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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
사회
전쟁
평화
의식수준
04 에고와 사회
맥락으로서의 사회구조
토론
에고라는 환상, 세상. 영적 작업간의 표면적 갈등에 어떻게 대처해야만 할까요?
영적노력에서
기쁨의 원천은
노력자체에 있는 것이지
성과나 목표달성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모든 움직임에는
내적인 즐거움이 있습니다.
예를들면
진보에 수반되는
내적쾌락이 있지요.
분개가
평화로운 수용으로 바뀌는 것이
진보자체의 보상입니다.
자신과 타인을 보는 시각이
점진적으로 바뀌지요.
이런 일이 생길 때,
사람은 자신의 인생사를
보다 연민어린 이해를 바탕으로
재맥락화 할 수 있습니다.
에고라는 신념체계가 삶의 고통과 괴로움의 근원이라고 할때 그것에 대해 어떻게 연민을 일으켜야 합니까?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일정한 의식수준에서 출발하는데,
의식수준은
사람이 물려받은 카르마의
유산전체를 속기한 것입니다.
자신이
그것을 요구했던
의식적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사람은 이제 동물의 육체와
그리고 추상적인 것은 물론
융통성이 없는 마음과 대면하지요.
게다가 모든 조건의 세트가 동시에 제공되는데, 왜냐하면 사람은 육체는 물론 감정체를 물려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역사적으로 진화해온 자체의 고유한 프로그램들을 가지고 있는 복잡한 문화속의 가족과 사회생활을 복잡다단함속으로 통합되어야 하지요.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
전체를 바라볼때,
사람은 전체로서의 사회뿐 아니라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들에 대해서도
연민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개인은
엄청난 복잡성 뿐 아니라
어떤 의식에 직면했는데,
개인의 의식은
스며드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 장들에
부지불식간에 영향을 받지만
그러한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 복잡성 안에서
개인은
이제 생존에 적응해야 하고
여러수준의 복잡한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개인은 또한
단 한차례의 심각한 실수가
삶에 재앙이 될 수 있을뿐 아니라
육체의 죽음조차 초래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지요.
그것은 마치
원하든 원치않든 간에
생존하기 위해서
인간 존재의 지뢰밭을 걸어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조건과는 별도로
길잡이 역할을 하는 자기감과
정체감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형성된 자기 이미지는
모든 의사결정의 중심이 되지요.
이 자기는
그 다음 모든 목표와
이상을 뭉뚱그려
도덕주의적 위치성으로 통합시킵니다.
어느 틈엔가
자기의 한 측면이 떨어져 나가
내면의 적, 가해자/공격자,
'죄책감과 후회와 두려움의 저자,
자신에 대한 무자비한 판관이 됩니다.
가장 성능이 뛰어난 컴퓨터라 할지라도
한 인간이 감당하는 것과
맞먹는 과제 앞에서는
무력함을 드러낼 것입니다.
이러한
관찰 결과를
확실한 것으로 만드는
한가지 유력한 사실은
인간은
컴퓨터에 의해 입력될수 있는 의식적 데이터뿐 아니라,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무의식적 데이터 및
에너지 장들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과 집단의
미지의 카르마적 경향과도 상대해야 하지요.
하지만
어떤 컴퓨터라도
가장 의미심장한 데이터의
주요 부분이 없는 상태에서는
프로그램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엄청난 과제를 떠맡고 있습니다.
과제를 완수하는데 있어
두뇌의 구조와 기능은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두뇌에는
보상과 쾌락의 회로가 내장되어 있고,
두뇌의 소프트웨어는 순진하며
쉽게 프로그램될 수 있습니다.
복잡한 데이터를 다루기 위해
마음은
종류와 논리적 알고리즘에 따라
데이터를 꾸러미로 묶는
지름길을 이용합니다.
따라서
마음은
모든 입력에 대해
그것이 다른 모든 데이터와 다른지 비슷한지를
즉각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게다가
이 모든 믿기 힘든 복잡성은
마음과 마음의 소프트웨어를 통해
처리될 뿐 아니라
또한 압도적으로 경험되기까지 합니다.
경험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는
그것을 분석할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경험은
이미 주어진 것이고
꾸러미에 포함됩니다.
마음은
이것을 자동적으로 편집하여
기억의 데이터뱅크에 보관하지요.
데이터는
형태뿐 아니라
감정의 미세한 농도차에 따라
철해집니다.
감정은
해당정보가 어디에 보관될 것인지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일부 데이터는
다시 불러올 수 있지만
상당부분은 이제 묻혀버려
의식적 회상이 불가능하지요.
예를들면
일부 데이터는
"고통스러움-기억하지 말 것" 파일에 보관됩니다.
그러나
파일속에 들어간 채
지금은 검색불가능한
이 고통데이터의 일부는
자학, 고통스러운 죄책감의 자기고문, 후회,
심지어는 자살에 이용할 수 있는 실탄으로
저장됩니다.
어떤 사건이라도
자학의 방아쇠를 당길 수 있고
자기 처벌의 일제 사격을
유발할 수 있지요.
에고가
자기보호를 위해 사용하는
한가지 기제는
그 고통스러운 데이터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그것을 세상과 타인에게
투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는
사실상 자기내부에서 생겨난
가증스러운 적들이 거주하게 되고
이제 에고는
내부가 아닌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두려워합니다.
피해망상은
에고를 갖는데
따르는 반주입니다.
인간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요약해보면
인간의 제한된 자원으로서는
생존, 행복, 성공이
부서지기 쉽다는 사실이
명백해집니다.
막대한 수의 사람이
생존의 과제조차 완수하지 못하고 있고,
수백만의 사람이
숱한 함정과 재난으로 인해 사망하지요.
그리고
사람은
개인적인 것이 아닌
전쟁과 역병, 기아,
혹은 사고로 나타나는
사회의 에고 문제들에 휩쓸릴 수 있습니다.
단 한번의 실수도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다면 그러한 조건에서 어떻게 생존이 가능할까요?
사실
사적인 자기는
혼자서는
내외적으로 복잡한 그런 환경에서
번영을 누리기는 커녕
생존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묘사한 것은
사실상 형상의 세계인데,
하지만 인간은 나약한 에고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지탱하는 것은
영의 비선형적인 차원이 힘이니까요.
생존이 가능한 것은
영의 월등한 안내덕분입니다.
물론 에고는
정반대로 주장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영은
엔진의 조속기와
같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엔진은
망가질때까지 회전할 것입니다.
의식의 형태를 취한 영은
매 순간 데이터 무더기 전체를 통합시키는데,
거기서 출력되는 것이
시시각각의 주관적 삶의 경험입니다.
영은
진실과 거짓을 식별할 능력이 없는
에고의 주된 약점을
상쇄시켜줍니다.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사람의 의식수준입니까?
삶의 주관적 경험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
의식수준에 크게 영향을 받는데,
그것은 선택지로 나타나는
선택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삶의 노력이
만족스럽거나 즐거운지 여부는
자신의 위치성에 달려있으며
이 위치성이
상황을 맥락화하는 방식을 결정하지요.
