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의 자암서법
자암서법- 김구가 중국 원元의 유학자 오초려吳草廬(1249~1333)의 글인
「화명和銘」을 써놓은 서첩書帖이다.
자암서법(출처: 충남문화역사연구원)
자암은 안평대군․양사언․한호와 더불어 조선 전기 4대 서예가의 한 사람이다.
왕희지와는 또 다른 필법으로 서체가 매우 독특하여 그가 살았던 인수방의 이름을 따
훗날 사람들이 이를 ‘인수체’라고 했다. 인수체는 왕희지 필법에서 나왔지만
왕희지와는 또 다른 필법을 완성한 서체이다.
자암서법은 김구의 친필로 원의 유학자 오초려 작 화명(和銘)을 쓴 것이다.
이는 성리대전서에도 실려 있다. 한 장에 쓴 것을 가위로 오려 전첩본으로 만들었으며
낙관은 다른 곳에서 오려 붙인 것으로 자암 자신이 한 것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그의 친필 서첩으로는 유일한 것으로 가장 많은 양의 친필서첩이다. 자암이 언제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서체의 완숙도로 보아 40대의 글씨로 생각된다.
그의 『자암서법 난정체 自庵書法 蘭亭體』는 낙관이 없는 임서이지만
자암 서체의 특징인 필획 굵기의 차이가 거의 없는 필획으로 난정서를 임모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특징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충남문화역사연구원)
난정체는 왕희지가 어느날 40명의 친구와 더불어 난정이란 정자에 모여 청류를 바라보며
함께 시를 썼는데 이 때 쓴 문체를 말한다. 왕희지의 난정서를 임서한 것으로
목판으로 만들어 인출한 것이다. 인수체의 발생 과정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和而不流。訓在中庸。顔之豈。弟。孔之温恭。孔顔往矣。
孰繼遐蹤。卓彼先覺。元公淳公。元氣之會。淳德之鍾。
瑞日祥雲。霽月光風。庭草不除。意思冲冲。天地生物。
氣象融融。萬物靜觀。境與天通。四時佳興。樂。與人同。
泯若圭角。春然心胷。如玉之潤。如酒之醲。晬面盎背。
辭色雍容。待人接物。德。量含洪。和粹之氣。㴠養之功。
敢以此語。佩于厥躬
‘화이불류(和而不流)’는 중용 속에 들어있는 교훈이다.
안자께서는 언제나 화락하셨고, 공자(孔子)께서는 온화하고 공손하셨다.
공자와 안자는 먼 고인이니 누가 있어 그 정신을 이을 것인가?
송나라 때 주돈이 선생과 정호 선생이 있었으니, 두 분 선생은 원기가 모이고
순박한 덕이 있어 마치 해와 같고, 상스러운 구름 같고,
밝은 달 아래의 풍경 같아서, 정원의 풀을 뽑지 않아도 그
뜻과 생각이 넓고 온화하였다. 천지가 만물을 낳는 기상은 화(和)에 근원을 두고,
만물은 바로 이 하늘의 화(和)와 더불어 각자의 경계를 뛰어넘어 서로 통한다.
네 계절의 조화로운 순환에 흥취가 있으니 주위 사람과 더불어 함께하고
뾰족한 모난 자리는 흥건히 적셔 그 예리함을 없앤다.
봄 같은 온화한 가슴 속은 마치 아름다운 옥이 맑은 물을 머금은 듯
술이 짙게 익은 듯 하고, 얼굴은 맑고 깨끗하고, 뒷모습은 물동이가 가득 찬 듯
원만하고, 말하는 기색은 온화하고 조용하고,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하는
태도는 푸근한 덕으로 싸여 있다. 이 모든 것은 온화하고 순수한 화기(和氣)를
평소에 함양한 공덕이다. 감히 이 말을 새겨서 몸에 패물처럼 지니고자 한다.
김구는 조선 중기 문신이며 서예가이다.
