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공무원 아버지와 부잣집 딸 어머니
리영희 평전/[2장] 출생과 성장 2010/04/26 08:00 김삼웅일제하의 중학교 입학기념(42년 4월)
고구려의 옛터였던 이 고장은 나라의 이름도 수없이 바뀌었다. 발해를 거쳐 오래동안 여진의 조상들이 터를 닦고 살았고, 신라 선덕왕 때에 수복되었으니까, 확고하게 이 나라의 영토가 된 것은 1천 3백여 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나마 사실은 ‘버린땅’이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는 기록으로는 정종(靖宗)왕 대에 성을 쌓고 방어사를 두었다니까 거의 1천 년이 되어간다. 오랫동안 몽골족 오랑캐의 지배도 받았으며 나의 선조들의 몸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피가 섞여 있을 법하다. (주석 2)
리영희가 언론사에서 쫓겨나고 대학에서 추방되고 사회에서 밀려나는 주변인, 변방인, 아웃사이더로 살아 온 데는 어쩌면 이같은 변방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환경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고향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앞으로 넓은 대령강이 구슬처럼 맑은 물을 넉넉하게 흘러내려서 사계절 마르는 일이 없었다. 대령강 저쪽으로 펼쳐진 넓은 뜰은 오곡이 무르익고, 소년의 눈에는 끝간데가 없어 보였다.” (주석 3)
삭주의 대관은 리영희에 앞서 항일, 반독재 투쟁의 고난의 길을 걸은 장준하가 의주에서 태어나 대관으로 이사와서 살았던 곳이고, 해방 뒤 이승만의 비서를 지낸 최기일도 이곳 출신이다. 장준하와 최기일은 삭주 대관보통학교의 선후배 사이로 해방공간에서 각각 김구와 이승만의 비서를 지내며 통일조국의 꿈을 키웠다. 장준하는 1918년생이니 리영희보다 11년 위이다. 리영희가 다닌 대관유치원은 장준하의 아버지 장석인 목사가 세웠다 한다.
리영희가 어릴적 살았던 지역이 지리적으로는 첩첩산중이었지만 문명개화는 남쪽 지역보다 훨씬 앞섰다. 중국을 통해 선교사가 드나들면서 기독교가 일찍부터 터를 잡았고, 그로 인해 서양문물이 비교적 타지역보다 일찍 수입되었다. 그 때문에 평등의식이 강했다.
평안남북도는 전반적으로 기독교의 선교가 일찍 퍼졌던 탓이겠지만, 나의 고향에서는 양반, 상놈의 구별이라든가, 엄격한 신분적 위계질서 같은 것을 알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고 자랐다. 서울이나 남한의 각 지방에서는 해방후의 오늘날에도 일상생활에 그런 구별이나 의식이 짙게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평안도가 평등주의적 기풍이 상당히 철저했던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기야 이 나라의 역사를 통해서 북방변경이었던 평안북도에 이남 사람들이 20세기말의 지금도 제각기 핏줄을 자랑하는 벼슬이나 문벌같은 왕권체제의 혜택이 주어지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특히 이조 5백 년의 영화와 오욕을 독점했던 이남의 후예들에게는 이북사람, 그 중에서도 변경 방위의 무인 밖에 없었을 평안북도 사람들은 모두 ‘상놈’의 후예로 밖에 비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쨌든 나는 자라면서부터 신분적 관계, 상관관계에서 직업적 귀천의식이니 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 (주석 4)
리영희의 고향에는 1939년에 이미 전기가 들어오고, 이어서 전화가 가설되었다.
동양최대라는 수풍발전소와 댐공사가 시작되면서 경의선 철도가 부설되어 정주와 삭주군 수풍을 연결하는 ‘정삭선(定朔線)’철도가 놓아졌다. 이 지역은 1930년대 말에 철도, 전화, 전기가 가설될 만큼 근대 문명의 혜택이 빨랐다. 일제가 전력생산과 금광, 산림(목재, 약초)의 수탈을 위해 취한 조처였다.
리영희가 태어난 1929년은 국내외적으로 소연한 가운데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가중되어 가고 있었다.
이 해 1월 22일 원산노동연합회가 총독부의 노동운동 탄압에 항의하여 총파업을 단행하고, 3월에는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가 중국 길림에서 2차 통합회의를 열고 국민부를 조직하는 등 무장투쟁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7월에는 김좌진 장군이 만주에서 한족 총연합회를 조직하고, 9월에는 재만 한인 중앙의회가 열렸다. 자치와 혁명을 분리하여, 자치는 국민부가 혁명은 민족유일당 조직을 개편하여 조선혁명당이 담당하도록 하였다.
1929년의 대표적인 사건은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이다.
촉발은 광주와 나주 사이의 통학열차에서 일본학생과 조선학생이 충돌하면서 벌어졌지만, 본질은 민족적인 대립이었다. 한일 두 나라 학생들의 충돌사건을 일제 경찰이 조선인 학생들만 처벌하자 한인 학생들의 민족적 감정이 격앙되었고 학생들은 대대적인 시위로 경찰과 맞섰다.
