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기 304-- 태국 치앙마이 국립박물관
이번 여행은 정말로 편안하게 시간 여유를 두고 여행합니다. 그 이유는 우한바이러스(코로나
바이러스)가 극성이기에 되도록 사람 많이 모이지 않는 곳으로 가려고 하여 2월7일은
치앙마이 국립박물관으로 가기로 하였습니다.
치앙마이에서 아침식사는 주로 숙소에서 햇반에다 이상원 부인이 싸준 멸치볶음과 김치
그리고 김으로 식사하였습니다. 가져온 커피로 모닝커피하였습니다. 돼도록 사람있는 곳에
안가려고 노력합니다. 계속 한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우한바이러스 확정 환자들 소식뿐...
치앙마이 국립공원을 걸어서가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갔던 길을 나와서 고속도로로 걷다가
국립공원을 찾았습니다. 저 지붕의 X자 모양의 장식은 란나양식이라고...
태국어로 '치앙'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치앙라이,치앙마이...
이곳 박물관에는 아주 옛날 오래된 엽전이나 구석기 신석기 시대같은 그런 철기 도구들이나
부처 조각상 등이 좀 있고, 절반 이상이 설명이나 사진이 많았습니다. 이 벽에는 인간 진화에
대해 그려져 있습니다.
세계 문명 시기 도표입니다.
우리 사는것도 이 문명 시기의 점을 찍는것이 됩니다. 같은 시기에 같은 학교에 다니고
같이 태국도 여행온것도 감사합니다.
치앙마이 지역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것을 이곳으로 옮겨온것입니다.
그당시 그림을 그릴때는 그림의 소질이 있는 사람이 그린것이 아닌것 같습니다.ㅎㅎ
이 나무는 코끼리 안장입니다. 옛날 아시아의 북방은 말이 운송수단도 돼고 전쟁때는
말을 타고 싸우는데 태국은 코끼리가 운송수단으로 쓰여 코끼리의 위치는 매우 큽니다.
동남아 영화를 보면 코끼를 타고 전쟁하는 모습을 봅니다.
옛날의 칼입니다. 치앙마이가 태국의 행정구역으로 편입 된것이 1930년경. 따라서 그 전에는
북쪽은 타이왕조, 남쪽인 방콕쪽은 시암왕국(수코타이-아유타야-現 차크리 왕조) 이었습니다.
태국에서는 1351년 아유타야(Ayutthaya) 왕국이 흥기하여 활발히 해외 무역을 전개했습니다.
한국과 태국간의 접촉을 보고하는 첫 문헌은 1451년에 작성된 고려 왕조의 연대기인
『高麗史』인 것으로 보입니다. 恭讓王(재위 1389~1392) 3년인 1391년 음력 7월의 부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暹羅斛 왕국이 나이 공(奈工) 등 여덟 명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며 서신을 보내어 이르기를,
“暹羅斛 왕이 이번에 나이 공 등을 사신으로 삼아 배를 감독케 하고 토산물을 싣게 하여 고려
국왕에게 바치도록 명했습니다.”라고 했으며 (서신은) 성명이 없고 봉인되어 있지 않으며
단지 작고 둥근 도장이 찍혀 있을 뿐인데, (그 진위를) 조사할 수도 없었다. 나라에서는
그것이 가짜라고 의심하여 이에 의논하기를, “(서신을)믿는 것은 불가능하나 또한 믿지
않는 것도 가능치 않다. 내방한 사람은 거절할 수없으니 후하게 그리고 예로써 대우한다.
그러나 그 서신은 받지 않으며, 이로써 (우리가) 미혹되지 않음을 보이는 것이 옳다.”라고
했다. 왕이 그들을 불러 접견하고 위로했다. 이때 그들이 왕에게 아뢰기를, “戊辰年 즉
1388년에 (저희 나라 왕의) 명령을 받들어 배를 출항하여 일본에 도착해 1년을 그곳에
머물었다가 오늘 귀국에 이른 것입니다. 전하를 뵈올 수 있게 되니 여행의 피로를 잊어
버립니다.”라고 했다. 왕이 그들에게 뱃길로 (그들의 나라에서 고려까지의) 상거를 물으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북풍을 받으면 40일 만에 (이곳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들 중에는 어떤자는 윗도리를 벗었고, 어떤 자는 신을 신지 않고 있었다. 높은 자는
흰 천으로 머리카락을 감춘다. 종복들은 尊長者를 보면 옷을 벗고 몸을 드러낸다.
