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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비전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예예
성 경 : 마 17:14-20절
제 목 : 순수하고 강한 믿음
일 시 : 2024. 4. 28.
마태복음 17:14-20/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 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계속해서 마17:20절을 중심으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마17:20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 너희의 문제는 믿음이 아니다. 너희의 문제는 불신(앙)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7장의 기사와 병행을 이루는 막9장의 기사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막9:20/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부분과 이 사건이 제자들로 하여금 불신(앙)을 가지게 했던 원인이었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서 간질병이 발작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면, 예를 들면 땅에 넘어져서 거품을 흘리고 눈이 돌아가고 몸이 비틀어지는 것을 보았다면 그것이 아주 무서운 경험이 될 것이며, 소름 끼치는 광경입니다. 지금은 잘 볼 수가 없지만 제가 어렸을 때는 그런 간절병에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게 되면 무섭고 놀라게 됩니다. 제자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분명히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전에는 다른 종류의 귀신들이 쫓겨나고 사람들이 치유되는 것을 보았지만, 제자들이 간질병 들린 아이를 위해서 기도해주자 아이 안에 있는 귀신이 발작을 일으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냈을 때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그분의 믿음을 무력화시키는 불신앙이 제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아이를 고칠 수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아이가 갑작스럽게 발작하는 것을 보는 순간 놀라고 당황하면서 불신앙으로 반응했으며, 그것이 그들의 믿음을 무효화시켰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주님께 우리가 그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믿음이 있었고 전에는 귀신이 쫓겨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이번에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의 불신앙 때문이다. 너희는 불신앙이 너희의 믿음을 무효화시켰고 취소시키며 무너뜨렸다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계속해서 마17:21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가진 성경에는 21절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과 영어성경에는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17:21/그러나 이런 종류(의 불신)는 기도와 금식에 의하지 않고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시더라./고 했으며, 현대인성경 (그러나 이런 귀신은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나가지 않는다.)/고 번역했으며, NASB {"But this kind does not go out except by prayer and fasting."} /고 했습니다. NRSV(뉴신개정표준역)만 이 구절이 생략되었을 뿐 모든 영어성경번역본은 21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21절 말씀이 원래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학자들이 불편하니까 없애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마17장과 병행을 이루는 마가복음 9장에는 이 구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9:28-29/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물론 여기서는 금식이라는 단어가 생략되었지만 마태복음에는 없는 성경구절이 마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번역하는 학자들이 얼마나 단순하고 무지한지를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없음이라고 했다면 마가복음에도 없음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마17:21절에 해당되는 성경구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번역성경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7:21절과 마가복음 16:17-20절이 들어있는지 그렇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떤 성경은 막16:17-20절을 괄호를 쳐 놓아서 성경에서 제외시키려고 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찾아온 불신앙에서 벗어나고 불신앙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을 마17:21절과 막9:29절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1. 일반적으로 세 종류의 불신이 있습니다.
1) 먼저 무지로부터 오는 불신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사람들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지식의 부족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반대합니다. 성경을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건강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제가 지금까지 전하는 진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성경을 통해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질병을 주시는 분이 아니지만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해서 하나님은 질병을 주시는 분이 아니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병을 주시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일종의 무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것도 일종의 불신입니다.
첫 번째 종류의 불신인 무지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말씀의 진리(복음)를 알려 주어야 합니다. 만약 복음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며, 그분의 영에 민감하다면, 그런 종류의 불신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2) 두 번째 종류의 불신은 잘못된 교리로부터 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 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기적을 행하지 않으신다. 치유는 오늘날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사도들과 함께 사라졌다 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맞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런 가르침을 받아 왔습니다.
이처럼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한 불신은 단순히 무지로 인한 불신보다는 더 어렵습니다. 우선 그들에게 있는 잘못된 교리를 반박하고, 그런 다음 진리를 가르쳐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류의 불신을 고치는 해결책은 첫 번째 종류의 불신을 제거하는 해결책과 동일합니다. 하나 더 첨가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들을 조용히 앉혀 놓고 그들의 반론에 대응하는 것입니다. 처음 두 가지 종류의 불신을 제거하는 해답은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3) 세 번째 종류의 불신은 자연적인 것입니다.
