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육의 그림 / 불교 47. 채용신, ‘황현초상’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본다면 생멸(生滅)에서 벗어나리”
“그렇다면 너의 마음과 눈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능엄경
아난이 외도사술에 미혹되자
그를 위해 설법하는 부처님
처음부터 결론 말해주는 대신
스스로 답 찾도록 거듭 질문
모든 주문의 공덕이 크다지만
간절한 마음 없다면 소용없어
당신에게 가장 큰 숙제는 무엇인가. 나에게 가장 큰 숙제는 삶과 죽음이다.
나는 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어떻게 해서 죽는지 역시 알지 못한다.
태어나기 이전의 나는 누구였으며 죽음 후에 나는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얘기하겠다는 표현처럼 현재의 삶이 그렇다.
본론의 앞뒤가 오리무중이다. 본론 앞에 나는 무엇이었을까.
본론 뒤에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정말 궁금하다. 어디 그뿐인가.
50년 넘게 날마다 잠을 잤지만 잠이 드는 순간과 잠이 깨는 순간의 경계를 알지 못한다.
깨어있는 상태에서 잠으로 들어가는 경계도 알지 못한다.
알지도 못한 잠을 잘도 자고 잘도 깬다.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자고 깨는 내가 마치 눈 뜬 장님 같다. 비행기를 타고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나라에 내렸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방황하는 사람보다 더 답답하다. 황당하기 그지없다.
나를 잠들게 하고 깨어나게 하는 나는 누구일까.
몇 년 전 나는 뇌종양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내 자신이 정말 신기했다.
머리 뚜껑을 열었다 닫았는데도 여전히 과거의 나로 머물러 있었다.
그때 생각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머릿속인가. 심장속인가. 아니면 간이나 허파에 들어 있는가.
머리를 열었다 닫아도 나를 찾을 수 없다면 나라고 할 수 있는 나는 어디에 들어 있는가.
마취된 상태였을 때 나는 살아 있는 나였는가. 잠들었을 때의 나는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궁금증은 밥 먹고 할 일이 없어 던진 것이 아니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면 편안할 수 있다.
태어나기 이전의 내가 누구였고 죽음 후에 나는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 수 있다면
현재의 내 삶은 ‘거두절미’가 되지 않고 ‘초지일관’이 될 것이다.
부처님은 미래에 나와 같은 궁금증을 가진 사람이 나타날 것을 예측하셨나 보다.
‘능엄경’에서 그에 대한 해답을 자세히 설해주셨다.
아난이 부처님의 명을 받은 문수사리보살의 도움으로 마등가의 주술에게 깨어난 후였다.
아난은 부처님의 법문은 많이 들었지만 선정력(禪定力)이 약해 외도의 사술에 미혹되었다.
그런 자신이 부끄러워 시방의 여래께서 깨달음을 이룬 법문을 설해 주십사하고 청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물으셨다.
“아난아. 네가 당초 발심하여 출가할 때 나의 불법 가운데 어떤 수승한 모습을 보고
세간의 깊고 무거운 은애(恩愛)를 갑자기 버렸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말하였다.
“저는 여래의 32상이 뛰어나게 묘하고 빼어나 몸이 투명한 것이 마치 유리와 같음을 보고,
항상 스스로 생각하였습니다.”
아난의 대답에 부처님이 다시 질문하신다.
네가 발심하여 마음을 낼 때 무엇으로 보고 좋아하게 되었느냐.
아난이 대답한다. 제가 이와 같이 좋아하는 마음을 낸 것은 저의 마음과 눈을 사용하였습니다.
부처님이 질문하신다. 그렇다면 너의 마음과 눈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아난이 대답한다. 저의 몸속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질문하신다. 아난아, 너는 이 기원정사의 숲과 정원을 보는데
어째서 그것이 보이는가? 아난이 대답한다.
이 큰 강당은 문도 열려 있고 창문도 열려 있기 때문에 저는 안에서 바깥의 사물을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질문하신다. 만약 네가 말한 것처럼 이렇게, 이 몸은 강당 안에 있으며,
문과 창문이 열려 있기 때문에 밖의 숲과 정원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이 강당 안에서 여래는 보지 못하고 단지 강당 밖의 숲과 정원만을 보는 중생이 또 있는가?
아난이 대답한다. 세존이시여! 강당 안에서 여래는 보지 못하고
숲이나 샘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다.
“아난아! 너 또한 이와 같다. 너의 심령은 일체를 명료하게 안다.
만약 네가 지금 명료하게 아는 이 마음이 네가 말한 대로 실재로 몸 안에 있다고 한다면,
이때 너는 먼저 너의 몸속이 어떻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먼저 몸 안의 물건을 보고 난 연후에 바깥의 사물을 보는 중생이 있는가, 없는가?
설령 네가 안의 심장, 간장 등을 보지 못하면, 바깥의 손톱이 자라고 머리털이 자라고
근육이 움직이고 맥박이 도는 것을 마땅히 알 것이다. 그러나 너는 왜 모르는가?
너는 몸 안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또 바깥의 사정은 아는가?”
이 부분을 읽을 때 나는 속으로 킥킥거리고 웃었다.
한 치의 빈틈도 없는 부처님께 아난이 딱 걸렸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강당 안에 있는 아난이 숲과 정원을 볼 수 있 수 있다면
바로 곁에 계신 부처님은 당연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은 몸속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심장, 간장, 비장, 위장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알 수 있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이 몸속에 있으니 몸속의 기관을 아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마치 바깥의 정원을 볼 수 있으면 강당 안의 부처님은 당연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어떤가. 우리는 우리 몸 안에 있는 심장과 간장과 위장을 볼 수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알아야 한다.