의식 척도상의 수준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어떤 선택이 가능한지 알 수 있고,
이러한 가능성은
주어진 의식수준의 한계 내에서
우세하다는 걸 알수 있습니다.
쾌락(기쁨)은
그 수준에 특유한 목표를 달성한 결과일 것이고,
부정적 감정은
그렇게 하는데 실패한 결과일 것입니다.
성격은
복잡하고 동일시를 포함하며
때로는 제2의 나로 불리며
갈등을 빚기도 하는
하위 성격들 또한 포함합니다.
하위 성격들은
서로 다른 목표를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하위 성격들은
삶의 환경이나 연령대에 따라
의식적 출현이 엇갈릴 수도 있지요.
영적목표는
복잡한 에고 조직을 종합하고
그것에 균형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성은 어떤 역할을 맡습니까?
지성을 통해
위치성은 정제되어
추상적 상징과 언어로 표현됩니다.
이 모든 것은 논리적이고
선형적인 합리성에 대한
일반적 요구속에 포섭되지요.
합리성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운용상으로 유용한 반면
또한 지성을 조작하여
어떠한 위치성이라도
합리화할 수 있다는 측면을 반영합니다.
하지만
지성은
형상을 다룰 뿐 아니라
영적가치를
자체의 정신작용속에
통폐합 시킬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은
사람이 의식척도를 따라
진화해가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일어나지요.
지성은
숨은 동기들에서 자유로울 때
세련된 추상적 개념화 작용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성의 기본적 결함은 여전하여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고
진정으로 맥락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지성은
자신의 위치성과 충돌할만한 데이터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요.
게다가
지성은
결과를 원인으로 오해하는데,
이것은 지성의 주된 결함중의 하나입니다.
지성은
선형적 영역과
비선형적 영역간의 차이를 이해하고
맥락화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또한
지성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실제로 실행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복잡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지요.
사회에는
표면상으로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는 것 같지만
임계요소 분석을 이용할 때,
공통된 뿌리를 드러내는 일이 많습니다.
예를들어
우리는 해결할 수 없는
사회문제의 목록을 작성할 수 있는데,
그 모든 것은
세상의 갖가지 원인에서
비롯된다고 여겨집니다.
예를들면 빈곤, 붐비는 고속도로, 대량이민, 석유 및 전력소비의 증가, 환경파괴, 힘이 부치는 정부기관, 열대우림의 점진적 파괴, CO2 과다배출, 과중한 조세, 범죄와 빈곤이 만연하는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심지, 스모그와 대기오염, 지구 온난화, 포화상태에 이른 쓰레기 매립장, 수용능력이 한계에 달한 법원과 교도소, 붐비는 응급실과 과다한 의료비용, 과다한 사회보장비용, 재정적자에 신음하는 우편배달 서비스, 쓰레기 하치장의 부족, 날로 고갈되는 야생생물 및 자연자원, 멸종위기에 처한 생물종, 해양오염, 사회복지 및 대민봉사분야의 과중한 업무량,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아동 보호기관, 치솟는 사회복지 및 사회보장비용, 모든 기관의 민원부서 앞에 길게 늘어선 줄, 수퍼마켓 계산대 앞의 긴줄, 교통체증, 점점 높아지는 소음공해, 모든 수준에서의 사생활침해, 원자재 부족, 독성폐기물 처리장 부족, 에너지원에 대한 과다한 세금, 하천과 호수오염, 전염병, AIDS, 기아에 시달리는 국가와 대륙들.
이 모든 것을
나열하기만 해도
이른바 다양한 문제라는 것이
모두 하나의 동일한 근원에서 비롯된다는
각성이 떠오릅니다.
그것은
매우 단순하고 자명하지만 주
목받지 못한 '인구과잉 현상'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해외원조가
출산율의 급상승과 기본적 빈곤수준의 악화로 귀결되는
모순을 보게됩니다.
이때
명백해진 인구과잉의 사회적 부담은
무절제한 이민정책이
과연 현명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민정책에 대해서는 미국민의 70%가 반대하지만, 엘리트 정책입안가에들의 80%가 찬성하고 있습니다.
지난 몇세기 동안
세계 인구의 의식수준은
190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 수준에서 인구과잉은
뒤따라 일어난 부정성의 불가피한 귀결로 인해
억제되었지요.
예를들면
세계주요 지역에서 세대 전체가 쓸려나갔고
치명적인 전염병이 돌아서
인구의 25%가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마오쩌뚱의 사회개혁 실험하나로 인해 1차세계 대전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굶어죽었고 대량학살로 수백만의 사람이 죽어나갔습니다). 로마시대에 평균 수명은 40세였지요.
이와 대조적으로
극히 최근에 인류의 의식수준은
부정성의 190에서
긍정성의 207로 뛰어올랐습니다.
분쟁지역이 아직 남아있긴 하지만
문명화된 세계는
더이상 대량 학살이 일어날 만한 분위기는 아닙니다.
냉전은 끝났고
전쟁은 국지적 현상이 되었으며,
유럽 각국의 민주주의적 소동은
점점 줄다가 아주 그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의식수준에서
인구증가에 제동을 건 대량파괴는 감소했고
세계 인구와 평균수명은 함께 치솟았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은
심각한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지요.
세계인구가 2배가 되었다가
그 다음에 다시 2배가 될때,
배로 느는데 걸리는 시간은
갈수록 짧아지게 됩니다.
그것은
과실파리가 됐건,
토끼가 됐건 혹은
사람이 됐건
폐쇄된 생물집단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대량학살이 사라진 안전사회에서
매 세대마다 인구증가 현상이
악화되지요.
늘어난 인구는
자동적으로 많은 영토, 더 많은 식량,
더 많은 서비스를 요구하고
대도시의 팽창은 교외의 팽창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자연환경에서
더 많은 서식지가 파괴된다는 걸
의미합니다.
에고와 사회의 정치구조
토론
우리는 지성이 어떻게 오류에 빠지는지 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현사회는 물론 최근의 역사에서 예를들수 있습니다.
지적 위치성들은
일정한 지식인 집단내에서
지지를 얻어 냅니다.
공상적 사회개혁안들이
부침을 거듭했는데,
그것은 1930년대에 대단히 흔했지요.
당시에 유행했던 한가지 안은 화폐를 없애고 그 대신 노동시간 증명서를 도입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과학기술 전문가들이 지배하는 기술국가를 의미했습니다. 다양한 사회주의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주의와 이론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는데, 그중 공산주의는 여전히 건재합니다. 고립주의와 평화주의가 유행했습니다.
에스페란토어가 새로운 세계어로 떠들썩하게 선전되었지요. 미국에서는 똑같은 집단이 내켜하지 않는 대중에게 미터법을 강요하려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섭씨나 킬로미터에 만족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던져버리고 익숙하고 편안한 화씨와 마일로 되돌아갔지요.
마오쩌뚱의 이상주의적 집단농장 정책은 역사상 최대의 기근을 초해했고, 3천만명이 사망했습니다. 사람들은 집단농장에서는 자기소유의 농장에서처럼 일할 의욕을 내지 않습니다.
일정기간 동안
엘리트 집단은
공산주의 극좌파와 밀월기를 보냈습니다.
