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유기택
옛 신남역에서 외
신나지 않았다
“너무 멀리와버렸다”는 주석을 단
“멈춤” 철도 표지판 앞에서 멈추었다
너무 멀리 와버렸다
화살나무 잎 붉은 가을 낮이었다
긴, 가로 의자 같은 생각이
플랫폼 바닥에 길게 누운 제 그림자를
조목조목 뜯어 읽었다
다 읽었다
조금은 더 살아보아야 하지 않겠나
일어섰다
붉은, 끝 고추 같은
고추잠자리 하나 날아간 온통 하늘이
아득하게 새파랬다
그때 당신은
그 작은 고추잠자리를 보지 못했다
다른 곳을 보고 있었는데
알려줄 사이를 순간에 놓친 나는
당신 귓속에 귓말을 불어넣어 주었다
‘하늘빛이 참 곱기도 하지?’
당신은
눈물이 날 것 같다면서도 자꾸 웃었다
눈매가 웃음에 흔들릴 때마다
눈 속에 괸 하늘만 한참씩 찰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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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내리는 정경
가을 새벽엔 나무들도 기침을 하얗게 쏟았다
공중을 몰려다니던 새들 입김은 늦은 안개로 떠돌았다
새들의 잔기침 소리 그대로였다
숲이며 들판이며
가을비 내리는 검은 숲은 창유리처럼 밖에서 흐리고
들판은 저녁 쪽으로 완만하게 기울다 마을의 경계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을 만났다
서로의 인후통을 눈짓으로 나누었다
이틀을 연하여 비가 내리는 동안
오다 말다를 거듭하는 그 잠깐씩의 틈을 비집고
어지럽게 흩어진 짐승 발자국들은 들길을 가로질러
눅눅하고 부드러운 숲의 숨결, 향내 속을 파고들었다
그 가슴팍에 코를 박았다
가늘어지고 있던 빗줄기가 그쳤다
그러고도 어찌 된 영문인지, 한참을
비안개로 젖은 길은, 낮을 넘기고도 잘 마르지 않았다
탈곡을 마치지 못한 벼 포기들이 서 있기를 포기했다
논바닥에 죄다 편히 드러누워버렸다
짧은 가을은 벌써 제 몫의 갈무리를 끝내고 있다
낮 기온이 바람 골을 따라 가파르게 곤두박질하는 동안
일 없는 바깥을 괜히 여러 번 들락거리던
무언가 거슬거슬 마르길 기다리는 동안, 날이 저물었다
잘 마른 것들이 서럽게 그리운
저녁이면, 나른히 퍼지는 푸른 연기가 들판을 건너갔다
유기택
2005년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강원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둥근 집』, 『긴 시』, 『참 먼 말』, 『짱돌』, 『호주머니 속 명랑』, 『사는 게 다 시지』, 『검은 봉다리』 외 전자 시집 『제제 봄이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