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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보 구엔 지압을 베트남에서 모르면 간첩이다.
철의 요새라고 불리는 디엔비엔푸, 이 전투를 말하려면 우선 ‘보 구엔 지압’을 알아야 한다. 지압 장군은 1911년 베트남 중부 꽝빈성 지역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쇼팽을 좋아하고 프랑스 유학까지 간 역사에 심취했던 사학도였다. 알렉산더에서 손자에 이르기까지 명장들의 병법에 통달했다. 역사 교사와 신문기자를 지낸 그가 무장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39년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인 호치민(胡志明·1890~1969)을 중국에서 만나면서다.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친 불세출의 영웅, 보 구엔의 3不 전략, “적이 원하는 시간을 피하고, 적에게 낯익은 장소를 멀리하고, 적이 익숙한 방법으론 싸우지 않는다. ”이 전략은 병법에서뿐 아니라 경영학에서도 자주 인용된다. 지압은 전쟁 철학과 개념을 혁신했다. 전투 승리의 축적이 전쟁 승리로 연결된 이론을 뛰어 넘었다.
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는 하노이 서쪽으로 약 300㎞, 라오스 국경으로부터 16㎞ 정도 떨어져 있는 한 소도시이다. 주변이 약 700m의 표고차를 갖는 산악으로 둘러싸인 이 분지는 남북으로 약 18㎞, 동서로 약 6~8㎞ 정도의 크기로 중, 월 국경지대, 라오스, 하노이로 통하는 길목이 되는 지역이지만 기실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는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지역이다. 이 촌구석에 군대를 잔뜩 포진시킨 프랑스 원정군 사령관은 앙리 나바르(Henry Navarre) 장군. 왜 그곳에 그렇게 열중했는가. 프랑스군의 조직적이고 체계화된 군대조직에 맞서 북베트남이 선택한 전술은 철저한 게릴라 전술이었고 히트 앤드 런으로 대응하는 북베트남 게릴라들에게 프랑스군의 피로도는 말도 못하게 심했다.
1954년 디엔 비엔 푸 전투를 위해 출동하는 프랑스군
결국 프랑스 지휘관 나바르는 정글 속 게릴라들을 일일이 때려잡다간 세월 다 보내게 생겼고 이 게릴라들을 깡그리 끌어내서 화끈하게 소탕한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나바르는 최고 중요시설이면서도 고립지형인 디엔비엔푸에 병력과 물자를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월맹이 반드시 디엔비엔푸를 공격해서 탈취해야 하니까 자기네 모든 병력과 물자를 한곳에 몰아넣고 공격해 들어오는 월맹군을 격퇴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베트민도 전쟁에 지쳐있었다. 산악지대는 그들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평야지역은 대부분 프랑스군의 지배하에 있었다. 평야지역의 프랑스군을 격파하기에는 그들은 너무나 역부족이었고 따라서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는 기대하기 힘들었다. 더구나 1953년 한국전쟁 휴전협정에 의해 1954년에는 한국문제에 대한 강대국 간의 정치회담이 예정되어 있고 이 회담에서는 한국문제 외에 인도차이나 문제도 토의의 대상이 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베트민으로서는 새로운 유리한 군사상황을 조성할 필요가 절실하였다.
보 구엔 지압은 1953년 12월 초 프랑스가 스스로 선택한 디엔 비엔 푸에서 결전하기로 작정하였다. 평야지역에서의 결전은 절대 승산이 없기 때문에 지원거리가 먼 디엔 비엔 푸에 전투력을 결정적으로 집중하여 이를 점령함으로써 유리한 군사적 상황을 조성함은 물론 지쳐있는 프랑스의 전의를 꺾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디엔 비엔 푸에서 결전하기 위해서는 베트민군에게 병력의 집결, 군수지원, 중장비 이동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겸비되어야 할 것인데 군사적인 상식으로서는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기에 나바르는 당연히 이길 거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지압은 3개 사단과 포병사단에 출동명령을 내리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초인적인 대 역사를 시작하였다.