이는 반국가적 선통과 반역행위로까지 귀결되었는데, 일부과학자들은 러시아의 첩자가 되어 로스 알라모스나 맨하탄 프로젝트같은 원자폭탄의 기밀을 KGB에게 건네주었고, 이러한 첩보행위는 냉전기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러시아는 이러한 정보덕분에 인류문명 전체를 파괴할 수도 있는 수퍼원폭의 개발에 착수할 수 있었습니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극좌의 정치적 위치는
극우보다 더 위험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극좌는 양의 탈을 쓰고
자신의 의도를 감춘 채
경건한 수사로
순진한 사람들을 유혹하여
트로이 목마의 문을 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목마에서는
억압, 전쟁, 죽음의 낮은 힘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릇된 정치적 위치성의 기본적 결함은
그것이 맥락을 무시할 뿐 아니라
내용을 왜곡한다는 것입니다.
내용이
아무리 이상주의적으로 보인다 해도
다른 맥락하에서는
거짓이 되지요.
맥락을 무시할 때
이상주의적 관념은
그것이 교정하고자 했던 원래의 문제보다
더욱 파괴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상주의는
내용만이 아니라 맥락을 포함하는 지혜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합니다.
광신주의는
청년들과 감수성이 예민한 이들을
사로잡는 것을 목표로 삼지요.
역사적으로 혁명정권은
정치적 혹은 군사적 권력을 획득하자마자
교육받은 계층, 재능있는 사람들,
전문가 집단과 지혜로운 이들을
살해합니다.
정치적 오류를 찾아내
바로잡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은 나쁜 정치는 나쁜 법으로 귀결되며
그것은 시민들에게 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사회의 정치적 오류는
사법부에서 궤변에 가까운 비난을 수용하고
개인 책임을 악마로 몰린
이른바 외적 원인에 전가하는 행위를
수용하는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들면 무한정 늘어나는 불법 행위법, 피해자들의 집단소송, 변호사 협회에서 입법부를 통제하는 현상등이 그것이지요. 미국의 일부지역에서는 그러한 현상이 극단적으로 치달은 나머지 합법적 강탈에 이르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엉뚱한 곳에 투사된 비난은 대다수의 사회적 왜곡에 대한 근거가 되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전쟁입니다.
국가 정체성에는 어떤 가치가 있습니까?
국가 정체성의 그늘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민족주의지만
긍정적인 면은 애국적 협동과
형제애 정신입니다.
이는
2차대전시기 연합군의 상호작용에서도 드러나는데,
이때 각국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같은 상황에 처한 다른 나라들과 연결된
중요한 공동의 정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상호 의존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단결되었을 때
전체의 목표에 기여합니다.
애국심은
단순히 자신의 조국을 향한 사랑이며
그것을 민족주의와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에고는 극단주의를 강화하는 듯합니다.
과도함은
불균형의 결과입니다.
극좌(190)와 극우(90)를 망라한 정치적 극단은
현저하게 온전치 못하고
거짓이며 파괴적이지요.
극좌의 정치적 위치는
신을 부정하고 내용을 왜곡하며
맥락을 무시하고 법의 힘과 소송을 걸겠다는
협박에 의지한다는 점에서
"루시퍼'를 상징합니다.
또한 극좌는
언론자유의 진짜 의미를
왜곡하고 악용하지요.
그 다음에는
궤변과 주지화된 왜곡 및 불균형한 지각에 의지하여
사회적 파괴에 대한 변증자이자
옹호자가 됩니다.
극좌는
힘을 위한 힘을 추구합니다.
극우의 위치는 사탄이며
도덕적 타락, 폭력, 범죄, 전쟁,
학살의 낮은 힘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두 부정적인 극단의 결합은
사회전체를 파괴시킬 수도 있는데,
그것은 실상에 대한 루시퍼적 왜곡의 연쇄가
사탄의 세력에 문을 열기 때문이지요.
극좌와 극우의 양 극단은
실천적으로 전체주의적인데,
이 두세력은
인간정신이 진실과 거짓을 식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추종자를 끌어모읍니다.
역사는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옮긴 예들을
무수히 보여줍니다.
중국 군벌의 억압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마우쩌둥의 억압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러시아 황제들의 잔학성은 스탈린의 잔학성으로 대체되었을 뿐입니다.
대중은
그 순진함으로 인해
번지르한 수사의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마지막 극단주의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대사탄으로 악마화하고
그럼으로써 세계를 서로 싸우는 파벌들로
다시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붓다는
중도의 지혜를 찬양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실용적인 위치는
바로 중용입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활동가들이 끝없이 사회적 갈등과 분쟁을 일으키는 듯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엘리트주의에 빠져있고
180으로 측정됩니다.
그것은
자부심과 허영심이라는 자만의 수준이지요.
역시 오류는 맥락을 무시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들은
평등주의를 표방하면서
모순되게도 우월한 태도를 취하고
대단히 도덕적인 척합니다.
그리고
낭만적인 이상주의로써
타인을 지배하는 권력과 통제력을
손에 넣으려 하지요.
그들은
정치적 범주를 지나치게 강조하는데,
그 때문에 인간 현실전체를 무시하고
삶의 정치적 측면이
인간 삶의 여러 성질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과
그것이 생존이나 정서적 행복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지 못합니다.
이는
극우는 물론 극좌의 정치적 위치의 특징인데,
이들은 똑같이 실천적으로 전체주의적이고
소수가 다수를 지배합니다.
의심스러운 정치적 위치들은
좋은 역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예를들면 과거에 정신질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의 진실은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185)라는 영화에서 엄청나게 왜곡되었지요. 그 결과 엘리트주의자들이 국가의 정신 보건시스템 전체를 해체시켰는데, 솔직히 말해서 그것은 당시 아주 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요즘 정신질환자들은
길거리를 방황하거나
감옥을 채우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위치의 장기적 결과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재앙으로 나타나는 일이 많습니다.
예를들면 현재의 대통령 직속 정신보건 위원회의 보고에 따르면 정신 보건시스템 전체는 이렇습니다. '아수라장이다. 즉 무능하고 통합돼있지 않으며 비 효율적이고 일관성이 결여돼있고, 파편화돼 있으며 실망스럽고 기능장애 상태이다'.
이는
좋은 의도에서 출발한
다수의 제도가 중복되기 때문인데,
이러한 제도는
매년 적어도 800억 달러를 낭비하면서
정신질환자의 절반이상을 치료받지 못한 상태로
방치해두고 있다.
그 어떤 사회개혁 프로그램이든
그것을 실행했을 때의 사회적 귀결을
사전에 예측할 수 있습니다.
200이하로 측정되면
해로울 것입니다.
20세기 전반
미국의 전통적 교실은
405로 측정되었습니다.
정치적 위치성들이 관철되고
교원노조(202)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요즘 평균적 교실은 285로 측정됩니다.
수업태도의 악화, 권위의 경시,
교사들에 대한 폭력에는
엄청난 퇴보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국제적 사안에서도
외교적 위치를 측정함으로써
동일한 사전예측의 이익을 얻을 수있습니다.
