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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수락산 등반은 수업이 있는 토요일이라 저는 동참하지 못합니다만
이 코스로 수락산을 처음 가시는 분은 수락산 입구의 노강서원 주변을
살펴 보면서 올라가면 좋을 것 같아서 몇 년전에 제가 썼던 수락산등반기를
원문 그대로 옮겨 봅니다. 쓸데 없는 앞 부분은 지나치고 뒤의 노강서원 부분을
읽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수락산에는 중간 중간에 암벽이 가파른 곳이 있습니다.
부디 즐겁고 안전하며 보람있는 등반하시기를 빕니다.
아래의 수락산 산행 후기는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서 월례 산행을 하는데 돌아가면서 산행 후기를 써 올리는 것입니다. 동창회 홈페이지에 올렸던 글입니다. 2002년 8월 3일의 산행도 이곳을 역순으로 다녀 오는 것이었기에 감회가 새롭더군요. 참고 자료로 실어 봅니다.
수락산 등반후기(제55/100회 등산)
1. 산행 대상: 수락산(638m)
2. 모인 일시: 2002. 5. 5(일) 09:00
3. 모인 장소: 7호선 장암역(종점이고 출구가 하나임.)
4. 준비물: 기본적인 등산장비, 간식
5. 등산 코스: 4시간 코스 (장암역-노강서원-석림사-석천동계곡-홈통바위-정상-철모바위-남근석-치마바위-수락유원지 계곡-수락산역으로 하산 (9:30∼13:50)
6. 참석 회원: 이종율, 장민기, 김의현, 유영기, 권충희, 박기병, 김용덕, 권오창, 류제석(9명)
7. 산행후기:
- 백등회 산행의 처음에는 박회장을 비롯하여 여러 명이 유선으로 연락을 주고받거나 팩스를 보내어 산행 계획을 알리고 참가를 독려하곤 하였으나 지난 해 부터는 우리 중동고 65회 홈페이지의 소모임 게시판을 이용, 산행계획의 홍보와 신청을 받아 아주 편하고 자연스럽게 진행되어 왔으며 많을 때는 20명이 넘을 적도 있으나 대략 매회 15명 내외의 회원들이 참가해 가볍고 부담없는 산행을 즐겨왔습니다.
- 그런데 이번 산행에서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신록이 짙어 가는 이 좋은 계절에 더구나 연중 가장 좋은 날로 선정된 '어린이날'에 겨우 9명이 참가하여 그 기록이 깨진 것이지요.
심지어 이날의 산행지를 선정하였던 김성오 회원과 장암역코스를 추천한 전희일 회원조차 나오지 않아 서운한 면이 있었습니다.
- 이 밖에도 이날 참가하지 못한 회원들의 경우 대체로 아이들이 고등학교나 대학을 다니고 있어 ''어린이 날''과는 무관하리라고 생각했었지요. 아직 아이들이 어린 어경선과 권오창의 경우는 불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지요.
- 피치 못할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다고 할 테지만 반성하시기 바랍니다. (숨겨놓은 어린이를 키우고 있지 않나 의심이 간다고 말들이 많았답니다.)
- 이날 아침까지 연락을 받거나 알고 있는 경우는
김광기 : 개인적인 일로 빠질 수밖에 없다고 게시판에 꽁지(公知)를 달았음
남승우 : 홈커밍 6차추진위원회에서 만났을 때 집안 일로 불참한다고 하였음
- 보라매역에서 도봉산행 7호선 전철을 타고 종점까지 가는 차니까 한숨 자다가 보니 박회장이 전화하여 "컨디션이 안 좋아 오늘은 하루 쉬고 싶다. 산행을 잘 처리하도록 부탁한다."라고 해서 잠이 확 달아나고 이 친구 저 친구 전화를 해 보게 되었다.
