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현스님의 '붓다로드' 메모 /btn]
구마라집(鳩摩羅什)은 실크로드에 있는 구자국 출신인데,
Kumara는 아버지 이름 구마라염, Jiva는 어머니 이름 지바에서 따 온 것이다.
(마지막 글자를 집 또는 습으로 발음 - 구마라집, 구마라습, 구마라십이 되기도 하고
구마라는 童, 지바는 壽라는 의미 - 의역해서 '동수童壽'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엄마 지바는 쿠자국 공주 출신이고 (쿠자왕의 여동생이라고도 함)
아버지는 인도사람이라고 하는데 인도 유학하고 귀국한 구자국 귀족인 것 같다.
지바공주 20세 때, 구마라염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하여 결혼하였다.
지바 몸에는 붉은 사마귀가 있었는데, 그러면 아주 총명하고 귀한 아이를 낳는다고..
임신을 하자 엄마가 갑자기 똑똑해졌다. (사리불 엄마도 그랬다고 한다)
보통은 아직 엄마기질이 더 강해서 아이가 엄마기질을 따르지만
태에 들어온 아이기질이 워낙 강하니까, 엄마가 아이기질에 따르는 것.
그렇게 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공주가 폭탄선언을 하였다. "나는 출가하겠다."
구마라염 입장이 어떠하였겠는가? "출가해서 잘 살고 있던 것을, 죽자살자 해서 결혼해 놓고
이제 와서 네가 출가를 하겠다고? 그럼 난 뭐야?" 이러지 않았을까..
원래 재상 정도까지도 할 수 있던 귀족이었는데 그것도 뿌리치고 출가해서
공부 잘 하고 있던 구마라염이었는데.. 죽고 못 살겠다 매달려서
사람 하나 살린다 생각하고 환속하고 결혼까지 했는데..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그래서 못 가게 잡았더니, 공주는 단식투쟁에 돌입해서 사람이 다 죽게 생겼다.
(자현스님 "저 정도 성격이면 보내주는 게 낫다, 못 데리고 산다 ㅎㅎ")
할 수 없이 가라고 했더니 아이까지 데려가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러려면 하나 더 낳고 가라고 했더니.. 그래서 구마라집 동생도 하나 있다.
(처음에 공주는 구마라염의 수려한 용모와 초탈한 듯한 분위기에 이끌려 청혼을 했었지만
막상 결혼해서 살다보니 초탈한 성격이 아니라 무기력한 사람으로 느껴졌다고도 함)
지바는 그렇게 출가를 했고, 구마라집도 7살에 출가했는데 출가하자 마자 엄청 똑똑했다.
인간스캐너 같아서 보는 대로 다 외워 버렸다고 한다.
지바는 출가를 해서도 계속 아들을 관리.. (헬리곱터맘의 시조?)
구마라집 9살 때 인도로 유학을 데리고 가서 반두달다 밑에서 공부를 시켰는데 그 스승도 대단해..
구마라집이 엄청 유명해진 다음에 "내 제자가 그렇게 훌륭해요?" 보러 왔다가
"아, 스승님~" 하고 제자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엄마가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소승,대승 불교공부를 두루 시키고
더 이상 배울 게 없어.. 12살에 돌아오는데, 그때 예언을 받는다.
(우연히 산길에서 만난 아라한이 관상을 보고서..)
"35세까지 파계하지 않으면 우바국다 같이 될 것이고,
파계를 하면 대단히 훌륭한 법사가 될 것이다."
(우바국다: 아소카대왕의 국사나 멘토 같던 사람)
그런데 실제로 연도를 계산해 보면 구마라집은
39살에 파계를 하였다. (예언을 잘못 기록했나?)
하여간에 구마라집의 명성은 높아지고 실크로드로 좍~ 퍼져 나갔고
그 명성을 들은 중국의 도안대사가 "그분을 모셔옵시다." 왕에게 건의.
도안도 상당한 천재였지만 구마라집은 거의 전설급 천재였는데
자기 위치가 흔들릴 것을 알고도 모셔 오자고 하는 것도 대단한 사람.
그래서 전진의 왕 부견이 여광에게 10만 군대를 주어서 데려오게 함.
