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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문학가 이무영(李無影)
<보도 자료와 친일인명사전 내용 발췌>
<보도자료 1>
충북일보 2011년 4월 14일(목) 칼럼
이무영의 친일 행적에 관한 고언
김승환 - 충북대 교수 / 충북문화예술연구소장
대략 일년 전인 2010년 4월 17일, 작지만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민족문제연구소 충북지부가 <친일인명사전>을 신채호 선생의 동상에 헌정(獻呈)한 것이다. 강철같이 살았고 절통하고 참절하게 타계한 단재 신채호 선생께 <친일인명사전>을 바쳤다는 것은 상징적인 일이다. 또한 최근에 헌법재판소는 <친일인명사전> 발간과 관련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합헌임을 확정한 바 있다.
친일과 항일은 한국사 150년이 걸린 문제이고, 분단의 고통이 서린 난제이며, 오늘의 한국인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생각해 보면, 21세기의 한국인에게 심대한 고통을 주고 있는 분단모순(分斷矛盾)도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가령 한반도 전체를 뒤흔드는 천안함 사건이나, 북한[조선]에 대한 식량지원, 연평도 포격, 독도 문제 등은 모두 분단 때문에 야기된 사건이다. 그런데 그 분단은 일제의 조선지배가 없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분단모순의 원인이 식민지배이므로 과거에 대한 냉철한 역사인식이 없다면 민족 정체성 확립은 물론이고 한반도의 미래를 전망할 수도 없다. 바로 이 중차대한 문제에 충북 음성 출신의 소설가 이무영이 걸려 있다.
일찍이 임종국은 <친일문학론>에서 이무영의 여러 작품들이 일제의 식민지배 정책에 부응한 소설임을 명확하게 밝힌 바 있다. 해방공간 이래로 이무영의 친일은 학계의 정설이었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오히려 이무영은, 추앙받는 문단의 원로(元老)로 기록되고 있다. 반면 같은 음성 출신의 김용제(1909 - 1994)는 해방 이후, 친일을 반성하면서 절필을 선언했다. 비록 친일을 했지만 깨끗하게 과오를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이무영보다 훨씬 높은 명망을 얻었고 실력을 인정받았던 김용제의 태도야말로 자기처벌과 자기책임을 실천한 작가다운 반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친일을 비판할 때는 원칙이 있다. 단순한 친일, 잘 몰라서 한 서민들의 친일, 정말 어쩔 수 없이 한 친일까지 문제를 삼는 것은 아니다. 신념을 가지고 민족을 배신했고 그러면서도 그것이 민족을 위하는 것이라고 합리화한 경우만 문제를 삼는다. 그런 경우에도 자기를 반성하고 민족에 사죄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전혀 다르다. 이무영은 음성 출신 김용제나 청원 출신 김기진 그리고 옥천 출신 정지용과 달리 최소한의 사죄나 반성의 표현이 없었다. 이것을 흔히 적극적인 친일이면서 반성조차 하지 않은 '일급친일'이라고 한다. 필자는 <친일문학론>을 쓴 임종국 선생을 몇 번 뵌 적이 있는데, '반드시 징치(懲治)해야 할 일급 친일문인'으로 이무영을 강조하던 나직한 목소리를 지금도 기억한다.
한때 이무영의 작품 <제1과 제1장>이 국어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작품이나 <흙의 노예>는 일제의 식민지배에 부응하고자 창작된 친일소설이다. 그러니까 조선총독부가 농촌으로 소개(疏開)할 것을 권고한 귀농(歸農)의 경험을 토대로 쓴 작품에 해당한다. 나름대로 문학성은 상당하지만 창작의 동기나 배경으로 볼 때 친일소설이 완연하여 이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없다. 그 외에 <청기와 집>을 비롯한 이무영 소설의 내면텍스트를 분석해 보면 더욱 더 선명해지는 '일급친일'이다. 필자는 개인 이무영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 친일과 무관한 소설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이무영을 논할수록 지하의 이무영 자신이 수치스러워지고 문학사의 왜곡에 분노하게 되므로 앞으로는 그런 오류를 범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 사안은 민족과 국가와 충북이 모두 걸려 있는 정신사(精神史)의 문제다. '민족의 죄인'으로 합법적으로 명시된 이무영을 추모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겠는가· 특히 충북 음성군이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에 주요 친일인사로 공식화된 이무영에 관한 행사를 후원하는 것은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친일인명사전>에 이무영의 친일행적이 객관적으로 기록되어 있거니와 훗날 이무영을 추모하고 비호한 행적 역시 개정판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될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분들께서는 이런 비판적 고언(苦言)에 감정적으로 반응할 것이 아니라 지혜롭고 정의롭게 생각해 볼 것을 정중하게 권고한다.
