는 하회탈놀이의 서민문화가 병존한다.
가일(佳日)마을(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가일마을은 고려의 개국공신인 권행의 후손 가운데 한 갈래인 안동권씨 복야공파가 사는 동성마을이다.
안동권씨는 세종 때 정랑을 지낸 권항이 이 마을의 부호인 유서의 사위가 되어 그 재산과 토지를 물려받아 이곳에 정착했다.
현재에도 병곡종택, 수곡종택, 노동재사 등의 고건축물이 잘 보존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이 영향으로 해방 이후 암울한 시기가 있었으나
근래에 와서 권오설, 권오상 등 이 마을 출신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훈장이 추서되는 등
제대로 된 평가를 받으면서 다시금 재조명 받고 있다.
소산(素山)마을(경북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소산마을(시미마을)은 본관과 성씨가 같으면서도 시조를 달리하는 두 안동 김씨, 즉 구안동 김씨(선안동 김씨)와 신안동 김씨(후안동 김씨)가 함께 사는 동족마을이다.
구안동 김씨의 시조는 신라 경순왕의 아들인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아들 김숙승(金叔承)으로 신라 왕족인 경주김씨에 그 뿌리가 있으며,
신안동 김씨는 안동 삼태사의 한명으로 고려태조를 도와 개국에 큰 공을 세운 김선평의 후손들을 이르는 말이다.
김태사의 9대손 되는 김삼근이 비안(현 의성군 비안면)현감에서 물러난 뒤 이곳 소산에 정착하면서 구안동 김씨와 함께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마을 안에는 양 안동김씨의 종택을 비롯한 많은 고가옥들이 유존하고 있으로 안동 동성마을의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오미(五美)마을(경북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이 마을의 이름은 본래 풍산현 오릉동(五陵洞)이었다.
지금은 오미동(五美洞)으로 불리는데 이는 한 집안의 8형제가 소과에 합격하고
그중 다섯이 대과에 급제함에 따라 인조 임금이 ‘팔연오계 오미지향(八蓮五桂 五美之鄕)’이라 불렀다는 데서 유래한다.
이곳은 풍산김씨가 5백년 세거해 온 동족부락으로 풍산김씨 종택을 비롯해 참봉댁, 영감댁, 도림
강당 등의 많은 고건축물이 남아 있어 반가지향의 향기를 잘 보전하고 있다.
또한 독립운동가로 일본왕궁에 폭탄을 투척한 김지섭, 임시정부 법무차장을 역임한 김응섭,
1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낸 김재봉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외내(烏川)마을-오천군자마을(경북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본래 외내마을이라 불리우던 와룡면의 광산김씨(김효로(1454~1534)가 입향조) 동성마을이였는데,
안동댐 수몰로 사라지게 되자 그 마을의 유서깊은 목조건물들을 한자리에 옮겨 놓은 곳이 바로 오천유적지이다.
오천(烏川)이란 말은 수몰전 외내마을 강가에 검은 돌이 많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이곳에는 예안파종가와 탁청정종가 등의 살림집을 비롯하여 탁청정, 후조당, 읍청정,
계암정 등의 정자건물들이 한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조선 중기 안동부사였던 한강 정구가 ‘외내에는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고 하여
군자마을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 숙박과 수련회나 대학생의 M.T 장소로도 가능하다.
온혜(溫惠)마을(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온혜는 예부터 온천(溫泉)이 있어서 여러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게 되었다하는 뜻으로 온혜(溫惠)라 하였다한다.
온혜는 주자학(朱子學)을 집대성한 대유학자(大儒學者)로 후세의 추앙을 받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이 태어난 유서 깊은 곳으로 ‘
도산서원’ 뒷산을 넘어 온혜, 상계, 하계, 원천 등의 지명을 가진 마을로서 모두 퇴계와 연관 있는
마을이다. 온혜는 태어난 곳이고, 상계는 자신이 산 지역이며,
하계, 원촌은 자손들의 뻗어나간 마을이다. 온혜에는 태실인 ‘노송정’이 있고,
상계는 ‘종택’이 있고, 하계, 원촌에는 ‘수졸당’과 ‘원대구려’가 각각 있다.
법흥동 고성이씨(固城李氏)(경북 안동시 법흥동)
안동에 살고 있는 고성이씨(固城李氏)는 李璜(李槃의 24세손)을 시조로 하고
입향조 이증을 파조로 하는 참판공파(參判公派)의 일부로 안동시 정상동과 법흥동 일원에
세거하면서 많은 인물을 배출한 안동의 대표적 명문 사족중 하나이다.
고성이씨가 안동에 정착하게 된 것은 1453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영산현감을 지내고
이조참판에 증직된 이증(李增)이 벼슬을 그만둔 후 안동 산수의 아름다움에 반해
안동부 부성 남문밖에 우거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유적으로는 이굉이 건립한 귀래정(정상동 소재), 이명이 건립한 임청각과 군자정(법흥동 소재),
이명의 여섯째 아들 이굉(李肱)이 건립한 반구정(정상동 소재) 등이 있다.
