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재미 있나?
이태호(통청 인문학아카데미 원장)
1.
나의 생활철학 선생님께서는 젊은 우리들에게 “사는 게 재미 있나?”고 자주 물으셨다. 물론 ‘사는 게 재미 있을 때’도 있고, ‘사는 게 재미 없을 때’도 있다. 사는 게 재미 있을 때는 밝은 얼굴로 “재미 있습니다”고 힘차게 대답하는 우리들이, 사는 게 재미 없을 때는 어두운 얼굴로 “재미 없습니다”고 힘없이 대답한다. 그러면 “뭔 일이 있나?”고 물으시면서 상담이 시작된다.
사는 게 재미 있을 때’는 원하던 일이 잘 풀려나가서 기분이 좋고, 별다른 근심꺼리가 없을 때이다. 이에 반해 ‘사는 게 재미 없을 때’는 원하던 일이 잘 풀려나가지 않는데다 근심거리가 늘어났을 때이다. 근심거리는 주로 대인관계의 불편함이나, 자신이 하는 일(학생은 공부, 직장인은 직정생활, 사업가는 사업 등)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일어난다. 그리고 건강상 문제나 금전 문제 등도 원인이 된다.
2.
하루에는 낮과 밤이 교대하고, 날씨는 맑을 때도 있고 흐린 날도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 인생에도 근심거리가 생겨서 괴로울 때도 있고, 바라던 일이 잘 풀려나가서 즐거울 때도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괴로울 때가 많고, 어떤 사람은 즐거울 때가 많다. 이것은 객관적인 조건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그 조건에 대한 그 사람의 주관적인 마음가짐에 의한 것인가? 물론 두 가지 모두 영향을 끼칠 것이다.
객관적인 조건 중에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이 있고, 자신의 능력으로 개선(改善)이 가능한 것도 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은 한탄해본들 소용이 없다. 그 운명까지 포함한 나를 사랑하는 것(自己愛)이 현명하다. 그리고 개선 가능한 것은 개선해 가는 과정을 즐기는 것이 현명하다. 왜냐하면 점점 좋아져가는 자신을 느낄 때 희망이 솟으면서 사는 게 재미 있어지기 때문이다.
3.
그런데 개선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많은 노력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개선이 잘되지 않고 제자리 걸음을 하거나 오히려 후퇴하게 되면 낙담(落膽)을 하면서 실의(失意)에 빠지게 된다. 이럴 때 ‘이것은 내 길이 아닌가?’즉 개선이 불가능한 운명인 것인데도 개선 가능하다고 착각한 것이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 들면서 불안해진다. 그리고 계속 도전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갈등이 일어난다.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적성검사와 지능검사 등을 해서 자신의 가능성을 체크해보기도 하고, 내가 도전하는 일에 성공하여 이미 그 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이렇게 합리적으로 의문을 해소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무턱대고 도전하는 자도 있다. 이런 자는 인생에 실패할 확률이 높다. 그리고 이사람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인생의 패배자가 될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의식주를 책임지고 있는 가족까지 괴롭히게 된다.
정말 성공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의식주를 해결하려는 독립심이 있다. 이것에 비해 실패하는 자는 남에게 의지하는 의타심(依他心)이 강하다. 독립심이 강한 자는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고, 의타심이 강한 자는 실패의 원인을 남에게 돌린다. 이 점은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이나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의 입장에서는 명심해야 할 사항이다.
4.
독립심이 강하고 부딪친 문제를 합리적으로 처리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키워가는 자는, 그렇지 않는 자에 비해 성공할 확률이 높고 인생을 재미 있게 살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물론 가능성이 높다고 현실성이 반드시 따라주는 것이 아니라는 측면도 있다. 그것보다는 성공이 현실화되었을 때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우월감에 빠지면서 장애물에 걸리게 되는 점이 크다.
인생은 장애물 경기와 같다. 경쟁에서 앞서 있다고 해서 반드시 결승점에 일찍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장애물이 예상하지 못한 곳에 설치되어 있거나, 자신의 가장 약한 점을 파고들 듯이 장애물이 다가오기도 한다. 우리들은 인생이라는 장애물 경기에 있어 크게 두 가지를 잘 모른다. 하나는 장애물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 다른 하나는 더 근본적인 것으로 결승점이 어디인지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조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달려가고 있다.
5.
장애물은 외부에 설치된 것도 있지만, 그것을 알아보고 대처해 나가는 능력은 내부에 있다. 이 능력이 부족한 것도 내부의 장애물이다. 따라서 내부에 있는 장애물이 훨씬 더 크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내부에 장애물이 있다는 것을 잘 모른다. 이것에 비해 성인(聖人)이나 현인(賢人)들은 내부의 장애물이 문제라는 것을 알고 이것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이 내부의 장애물을 극복하는 방법을 각각 제시하였다.
성인이나 현인들은 모두 내부의 장애물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를 인생을 재미 있게 살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공자는 『논어』에서 기쁘고 즐겁게 살 것을 제시하였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항상의 만족(常足)을 제시하였다, 석가는 『열반경』에서 내가 맑으면 항상 즐겁다(常樂我淨)는 것을 제시하였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무정념(無情念)의 상태인 아파테이아를 제시하였고, 에피쿠로스 학파에서는 평정심(平靜心)의 상태인 아타락시아를 제시하였다.