<보도자료 2>
2011년 4월 21일 충청리뷰
친일문인 기리는 무영제, 문학상
일본어로 쓴 소설 ‘청기와 집’ 1943년 총독상
음성군 94년부터 문화원 등과 함께 ‘무영제’
2011년 04월 21일 (목) 08:39:14 이재표 gajadia@naver.com
▲ 일제강점기 농민문학의 대부로 추앙받았던 이무영(본명 이갑룡)의 삶에는 그림자가 없다는 필명 무영(無影)과 달리 친일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의 행적이 공인됐음에도 음성군은 군비로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또 동양일보는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 시상을 12년째 사실상 주관하고 있다.
음성출신의 소설가로 흙의 작가, 농민문학의 대부로 추앙받아온 이무영의 삶에는 ‘그림자가 없다(無影)’는 필명과 달리 짙은 친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펴낸 친일인명사전에는 무려 5쪽에 걸쳐 그의 친일행적이 낱낱이 드러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성군이 1994년부터 이무영을 기리는 ‘무영제’를 해마다 전액 군비로 개최하고 있어, 공공기관이 친일을 용인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사고 있다. 올해로 18회를 맞은 무영제는 이무영의 작고일인 4월20일에 맞춰 열리고 있으며 1995년에는 터미널 인근 거리를 무영로(無影路)라고 이름 지었다.
1908년 음성에서 태어난 이무영(본명 이갑룡)은 1920년까지 음성·충주 등에서 자라며 학교를 다닌 뒤 일본으로 건너가 가토 다케오로부터 문학수업을 받았다. 1929년 귀국 후 교사, 출판사 직원을 전전하다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며 소설가로 활약한다. 1939년 동아일보를 그만두고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에 정착한 뒤에는 농민문학 창작에 열중했다.
이무영의 본격적인 친일행각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1942년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소설·희곡회 상임간사를 맡았으며 같은 해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일본어 신문 ‘부산일보’에 일문 장편소설 <청기와집>을 연재했다. 청기와집은 조선인 작가가 일본어로 쓴 최초의 연재소설이다. 중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홍콩을 점령할 때까지를 시대배경으로 하는데 청기와집이라 불리는 양반 권씨 집안은 ‘조선’을 상징한다.
청기와집의 가장 권 대감은 ‘지나(支那·중국의 음차)에 대한 사대주의에 빠진 구사상’, 아들 권수봉은 ‘영미 제일주의에 빠진 사상’, 손자 권인철은 ‘일본으로 상징되는 신사상’을 대변한다. 결론은 권 대감이 세상을 뜨고 수봉도 마음을 바꾸어 조선신궁을 참배하게 됐으며, 인철은 젊은 일본인으로서 개간사업에 몰두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무영은 같은 시기 문인협회가 파견한 만주국 시찰단의 일원으로 간도의 조선인 개척촌을 돌아보고 온 뒤 좌담회와 집필활동 등을 통해 “일본의 분촌(分村)이 조선에서도 시행됐으면 좋겠다”는 주장을 펼쳤다. 친일인명사전은 이에 대해 “일제가 조선에서 행한 정책적 농업식민을 조선인이 만주에서 재현하기를 기대한 아류제국주의”라고 비난하고 있다.
해방 후 대학에 출강하다 6.25 전쟁 당시 군에 입대한 이무영은 1955년 해군대령(국방부 정훈국장)으로 예편한 뒤 1960년 작고할 때까지 친일파 청산을 폄훼하거나 친일파를 시대의 희생양으로 묘사한 다수의 글을 남겼다.
김기선 민족문제연구소 충북지부장은 “이무영의 친일은 단순한 친일이나 어쩔 수 없이 한 친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더욱이 그는 훗날에도 반성하지 않은 1급 친일분자다. 그런데 유족이나 제자들도 아니고 음성군과 기관이 나서서 친일파를 기리는 것은 친일의 정당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음성군과 공동으로 무영제를 주최하는 반영호 음성예총 회장은 “이무영의 친일은 역사학자들이 얘기할 문제고, 우리는 이 고장이 낳은 흙의 작가의 문학적 위업을 기리자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 거부할 용기는
당선 시상금 500만원, 심사·진행비는 1000만원
동양일보 실질적 주관, 이제는 들러리는 ‘NO’
친일문인 이무영의 예술가적 명예는 해방 후 66년, 작고 후 51년이 지나도록 생생하게 살아있다. 무영제의 일환으로 지금까지 12명의 작가들에게 그의 이름을 딴 ‘무영문학상’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올해 수상작은 김도연(46·강원 평창군) 작가의 소설집 ‘이별 전후사의 재인식’이다.
무영문학상에 대한 문제제기는 크게 두 가지다. 무영제와 마찬가지로 친일문인의 문학적 성취만을 인정해서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운영한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그 첫 번째다. 이는 이미 거론했으므로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민족문학 진영의 작가들까지도 문제의식 없이 무영문학상을 수상해온 것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예를 들어 장편 ‘낯선 사람들’로 2007년(8회) 수상한 김영현씨는 실천문학사 대표를 맡고 있는 진보성향의 작가다.
김승환 충북대 국어교육학과 교수는 “심사하는 사람들의 체면도 있고 상을 거부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계기로 이무영의 친일행적에 대해 사실상 공인이 된 만큼 의식이 있는 작가들은 상을 반납하려는 운동을 벌였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밝혔다.