그것은
외국 정부들에 대한 상담과정에서 이용된 바 있고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일체의 위치변동에 대해
예상되는 반응을 분석하는 것은 가능하고
그래서 갈등이나 심지어
큰 재난조차 막을 수있습니다.
세계 여러지역에서
미국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받고 있는데,
역사적 분석에 따르면
그것은 사전 예측할 수 있었고
따라서 예방할 수도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자극은
아무 생각없이
계속됩니다.
우월성을 뽑내는 태도는
190으로 측정되고
따라서
적대적이며
적을 만들어냅니다.
순진한 위치는
대부분 학계에서 비롯되는데,
학계는 전통적으로 상아탑속에 고립되어 있고
인간 삶의 현실(즉 맥락)에는
노출되어있지 않습니다.
학계에서는
그러한 경험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균형을 잃은 통계적 연구를 이용하는 일이 많은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결함을 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통계적 연구에는
맥락, 비선형적 영역, 지혜와 같은
가장 중요한 인간적 요소들이 빠져 있으니까요.
연구결과는
그 다음 균형을 잃은 방식으로
대중에게 제출되고
그래서 한번의 소동이 지나가면
다시 또 다른 소동이 벌어집니다.
학계에는
정치적 편향이
극단적으로 심합니다.
아이비리그 대학교수의 94%가
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고작 6%만이 다소라도 보수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보수적인 학생단체들은
학생회에서 사실상 제외됩니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실제로는 그 명칭의 진실성을 부정하고 있지요.
다시 말하면
자유주의는
사실 반동적이고 배타적입니다.
그것은 은밀히
귀족주의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불균형을 나타내는 대중적 소동이 쉼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겨우 천만명에 한명꼴로 걸리는 병에 대해서도
공황상태에 빠집니다.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욕조에서 사망합니다.
지난 세월동안
예전에 독기로 명명되었던 것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밤공기, 스트레스, 외풍, 병소 감염, 세균, 먼지 ,악마, 나쁜 공기, 화학물질, 영양부족, 불결한 위생, 일조량 부족, 양이온, 독가스, 곰팡이 등
모든 대도시의 대기오염은
하루에 담배 두갑을 피우는 것과
맞먹는 효과를 내고
암발생율을 상당히 높은 비율로
상승시키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자신의 자동차에서 나오는 배기가스가
시가를 피울때보다
더 많은 탄화수소와 유독가스를 방출합니다.
밀리는 도로안에서
차안에 앉아있는 동안 흡수되는 독소의 양이
복도로 밀려나온 수위의 파이프 연기에서 흡수되는 양보다
더 많습니다.
질병의 유행은
그것이 대중적으로 얻은 명성과
악마로 몰린 산업분야의
매력적인 풍부한 재력을 반영합니다.
두려움은
마음이 두려운 생각을 품고,
그것에 에너지를 불어넣을 때
나타나는 경향이 있지요.
이것은
면역계를 억제하는 효과를 내는데,
왜냐하면 두려움은
경락과 자율신경계통에
기능장애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만성적인 기능장애는
실제의 질환이나 기능부전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두려움의 확산은
결국 인간에게 섬유근육염, 과민성 장증후군, 만성피로증후군,
환경병, 신경쇠약 등
다양한 형태의 건강염려증을
일으킵니다.
사람의 마음은
선천적으로 무구하고 무방비 상태이며,
암시에 걸리기 쉽고
쉽게 프로그램됩니다.
이는
노세보 효과로 명명되었는데
노세보 효과는 미국 보건재단과 같은 연구소의
연구주제가 되고있습니다.
참고) 노세보 효과 : 어떤 것이 해롭다는 것을 암시 혹은 믿음으로 인해 부정적인 효과가 야기되는 현상. 예를들면 실험실에서 사람들에게 무해한 물질을 먹인 뒤 이 물질이 구토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하면 실제로 구토하는 사람이 나온다.
부정적 내용의 의학정보가 널리 조명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의학정보라는 것은
대부분 왜곡되어 있으며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숨은 동기를 반영할 뿐입니다.
그것은
사리를 추구하는 위치성이지만
순진한 대중은
그것이 객관적 과학적 보고를 나타낸다고
믿습니다.
이보다
더 진실과 거리가 먼 것은 없지요.
이른바
과학적 진술이라는 것은
모두 어떤 위치성에 대한
설명을 나타냅니다.
데이터는
선별되는데
보다 중요한 것으로
이야기의 일부만이 제시되고
보고서의 영향력을 바꿀 만한 사실은
누락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불균형합니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많은 그릇된 임상연구가
학술지에 발표되는데,
오류는
맥락의 영향력과 효과를
무시하는데서 생깁니다.
이것은
우리의 연구는 물론이고
임상경험을 통해서도 분명히 입증되는데,
우리의 연구에 따르면 조
사자의 편견과 의식수준이
연구하고 있는 요인들보다
표면적인 결과에
더욱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고
치료의 부작용을 강조하는 많은 의사는
의식수준이 높고 따라서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는 의사에 비해
부작용의 발생빈도수가
더욱 높아지게 되지요.
어떤 경우에는
치료의 이로운 효과보다는
부정적 맥락의 악영향이
결과에 사실상 더욱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근육테스트 연구를 이용하여 연구 프로젝트가 시작되기도 전에 그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두가지 큰 요인때문이지요.
1) 맥락이 내용보다 더욱 강력한 일이 자주 있습니다
2) 양자 잠재성의 실상에서 시간은 초월되고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는 연쇄적이지 않고 공존합니다.
그래서 미래가 현재보다 먼저 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독기가 병이나 증상을 낳지 않습니까?
옳습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앞서 언급한 질환의 대다수가
최면상태에서는 사라집니다.
그것은
정신분석학에서는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지요.
예를들면
어느 정신분석의 환자는
종이 장미에 대한 반응으로
천식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모순되게도
그 환자는 최면상태에서
진짜 장미에 대해서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요.
이와같은 발견이
정신 신체의학 시대의 막을 열었습니다.
정신 신체의학에서는
억압된 갈등이 증상 및 질환과
연결된다고 봅니다.
시카고 대학 정신분석학 연구소는
정신 신체의학 분야의 선두를 달렸고,
결국 정신 신체의학학회가
탄생했습니다.
유명한 저술가 루이스 헤이는
영적/철학적/심리적 메커니즘을
증상 및 증상의 무의식적 기초와 결부시킨 연구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지요.
그 다음에
정신과 의사 존 다이어몬드는
태도를 다양한 장기 및 경락과 결부시켰고,
근육테스트는 조사도구가 되었습니다.
충분히 검증된
다중 성격장애의 사례에서도
또 다른 흥미로운 관찰이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여러 성격중에서
단 하나의 성격에만
병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의식과 육체의 강력한 상호관련을 강조하는데,
마치 의식수준과 사회병리사이에
선천적인 관련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불균형의 유일한 결과가 극단주의 입니까?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맥락을 무시하는
어떤 위치성에 기인하는
부정으로부터 일어납니다.
가설적인 것은
실재를 기반으로 하지 않으며
그것은 일상적 인간 삶이
아주 다르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추상입니다.