이황(李璜)이 고려 덕종 초에 거란이 침입했을 때 세운 공으로 이부상서에 올라
철령군(鐵嶺君: 철령은 철성(鐵城),
곧 현 고성의 별호)에 봉해졌기 때문에 이황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고성(또는 철성)으로 쓴다.
내앞(川前)마을(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은 의성김씨의 동성마을이다.
풍산에 살던 김만근이 처가인 내앞마을로 옮겨오면서 입향조가 되었고,
그의 손자 청계 김진의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면서 안동지역의 대표 명문 사족이 되었다.
특히 넷째인 학봉 김성일은 퇴계의 문인으로 영남학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또한 이들의 후손들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는데,
일송 김동삼, 백하 김대락 등이 모두 이 마을 출신이다.
안동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가 내앞문중의 주도로 마을 안에 세워졌으며,
현재까지도 많은 문화재들이 유존하고 있어 반가의 기풍을 잘 유지하고 있다.
임하(臨河)마을(경북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에 있는 안동권씨 동성마을이며
낙동강 반변천 기슭에 있다 하여 임하(臨河)라고 하였다.
와룡면 이상리에서 출생한 권환(權寏)이 당시 임하현 천전리에 세거하던
의성김씨 집안의 사위가 되어 임하리로 옮겨 오면서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권환은 천전리에 세거하던 김진의 외손녀인 전주류씨를 셋째 부인으로 맞았다.
임하리는 임하마을을 중심으로 한 임하1리와 추월마을을 중심으로 한 임하2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임하1리는 1976년 임하댐 준공으로 수몰 지구가 되면서
주민들이 인근 지역으로 이주하여 모습이 크게 달라졌다.
관련 유적으로는 권환의 아들 권굉(權宏)이 세운 와룡정사(臥龍精舍)가 있다.
권환은 불천위로 추대되어 있다.
무실(水谷) 박실(朴谷)마을(경북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박곡리)
무실마을은 인접한 박실마을과 함께 전주류씨의 동성마을이다.
내앞마을 청계 김진의 사위인 유성이 입향조이다.
원래는 현 위치에서 200m 아래쪽에 있었는데, 1989년 임하댐이 건설되어 현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박실의 류씨들은 대부분 선산의 해평으로 집단 이주하였다.
수몰 전의 전통적인 멋은 잃었지만 무실종택, 정재종택,
수애당, 기산서당, 만우정 등이 남아 있어 옛 향수를 전하고 있다.
지례(知禮)마을(경북 안동시 임동면 지례리)
지례마을은 조선 숙종때 대사성을 지낸 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 1623~1695)과
그의 중형 방형(邦衡)의 자손이 340여년간 동족 마을로 살아온 전형적 士林마을이었다.
지촌(芝村)은 의성 김씨 내앞파의 大祖 청계 김진(金璡)의 玄孫이며
학봉 김성일의 백씨인 약봉 김극일의 증손자로 지례의 입향조다.
그는 조선 현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지만 은둔생활을 좋아하여
지례에 집을 지었으며 후손들은 340여년간 가난하면서도 면학하는 전통을 이어 마을안에
초등학교를 짓고 후세교육에 힘써 수십명의 유명인( 김호길 등)을 배출했다.
정부의 임하댐 계획이 발표되자 종택과 제청, 서당 등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받아
마을 뒷산 중턱에 옮겨 지어(1986~1989) 한국최초의 예술창작마을 ‘지례예술촌’을 열었다.
묵계(黙溪)마을(경북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이 마을 입향조는 안동 김씨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1431~1521)선생이다.
보백당은 연산군의 폭정을 피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앞산 깊은 계곡에 만휴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87세까지 지냈다.
그가 남긴 '내 집에는 보물이 없다(吾家無寶物). 보물이라고는
오직 청백이 있을 뿐이다(寶物惟淸白)'라는 유훈은 아직도 청백리의 표상이 되고 있다.
보백당 김계행 선생은 안동 김씨의 상징적 인물이며,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보다
한 세대 앞선 인물로 1431년(세종 13년)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에서 태어났다.
보백당은 마은아홉 뒤늦게 과거에 급제했으며,
훗날 보백당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것이 바로 묵계서원이다.
소호(蘇湖)마을 (경북 안동시 일직면 소호리)
소호마을은 대구서씨ㆍ한산이씨ㆍ영양남씨가 각각 마을의 진입로를 기준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남쪽으로는 소호헌과 약봉종택의 달성서씨가, 북쪽으로는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수은종택과 대산종택의 한산이씨가, 동쪽 마을 안으로는 영양남씨가 살고 있다.
소호헌이 있는 소호마을은 달성서씨 동족마을을 이루고 있다.
특히 달성서씨는 영남에서는 드물게 노론집안이다.
소호마을 주변으로는 고산서원, 서산서원, 타양서원과 조탑동 5층전탑이 있어
볼거리가 풍부하고, 남안동IC와 인접하고 있어 교통도 편리하다.
안동 양반들의 허기를 달래던 전설을 품은 안동 헛제삿밥
***** 내고향 안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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