김 교수는 또 “이무영은 친일의 행적을 지우기 위해 반공주의자가 됐다. 군에 입대해 대령으로 예편함에 따라 문단에서 권력도 대단했으며 많은 작가들을 도와주고 제자들을 키웠다. 그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린 것만 봐도 편찬자들의 세계관을 알 수 있다. 1966년 <친일문학론>을 통해 이무영의 행적을 비판한 임종국 전 민족문제연구소장으로부터 ‘그 이후로 내가 문학계에서 소외됐다’는 말을 직접 들었다”고 덧붙였다.
두 번째 문제는 무영제 예산 2000만원 가운데 1500만원이 문학상에 집중돼 있고 이를 특정언론사가 주물러왔다는 것이다. 1994년 음성군과 음성문화원의 공동 주최로 시작된 무영제는 1998년 5회 행사부터 음성군과 음성예총으로 주최가 바뀌었다. 문학상은 음성예총이 주최하면서 생긴 것인데 그동안 동양일보가 실질적 주관사로 예산을 사용해 온 것이다.
그러나 지난 2월 취임한 반영호 음성예총 회장은 예산을 토스(Toss)해주는 방식의 문학상 주관을 거부했다. 반 회장은 “내막은 모르겠으나 검찰에서 내사를 했다는 얘기도 있고 전체 예산 가운데 문학제·추모제 예산은 500만원인데, 문학상 예산이 1500만원이라는 것도 주객이 전도된 것 같아 우리는 추모·기념행사만 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문학상 예산의 관리는 우여곡절 끝에 올해부터 문화원이 집행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문화원 관계자는 “예산집행에 있어 모든 컨트롤을 우리가 하는 조건으로 예산을 받았다. 시상금이 500만원이고 나머지 1000만원이 문제인데 동양일보 문화사업단과 마찰도 있었다.
그러나 광고비의 경우 음성군에 자문을 받아 220만원으로 조정했다. 월간지 2곳 광고료로 99만원, 심사비 230만원, 인쇄비 330만원, 상패 55만원, 현수막 10만원, 진행비 56만원 등이 올해 집행내역”이라고 설명했다.
<보도자료 3>
2008년 10월 18일
친일문인 기리는 '문화의 달'
국민 혈세로 친일파 선양은 행사 취지에 맞지 않아
청주기별 박정규 대표기자 pkjk21@korea.com
2008 문화의 달 행사의 일환으로 “충북근현대 작고 예술인 특별전”이 지난 11일부터 청주예술의 전당 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이 전시회는 ‘개화기 이후 한국 문학 예술계에 큰 족적을 남긴 근현대 충북 출신 예술인들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조명하여 선인들의 높은 예술인과 정신을 계승 선양하고, 충북 도민들에게는 긍지와 자부심을,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겐 꿈과 용기를 주는 교육의 장(場)’이 될 수 있도록 기획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전시회는 충북 출신 문인으로 홍명희 등 15인과 가야금 명인 박팔괘, 최초로 서구식 조각을 도입한 조각가 김복진, 서예가 수필가로 이름 난 김사달, 서양화가 윤형근 등의 예술가의 면모를 살펴 볼 수 있다. 15인의 문인 가운데는 놀랍게도 친일 문인으로 널리 알려진 문학평론가 김기진(1903-1985)과 농민문학가로 불리 우는 이무영(1908-1960) 소설가가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식민지 치하에서 화려하고 능숙한 문필로 우리의 혼을 판 일본의 앞잡이였다.
이들은 이미 문학계에서도 친일 문인으로 공인되고 있으며 민족문제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편찬하는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 예정자로 확정된 바 있다.
김기진은 1944년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 겸 평론수필 부회장과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이사라는 직함을 갖고 친일 행위를 했다. 그는 식민지 치하에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씨를 뿌리고 그 운동을 이끌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기록과 자료를 종합해 볼 때 그의 친일 행각은 1938년부터 시작되었다.
1940년 2월 27일부터 29일까지 {매일신보} 지상에 ㅤ발표된 평론 [문예생활의 지표],[장래할 역사의 파악], [재출발의 기본선]과 같은 글을 시작으로, 1941년에는 [대아세아주의와 김옥균 선생]을 비롯한 수필 3편, 1942년에는 [국민문학의출발](평론), [마닐라 점령](시), [신세계사 첫장 쓰던 날](수필), 1943년에는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시), [가라! 군기 아래로 어버이들을 대신해서](시), [나도 가겠습니다](시), 1944년에는 [탄환과 충언](수필), [신전의 맹서](수필), [조선영화의 신출발](평론, 일문), [이 길로가자](수필), [경산시첩](시조), [의기충천](시), 1945년에는 [근감단편](수필) 등을 게재함으로써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전개했다.