디엔 비엔 푸 전투를 지휘하는 보 구엔 지압
프랑스군은 디엔 비엔 푸 방어에 자신만만하였다. 1953년 11월 25일 프랑스군 통신 정보기관의 정부수집 결과에 의하면 베트민군이 3개 사단과 1개 포병사단에 출동명령을 내린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베트민군이 4개 사단의 병력을 집중하여 공격한다 하여도 겁날 것이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프랑스군이 바라는 바였다. 베트민군의 기동 능력과 보급 능력을 고려할 때 4개 사단이 그들의 근거지를 떠나 대규모 작전을 한다는 것은 군사적 상식으로는 어불성설이었다. 베트민군이 홍하 델타지역에서나 중,월 국경지대에 있는 그들의 근거지에서 디엔 비엔 푸까지 이동하는 거리는 산길로 500~600㎞가 된다. 따라서 그들이 이 거리를 도보로 이동하다 하더라도 이동 후에 전투능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으로 보았다.
또한 베트민군의 수송능력을 고려할 때 5만 명의 전투 병력에 대한 군수지원을 하기 위해서는 별도로 5만 명의 노무자가 동원되어 쉴 새 없이 쌀을 운반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이 장거리를 운반하는 동안에 공군의 활동으로 이를 저지할 수 있고 설사 공군의 감시를 벗어난다 하더라도 그 규모나 분량으로 보아 일주일 이상 공세를 지속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베트민군의 포병화력과 대공화력도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베트민군은 산길을 따라 중장비를 디엔 비엔 푸까지 이동시킬 능력이 없었고 만일 그들이 이동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디엔 비엔 푸의 지형 여건상 포병화력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사거리 때문에 분지 주변 산악의 사면에 포진지를 선정하여야 한다. 방열된 포는 발사되는 순간 금방 진지위치가 폭로되고 이는 즉각 프랑스군의 포병과 공군의 밥이 될 것이 자명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랑스 지휘관들은 베트민군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고 오히려 베트민이 디엔 비엔 푸를 공격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인간사에 있어서 가능, 불가능의 판단은 각자 자기의 가치기준에 따라 결정되기 마련이다. 프랑스군 지휘관들에게는 그들이 가진 가치관, 군사상식을 기준으로 할 때 베트민군이 대규모 작전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지만 베트민의 지압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의지로 얼마든지 극복 가능한 것이었다. 베트민군은 그들의 근거지에서 500㎞ 이상을 도보로 행군하여야 디엔 비엔 푸에 집결할 수 있었다. 베트민군 병사들은 무기와 배낭, 그리고 15㎏의 쌀부대와 기타 개인장구를 메고 주야로 행군하였다. 프랑스군의 항공기가 출현하면 행군종대는 길옆의 숲속으로 뛰어 들었다. 따라서 주간보다 야간행군이 빨라 주간에는 30㎞ 정도 행군할 수 있었으나 야간에는 50㎞까지 행군할 수 있었다.
물자를 이동시키는 수송부대원들
식사는 주로 주먹밥이었다. 1일 행군이 끝나면 참호를 구축하고 소금을 탄 더운물에 발을 찜질한 후 취침하였다. 군화가 아닌 고물 타이어로 만든 샌달을 신고 있었기 때문에 발에는 상처가 끊이지 않았다. 병사들은 3인조 편성에 의해서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상관과 당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충성만이 그들의 유일한 생존수단이었다. 공산당원은 당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병사는 외세에 대항해서 조국의 독립을 쟁취한다는 열정으로 그들은 무서운 인간기계가 되었다. 500㎞ 이상의 도보행군도 참아낼 수 있었다. 베트민군의 군수지원 문제에서 가장 큰 애로는 쌀의 운반이었다. 디엔 비엔 푸에 공급된 쌀의 대부분은 홍하 델타 지역으로부터 500㎞ 이상을 맨손으로 운반된 것이었다. 각각 15~25㎏의 쌀을 어깨에 짊어지고 수십만 명의 남녀 노무자들이 매일 밤 운반하였다. 공습을 피하기 위하여 낮에는 운반되지 못하였고 밤에 5명당 1개의 등잔불을 밝히고 이동하였다. 비행기 소리가 나면 불은 즉각 꺼버렸다.