왜냐하면
추상이란
이상화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자식을 둔 어머니들에게
집안에 신체 건강한 남자가 없을 경우에 한해
생활보호를 허락한다는 규정을 가진
복지국가가 출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이때문에
아버지들이 자녀를 두고
집을 떠나는 결과가 초래되었지요.
아이들은 기초생활 지원금이 아이의 수가 몇이냐에 따라 1인당 얼마씩 계산되어 나오는 현실에서 기초 생활 지원의 역할을 맡고 줄줄이 태어났습니다. 여자와 아이들의 생활을 위해서 남자는 그저 가정을 떠나기만하면 되었습니다.
어떤 가설적 사례의
--할수도 있었다 때문에
온 사회가 히스테리를 일으킵니다.
대중이
언론매체의 균형을 잃은 정보를 접하게 되면
그 다음에 통계상의 변화로서
'노세보' 효과가 표면에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암시에 걸리기 쉽고
두려움에 쉽게 프로그램됩니다.
폐경 후에
여성 호르몬을 복용하는 여성들과
그렇지 않은 여성들의 암발생률 보고서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
그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그러면 사회의 한 부분의 본성은 그 부문의 의식수준을 측정하는 것만으로 진단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수온 측정이 이름표 다는 일이 아닌 것처럼 더이상 이름표를 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인구의 측정수준은
그 집단의 사회문제의 본성과
상관있습니다.
증오와 전쟁은
오늘날의 세계에서
특정 지역의 풍토병이지요.
그곳 사람들은
민족주의, 종교 혹은
전통의 깃발아래 모여있습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이른바 전통이라는 것이
결국에는 죽음, 노예화, 불구를 낳습니다.
보다 세련된 사회에서
부정성과 폭력은
고의로 왜곡하는 궤변을 통해 옹호되는데,
예를들면
대중매체에서는
'우리는 대중의 여론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우리는 여론을 반영할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타락한 행위에 영합하는 구실은
그것이 수지가 맞는다거나
혹은 언론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풍토적 문제의 원인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간단한 근육 테스트로 조사해보면
그러한 문제는
주민들의 지배적 의식수준의 반영일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다른
외적 원인은 없지요.
에고의 한계가 정치화될 때
사회적 후유증이 뒤따르는데,
그 엄청난 비용은
흔히 대중이 치릅니다.
전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쟁의 기본 메커니즘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금언과 일치하지요.
즉
루시퍼가 열어놓은 문으로
사탄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정치 이데올로기는
원시적 격정이 분출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줍니다.
펜은 칼보다 더 강합니다. 당파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는 지지를 얻기 위해 수사, 선동, 선전가의 설득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개종시킵니다. 인기있는 구호는 대개가 무슨 다양한 권리를 주장하거나 혹은 무슨 부당행위를 바로잡자는 내용입니다. 이런 부당행위의 피해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감정주의를 자극하고 의분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줄지어 행진합니다. 그 다음에는 무고한 피해자의 처지가 이른바 악행을 저지른 이들을 고발하고 비난하고 악마로 몰기 위해 이용되는데, 그 다음에는 아무런 죄책감없이 가해자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져 그들은 유린당하고 처벌받아 마땅한 존재가 됩니다.
정치 이데올로기의 왜곡은 전통적으로 힘, 통제, 위신, 이득을 추구하는 루시퍼 에너지로 묘사된 것에서 비롯됩니다. 루시퍼 에너지는 평화주의, 평화운동, 정치적 이상주의와 같은 "양의 탈'을 쓰고 숨어있는 일이 많습니다. 이들은 늑대무리와 마찬가지로 목표로 삼은 먹이의 약점이 드러나기를 기다리지요.
먹이가 가진 자산이 많을수록
악마로 모는 작업은
더욱 요란해집니다.
그래서
재정적, 정치적 권자에 올라앉은
대기업, 산업, 혹은 정부를 포함하는 여러기관들이
인기있는 목표물이 됩니다.
설정은
멜로드라마와 같습니다.
여기서
빛나는 갑옷을 입은 기사라는 이들이
악행을 저지른 자의 손에서
피해자를 구해내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이득과 위신, 권력,
큰 부를 챙깁니다
트로이 목마와 마찬가지로
전쟁에 이르는 문을 여는 것은
정치적으로 순진한 정당화와 설득인데,
이를 통해
목마속에 숨어있던
죽음과 파괴라는
사탄 에너지가 풀려납니다.
그래서
전쟁 예방은
전쟁의 이데올로기적 전주곡을
조기에 탐지해 내는 일에 달려있는데,
그 방법은
전쟁이데올로기에
내재된 거짓전제(데이터에 대한 균형을 잃은 왜곡과 맥락의 무시)를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전쟁을 예방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전쟁의 전주곡은
눈에 대단히 잘띕니다.
그것은 1차대전 이전의 정치 에데올로기, 예컨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 레닌의 정치적 저작과 연설문, 히틀러의 나의 투쟁, 마오쩌둥의 붉은 소책자 등을 생각하면 쉽습니다. 나치의 유럽점령은 레벤스라움(생활공간)이라는 카를 하우스호퍼 교수가 제시한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으로 정당화되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우생학의 철학과 결합되어 대량학살을 정당화했지요. 정치적 왜곡은 대개 맥락과 종류의 왜곡이나 혹은 시간이나 조건상의 자리바꿈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를들면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한때는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 나중에는 해롭거나 받아들일 수 없은 것으로 여겨져 교정을 요구받게 됩니다. 현시대의 시민들이 과거시절에 끼친 해로 지금 소급해서 여겨지는 일들에 대해 재정적 혹은 군사적 배상의 형태로 보상할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과거 어떤 조건의 실제적 귀결로 인해
괴로움을 겪고 있다고 상상하는 한,
현재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보다 원시적인 문명의 과거의 무지와
실수에 대해 배상받을 자격이 있다고 보는
변호가능한 견해가 성립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불의는
과거시대 어디서든
찾아낼 수 있습니다.
바로잡기에 대한 요구에서 무시되는 것은
지금의 후손세대는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진 엄청나고 급속한 사회발전으로 인해
현재 살아있는 모든 시민에게 발생한 이익으로
이미 크게 보상받았다는 것입니다.
무수한 인명을 앗아간 숱한 질병이
이제는 사라졌거나 치료될 수있다는 사실 및
과학기술의 혜택, 현대적 발명품,
노동시간의 감소, 평등권의 진보,
주민의 일반적 풍요 등은 주목할만 하지요.
오늘날 가장 가난한 시민조차도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살았던
가장 부유한 계급에게도 가능하지 않았던
편리를 누리고 있습니다.
보다 균형잡힌 시각을 갖는다면
어떤 인간조건에 대해서도
대비가 되어 있는
오늘날의 세계에 살아있는 것에
감사할 것입니다.
과거의 지배자들은
지금의 가장 빈곤한 계층조차
현대의 사회적 안전망안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질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집단에고의 투사인 사회는
학습 곡선상에 있지요.
대중매체와 법원 혹은
여론을 포위하고 있는 일부집단이
새로운 불만거리를 끄집어 낼때마다
사회는 끊임없이 혼란에 빠집니다.
일단 그 패러다임이
유효한 것으로 인정되면
그것은 사회 전 부문의 무한한 요구의 분출에
문을 여는 격이 되지요.