이무영은 1939년 경기도 군포 인근에서 농사와 문필을 병행하면서 본격적으로 농민소설에 전념하여 ‘제1과 제1장’, ‘흙의 노예’ 등의 작품을 집필하여 농민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많은 문인들이 절필하거나 작품을 발표하지 않던 시기에 그는 일본어로 ‘청기와 집’이라는 소설을 써서 1943년 조선총독부가 주는 “제4회 조선예술상 문예상”을 수상했으며, 우리말로 발행되던 신문 잡지가 모두 폐간된 상황에서 일본어로 발행된 <국민문학>에 일제 황국화 정책에 순응하는 작품 등을 발표함으로써 뚜렷한 친일 문학에 참여했다.
친일 문학에 앞장섰던 이들이 주최 측에서 밝힌 “충북 도민들에게는 긍지와 자부심을,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겐 꿈과 용기”를 줄 수 있겠는가? 충북 도민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행사에 어떻게 친일파를 기리고 선양하는 전시회가 있을 수 있는가? 이제라도 남은 전시기간이라도 이 두 친일문인의 사진과 자료는 전시회에서 퇴출 시키고 충북 도민들에게 정중한 사과를 해야 할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이무영에 대한 기록
이무영 李無影 / 1908 - 1960
소설가
(출생 및 성장 과정)
1908년 1월 14일 충청북도 음성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다. 본명은 이갑룡(李甲龍), 아명은 이무갑(李茂甲)·이용삼(李龍三)·이용구(李龍九), 호는 누성(淚聲)·탄금대인(彈琴臺人)이다. 필명으로 무영·이산(李山) 등을 썼다. 1916년 4월부터 1920년 3월까지 충청북도 중원군 신니면에 있는 사립 용명(龍明)학교를 다녔다. 1920년 4월 경성의 휘문(徽文)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25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일본 세이조(成城)중학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중퇴했다. 이후 일본 작가 카토 다케오(加藤武雄)를 사사하면서 문학수업을 했다.
1926년 6월호 『조선문단』에 단편소설 「달순(達順)의 출가」로 등단했다. 1927년 5월 첫 장편소설 『폐허의 울음』(청조사)을 발간했다. 이즈음 일본작가들의 모임인 ‘20일회’에 참여해 활동하다 1929년 귀국, 귀국 후 경성부 성북동의 삼선소학교 교원과 출판사, 잡지사 직원을 전전하다 1931년 『동아일보』희곡 현상모집에 「한낮에 꿈꾸는 사람들」이 당선되었다. 1932년 7월 30일 문인들의 친목단체인 조선문필가협회가 창립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33년 2월 문예지 『문학타임스』를 창간했다. 1933년 8월부터 1933년까지 문학동인 ‘9인회’회원으로 활동했다. 1933년 10월 『문학타임스』의 제호를 바꿔 『조선문학』을 창간했다. 1935년 5월 『동아일보』학예부 기자로 들어갔다. 제11회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실으면서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으로 1936년 8월 29일 『동아일보』가 정간되어 잠시 실직했으나, 1937년 6월 2일 복간되자 복직했다. 1937년 첫 작품집 『취향(醉香)』(조선문학사)을 발간했다. 1938년 작품집 『무영단편집』(한성도서주식회사)과 장편소설 『명일(明日)의 포도(鋪道)』(삼문사)를, 1939년 장편소설 『먼동이 틀 때』(영창서관)를 발간했다. 1939년 7월 『동아일보』학예부 기자를 그만두고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 어엽 2리 궁촌으로 내려가농촌생활을 하며 농민문학에 열중했다. 1940년 4월 경성보육학원에서 조선문학과를 담당하면서 생도감 겸 서무주임으로 재직하다 1941년 사임했다.
(친일 행적)
1942년 9월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문학부 소설희곡회 상임간사를 맡았다. 같은달 8일부터 1943년 2월 7일까지 일본어 신문 『부산일보』에 장편 일문소설 「청기와집」(靑瓦の家)을 연재했다. 「청기와집」은 조선에서 조선인 작가가 일본어로 쓴 최초의 일간지 연재소설이다. 중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홍콩을 점령할 때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데, ‘청기와집’이라 불리는 양반 권씨 집안은 ‘조선’을 상징한다. 여주인공 안미연(安美燕)을 둘러싼 남녀관계를 주축으로 하는 이 소설에서 청기와집의 가장인 권대감은 ‘지나에 대한 사대주의’에 빠진 구사상, 아들 권수봉은 ‘영미제일주의’에 빠진 사상, 손자 권인철은 ‘일본’으로 상징되는 신사상을 대변한다. 결국 권노인은 세상을 뜨게 되었고, 수봉은 마음을 바꾸어 조선신궁을 참배하게 되었으며, ‘젊은 일본’으로서의 인철은 꿋꿋하게 개간사업에 몰두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1942년 12월 26일부터 1943년 1월까지 만주 젠다오성(間島省)초빙으로 조선문인협회가 파견한 시찰단의 일원으로 채만식, 정인택, 정비석과 함께 젠다오성의 조선인 개척촌을 시찰했다. 떠나기 전에 그는 “영하 30여도의 추위와 싸우면서 그다지 비옥하지 않은 토지를 감연(敢然)히 개척한 그 위대한 정성을 내 마음의 양식으로 하고 싶다.”(『매일신보』1942.12.29)는 포부를 밝혔다. 시찰을 다녀온 뒤 가졌던 좌담회에서 만주 이민의 황국신민화는 논리가 아니라 생활로부터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면서 개척민의친화나 단결, 정착을 위해 일본의 분촌(分村)계획과 같은 것이 조선에도 시행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간도성시찰작가단보고」, 『녹기』1943년 2월호). 이는 일제의 정책적 농업식민을 2등 신민인 조선인이 만주에서 재현하기를 기대하는 것으로 전형적인 아류제국주의 논리에 기초한 발상이었다. 이외에도 「간도를 여행하고」(『경성일보』1943.2.16-2.20), 「개척촌을 보고」(『매일신보』1943.2.25-2.28)와 같은 산문이나 「토룡(土龍)」(『국민문학』1943년 4월호)과 같은 소설을 결과물로 남겼다.