동원된 노무자들이 먹는 쌀은 그들이 운반하는 분량을 축내어야 했다. 따라서 목적지에 도착되는 쌀은 그들 운반량의 1/10에 불과하였다. 평균 약 2㎏의 쌀을 디엔 비엔 푸에 보급하기 위해서 그들은 1,000㎞ 이상을 걸어야만 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105㎜, 75㎜, 37㎜ 포와 12.7㎜ 대공기관총 등의 중장비 및 포탄의 이동과 이 포들을 프랑스군에게 관측당하지 않고 디엔 비엔 푸 주변의 산악에 방열하는 것이었다. 이들 각종 포는 디엔 비엔 푸 근처까지는 도로를 이용하여 차량으로 견인되어 이동하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의 근거지로부터 목적지까지 연결되는 도로는 없었다. 기존의 지방도로는 보수되어야 하거나 새로 도로를 개척하여 연결시켜야 했다. 베트민군의 공병부대가 도로개설 임무를 부여받고 불철주야 이 임무를 수행하였다. 공병대는 수만 명의 주변 주민들을 동원하여 새로운 도로를 개척하고 도로를 보수하였다. 비행기 소리가 들리면 작업을 중단하고 은폐하여야 했고 지뢰지대 개척을 위해서 물소 떼를 몇 번이고 통과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개설된 도로를 이용하여 차량으로 견인되어 온 각종 포와 탄약을 이제는 순수한 인간의 힘으로 700여 미터 이상이 되는 고지군을 넘어서 산의 사면까지 이동시키고 은폐, 엄폐를 제공할 수 있는 지하 포상(砲床)을 정교하게 구축해야 했다. 베트민군의 초인적인 노력이 또 시작되었다. 지형에 따라 정교한 포상이 구축되었고 수많은 위장 진지가 구축되었다. 다음은 험한 경사와 계곡을 연하여 개설된 작은 길을 따라 베트민군 병사들은 한 발짝 한 발짝 포를 끌어 올렸다. 이미 우기가 시작되어 길은 진흙탕이 되었고 때로는 가슴까지 진흙 속에 파 묻혔으나 그들은 끈기 있게 포상까지 포를 이동시켰다. 그야말로 처절한 인간의지의 시험장이었다. 이렇게 하여 베트민군은 1954년 3월 10일 공격준비를 완료하였다.
포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작업하는 베트민 공병대
험한 산 위로 대포를 옮기는 베트민
지압의 공격전술은 프랑스군의 화력과 기동타격 능력을 분산시키면서 하나하나의 거점에 병력을 집중하여 압도적인 우세로 점진적으로 각개격파 하는 것이었다. 공격개시 2개월 전에 집결할 수 있었던 베트민군의 공격준비는 철저하였다. 산 전체에 배치된 포들은 프랑스군에 발견당하지 않았고 요새의 주변에 수백 ㎞에 달하는 참호망을 구축하면서 프랑스군 진지에 접근해 갔다. 프랑스군 진지 모형을 만들어 놓고 수많은 예행연습도 하였다. 1954년 3월 13일 야간에 베트민군의 총 공격은 개시되었다. 최초 공격목표는 북동쪽의 베아트리스(Beatrice), 북쪽의 가브리엘(Gabrielle), 북서쪽의 안느 마리(Ann Marie) 진지에 지향되었다. 55일간 계속된 디엔 비엔 푸 공방전이 시작된 것이다.