고유한 결함은
인과관계라는 개념에 의존합니다.
인과관계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등장하는
무한히 순환하는
대하소설의 막을 여는 주문,
열려라 참께이지요.
이 대하소설에서 주인공들은 덩달아 역할을 맞바꿉니다. 끝없는 음모를 부추기는 요인들은 비난과 탐욕, 그리고 인과관계와 보상개념(이것은 쉽게 속아 넘어가는 판사와 배심원, 그리고 대중의 감성에 강한 인상을 줍니다)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모든 사람이 고발당하거나
비난의 표적이 되기 쉬운 소송하기 좋아하는 사회에서
살아갑니다.
사람은
더이상 이성, 논리, 균형으로
보호받지 못합니다.
사회는 일차적으로 의식수준들의 집단적 상호작용과 표현을 나타냅니다.
잘 표현해주셨습니다.
대부분의 어려움은
개인의 책임을 수용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예를들어
누가 지나치게 과식하면
그것은 식당의 잘못입니다.
이것은
에고가 사회의 다른 부문을 원인으로 보고
비난을 투사한다는 의미이지요.
이러한 성향은
사회조직을 약화시키고
그릇된 치유책으로 유도하는데,
그 다음에 그 치유책은
논란과 갈등을 더욱 증폭시킵니다.
그것은
과정 자체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개인의 책임을 수용하기보다
핑계를 대려는 이러한 성향은
점점 커지는 사회문제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지금 주목받고 그 효과가 연구되어
언론매체에 보도되고 있습니다.
앞의 저자들은
타인에게 비난을 투사하기 위해 핑계를 대는 것이
도덕과 사회를 약화시키고
사회는 물론 개인에게도
파괴적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우리는
근육테스트 연구를 통해
비난에 의존하는 것이
의식수준의 중대한 저하와
힘의 상실로 귀착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책임전가는 또한
증오와 분개를 낳으며
이는 계급갈등과 전쟁은 물론
범죄에 기름을 끼얹습니다.
그래서 12단계 영성 그룹의 기본 공리의 지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됩니다.
'의분(정당한 분노)과 같은
그런 것은 없습니다"
합법적 사회개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힘(power)은
온전성에서
그리고 자신의 행위와
선택의 결정의 귀결에 대한 책임을
수용하는데서 나옵니다.
모든 선택에는
고유한 위험이 따르며
그렇지 않은 척하는 것은
온전치 않을 뿐더러
이득을 위해 정직하지 않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한 위치성의 온전성은
측정가능한 수준들을 통해 반영되는데,
이 수준들은 동기와 의도를 가리킵니다.
사회적 불의는
온전하게 제기될 때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되지요.
만약 쟁점들이
고의로 왜곡된다면
이는 바로잡아야 하는
또 다른 불의로 이어질 뿐이고
그 순환은 끝이 없습니다.
늑대는
양의 탈을 쓰고
문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사회일부 부문이 정치적 계획을 들고 나올때는
진실과 거짓을 식별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모든 이기적 책략은
대중의 찬성을 얻기 위해
경건해보이는 일정뒤에 감춰져 있습니다.
전쟁에 이르는 문을 여는 것은
흔히 평화주의자들인데,
이들은 형편없는 그러나
치명적인 구조물을 합리화하는 근거를 제공하고
이로써 이성은 부정의 도구가 됩니다.
예를들면
정보부는 법으로 제정된
정치 이데올로기의 규제로 인해
대중을 보호하지 못하지요.
궤변의 바탕에는
사이비 평등주의, 수준의 혼동,
그리고 맥락을 무시함으로써
개념들을 잘못 적용하는 것이 있습니다.
최근 역사를 예로 들어 그 의미를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2차 대전의 전주곡을 보면 누구나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영국의 유화정책의 대표자는 네빌 챔벌린(185로 측정)이었는데, 그는 히틀러(125)에게 유화책을 사용했고 ,히틀러의 진짜 의도를 알지 못했습니다. 순진한 이들은 무장해제와 불가침 조약에 의지했는데, 물론 히틀러는 그런 것을 지킬 의도가 전혀 없었지요.
윈스턴 처칠(510)은 당시 주전론자로 널리 비난받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순진한 외교협상의 기만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으니까요. 히틀러가 내놓고 공격해왔을 때 영국은 이상주의자들이 초래한 재앙에서 구해달라며 현실적인 처칠에 매달렸습니다. 이러한 오류의 총 비용은 최소 7천만명의 사망외에 유럽의 파괴였습니다.
이렇듯 전쟁 발발 전의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요소를 나타내는 것은
이상주의자들이지요.
이들은
양의 탈을 쓴채
인류가 경계해야 할 것들을
불러냅니다.
정치적 극단주의와 이상주의적인 과도한 단순화의 위험한 오류는
그러한 것의 진행에 이르는
실상으로 여겨진 그 모든 것이
오직 맥락을 무시함으로써만
뒷받침 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그러한 정치적 위치성의 실용성을 부정할
전반적 사회현실입니다.
이 불균형은
실패와 재난을 보증하고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습니다.
소송걸기를 좋아하는 사회조직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극단적인 안전 제일주의적 조작으로 인해
이미 과부하가 걸려
거의 기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CIA, FBI, 연방 이민국, 국가안전 보장국, 공항 경비대의 마비현상을 보세요. 이 모든 것이 세계무역센터의 폭파를 막지 못하는데 일조했습니다. 세계 무역센터폭파에 일조했고, 그에 대해 일차적으로 책임이 있는 바로 그러한 태도들이 사건직후 다시 부상하여 테러리스트의 색출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혹은 범인이 체포된 경우에도 군사적/형사적 정의를 세우는 일을 막으려고 했지요. 논란이 분분한 그런 입장은 진정한 권위를 악마로 몰고 범죄자의 옹호자가 됩니다. 그래서 그것은 온전치 못한 것의 변증자가 되므로 부정적으로 측정되는 것입니다.
역설적인 것은
진실에 대한 루시퍼적 왜곡은
미국헌법이 보장하는
신이 주신 권리를 활용하여 법에 호소함으로써
신이라는 용어를 공개적으로 사용하는데
항의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회를 세속화하고
그럼으로써 모순되게도
자유권이 갖는 권위의 근원자체를
제거하려는 것이지요.
(미국헌법은 700으로 측정됩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입장은 180으로 측정됩니다).
따라서
엘리트주의자들이
신에 대한 모든 언급을 불편하게 느끼는 것도
이해할만 합니다.
루시퍼는
자부심과 힘에 대한 탐욕으로 인해
신의 통치권을 인정하길 거부했습니다.
이 위치성은
왜곡으로 인해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는데
사실 왜곡이야말로
식별력의 지극히 중대한 결핍이며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르게 분간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낳습니다.
이 때문에
두 역할이 거꾸로 바뀌기에 이르는데,
여기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쪽은
진짜 가해자가 되고
또 그렇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피해자학 운동 그리고
그와 관련된 요행심리학 전체는
성숙한 어른이라면
누구나 대처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삶의 부침을 병리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해롭습니다.