1943년 1월이무영이 육군편, 이태준이 해군편을 맡아 쓴 『대동아전기(大東亞戰記)』를 발간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의 활약상을 영웅적으로 묘사해 조선인이 “대동아공영권 확립을 위하여 정신어봉공(挺身御奉公)을 다하는 심기(心機)를 투철케 하는 것”을 목표로 발간되었다. 같은 해 2월 일본적 예술의 창조를 위해 예술인들에게 일본정신을 체득시키고자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로 경성부 남산의 조선신궁에서 행해진 예술부문 관계자 연성회에 참가했다. 같은 달 장편소설 『청기와집』으로 일본의 신태양사가 주관하는 제4회 조선예술상 총독상을 수상했다. 이 수상에 대해 『경성일보』2월 21일자 기사는 “당당하게 국어(일본어)와 씨름을 하면서, 반도인이 시국과 함께 일어나서 나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 인정받았다고 평가했다. 이어서 5월 3일부터 9월 6일까지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향가(鄕歌)」를 연재했다. 농촌소설의 형식을 빌린 이 소설은 농촌에서 ‘총후봉공’과 지원병 문제를 다루고 있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팔선동(八仙洞)이란 농촌마을에서 원수지간의 두 집안의 아들과 딸인 남녀 주인공은 고향으로 돌아와 함께 힘을 다해 수리공사, 강습소 설립 등을 통해 촌락공동체를 건설해 간다. 그리하여 당시 농촌의 중대과제였던 자작농 창설을 이루어내고, 전선에 보낼 위문대와 애국저금을 확보해 나가는 것은 물론 지원병에 응모하는 젊은이가 나오고 국어 보급도 활발해지기까지 하는 등 ‘전시하의 촌락’다운 체제와 활동을 갖추고야 만다는 내용이다.
1943년 5월 4일부터 9일까지 미쓰코시(三越)백화점에서 열린 조선문인보국회 결성기념 문예전에 이무영은 조선예술상 상장과 상패 등을 전시 출품했다. 같은 해 6월 조선문인보국회 소설희곡부회 간사를 맡았다. 8월 4일 징병제 감사결의 선양행사에 협찬하여 경성 부민관에서 개최된 ‘낭독과 연극의 밤’에 네거리소설(辻小說 : 국민의 전쟁의직를 높이기 위해 짧은 글을 거리에 게시한 것에서 유래)인 「역전(驛前)」이 영화배우 남승민(南承民)에 의해 낭독되었다. 같은 날 이무영은 ‘결전하 반도문화 진영의 지도자층을 연성’하기 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로 외금강에서 열린 문화부문 관계자 미소기연성회에 참석했다. 미소기는 ‘죄 또는 더러움을 중대한 신사(神事) 등에 앞서 강이나 바다에 몸을 씻음으로써 청결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8월 28일부터 9월 9일까지 해군특별지원병제도 실시에 즈음하여 국민총력조선연맹과 매일신보가 주도해 조선의 소설가, 시인, 화가 5명으로 조직한 ‘조선문화관계자 해군시찰단’의 한 명으로 선발되어 일본의 해군병학교, 해군항공대, 기타 해군 관계 각 기관을 견학했다. 견학 도중 별도로 태평양전쟁 전사자인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원수와 이른바 ‘9군신(軍神 : 진주만 공격 때 희생자)’의 생가 등을 방문했다. 9월 29일 장편 일문소설 『청기와집』을 일본의 신태양사에서 단행본으로 발간했다.