포병화력의 지원을 받으면서 베트민군은 3월 18일까지 3개 방어진지를 점령하였다. 나바르 장군에게 “산의 사면에 배치된 베트민군의 대포는 3발을 쏘기 전에 우리의 대포로 전부 파괴하여 버릴 것입니다.”라고 큰소리쳤던 프랑스군 포병단장 샤를 피로스(Charles Piroth) 대령은 자살하고 말았다. 베트민군은 2단계 공격준비를 계속하였다. 2단계 공격의 목표는 중앙진지 일대를 공격하여 동쪽과 서쪽의 거점들을 점령함으로써 프랑스군 비행장의 기능을 마비시켜 프랑스군의 보급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베트민군은 주변의 고지로부터 무수하게 갈라진 참호를 굴착해 나가면서 전진해 나갔다. 프랑스군의 격렬한 포화를 견디면서 베트민군 병사들은 인내심과 끈기로 한발 한발 참호를 파 내려갔다.
프랑스군이 그렇게 믿었던 공중지원도 무위였다. 당시 프랑스군의 항공 전력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300여대의 항공기 중 전투기는 80여 대로서 그나마 비행거리 때문에 충분한 지원이 곤란하였고 베트민군의 대공화기는 끊임없이 프랑스군 항공기를 격추시켰다. 프랑스군 지원 항공기 중 48대가 디엔 비엔 푸 상공에서 격추되고 16대는 지상에서 파괴되었으며, 167대가 피해를 입었다. 일주일 가까이 격렬한 공방전이 계속되어 프랑스군은 4개의 방어진지를 제외하고 나머지 진지는 모두 베트민군에게 피탈되었다. 프랑스군의 저항도 대단하였고 베트민군도 2만 명 가까운 손실을 입고 4월 5일 지압은 일단 공격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베트민군도 너무나 엄청난 손실을 입어 내부적으로 병사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병력을 보충하고 전열을 가다듬은 지압은 5월 1일 3단계 총 공격을 개시하여 5월 7일 베트민군 제 308 사단이 마지막 남은 프랑스군 진지를 점령함으로써 디엔 비엔 푸 결전은 베트민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부상자를 포함한 11,000여 명의 프랑스군이 포로가 되었다.
프랑스군이 이 전투에서 패배한 근본원인은 베트민군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하였기 때문이다. 베트민군은 게릴라나 부랑자들을 주워 모은 오합지졸로서 비록 소규모의 게릴라전은 수행할 수 있으나 군사적으로 대규모 정규전은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 데에서 모든 전술적 과오가 기인되었다. 따라서 프랑스군은 베트민군이 4개 사단, 5만여 명의 대병력을 집중하여 공격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하였고 이 때문에 디엔 비엔 푸를 방어상 취약한 지역이 아니라 적에게 압력을 가하는 공세기지로서 운용하려고 한 것이다. 추후 정보기관에서 대규모의 병력이 집중된다는 정보를 제공하였으나 프랑스군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오히려 오합지졸들을 격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베트민군이 군수지원 능력, 중장비 이동능력, 대규모의 정규전 수행능력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강력한 베트민군의 최초공격은 프랑스군을 경악시켰고 베트민군의 강력한 대공화기 때문에 항공지원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프랑스군은 미국에게 항공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군 출신인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이를 신중히 고려한 후 개입을 보류하였다. 베트민군에게는 운명을 건 건곤일척의 대 결전이었다. 베트민군의 승인은 호치민과 지압의 대 결단에 의한 병력집중, 프랑스군의 의표를 찌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창의성, 이를 가능하게 해 준 베트민군의 군기, 인내심 그리고 주민의 자발적인 협조였다. 베트민군의 디엔 비엔 푸 공격 시기도 기가 막힐 정도로 적절했다. 디엔 비엔 푸가 함락된 바로 다음날 제네바에서 인도차이나 문제에 관한 토의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500킬로를 걷고 또 어떻게 높은 고지까지 무거운 군수물자들을 나른 것일까. 베트민군은 그들이 가진 모든 수단을 총 동원하였다. 주 운반수단은 인력으로 그들은 얼마든지 동원가능 하였다. 말, 삼판(Sampan, 하천이나 연안에서 운용하는 목제 평저선), 변형된 자전거(지형에 따라 75㎏이상 운반 가능), 기타 가용한 군용 및 민수차량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이 강구되었다. 그러니까 자전거 부대가 비행기 군수물자 부대를 이겨낸 것이다.