광주에서 시위가 벌어지자 일제는 서울에서 2개 연대 병력을 급파하여 학생들을 닥치는대로 체포했다.
그러나 항일운동은 각지로 파급되어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학생들은 <일본제국주의 타도>, <총독정치절대반대> 등을 주장하며 동맹휴학과 시위를 계속했다. 이 광주학생 운동에는 전국 194개 학교 5만 4천여 명의 학생이 참가하였고, 검거된 학생 1,642명, 제적 582명, 무기정학 2,330명에 이르렀다. 3.1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운동이었다.
리영희가 자라는 1930년대 조선의 상황은 일제의 탄압과 저항으로 점철되었다.
1930년 악명 높은 우가키 가즈시게가 신임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고, 1931년 만보산 사건, 1932년 이봉창 의사 도쿄에서 일왕에 폭탄투척, 윤봉길 의사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왕 생일과 상해사변 승전을 자축하는 행사장에 폭탄투척, 총독부 조선 소작 조정령, 1934년 조선농지령, 1935년 총독부 한국농민 80만 명을 만주로 이주시키기로 결정, 총독부 각급 학교에 신사참배 강요 등 날이 갈수록 일제의 폭압과 수탈이 심해졌다. 이에 따른 저항도 강하게 나타났지만 극심한 탄압으로 그 뜻을 펴기가 쉽지 않았다.
민족적으로 참담한 시대였다. 그런 속에서도 함경도 산골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자라고 식민지 교육이나마 교육은 이루어졌다. 리영희는 안정된 가정에서 당시로는 드문 유치원에 들어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면장을 지낸 할아버지는 지역사회에서 개명한 유지였고, 어머니는 벽동군에서 거부로 알려진 천석꾼의 딸이어서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하게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유지급에 속한 가정이었다.
리영희 가문의 평창 이씨 세거지(世居地)는 강원도 지역이었다.
선대는 무슨 까닭이었는지 평안도로 이거한 증시조의 32대손이다. 리영희 선대는 세종대왕의 사민정책으로 한강이남의 백성들을 북방 변경지대로 이주시켜 그 지역을 개척하면서 평안도에 터를 잡게 되었다. 조상들은 대대로 변방의 하급 무관직을 지냈다.
고조할아버지는 대원군 때 벼슬하기 위해서 당나귀에 돈꾸러미를 매달고 상경하여, 대단치도 않은 관직이지만 경복궁 선영관(繕營官)이라는 감투를 사 가지고 내려오셨어. 말하자면 매관한 샘이지. 그것이 뭐냐하면, 대원군이 경복궁을 증수하는 데 필요한 평안도의 토산물, 목재, 인삼, 짐승가죽 따위를 올려 바치는 그런 직책이었어. 오늘로 치면 지방의 정부 물자를 중앙으로 올려 보내는 조달관 같은 것이 아닐까? 증조부는 초산 지역에서 학문으로 이름이 높고, 이감역이라는 관직명칭으로 불렸는데, ‘감역’역시 선영관의 한 벼슬이었다고 하더군. (주석 5)
리영희의 선대는 이와 같은 배경으로 할아버지가 면장을 지내고, 구한말 신식 교육제도에 따라 아버지는 의주에 설립된 농림학교를 나와 평북 영림서의 공무원으로 근무하여, 지역에서는 상류에 속한 계층이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짝지음은, 당시 초산군 명가인 평창 이씨 가문과 벽동군 제일 부자인 최씨 집안의 정략결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앞서 얘기한 것처럼 친가는 압록강 강변 지방에서는 제법 이름난 선비집안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가난했어요. 외가는 벽동군에서 천석꾼으로 알려진 그 지방의 거부였지만, 외조부 최봉학은 소작농에서 당대에 자수성가한 일자무식이었어. 지체가 높으면서 가난한 평창 이씨와 부자이면서 무식꾼인 최씨가 그 아들과 딸을 엮어, 지체와 돈을 묶는 정략결혼을 한 샘이랄까. (주석 6)
오늘날 권력층과 재벌 가문이 정략결혼을 하듯이 당시에도 가난한 선비와 돈 많은 상민이 결혼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리영희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렇게 하여 맺어지고 리영희가 태어나게 되었다. 아버지는 심성이 고운 편이었고, 반대로 어머니는 성격이 괄괄한 여장부였다.
리영희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3형제를 두었다. 현대식 교육을 받은 이는 장남 이근국뿐이고, 다른 형제는 향리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일찍부터 공직생활을 하면서 빨리 ‘개명’된 이근국은 아들을 유치원에 보냈다.
주석
2) 리영희, <역경 - 나의 청년시대>, 13쪽, 창작과 비평사, 1988, (이후 <역정>으로 표기).
3) 앞의 책, 15쪽.
4) 앞의 책, 16~17쪽.
5) 리영희, <대화>, 22~23쪽.
6) 앞의 책, 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