세 번째 불신은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자연적인 정보로부터 오는 불신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낫게 하기 위해 기도하는데 그가 죽은 듯이 나자빠진다면, 여러분의 눈과 귀와 모든 감각기관은 내 기도가 역사하지 않는구나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무지나 잘못된 교리로 인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우리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으며 느낀 것을 신뢰하도록 배워 왔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몸이 더 이상 아프지 않도록 기도하지만 여전이 고통이 느껴진다면,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에게 자연적인 불신의 생각을 줄 것입니다. 그것은 마귀의 생각도 아니며, 악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오감은 마귀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오감이 없다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냄새를 맡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러 번 뜨거운 냄비에 손을 대어서 화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저녁에 사모님이 된장을 끊어 놓았는데 된장냄새를 맡지 못하니까 된장을 끊어 놓은 뜨거운 냄비에 손을 대어서 화상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는 저녁에 집에 들어오면 벌써 냄새를 맞으면서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하고 무슨 반찬을 했는지 아는데 냄새를 맞지 못하니까 그런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오감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오감을 믿고 따라서는 안됩니다.
2. 우리의 육감(오감)을 개발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나를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운전하고 있다면, 나는 여러분이 눈을 감고 믿음으로 운전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여러분이 눈을 뜨고 교차로를 통과하기 전에 다른 차가 오는지 안 오는지 잘 살펴보고 건너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도 아니고, 불신으로 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이나 영감을 통해 무언가를 말씀하셨는데 여러분의 육체적인 감각들은 그건 역사하지 않을 거야 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오감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눈으로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으며 느낄 수 있는 것과는 반대되는 무언가를 원하실 때 여러분의 자연적인 오감은 여러분의 믿음을 무효로 만들 불신앙의 생각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마17장에서 제자들에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제자들은 기도하면서 믿고 있었던 결과와는 정반대로 귀신들이 기도해 준 아이에게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제자들은 귀신 들린 아이에게 손을 대고 기도하면 즉시 아이가 정상적으로 돌아올 줄 알고 있었는데 아이에게 손을 얹고 기도했는데 오히려 발작을 일으켜서 아이가 더 나빠진 것입니다. 바로 그런 발작이 제자들을 두렵게 한 원인이었습니다. 그들의 오감은 믿음에 반대하는 불신앙의 생각을 전달해주었습니다.
앤드류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이 처음으로 죽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을 때 살아난 것을 본 것은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첫 번째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은 너무나 쉽고 단순했다고 합니다. 목사님께서 그 방으로 들어갔을 때 목사님은 무슨 문제가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목사님은 그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미처 알기 전에 그 사람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방으로 들어갔을 때 그의 아내가 오. 하나님, 남편 에버트를 다시 살려 주세요 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할 때에야 목사님은 처음으로 그 사람이 죽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기도를 들었을 때 목사님은 그저 그 사람을 쳐다보고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에버트,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네 몸으로 돌아올지어다. 그러자 그 사람이 곧 바로 일어나서 앉았습니다. 너무나 쉽고 간단하게 기적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만약 앤드류 목사님이 죽어 있는 사람에 대해 삼십 분 정도 생각했더라면 훨씬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누군가 목사님께 무엇 때문에 기도하러 갈 것인지 말해주었더라면, 목사님의 생각은 아마도 목사님의 믿음을 무효과시키고 무너뜨리기에 충분한 불신들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앤드류 목사님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다른 어떤 것들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찾아가서 기도한 것입니다. 즉 불신앙이 목사님의 생각 속에 들어올 기회도 없기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했기 때문에 첫 번째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17장에 나오는 산아래 있던 제자들은 과거에 귀신이 쫓겨나가고 사람들이 치유되는 것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이처럼 귀신이 발작을 일으키는 것을 본적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과거에 이와 같은 불신앙에 유혹받을 만한 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들이 기도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물리적인 현상이 나타났고 바로 그것이 그들이 불신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된 원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리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런 종류의 자연적인 불신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금식과 기도를 통해서이다 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이는 단지 더 많은 말씀을 공부하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단순히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 여러분의 육감 즉 오감을 초월하는 믿음을 계발해야 합니다.