호는 자암 · 삼일재이며 시호는 문의이다. 생원 · 진사에 모두 장원하여
시관을 놀라게 했다. 사마시 때에는 시험관이 시권에 비점을 치며 말하기를,
“한 퇴지의 작품에다 왕희지의 글씨이다.” 라고 하며 극구 칭찬했다.
기묘사화로 조광조 · 김정 등과 함께 투옥되었으며 개령에 유배되었다가
수개월 뒤 죄목이 추가되어 13년 간 남해 절도에 안치되었다.
이후 임피로 옮겨 1533년에 풀려났다.
15년간의 남해, 2년간의 임피에서 긴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 예산으로 돌아와 보니
부모는 이미 세상에 없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해 조석으로 산소에 가 통곡하다
그 해 화병으로 젊은 나이에 죽었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부모 산소의 풀들도
그의 뜨거운 눈물에 말라 모두 시들었다고 한다. 시호는 문의이며 그의 유허비에는
‘너무나 짧은 인생이 아깝기만하다…’고 쓰여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가. 당쟁의 무참한 희생물이 된 김구 선생.
씁씁하지만 그나마 작품과 필법이 남아 생전의 편린을 볼 수 있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선조 때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예산의 덕잠서원, 군산의 봉암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자암은 기묘명현 중 한 사람으로 단명하여 남아 있는 작품이 거의 없다.
유품으로 「이겸묘지」,「자암서법」,「우주영허첩」, 국립중앙박물관의
「두보시」, 경남대 데라우치문고 중의 「시고」 등 단편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저서로는 『자암집』이 있는데 경기체가인 「화전별곡」과
시조 5수가 그의 문집에 전하고 있다.
주간한국문학신문,10.8
김구 (14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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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金絿, 1488년 ~ 1534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대유,
호는 자암(自庵)과 삼일재, 시호는 문의,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1507년 생원과 진사에 모두 장원 급제해 시관을 놀라게 했고 1511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홍문관정자가 되고 1515년 부수찬, 1519년 부제학에 승진되었다.
그러나 1519년에 기묘사화로 조광조, 김정 등과 함께
투옥되고 개령으로 유배당했다가 다시 남해에 안치되었다.
1531년 임피로 옮기고 1533년 겨우 풀려나와 고향 예산으로 돌아와 죽었다.
글씨가 뛰어나 조선 전기 4대 서예가로 유명하며 서울 인수방에 살아서 그의 서체를 인수체라 했다.
사후 선조 때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예산의 덕잠서원, 군산의 봉암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는 《자암문집》, 작품에 《이겸인묘비》, 《자암필첩》, 《우주영허첩》 등이 있다.
가족 관계[편집]
- 증조부 : 김의몽(金義蒙)
- 할아버지 : 김사예(金司藝)
- 아버지 : 김계문(金季文)
- 어머니 : 이겸인(李兼仁)의 딸 - 전의이씨
- 부인 : 김해김씨
- 장남 : 김용(金鎔) - 조졸
- 손자 : 김갑(金韐) - 생부 김균(金鈞)
- 증손자 : 김숙(金橚)
- 증손자 : 김건(金楗)
- 증손녀 : 이영의(李榮義)에게 출가
- 증손녀 : 이진형(李晉亨)에게 출가
- 손녀 : 안세복(安世復)에게 출가
- 외증손자 : 안몽익(安夢益)
- 외증손자 : 안몽윤(安夢尹)
- 외증손자 : 안몽척(安夢陟)
- 외증손자 : 안몽상(安夢尙)
- 외증손녀 : 신대근(申大根)에게 출가
- 외증손녀 : 원사익(元士翼)에게 출가
- 외증손녀 : 홍형(洪逈)에게 출가
- 차남 : 김균(金鈞)
- 손자 : 김온(金韞)
- 증손자 : 김벌(金橃)
- 증손자 : 김황(金榥)
- 증손녀 : 윤덕경(尹德敬)에게 출가
- 장녀 : 이사항(李思航)에게 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