그런데 강남의 동진 정벌에 나섰던 부견이 패망하고 나라도 멸망하자
구마라집을 데리고 돌아오던 여광은 독자적으로 나라를 세움 - 후량
불교에 대해 별로 안좋아 하던 여광은 구마라집을 마루타 같이 학대하고 파계까지 시킴.
구마라집이 한창 잘나갈 때는 초청받아 법문을 하러 가면
그 나라 왕이 엎드리고 자기를 밟고 법상에 올라가게 할 정도의 대접을 받았는데
집안 좋고, 머리 좋고, 그 정도 대우에.. 기고만장했을 텐데
여광의 시련이 인생의 약이 되었을 것이다. (하층민의 고뇌를 알게 됨)
그래서 '중국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불교'를 알고 번역할 수 있었을 것
(아픔을 겪어본 사람의 문학이 훨씬 더 호소력 있어)
후진의 요흥이 다시 구마라집을 모셔오려고.. 여광 보고 보내라고 하니까 거절
다시 전쟁.. 요흥이 후량을 멸하고 구마라집을 모셔옴.
(결국 구마라집 한 사람 때문에 두 나라가 무너졌다)
16년 정도 여광 밑에서 고생하던 구마라집은 장안에 와서 드디어 뜻을 펼치기 시작.
요흥이 구마라집을 잘 대우했는데.. 그 방식이 좀 별났다.
어차피 여광 밑에서 파계를 해서 부인도 있으니까.. 성인의 씨를 받아야 한다며
10명의 첩을 두게 하였지만.. 별로 똑똑한 자식을 얻지는 못했다.
역경 중에도 세간에는 "저런 분을 법사로 섬겨야 하나 말아야 하나?" 논란..
그래서 구마라집은 법상에 올라가면 항상 하는 말이 있었다.
"나를 보지 말고 내가 설하는 법을 봐라."
인도승려 불타발타라가 장안에 왔다가, 잘 나가는 대단한 스님 있다 해서 가 봤더니
첩이 열 명이래..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엄격했던 인도문화..
구마라집은 '미안하다, 어쩔 수 없었다' 했겠지만, 그 제자들은 스승에 대해 모욕적인 그를 혼내준 듯..
(왜? 불타발타라는 뜬금없이 갑자기 엄격주의자 혜원스님 교단으로 가 버려.. 60권 화엄경 번역)
그런 컴플렉스 있던 구마라집, 돌아가시면서 "번역에 오류가 없다면
내가 죽고나서 화장했을 때 혀는 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혀만 남아.. 장안 초당사에 구마라집 혀탑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일이.. 삼국유사에 실린 백제스님 혜현(惠現)
대단한 법사로 활동하다가 참선으로 선회.. 호환을 당했는데 혀만 남았다고 한다.
(끝까지 바른 말을 하려 했던 혀 / 말을 잘 할 수 있지만 안 한 혀 - 누가 더 대단한 혀?)
구마라집은 인도사람인데 중국의 정서에 맞게 번역하려고 애썼고 (의역)
현장스님은 중국사람인데 인도의 원문에 맞게 번역하려고 애썼다 (직역)
* 구마라집 번역 - 우리가 널리 사용하고 있는 금강경, 법화경, 유마경, 아미타경 등..
(현장역 반야심경뿐 아니라, 구마라집역 반야심경도 있음)
* 극락(極樂), 공(空), 공명조(共鳴鳥)라는 단어가 쿠마라지바의 번역으로 생겨났고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도 그가 의역해낸 것.
* 아발로끼테슈와라(Avalokitesvara)를 '관세음보살'로 번역 (현장은 '관자재보살'로 번역)
* 아미타경을 번역하면서 공명조를 끼워넣는 식으로 의역을 감행했는데 이는
공명조처럼 사이가 나쁜 새들도 싸우는 일 없이 행복한 곳이 극락정토임을 강조하려는 의도였다고 함.
* 법화경 '용녀의 성불'은 변성성불이고, 범어 원본에는 구체적인 몸의 변화도 묘사되어 있지만
구마라집이 번역할 때 생략.. '중국에선 좀 문제가 되겠다' 19금으로 걸려서.. <자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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