3. 불신(앙)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금식과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금식과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오감, 즉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으며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있습니다. 이 감각 중 어느 하나가 손상되더라도 예를 들어 눈이 멀더라도 여러분은 여전히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시간장애인들은 그들의 집이 어떻게 생겼고, 모든 물건들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그들은 눈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어두운 곳도 걸어 다닐 수 있습니다. 그들은 청각과 촉각을 주로 사용합니다. 즉 여러분은 감각 중의 하나를 잃어도 다른 감각에 의존하여 보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병을 고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실 때 우리 안에 놀라운 믿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우리의 오감은 그것은 역사하지 않았어, 나는 아직도 고통을 느끼고 있어, 나에게는 아직도 이러저러한 증상이 있어. 아직도 몸이 낫지 않았다는 것을 입맛을 통해서 느낄 수 있어(입맛이 쓴 경우) 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의 오감은 병이 아직 고침받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주장하고 있다면, 우리는 병이 이미 나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육감을 계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육감은 바로 믿음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정말로 믿게 되는 정도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믿음은 여러분이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으며 느낄 수 있는 것만큼이나 여러분에게 실재가 됩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영역에서 시간을 보냄으로써 그렇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와 금식의 의미입니다.
금식이 하나님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은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지 않습니다. 금식과 기도는 귀신을 떠나게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도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것에 덧붙여 금식과 기도를 해야만 쫓겨나는 귀신을 만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난 귀신이 예수님의 이름과 그 이름으로 믿는 믿음에 반응하지 않았다면, 기도와 금식도 그것을 쫓아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만으로도 어떤 귀신이든지 처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금식과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마귀를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금식과 기도는 우리자신을 변화시키고 우리자신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식욕은 우리의 육신 가운데 가장 강한 욕구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금식을 통해 육신을 부인하면, 육신은 먹고 싶기 때문에 강하게 저항하고 반항할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제멋대로 하고 싶어하고 보살핌을 받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육신(몸)을 향해 안돼! 사람은 떡으로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먹고 사는 거야! 라고 말한다면, 우리의 육신은 아니야, 밥을 먹어야 살 수 있어 라고 즉시 반항할 것입니다. 우리가 삼일 금식기도를 한다면 첫날 정오쯤에 이르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틀린 것입니다. 우리가 삼일 금식기도를 통해서 힘든 순간을 참고 견디면, 잠시 후에 우리의 몸과 감각은 드디어 배우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감각은 이봐 나는 정오에 죽지 않았어 라고 말할 것입니다. 실제로 금식한지 사흘정도가 지나면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은 지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음식을 먹지 않았는데도 배가 고프지도 안고 먹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 지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아직 이러한 체험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저는 그것을 여러번 경험해 보았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오감을 통제할 수 있으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씀을 믿는 믿음이 실제라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몸은 음식 만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고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금식을 하면서 우리의 육체와 오감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가 우리의 몸을 향해 너는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된다 라고 말하면, 우리분의 육신은 나는 아직도 아픈데 라고 대답할 수도 있지만 육감은 나는 치유되며 그 사실을 믿는다. 그래, 나는 전에도 이것을 경험했어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금식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머물러 있는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면, 우리의 몸은 아니야, 나는 아직도 아파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몸을 향해서 몸아, 너는 명령에 따르라 라고 말하면, 우리의 육신은 내게 이래라 저래라 말하는 너는 누구냐? 언제 먹을지, 무엇을 먹을지, 얼마나 먹을지 말하는 건 나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육신은 마치 버릇없는 개구쟁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하나님과 그분의 말씀)과 악(하나님과 그분의 말씀과 반대되는 것)을 분별하도록 우리의 감각들을 훈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5:14/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어린 아이는 우유를 먹어야 됩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은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은 자신의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서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 감정, 감각, 환경이 말하는 자연적인 것보다, 믿음이 말하는 것에 더 많이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우리에게 불신은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4. 모든 믿는 자들은 똑같은 믿음의 분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4장을 통해서 불신의 수준에 의해서 어떤 사람에게는 약한 믿음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강한 믿음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롬4:19-21/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행동이 우리에게 믿음과 불신이 얼마나 뒤섞여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불신이 많다면 우리의 믿음은 약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불신이 적다면, 우리의 믿음은 강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믿음과 큰 믿음이라는 말은 적절한 표현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을 이미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롬12:3/...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했으며, 갈2:16,20/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by the faith of Christ 그리스도의 믿음으로써)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the faith of the Son of god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처럼 거듭난 모든 성도들에게는 예수님과 정확히 똑같은 양과 질의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 각자에게 있는 문제는 불신(앙)입니다. 우리는 더 큰 믿음을 세우려고 애쓰기보다는 불신을 키우는 일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불신의 원천을 꺼 버리고 불신을 굶겨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세계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만을 생각하며 많은 시간을 보냄으로써 그런 불신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지점에 도달해야 합니다.