세 번을 통역해서야 그 뜻이 전달되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高麗史』보다 1년 뒤인 1452년에 완성된 『高麗史節要』는 이 사건을 “暹羅斛 왕국이
(고려로)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해 놓고 있다. ‘暹羅斛’ 혹은
중국어로 ‘셴뤄후’는 태국의 옛 명칭인 시암(Siam)을 가리킵니다. ‘셴뤄후’는 ‘셴뤄(暹羅)’와
더불어 중국의 『明史』와 『明實錄』에서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을 지칭하는 국호로 사용
되었습니다. 최근의 한 연구에 의하면, 중국의 史書들에서 아유타야 왕국에 대한 명칭으로
‘셴뤄후’는 1398년경까지 나타나다가 그 후부터는 오직 ‘셴뤄’만 쓰였다. 한국의 사료들에도
‘暹羅斛’은 14세기 말까지 쓰이다가 15세기 초부터는 시암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국호로 오직
‘暹羅’만 등장합니다.
‘셴뤄후’는 『明史』에 그 용어의 기원이 설명되어 있는데, 그에 따르면 그것은 ‘셴’과
‘뤄후’의 복합어입니다.. ‘셴’은 대개 13세기 중엽부터 15세기 중엽까지 존속했던 태국의
수코타이(Sukhothai) 왕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며, ‘뤄후’는 유럽인들에 의해 “라보
(Lavo)” “루보(Louvò)” 등으로 불린 롭부리(Lopburi)와 동일시됩니다. 롭부리는 14세기까지
태국 중부의 짜오프라야(Chaophraya) 강 동편 지방에서 독립적 혹은 半독립적 위상을
유지했던 성읍 국가이었습니다.
중국에서 건너온 THAI 족을 모아 1296년 치앙마이를 세운 사람은 망라이왕(King Mangrai)i)
그 후 LANNA 왕조에서 치앙마이를 수도로 했으며 이 란나왕조는 1355-1558년 약 260년간
독립국가로 실크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했고, 그 후 220년간 버마와 아유타야 왕조(SIAM :
시암족)의 지배를 받았다가 (버마의 침공에 맞서서 해자를 새워 지금의 구시자기가 그런
모양이라고...) 1930년경 치앙마이 왕조가 몰락하면서 태국으로 편입되었습니다.
그 편입의 시작의 의미로 열차가 건설되었고 그 때 국왕이 방문을 했는지, 코끼리를 탔던
의자와 치앙마이 일대를 돈 것 같은 사진들이 붙어있습니다. 19세기~20세기 초 외국 선교사
사진이나 근대식 개화 건물들, 병원시설에 대한 사진 자료도 좀 있습니다. 그 당시 또 목재를
운반하는 열악한 환경속노동자들의 모습이나, 군인들, 프랑스 영국 사람들 관련된 사진이나
채취하는 모습의 미니어처도 있었습니다. 19세기 서양열강의 아시아 이권다툼의 여파가
여기까지 미쳤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어쨋건, 지금까지 주변나라가 다 수탈을 당했는데,
유일하게 식민지배를 받지 않는 나라인 태국입니다.
3왕에 대한 내용도 재미있습니다. 12세기 태국북부에 쑤고타이,파야오,란나 3왕국이 있었고,
한 왕이 다른 왕의 아내에게 추파를 던져서 대립을 하고 있었는데 다른 왕이 중재를 해서
동맹을 체결했고,그게 3왕의 동맹으로 이어져 북부 왕국이 탄생을 하게 되었다는 것.
( 3이란 숫자는 여러가지 역사적 신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 박물관에서
3 King 의 내용을 보고 나서 부터는, 치앙마이 시내를 다닐 때마다 THREE KING 의 상징물이
자주 보입니다. 구 시자기에 '치앙마이 구 시청사 앞에 3동상이 상징적으로 서있는데,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절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경주 박물관같은 곳 가면, 그 옛날 신라왕 왕관, 귀걸이 하나만 봐도 입이 딱 벌어
지고 역사시간에 의미도 모르고 외웠던 <미륵보살 반가사유상>같은 것은 정말 다른나라
불상 보다 보면 정교하기로 소문한 스위스시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흔하디
흔한 도자기는 또 어떤가..정말 우리나라 유물이 얼마나 소중한지, 나와봐야 압니다.