6.
오늘은 시간의 제약이 있어서 석가가 제시한 상락아정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석가는 내 마음이 맑으면 항상 즐겁다고 하였는데, 이것을 물이 담긴 투명한 그릇의 비유를 통해 제시하고자 한다. 여기서 항상 즐겁다는 것은 항상 재미 있다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목적이며, 경쟁의 결승점에 해당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세 가지 종류의 투명한 그릇이 제시될 것이다. 이 그릇 안에는 각각 물이 2/3 정도 담겨져 있다. 그리고 세 개의 그릇 각각에는 나무 막대기가 하나씩 꽂혀 있다. 이 중 첫째 것은 맑은 물만 담겨져 있다. 둘째 것은 물 밑에 찌꺼기가 가라앉아 있다. 셋째 것은 탁한 찌꺼기가 물 전체에 물들여 있다. 준비가 다 되고 난 뒤에, 그릇에 꽂혀 있는 나무 막대기로 그릇의 내부를 휘젓는다.
그러면 첫째 것은 맑은 상태 그대로 있다. 둘째 것은 찌거기가 확 일어나서 전체를 물들인다. 셋째 것은 탁한 상태 그대로다. 첫째 것은 항상 맑은 상태를 유지하는데, 이것은 항상 즐겁고 재미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둘째 것은 젓으면 번뇌가 일어나고 가만히 있으면 번뇌가 가라 앉아서 평온함이 찾아온다. 때로는 재미 있고 때로는 재미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셋째 것은 젓는 것과 관계 없이 항상 탁함을 유지하는데, 이것은 항상 괴롭고 재미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7
이 비유에서 찌꺼기는 탐(貪),진(瞋),치(癡),만(慢)의 인(因)을 나타낸다. 탐은 탐욕(貪慾), 진은 진애(塵埃), 치는 우치(愚癡), 만은 자만(自慢)의 약자이다. 탐욕은 아귀(餓鬼, 굶주린 귀신)라고 하는데, 불평불만에 가득찬 마음이다. 진애는 지옥(地獄,땅속 깊은 곳에 갇힘)이라고 하는데,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 상태로 고통스럽고 성난 마음이다. 우치는 축생(畜生, 약육강식의 짐승)이라고 하는데, 강자에게 비굴하고 약자에게 갑질하면서 자신에 대해서는 한탄하는 어리석은 마음이다. 자만은 수라(修羅, 건방진 마음)라고 하는데, 자신이 항상 남보다 위에 있어야 한다는 비뚤어진 마음 때문에 다투는 삶을 산다.
이 비유에서 막대기는 연(緣)을 나타낸다. 이때의 연(緣)은 인(因)을 불러일으키는 환경이나 조건을 나타낸다. 환경이나 조건 중에는 당연히 사람도 포함된다. ‘상대가 나를 무시했기 때문에 내가 성을 냈을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이때 상대는 나무 막대기를 젓는 것이며 연(緣)이다. 이러한 연(緣)이 다가왔을 때 내 마음 속에 있는 진애라는 인(因)이 작동하여 성냄이라는 결과를 야기한다. 이것을 인연생기(因緣生起)라고 한다.
첫째 그릇에는 외부에서 성낼만한 연(緣)이 와도 내부에 진애라는 인(因)이 작동하지 않으니 성이 일어나지 않는다. 둘째 그릇에서는 외부에서 성낼만한 연(緣)이 오면 내부에 진애라는 인(因)이 있기 때문에 성이 일어난다. 셋째 그릇에서는 성낼만한 연(緣)이 오지 않았는데도 내부에 있는 인(因)이 너무 강하여 스스로 연(緣)을 만들어서 성을 일으킨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예민하다고 한다. 이런 사람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살얼음을 걷는 것처럼 불안해 한다.
셋째 그릇과 같은 사람은 본인도 불행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도 큰 불편을 주고 있다. 이런 사람을 불교에서는 사악도(四惡道 : 지옥, 아귀, 축생, 수라)에 물든 사람이라고 한다. 둘째 그릇의 사람은 저 사람이 나를 성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 말도 맞는 말이다. 나무 막대기로 젓지 않았다면 찌꺼기가 일어날리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석가는 첫째 그릇을 보라고 말한다. 그는 나무 막대기로 젓어도 마음 내부에 찌꺼기가 없으면 일어날 성이 없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연(緣)에 해당하는 막대기는 그 막대기 아니라도 수없이 많다. 내 마음 내부에 찌꺼기인 인(因)이 있는 이상, 언제든지 다가올 수 있다. 연(緣)에 불과한 막대기를 보고 ‘너 때문이야’라고 핑계를 대봐야 소용이 없다. 결국 ‘사는 게 항상 재미 있으려면’나의 마음 내부에 있는 탐, 진, 치, 만의 마음을 제압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천주교에서도 한 때 진행했던‘내 탓이오’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