이종율 : 부지런하여 벌써 장암역에 닿아서 기다리고 있고
지승일 : 전날, 대학동창들의 모임이 원주에서 있어서 아침에 상경 중이었음
강정만 : 변호사일도 피로가 쌓여 쉬고 싶다고 함
권오창 : 지금 4호선을 타고 오는데 어디서 갈아타야 되느냐고
박승찬 : 대홍기획을 퇴임하고 5월 2일에 칼국수집을 개업했는데 사장 겸 사환이라 바빠서 정신이 없다고 함
- 모두에게 전화는 못했지만 오랫동안 나오지 않아 얼굴을 잊을 것만 같은 그리운 얼굴들(장세영소아과 원장, 김남국피부비뇨기과원장, 강수호 해운사장, 박경철, 강문중소장, 윤창영이사 등)이 먼저 스쳐 지나간다.
- 장암역에 닿는 차편은 드문드문 있어, 도봉산역에 내려 기다리면서 박기병건축사, 유재석 상무와 만났다. 백등회 산행에 처음 참가하는 유재석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가 장암행 전동차를 타고 오는 권오창소장과도 만났다.
- 장암역 밖의 육교 위에서는 이종율 한전 감사가 오는 사람마다 손을 흔들어 환영하고 있었다. 모인 회원이 9명밖에 안되지만 각자 연락 받은 경우를 취합해 보니, 더 기다릴 사람도 없는 것 같아 9시 20분에 바로 출발하였다.
- 서울과 의정부의 경계지점인 이곳은 전형적인 근교촌(近郊村)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데 등산객이 적어 참으로 호젖한 코스였다. 어쩌다 마주친 풍만하고 젊은 두 여성을 보고 조선일보의 김의현이 눈이 번쩍하여, 뻔한 길을 물어 보려는데 필리핀계(?) 노동자였으니...
- 작은 가게에서 장수막걸리와 조껍데기술(발음 주의), 생수를 몇 병씩 사서 나누어 졌다. 그런데 아침을 거르고 나온 사람들을 위하여 김밥을 좀 사려고 하였더니 도대체 파는 가게가 없다. 등산로 길을 따라 계곡으로 들어서는데 몇 곳의 가게와 음식점이 모두 김밥을 만들지 않고 있으니 이 길이 얼마나 외진 길이겠는가?
- 봄비가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여러 차례 산행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반석위로 맑은 물 흐르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걸었다.
신록의 새순과 새잎을 간지럽히며 반짝이게 하는 따스한 봄볕을 함께 즐기며 계곡 입구를 향하여 들어섰다. 아스팔트길에 물이 넘쳐흐르며 그리는 얕은 물 무늬가 아름다운 길에 두터운 등산화 바닥을 씻으며 잘박 잘박 소리를 내면서 걸어갔다.
- 마지막일 것 같은 음식점에서 ''팔 것은 없고 우리네가 장사할 음식재료로 사두었다''는 오이 몇 개를 빼앗다시피 사 배낭에 넣고 나서니 권오창과 유영기, 박기병이 기다리고 서 있었다.
- 그곳 서쪽에는 궤산정이라는 6각형의 작은 정자가 있었으며 조금 위 수락산쪽(우측) 계곡 물가에는 청풍정터가 남아 있었다.
- 궤산정은 조선조 후기의 유학자였던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 수락산 서쪽 계곡이라는 점에서 따와서 호를 西溪로 정한 것임. 박세당에 대하여 더 자세한 내용을 보려면 다음 주소를 이용할 것 http://binin.netian.com/takja_parksedang1.htm)의 정자였다고 하며 주춧돌만 남아있는 청풍정(淸風亭)은 이곳을 찾아왔던 매월당 김시습의 전송을 위하여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 궤산정이라는 이름은 박세당선생이 제자들에게 (아홉길)높이의 산을 만드는데 흙한 삼태기가 모자라서 쌓은 공이 헛되이 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의 교훈을 주기위해 이름 지었다고 한다. 정자 아랫쪽 바위에 음각된 석촌동 서계유거 취승대는 선생의 친필이라고 한다.