1943년 11월부터 1944년 1월까지 ‘국체본위(國體本位)에 철저하여 적의 모략을 파쇄하고 국민의 사기를 높이는, 건전하고 생활의 지도력이 큰 작품’을 발굴 보급하기 위해 조선문인보국회가 주관한 ‘결전소설과 희곡’ 현상모집의 심사원으로 참여했다. 1943년 2월 29일부터 8월 31일까지 『경성일보』에 일문 장편소설 『바다에의 서』(海への書)를 연재했다. 4월에는 일문 소설집 『정열의서』(情熱の書)를 연재했다. 여기에 실린 작품 중 「제1과 제1장」은 1939년 10월에 한글로 발표했던 소설을 작가가 직접 일본어로 번역한 것으로 일제의 농업정책으로 인해 농민들이 궁핍한 생활에 시달리는 대목들은 대거 삭제해 자기검열에 충실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같은 해 6월 18일 조선문인보국회 소설부회 간사장을 맡았다. 같은 날 일본문학보국회 주최 정보성, 육군성, 대정익찬회 후원으로 도쿄의 군인회관에서 열린 ‘문학자총궐기대회’에 참가했다. 도일(渡日)에 앞서 “지금까지 조선문학은 언문문학이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었던 까닭도 있어 일본문학의 바깥에 있다는 느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문학도 전열(戰列)의 제1선으로 뛰쳐나온 현재, 홀로 일본문학에서 떨어져 초연한 태도를 집착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또 할 수도 없다. 조선문학은 지금 일본문학의 일익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했다. 그 신선한 숨결을 내지 문학자에게 전하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대회를 마친 뒤 6월21일부터 22일까지 일본문학보국회 소속으로서, 일본에 가서 영농법과 ‘농민도(農民道)’를 익히고 있는 조선농민청년대 평안남도 반원과 일본 동부의 한 부대에 근무하고 있는 조선 병사를 위문했다. 1945년 5월 국민총진격운동 사무로 함경북도에 출장을 갔다. 8월 1일 조선문인보국회 소설부회장을 맡았다.
이무영이 문학활동으로 무엇을 배웠는가?(大東亞戰爭に依って何ゑ敎へられたか?)라는 설문에 대한 응답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영미에 종속적인 지금까지의 문학을 비판하면서 “관념적인 문학이거나 학문 같은 것이 전쟁의 경우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없으며, 위대한 국민 정신이 없는 곳에 힘찬 문학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지금 새삼스럽게 통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이며 그리고 작가의 한사람으로서 장차는 투쟁정신을 갖지 않는, 숫자만의 군인을 앞에 두고 두려워서 옹송그리고 있는 영미의 수뇌자들을 거울로 하고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라고 하여 시국에 조응하는 문학을 추구할 것임을 밝혔다. 오랫동안 가토 다케오를 사사한 끝에 누구보다도 일본어 창작에 자신감을 지니게 되자 시국적 문학의 창작 수단으로 일본어를 사용할 것을 주창했다.
1943년 1월호 『국민문학』에 발표한 산문 「국어문제회담(國語問題會談)」에서 조선인의 행복은 국어(일본어)보급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오늘날의 일본어는 일본만의 국어가 아니며, 동아 10억의 국어가 되고자 하고 있다. 종래 조선 반도만의 좁은 지역만의 조선어로 쓰이고, 그 지역에 삶을 갖는 자만으로 친숙하던 조선문학은, 이후 일본 내지는 물론 멀리 지나, 남방 방면에도 전파될 가능성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 문학은 이제부터 커다랗게 발전할 것”이라고 발언하여 일본어 창작이 조선문학의 외연 확대에 기여할 것이라고 호도했다.
나아가 문학에서 결전자세가 강조됭수록 문학가의 특수성이 잘 활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전문학의 수립을 위해」(決戰文學樹立の爲めに, 『문학보국』1944년 8월호)에서 “애국 문학자가 제작한 위대한 문학작품은 그 한 자 한 구절이 포탄이며 전선 장병이 목말라하며 후방의 국민에게 요청하는 비행기”이기 때문에 “우수한 문학자를 결전하 생산 각 부분에 계속 투입하고, 그들에게도 생산수량 전임제랄까, 일정한 기간 내에 국가가 요청하는 우수한 문학작품을 생산시”키자는 안을 제안했다. 문학을 전쟁의 도구로 상정하고 창작을 생산으로 인식하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문필보국(文筆報國)하는 이무영의 문학적 실천은 『대동아전기』에서 잘 드러난다. 이무영과 이태준의 공동 저서로 돼 있지만 일본 책을 공동 편역한 것으로 추측되는 이 책에서 “유사이래로 인간사회의 전쟁이란 전부가 침략 다시 말하면 무력으로써 권리를 뺏고 땅을 뺏고 백성을 뺏아서 자기 나라의 노예를 만드는 것이었더니라. 그러나 이번 대동아전쟁은 오랫동안 영미의 악정 밑에서 허덕이고 있던 대동아의 민족으로 하여금 스스로 일어서게 하기 위해서 이 공영권 내에 있는 영미 두 나라의 세력을 쫓아내자는데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동아공영권 내에 있는 10억의 유색 인종이 한 덩치가 되어 단란하게 살자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대동아전쟁’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이러한 정신 아래 영미와 싸우는 ‘무적 황군’의; 활약상을 ‘국어’ 즉 일본어를 해독 못하는 조선인들에게 널리 알리려 했다.