따져보자면 프랑스 군이 간과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날씨의 중요성. 베트남은 위아래로 긴 형태의 나라고 디엔비엔푸 지역은 열대 몬순기후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10월에서 이듬해 3월은 날씨가 좋은데 4월부터 9월까지 1,500mm가 넘는 폭우가 쏟아지는 기후 특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나바르는 벙커로 입구를 틀어막고 수송기로 탄약 및 식량, 의약품 등을 투하하면 되겠지 하고 보급에 대해 낙관적이었지만 현실은 보급을 할 수가 없었다. 악천후야 그렇다하고 어찌어찌 디엔비엔푸까지 날아가더라도 이를 둘러싼 월맹군의 대공포 때문에 화물투하도 제대로 안되고 투하거리까지의 접근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어쨌든 싣고 왔으니 투하하면 그중에 몇 개는 진지에 떨어지겠지 하고 대충 뿌렸는데 대부분 월맹군이 주워 갔다.
더 웃긴 건 프랑스가 월맹군을 얼마나 핫바지로 봤는지 월맹군 포격을 아예 고려도 안했다는 것이다. 월맹군은 반대편 고지에 포를 끌고 와서 프랑스 진지를 포격으로 두들겼고 프랑스가 대응포격을 해보려고 했지만 디엔비엔푸가 상대적으로 저 지형이라 포격이 불가능했다. 자전거 부대가 산꼭대기까지 그들의 포를 나른 것이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4월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폭우시즌이 시작됐다. 이는 그나마 간간이 오던 보급마저도 아예 끊어지게 된 것을 말한다. 아무리 세계최강의 군대라도 보급이 없으면 싸울 수 없는 법. 배고프고 목도 마르고... 폭우가 쏟아진다지만 정작 마실 물이 없다는 게 함정이었다. 우기가 시작되면서 같이 시작된 장티푸스, 이질로 인해 물은 사방에 널려 있었지만, 음용수가 없었던 것. 거기에 우기가 시작되면서 창궐한 모기떼들 때문에 발병하기 시작한 말라리아는 덤이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디엔 비엔 푸 전투의 전말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상상을 초월하는 예측파괴의 전략으로 보 장군은 105mm 곡사포(大砲)를 산위로 끌어 올렸으며 프랑스는 난공부락으로 확신하여 이를 오판했다. 비행기만 믿었던 프랑스와 자전차 짐꾼 3만 명으로 식량. 탄약을 나르고 곡사포를 하루 50m씩 산으로 끌어올려 승리를 이끈 것이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그의 공세적 사고 전환, 중국은 베트남 투혼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 보 구엔 지압은 “우리는 프랑스군과 미군을 정확히 파악했지만, 그들은 베트남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지 못했고 알려고 들지 않았다. 우월한 무기만으로 충분히 이길 것으로 오판했다”고 말했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기가 아닌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아무리 첨단 무기로 무장했더라도 우수한 두뇌가 없으면 다 헛일”이라는 것이다. “자유란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불굴의 의지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다. 더 이상은 미국과 프랑스를 미워하지 않는다. 한국군들이 베트남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고 있지만 역시 미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백성 누구인 줄 알고 백성을 사랑한 지도자이다. 그리고 진정한 힘의 원천이 전략보다 백성에게서 나온다는 애민가였다.
<우리 힘의 원천은 도덕성과 인민의 지지에서 나온다. 인민의 마음만 단결시키면 小國이 大國을 이길 수 있다. 질로 양을 이긴다.>
미국 타임지는 그를 ‘붉은 나폴레옹’이라고 평가했다. 20세기 최고의 명장’으로 불리는 베트남 독립 영웅 보 구엔 지압(武元甲) 장군은 2013년10월에 별세했다. 102세. 그를 모르면 베트남을 모른다고 할 수 있다.
베트민군이 디엔 비엔 푸 요새 내부로 들어가는 임시가교를 건너고 있다. 최후의 날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