헌법이나 국기에 대한 맹세에서 '신"에 대한 언급을 빼면 어떤 효과가 나타날까요?
힘은
신성인 실상의 묘사적 측면인
진실의 한 반영입니다.
미국 헌법은
모든 나라중에서 가장 높게 측정되며
705에 이르지요.
조국에 대한 사랑의 맹세인
국기에 대한 맹세는
520으로 측정됩니다.
헌법에서 신이라는 단어를 빼면 그것의 측정수준은 705인 진실에서 485(지성과 논리)로 떨어질 것입니다. 국기에 대한 맹세에서 신을 빼면 그것의 측정수준은 520에서 295(열정과 선의)로 떨어질 것입니다.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힘센 나라입니다.
따라서
그 힘의 근원을 함부로 변경하는 것은
미국뿐 아니라 이 나라에서 영감과 지도력과 모범을 구하는
전세계에 재앙이 될 것입니다.
미국은
희망, 자유,
더 나은 삶의 기회를 나타냅니다.
다른 나라의 미국에 대한 증오는
오직 선망에서 비롯됩니다.
지혜로운 이들은
성공을 모방합니다.
그렇지만 악의적인 이들은
질투심에서 선망하는 것을 파괴하려 하지요.
극좌와 극우 모두가
미국을 악마로 몹니다.
이러한
갈등과 압박의 시대에조차
온전치 못한 이는 저자세로
미국의 적들을 찾아가
악마로 모는 이들의 편에 가담합니다.
적에게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배신자와 반역자의 역할인데,
결국 사회는
이들을 가장 저열한 부류로
취급합니다.
수감된 범죄자들조차
애국적이라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지요.
이렇듯 보편적 가치를
고의로 훼손하는 것은
가장 가증스러운 범죄로 비치고
그래서 저주받아 마땅한 것으로
보입니다.
반역자들은
연방감옥에서
특별 경호를 받습니다.
살인범들조차 그들을 미워합니다.
I pledge allegiance to the flag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to the Republic for which it stands:
one Nation under God, indivisible, with Liberty and Justice for all.
합리성과 사회구조
토론
그래서 이성은 그 자체로는 신뢰할 수 없는 것입니까?
합리성에 곤란한 점은
그것이 인간성의 어두운 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합리성은
외국의 국가 지도자가
자국과 자국민을 파괴할 만큼
비합리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것은 에고가 최악의 상태에서는 가족이나 자국민의 생명을 포함하는 인간 생명에 대해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무시하지요. 자기 우월광 지도자들이 세계 무대에 등장할 경우 이들은 적보다는 자국민을 더 많이 살해합니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을 경멸했습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과 마찬가지로 수백만명을 죽였고, 보다 최근에는 밀로셰비치가 그랬지요. 프랑스 혁명에서는 프랑스의 적보다는 자국민과 애국자들이 더 많이 살해되었습니다. 사담 후세인은 군대 전체를 희생시켰지요. 일본지도자들은 자국 영토와 자국민에 대한 원폭투하를 자초했습니다. 중동의 테러리스트들은 아직도 자국과 자국민에 대한 공격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이상으로부터 우리는
양식있는 이들의 문제점은
그들이 순진할뿐더러
자신의 가치관을 추정으로
타인에게 투사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지요.
적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국가와 군사지도자들이
빠지기 쉬운 가장 악명놓은 함정입니다.
어떻게 그런 오산을 예방할 수 있을까요? 그런 무지로 인해 인류가 치르는 비용은 막대합니다. 단순하고 기본적인 정보가 결핍된 결과 수십만, 실은 수백만의 사람이 죽어갑니다.
패러다임 맹목의 귀결은
엄청난 파괴입니다.
각 사회의 측정수준은
저마다 달라서 사회적이고
따라서 정치적인 실상의 전혀 다른 매개 변수들을 나타냅니다.
매수준마다 허용되는 행동과
허용되는 신념 및 태도에 대해
한계를 추정하지요.
인간 생명의 가치 그 자체에 대한
공통된 합의조차 없습니다.
매 수준마다 기대, 지적위치,
경계선이 저마다 다릅니다.
다른 개인과 사회집단,
혹은 다른 정부와 정부 지도자들을 대할때는
그들의 측정수준과 그들의 문화에서 그 수준이 의미하는 바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한 사회에서 정당하고 윤리적인 것이
다른 사회에서는 못마땅하거나
심지어 비겁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지요.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선거구민의 기득권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여론조사를 통해 그러한 가치를
재보려고 합니다.
기업에서는
포장과 광고에 도움을 받기 위해
시장조사기법을 이용합니다.
국제적인 정치적 혹은 군사적 사안에서
다른 문화의 전반적 분위기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큰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예를들면 쿠바 국민은
억압적인 정권에 항의하여
봉기하지 않습니다.
사실 피델 카스트로는
오늘날 지구상의 어느 지배자보다
더 오랜 기간 통치하고 있지요.
400대 관료들의 사고는
200대나 300대 주민과 실상과는
전적으로 어긋나는 것이 보통이니
200대에 훨씬 못미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일상적으로
굶주림에 시달리는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식량과 일자리가 민주적 정부형태보다 더 중요하며
그런 것은 자신과 상관없는
비실용적 얘기로 들립니다.
주민들을 추동하는 것은
논리가 아닌 열정인데
열정은 흔히 비합리적이거나 극단적이고
파괴적이기조차 합니다.
다른 문화와 전통에 대한 존중심의 결여는
약점입니다.
다른 나라 국민들의 문화적 양식을 존중하고
사회 정치적 진보의 학습곡선상에서
그들이 갖는 위치를 존중하는 것은
좋은 외교에 필수적이지요.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가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임상 진료의 규칙입니다.
정신분석의 원칙에는
"부정적 전이" 앞에서는
결코 해석하지 말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부될테니까요).
참고) 부정적 전이 : 정신분석 치료과정에서 환자는 보통 치료자에게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는데, 이때 환자가 치료자를 이유없이 두려워하거나 미워하는 등의 부정적 감정을 일으키는 것.
저쪽에서 근육테스트의 가치를 알게 되면 불리해지지 않겠습니까?
흥미롭고 의미심장하게도
근육테스트는 오직 200이상으로 측정되는 사람들만이
정확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보다 의미심장한 것은
질문과 대답의 주제가
200이상이어야 할뿐 아니라
질문(이는 서술문의 형태로 제출됩니다) 그 질문 자체의 동기가 온전하고
200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는
정말 놀랍기 그지 없는 일이며,
오직 온유한 자만이
땅을 상속받으리니라는 말을
상기시킵니다.
양의 탈을 쓴 늑대는
이제 가면을 벗고
정체를 드러냅니다.
사람이 온전하고
목적이 선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이 간단한 테스트는 되지 않습니다.
역설적으로
진실을 가려내는 테스트는
거짓에 봉헌한 이들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이 테스트는 이기적이거나
자만한 목적으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진실이 창조주의 본질이라는 점에서
악은 진실에 접근하는 것을
거부당합니다.
인류의 무구함은
이전에는 아킬레스 건이었지만
이제 그 무구함은
진실이 거짓을 누르고
궁극적으로 승리하기 위한 왕도로 복귀합니다.