대일 협력은 ‘농민소설’이라는 문학적 실천을 통해 활발히 전개되었다. 「흙의 노예」(『인문평론』1940년 4월호)에서는 농촌계몽을 일제의 식민정책과 융화시켰고, 『청기와집』이나 『향가』 등에서는 작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계몽주의적인 젊은 주인공들’을 등장시켜 조선의 근로대중을 일제의 총동원체제에 합류시키려고 시도했다. 『향가』에서 성명옥과 엄준섭을 팔선동 주민들을 증산보국의 현장에 끌어들임과 아울러 동민들이 자작농 창설과 일본어 습득에 나서게 함으로써 근로동원의 효율화와 극대화를 이루어내려고 했다. 그 결과 팔선동에서는 “자작농 창설이 끝나자 뒤이어 춘추 2기로 나누어 해오는 위문대와 애국 저금 등의 배당을 하고, 금녕 최초로 지원병에 응모한 여섯명의 여비와 기타 준비며 보리 공출, 배급 등의 전시하의 동회(洞會)다운 긴장 속에서 진행이 되었다.”(『매일신보』1943.9.6)고 묘사했다.
‘자작농 창설’은 이 시기 일제의 중요 정책이었고 이무영의 소설에서 이 주제는 반복되어 나타났다. 1943년 8월호 『반도의 빛』(半島の光)에 발표한 「용답(龍沓」은 『반도의 빛』편집부로부터 ‘황해도 농촌의 시찰기’를 의뢰받고 ‘시찰기’를 대신해 쓴 단편소설이다. 여기서 조선 작가인 ‘나’는 작가 3명과 함께 황해도 농촌시찰을 나갔다가 아버지 대에서 패가한 뒤 ‘내지’에서 다시 돈을 벌어 온 조선 농민의 부탁을 받게 된다. 창씨명이 다카시로인 이 농민은 벌어온 돈으로 자기네 옛 땅을 되찾으려 하나 땅 임자인 장(張) 지주는 거절한다. 이에 다카시로는 이 시찰단 일행에게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농본주의와 농민문학을 내세우며, 제국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도 자작농이 창설되어야 한다고 제창해온 사토(佐藤) 씨를 필두로 한 시찰 일행은 장 지주를 꾸준히 설득해 결국 다카시로의 청을 들어줄 수 있게 된다. ‘농본주의’와 ‘휴머니즘’으로 위장한 증산보국 소설의 또다른 양상이었다.
1944년 4월 15일호 『국민총력』에 발표된 「화굴이야기(花窟物語)」는 황해도 시찰에서 채집한 것으로 추측되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여 집필된 소설이다. 여기서 군청의 도쿠하라(德原)군수, 후지야마(藤山)과장, 그리고 미곡 소매조합 이사인 하리모토(張本)는 절미(節米)와 식량증산책의 일환으로 고구마의 주식화(主食化)를 꾀한다. 그들은 주위의 무관심과 몰이해 소겡서도 실험과 관찰을 거듭한 끝에 남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던 ‘화굴’이라는 천연동굴에 고구마를 저장하는 법을 생각해 냄으로써 전시하 증산보국에 크게 공헌하게 된다. 소설집『정열의 서』에 수록된 「어머니(母)」에서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증산보국에 공헌하는 농민 어머니가 묘사돼 있다. 오(吳)과부는 남편이 주색잡기로 가산을 탕진한 수 죽자, 남은 3000평 정도의 모래산을 아들 태근(台根)과 부지런히 일구어 훌륭한 복숭아 과수원으로 바꿔 놓는다. 그런데 첫 수확을 올린 뒤, 지원병으로 출정하겠다던 태근이 감기로 병사한다. 오 과부가 슬픔에 젖여 있을 때 면(面)에서는 식량증산을 위해 마을 과수원들을 밭으로 개발하라고 시달한다. 그러나 오 과부의 사정을 늦게 안 면에서는 시달을 철회하나 오히려 오 과부는 국가를 위해서 공들인 과목을 뽑는다. 아들 태근이 나라를 의해 일하지 않은 게 죄스러워서라도 그렇게 한 것이다. 과수원에는 이제 보리가 자라게 되었다.
일제 말인 1945년 5월 5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산문「소개(疏開)산 전훈(戰訓)②―선구자들의 변」에서도 꾸준히 증산을 향한 매진을 강조했다. "소개라는 것은 전쟁의 도피도 아니고 일시적 피란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소개해 올 때는 생업이 없이 또는 근로정신이 없이 막연히 와서는 안 된다. (증산)연고자의 농토가 있다거나 친척, 친구의 토지가 있으면 이를 맡아 밭을 갈고 논을 가꾸고 산을 거두어 그것으로 자급자족의 길을 열고 크게는 국가에 식량증산으로 공헌하리라는 굳은 결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소개하는 것은 전투행위이고 증산을 위한 동원이기 때문에 소개를 속히 단행하라고 제창할 뿐“이라고 하여 전시체제하의 농업보국을 독려했다.