본인의 나이가 백 살이고 아내 역시 구십 세라는 사실마저도 생각하지 않는 아브라함처럼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갖게 되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만을 생각했습니다. 롬4:19절은 아브라함은 자신의 몸이 지금 죽은 줄로 생각하지 않았고, 사라의 태도 죽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이로 인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불신으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5. 승리의 열쇠가 있습니다.
보통 치유사역에 대해서 사람들이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없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불신도 있습니다. 따라서 병을 고침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믿음은 약합니다. 즉 그들의 믿음은 불신에 의해서 무효화되고 취소되며 무너집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시간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불신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독감 계절이군, 모든 사람이 독감에 걸리지 또는 내 아버지도 나를 공격하는 이 질병 때문에 돌아가셨어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연적인 것들을 숙고하고,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불신이 자신의 믿음을 무효화시키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승리의 열쇠는 거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비록 겨자 씨 한 알 크기의 믿음일지라도 단순하고 순수하며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 곧 불신에 의해서 무력화되지 않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대방향으로 끌어당기는 불신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서 겨자 씨와 같은 작은 믿음이 우리를 승리로 이끌게 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들이 치유되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가 그들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병 고침을 받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믿음도 있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위대한 사람일 수 있지만 반대방향으로 자신을 끌어당기는 불신앙을 아직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초자연적이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불신(앙)을 굶겨야 합니다. 우리의 겨자 씨 같은 작은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필요한 것은 무엇이나 충분히 성취할 수 있을 만큼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올 인하시기 바랍니다. 불신앙은 마치 거머리와 쓰레기처럼 취급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일주일 정도 따로 시간을 내십시오.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주님께 올인 한다면 우리의 불신은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능력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를 반대방향으로 끌어당기는 불신(앙)을 감소시킴으로써 우리의 믿음이 훨씬 잘 역사하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건강하기를 원하신다는 진리를 믿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우리의 믿음이 바라던 결과를 얻기 시작할 때까지 불신을 굶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댓글 ♥ 홀로 앉으십시오.
1. 마17:14-21절을 읽고 불신앙을 다루는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 함께 나누십시오.
1. 예수님은 제자들이 불신앙에서 벗어나는 비결을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어디에서 말씀하셨습니까?
2. 일반적으로 볼 때 세 종류의 불신이란 무엇입니까?
3. 우리가 개발하고 훈련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4. 히5:14절과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어떻게 하면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다고 했습니까?
5. 믿음이 작다 크다는 표현이 잘못된 이유와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은 누구와 같습니까?
6. 불신(앙)을 굶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입니까?
아멘 아멘 아멘
아멘아멘
아멘
아멘 아멘
1.막9:28~29 집에 들어가시며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외에 다른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수 없느니라
2.1)무지로부터 오는 불신 2)잘못된 교리로부터 오는 불신 3)자연적인 불신
3.육감 곧 오감을 초월하는 믿음
4.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은 자신의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서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 분별 할수 있는자입니다
5.우리에게 불신이 많다면 우리의 믿음은 약합니다 우리에게 불신이 적다면 우리의 믿음은 강합니다 그러므로 작은믿음과 큰믿음은 잘못된 표현이고 거듭난 성도인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정확히 똑같은 양과 질의 믿음이 있습니다
6.금식과 기도로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만을 생각하고 올인하는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