의도나 동기가 근육테스트의 사용을 어떻게 제한합니까?
연구에 따르면
신의 진실의 통치권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근육테스트를 정확히 사용할 수 없습니다.
진실은
신성의 반영인 까닭에
신에 대한 무의식적 부정은
자만한 동기로 테스트를 이용하는 것을
가능하지 않게 만들지요.
이것은
창조의 본성의 귀결이지
'악인을 벌하기 위한'
신의 임의적이고 도덕주의적이며
정당한 결정의 귀결이 아닙니다.
신의 진실은
공격당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근육테스트를 실험한
일부 사람들이 왜 상충하는 결과들을 얻었는지
설명해줍니다.
결정적 요소는
온전치 못한 동기였을 것입니다.
예를들면
가장 흔히 보고되는 오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식수준을 측정하려고 했을때
발생했지요.
이 경우 동기는
상당한 차이를 빚어냅니다.
한편으로
자신이 영적 수행의 어디쯤에 있는지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진실한 욕망일 수 있지만
일부 사람들은 영적 자부심이나
지위를 구하는 마음때문에
그것을 알고 싶어합니다.
온전치 못한 방식으로 했을 때
부정확하게 높은 숫자가 나오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심지어는 1,000이상 나오기도하지요. (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동기가 겸손함일 경우,
그 답은 자부심이나 이득을 동기로 하는 경우와는
다르게 나옵니다.
진정으로 영적인 구도자는
서열, 권위, 혹은 위신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일차적인 필요조건은
단순히 온전함을 갖출 것입니다.
예를들면
범죄 수사를 하는 수사관이 정의를 수호하고
무고한 이들을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범죄자에 대한 증오나 복수를 동기로 하여 질문할 경우와는
그 결과가 아주 판이하게 다를 것입니다.
한번은 2차대전시기에 처칠이 근육테스트를 사용할 수 있는 허락을 받을 수 있었겠는지를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답은 예였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히틀러라면 허락을 받을 수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답은 아니오였지요. 이 예에서만 보더라도 비선형적 영역의 힘은 선형적인 낮은 힘의 세계를 능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도 연구했는데,
그것 또한 동기에 달려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만약
의심하는 이가
영적 성실함과 정직성에서
그러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면
근육테스트는 작동했습니다.
만약
탐욕이나 신에 대한 증오를 동기로 하고 있을 경우에는
그 동기가 온전치 못한 것이어서
근육테스트를 쓸수 없을 것입니다.
우주는
순진하지 않습니다.
모든 귀결은
우세한 의식장의
온전성을 반영할 뿐이지요.
근육테스트는
진실이 현존하는지 여부를 판정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실에는
거짓이나 꺼짐과 같은
대립물이 없습니다.
의식장에 숨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가
온전치 못한 종교주의자보다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사회는 참으로 폭넓은 가지 친 극단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해야 분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인간 삶은
가장 지독한 것에서
지복과 숭고함에 이르는 일체의 가능성과
선택지들을 표현하는 집단과
개인의 집합적 카르마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삶은
나쁜 카르마를 해소할 수있는 기회가 있고
또한 비난을 용서로
증오를 사랑으로 대체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점에서
연옥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또한 다른 선택을 하여
공덕이나 선한 카르마를 쌓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의식이 진화하기 위해서는
폭넓은 기회가 필요하고
발전의 선택지를
거의 무제한으로 수용할 수 있는
운동장이 필요합니다.
인간 삶이
학습과정을 나타낸다고 할 때
사회는 수많은 의식수준이 발전하고
진보하고 정의하고 동일시 할 수 있도록
그리고
보다 굵직한 교훈을 배우는 것은
물론 끝없이 미묘한 점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지극히 광범위한 선택지를 제공해주는
이상적인 학교이지요.
에고는
극단적으로 집요해서
어떤 위치성을 놓기전에
극단적인 조건을 요구하는 일이 많은 듯합니다.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거나
사랑이 미움보다 낫다는 등의
살펴보면 간단하고 명백한 진실조차도
그것을 배우는데는 여러세기에 걸친
수백만명의 집단적 경험이 필요한 일이 많습니다.
의식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영적의지에서 나온
선택이고
따라서
의식수준은
카르마의 결정요인임은 물론
그 귀결이기도 합니다.
진화할 수 있는 자유는
영적 사다리를 올라가거나 내려갈 수 있는
최대한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세계를
필요로 하지요.
그러한 견지에서 볼때,
이곳은 이상적인 세계이고
이 세계의 사회는
광범위한 경험적 선택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자유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기회이자
필수적이고 고유한 영적 진실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말합니다.
공덕을 쌓든,
나쁜 카르마를 짓든
선택은 그것이 실제라는 신념과
그러한 경험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하지요.
그래서
환상조차
영적 성장에 기여하는데,
그것은 그 환상이
당시에는 실제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인간 삶은 영을 돕습니다.
세계를 우리가 그속에서 구원을 얻고
자신의 삶으로써 서로에게 봉사하는
궁극의 학교로 이해한다면
그것을 지켜보는 일이 덜 고통스럽지요.
어떤 태도로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 최선일까요?
그것은
연민어린 자비심의 태도입니다.
보통 사람의 심령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여러 겹의 프로그램된 신념체계들에
압도되어 있습니다.
순진함과 인과율에 대한 신념에서
사람들은 이른바 원인과 그 원인에 대한 해결책을
저 밖에서 구하지요.
하지만
성숙해지며
영성의 지혜를 갖추게 되면
탐구는
근원과 해답이
최종적으로 발견되는
내면으로 향하게 됩니다.
첫댓글 영적노력에서 기쁨의 원천은 노력자체에 있는 것이지 성과나 목표달성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모든 움직임에는 내적인 즐거움이 있습니다. 예를들면 진보에 수반되는 내적쾌락이 있지요. 분개가 평화로운 수용으로 바뀌는 것이 진보자체의 보상입니다. 자신과 타인을 보는 시각이 점진적으로 바뀌지요. 이런 일이 생길때, 사람은 자신의 인생사를 보다 연민어린 이해를 바탕으로 재맥락화 할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양자 잠재성의 실상에서 시간은 초월되고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는 연쇄적이지 않고 공존합니다. 그래서 미래가 현재보다 먼저 올 수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가난한 시민조차도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살았던 가장 부유한 계급에게도 가능하지 않았던 편리를 누리고 있습니다. 보다 균형잡힌 시각을 갖는다며 어떤 인간조건에 대해서도 대비가 되어 있는 오늘날의 세계에 살아있는 것에 감사할 것입니다. 과거의 지배자들은 지금의 가장 빈곤한 계층조차 현대의 사회적 안전망안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질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어떤 태도로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 최선일까요?
그것은 연민어린 자비심의 태도입니다. 보통 사람의 심령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여러겹의 프로그램된 신념체계들에 압도되어 있습니다. 순진함과 인과율에 대한 신념에서 사람들은 이른바 원인과 그 원인에 대한 해결책을 저 밖에서 구하지요. 하지만 성숙해지며 영성의 지혜를 갖추게 되면 탐구는 근원과 해답이 최종적으로 발견되는 내면으로 향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