이 밖에도 다수의 친일 관련 글을 남겼다. 「가련한 처칠의 말로」(『매일신보』1942.2.19),「문학의 진실성」(『경성일보』1943.3.17~3.21),「가등무웅(加藤武雄)선생께」(『국민문학』1942년 4월호),「사위」(『녹기』1942년 9월호),「작자의 말」(『부산일보』1942.9.4),「‘문서방’에게 보내는 편지」(『국민문학』1942년 11월호), 「이날이 되어」(『경성일보』1942.12.16), 「과원이야기」(『신여성』1943년 1월호), 「부산일보 청기와집」(『대동아』1943년 8월호), 「농촌의 중견청년」(『반도의 빛』1943년 8월호), 「농군의 것」(『신태양』1943년 11월호), 「고기(肉」(『문학보국』1944년 11월호), 「촌거단상」(『매일신보』1945.2.20~2.23), 「싸우는 농촌과 문화문제」(『경성일보』1945.3.26)등이 있다.
해방 후, 경기도 군포에 칩거하며 침묵을 지키다가 1946년 3월 전(全)조선문필가협회에 참여하면서 활동을 재개해 서울대학교 문리대에서 소설론을 강의하는 한편 조선출판사에서 작품집 『흙의 노예』를 발간했다. 해방 후 최초로 발표한 단편소설인 「굉장소전(宏壯小傳)」(『백민』1946년 12월호)에서는 친일파 청산을 폄훼했다. 1947년 연희대학교 문과대에 출강하고 장편소설인 『향가』(동방문화사)를 발간하는 한편, 좌익의 ‘조선문화단체총연맹’에 대응해 조직한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의 최고위원을 맡았다. 1948년 『국민신문』에 연재한 장편소설 「피는 물고다 진하다」(「삼년」으로 개제)에서 친일파 역시 시대의 희생양인 것처럼 묘사했다. 1949년 장편 『세기의 딸』(동진문화사)을 발간하고, 소설집 『산가(山家)』를 『무영농민문학선집』(민중서관) 1권으로, 장편『향가』를 제2권으로 발간했으며, 『소설작법』(구문사)을 발간했다. 같은 해 12월 전국문필가협회 문학부와 한국청년문학가협회를 중심으로 한국문학가협회가 결성되자 여기에 참여했다.
1950년 1월 1일부터 5월21일까지 『한성일보』에 장편「농민」을 연재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해군소령으로 입대해서 해군의 정훈교육을 담당하다가 10월에는 문총구국대 기회위원을 맡았다. 1951년 해군 진해통제부 정훈실장으로 부임했다. 1952년 충무공 동상 제작을 지휘하는 한편 희곡「이순신」을 김승호 주연으로 상연했다. 1953년 2월 대령으로 진급하면서 해군 정훈감에 취임했다. 이해에 소설집 『B녀의 소묘』를 발간하는 한편 숙명여대 문리대 강사로 출강했다. 1954년 환도 후 국방부 정훈국장으로 임명되었으며, 5월부터 『대구일보』에 장편소설「노농」을 연재했다. 1955년 해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이 무렵 발표한 희곡 「팔각정이 있는 집」(『문학예술』1955년 11월호)에서도 친일파의 죄상을 용서하자는 태도를 취했다.
예편 후, 국방부 정훈국 자문위원 겸 해군기술연구소 이사,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 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자유문학자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1956년 4월 「농부전초」로 제5회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고, 7월부터 영국 런던에서 열린 제28회 국제 펜클럽 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1957년부터 단국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같은 해 자유중국(현 타이완)정부 초청으로 한 달간 중국 교육문화재를 시찰했다. 1957년 『해전(海戰)소설집』을, 1958년 『벽화』(문장사)를 발간했다.
1960년 4월 21일 뇌일혈(일설에는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문인장으로 서울 성북구 창도 천주교묘지에 묻혔다. 1975년 신구문화사에서 『이무영대표작전집』이 발간되었다. 총 5권으로 발간된 『전집』에는 장편 『향가』를 비롯해 다수의 친일작품들이 개작되어 수록되었다. 1985년 음성에 ‘이무영선생문학비’가 건립되었다. 1994년 4월 21일 음성문화원이 주최하고 동아일보사가 후원해 ‘무영제’가 개최되었다(1988년 제5회부터 한국예총 음성지부 주최). 1995년 4월 제 2회 ‘무영제’를 계기로 문학비가 세워진 설성공원 앞길이 ‘무영로’로 명명되었다. 1996년 4월 음성군과 음성문인협회에서 이무영 생가에 표지와 표석을 설치했다. 1997년 6월 한국문인협회와 SBS문화재단 후원으로 이무영 생가의 한국문학 표징 제막식을 가졌다. 1998년 음성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에 이무영의 작품을 비롯해 친필·유품 등을 전시했다. 2000년 4월 40주기를 맞아 『이무영문학전집』(전6권, 국학자료원)이 발간되었고, 동양일보사가 주관하고 음성군이 후원해 ‘무영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이후 ‘무영문학상’은 매년 4월 음성군에서 열리는 ‘무영제’에서 시상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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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공부햇습니다.......
이무영도 친일 매국도인건 확실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