알아차리고 분별하고 사랑하고 밝게 이해하는 이 마음이
몸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
그러자 아난은 느끼고 분별하고 알고 보는 눈과 마음이 몸 밖에 있다고 말한다.
부처님은 그에 대해 왜 아난의 대답이 틀린지를 조목조목 설명한다.
아난은 그 마음이 안근(眼根) 속에 있다고 대답한다.
부처님은 또 다시 아난의 오류를 지적한다.
그래서 아난이 마음과 볼 수 있는 능력이 몸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몸 밖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때까지 부처님의 설법은 계속된다.
지루할 만큼 계속된 문답이다. 자비심이 없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수업이다.
둔한 학생이 똑같은 질문을 하고 또 해도 결코 화내지 않고 대답해주는 인자한 스승의 모습 그대로다.
부처님은 결코 결론을 말해주는 법이 없다.
아난이 스스로 답을 찾아갈 때까지 옆에서 도와 줄 뿐이다.
아난이 어려움에 빠진 것을 계기로 삼아 작은 것에서 큰 것(佛道)으로
나아가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능엄경’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능엄경’을 읽어보면 부처님의 설법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지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인가. ‘능엄경’에 나와 있다. 이렇게 끝내버릴까, 하다가
너무 불친절한 것 같아서 정답을 공개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보는 성품 때문이다.
보는 성품이 마음이다. 여기서 마음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근(六根)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육경(六境)을 만나서 생성되는 육식(六識)이 아니다.
육식은 생멸하는 마음이며 반연심(攀緣心)이다. 반연심이란 밖을 향해 구하는 마음이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반연심이 아니라 참마음 즉 진심(眞心)이다.
보는 성품은 생멸이 없다. 눈이 있는 사람이 눈을 잃어도 볼 수 있는 성품은 사라지지 않는다.
불생불멸이다.
그렇다면 보는 성품인 진심은 어디에 있는가.
일반인들은 진심이 이 몸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잘못이다.
우리의 마음은 결코 몸 안에 있지 않다. 우리 사람이 마음 안에 있다.
우리의 마음은 삼라만상과 허공을 포괄한다.
우리가 생멸(生滅)하고 생사윤회를 하는 이유는 상주하는 진심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불의 법신은 생멸함이 없다. 우리의 상주하는 참된 마음도 생멸함이 없다.
우리도 불보살과 똑같이 모두 원묘하고 밝은 마음 즉 묘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
다만 참된 성품을 잃어버리고 전도된 생각에 사로잡혀 밝은 체(體)를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즉 맑고 깨끗한 큰 바다는 버리고 오직 하나의 물거품을
전체의 파도, 전체의 바다라고 인식하는 것과 같다.
이런 전도된 생각에서 벗어나 참된 진리를 깨닫는 것이
진심을 보는 것이고 생사(生死)를 뛰어넘는 것이다.
▲ 채용신, ‘황현초상’, 비단에 색, 95×66cm,
구례 매천사.
‘황현상(黃玹像)’은 조선시대 마지막 초상화가 채용신(蔡龍臣,1848~194년)이 그린 초상화다.
채용신은 특히 인물을 잘 그려 고종의 어진(御眞)을 비롯해 ‘최익현상(崔益鉉像)’
‘전우상(田愚像)’ ‘운낭자상(雲娘子像)’ 등 수많은 초상화를 남겼다.
그 중에서도 ‘황현상’은 극세필을 이용한 얼굴의 육리문(肉理文), 터럭 하나까지도
틀리게 그리면 안되는 핍진(逼眞)함이 탁월한 수작이다.
초상화의 가치는 외형적으로 닮게 그리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내면적인 세계까지도 전해줄 수 있어야 진짜 초상화다.
이것이 전신(傳神)이다. 정신을 전해준다는 뜻이다.
황현(黃玹,1855~1910)은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하자 글 배운 지식인으로서
항거의 의미로 자결을 선택했다. 채용신이 그린 우국지사의 얼굴에 선비의 꼿꼿함이 살아 있다.
‘능엄경’에는 능엄신주의 공덕이 자세히 적혀 있다.
그 엄청난 공덕을 이 짧은 글에서는 이루 다 묘사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이런 공덕이 어찌 능엄신주 뿐이겠는가. 모든 주문이 다 공덕이 크고
모든 경전독송이 다 불가사의하다. 중요한 것은 어떤 주문이 더 힘이 센가 하는 것이 아니다.
주문을 하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정성스럽고 간절한지가 중요하다.
‘황현상’을 다른 화가가 그렸다면 저렇게 생생한 전신이 가능했을까.
불가능했을 것이다. 채용신은 붓을 들자마자 바로 ‘황현상’같은 명작을 완성했을까.
아마 무수히 많은 붓질을 거듭한 끝에 전신에 도달했을 것이다.
우리의 공부도 그러해야 한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말을 하는 나는 누구이며 보는 나는 누구인지 놓치지 않고 물어야 한다.
그리고 가르쳐야 한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질문한 아난처럼.
귀찮게 여기지 않고 대답해준 부처님처럼.
그 끝에 만날 수 있는 것이 주문의 위력이다. 능엄신주의 공덕이다.
2014년 12월17일
출처 :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