태국 북부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태국의 북부는 선사시대에도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1261년 라나왕국이 출현할 때 까지 몬족 크메르족 라와족이 세운 여러 작은 왕국이 힌두
및 불교의 영향하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1261년에 북부의 소수왕국의 아들인 망라이왕( Phaya Mang Rai)이 라나 왕국을 건설하고
1262년에 치앙라이에 수도를 정하였습니다. 그는 정복군주로서 1281년에 그 당시 북부의
크메르족이 세운 최고의 하리푼차이 (Hariphunchai) 왕국을 정복하면서 제국의 길로 들어
섰으며, 1296년에 치앙마이에 신 수도를 건설하게 됩니다. 그 후 라나왕국은 1558년 버마에게
정복당할 때 까지 태국북부의 왕국으로 번영하게 됩니다.
버마의 200여년의 통치 끝에 1774년에 태국의 남부지방의 톤부리(방콕에서 강 건너 남쪽)에
수도를 건설한 타이족의 탁신 Taksin왕조 (8년후 1782년 탁신왕이 처형을 당한 후 현재까지
이어온 짜끄리 Chakri왕조 탄생)에 의해서 란나왕국은 버마로 부터 독립을 하게 되며
태국에 편입된 후에도 자치권을 인정받아 독자적인 통치를 하게됩니다.
이것이 부처의 발이라고 써있습니다. 아마 부처의 발을 아름답게 꾸며 놓은 상징적인것
같습니다. 29세에 출가해 35세에 깨달은 부처님은 이후 45년간 ‘길에서 자고, 길에서
이야기하고, 길에서 입적했다’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참으로 열심히 인도대륙을
‘발로’ 누볐습니다. 붓다가야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성취한 뒤 첫 설법 대상을 물색하다,
600리나 떨어진 사르나트의 녹야원까지 손수 걸어가 법륜(法輪)을 굴렸습니다. 그리곤
다시 붓다가야 근방으로 되돌아와 불(火)을 섬기고 있던 가섭3형제를 제도했습니다.
‘고대’라는 시대적 한계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부처는 이처럼 항상 걸어 다니며 중생들을
제도(濟度)하고, 걸어 다니며 자신의 가르침을 폈다. 그래서 그런지 가르침에 귀의한 사람들이 부처님께 올리는 최상의 예경은 부처님 발에 이마를 대고 절하는것를 ‘불족정례
(佛足頂禮)’라 합니다 .적지 않은 경전에 나오듯 부처님의 발을 물로 씻어주는 것도 최상의
예경에 속했습니다. 부처가 계시는 곳’에서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기에, 부처의 발은 곧
진리를 전하는 표상(表象)이었던 것입니다.
불교의 발생지 인도에서 불교는 거의 없습니다. 인도 북부에 남아있는 일부 불교성지와 그
주변의 한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건립한 사찰들을 제외하면 불교 흔적을 찾기 힘듭니다. 인구
11억 중에서 불교신자는 극소수입니다. 인도에서 불교가 왜 사라졌을까. 그 원인을 놓고 많은
학자들의 연구가 있었습니다. 기존 학설은 크게 두 가지다. 외적으로는 이슬람에 의한
파괴며 내적으로는 불교가 정체성을 잃고 힌두교로 흡수되었다는 것입니다.
흰 사원의 모형입니다.
정교한 탑 모양의 문양.
석기시대의 모형입니다.
이상원특파원이 석기시대 사람과 인터뷰를 합니다.ㅎㅎ
옛 사람의 뼈. 남방계라 그런지 작습니다. 일본도 키가 작아 왜(倭)를 썼는데...
치앙마이의 옛 유물의 정교함을 봅니다.
출토된 도자기입니다. 도자기를 보면 중국에서 흘러온것 같습니다.
치앙마이 국립박물관에 갔다 숙소와서 쉬고 저녁먹으로 마야 몰 근처 령만(寧曼) 야시장으로
갔습니다.
이곳 야시장은 먹거리, 잡화점으로 많은 관광객이 붐비는데 요즘 우환바이러스 때문인지
한가합니다.
치앙마이에 오면 야시장을 꼭 들러 봐야 합니다.
야시장 안에 한국어로 포장마차 간판이 있습니다. 한국 관광객이 많이 오나 봅니다.
외국인들은 대체로 마스크를 안 쓰고 다닙니다. 우리는 사진을 찍을때만 마스크를 벗었습니다.
식사를 시켜서 먹는데 이름이 똠양인가? 나는 오른쪽 우동을 먹었습니다.
숙소가 마야몰 근처에 있어서 마야몰이 우리의 아지트입니다.ㅎㅎ
이 안에 다이소도 있습니다. 물론 식당도 있습니다. 커피샵도 있고
마야 몰 앞에 야시장입니다.
중국 인형이 호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