- 청풍정터에는 현재 주춧돌만 남아 있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불사르고 사육신의 시신을 거둔 후, 처음에 청풍정에 숨었다가 폭천정사(瀑泉精舍)로 옮겨 은둔하였다고 한다.
- 그런 연고로 이 정자는 서계선생이 매월당 김시습을 추모하기 위해 영당(影堂)을 짓고 그 앞에 세운 정자로 제자들과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주추의 크기는 높이 90㎝, 아래 폭 60㎝, 위 폭 38㎝ 정도이며 모두 네 개로 되어 있는데 주추간의 거리는 가로 2.2m, 세로 2.4m인 것으로 보아 정자의 평면적은 1.6평 정도로 추측된다.
- 정자 아래쪽 계곡 암면에는 수락동천(水落洞川)이라는 매월당의 친필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확인을 하지 못하고 지나쳤다. 이 글씨는 매월당이 전국을 유랑 할 즈음 이 곳 수락산에 머물고 있을 때 남겨 놓은 친필이라고 전해진다.
- 그런데 조금 더 위쪽 왼편에 작은 건축물이 있고 심지 깊은 박기병이 얕은 담장 너머로 기웃거리고 있었다.
- 이름하여 노강서원(鷺江書院)이었다.
- 참으로 규모가 작은 이 서원은 동재와 서재를 앞에 두고 정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었는데 조선 숙종때의 문신 문열공 박태보(朴泰輔)를 모신 사당으로 그는 1654년에 박세당(앞에서 소개한 이 분은 李重煥·安鼎福 보다 앞선 시대의 실학파 학자로서, 농촌생활에 토대를 둔 博物學의 학풍을 이룩하였으며, 글씨도 잘 썼던 훌륭한 분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24세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었으며 홍문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 암행어사, 파주목사 등을 거쳤으나 기사환국때인 숙종15년 즉, 1689년에 인현왕후 민씨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귀양을 가던 중 노량진에서 장독(杖毒:곤장 맞아 생긴 병)으로 36세에 죽었다고 하였다.
- 도대체 백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이 좁은 계곡에 웬 "노강(鷺江)"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이냐고 이상히 생각하여 산 능선에서 쉬면서 박기병에게 "서원의 이름이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였는데 나중에 이 글을 올리려다가 찾아보니 그는 학문과 문장에 능통하고 글씨도 뛰어나게 잘 썼다고 하며 그가 죽은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는데 노강서원은 그를 추념하기 위하여 1695년에 세운 서원으로 원래 노량진에 있었다고 한다. 더구나 정조15년(1791)에는 노강서원이라는 어필사액을 하사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을축년(1925년)의 큰 홍수로 한강 물이 넘쳐흐르는 바람에 노강서원이 물에 떠내려 갔으며 이를 아쉬워하던 그의 후손들에 의하여 1969년에 이 곳에 새로 노강서원을 건립하였고 1977년에 경기도 지방문화재로 41호로 지정 받았다는 것이다.
- 그러고 보니 우리 일행이 스쳐 지나온 이 계곡과 근처의 마을이 반남박씨의 집성촌(集成村; 일찍이 일본인 학자들이 동족부락이라고 책을 써서 지금도 종종 동족부락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집성촌 또는 동성촌이라고 해야 올바른 표현이다)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 다음 번에 이 계곡을 찾아오면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3호(2000. 4.17)인 서계 박세당 사랑채(장암동 197번지)와 마을을 놓치지 말고 꼭 둘러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이 글을 읽고 언젠가 다시 찾아가 볼 사람도 있지만 그냥 지나치고 말 사람도 있으니 아래에 한번 더 읽을거리를 옮겨 적어 보겠다.
『이 가옥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박세당(朴世堂:1629∼1703)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기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집필을 하였던 곳이다. 서계(西溪)선생은 1629년(인조 7년)에 이조참판을 역임한 박정(朴炡)과 양주 윤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31세인 1660년(현종 1)에 증광문과에 장원을 시작으로 예조좌랑, 정언, 병조정랑, 지평, 홍문관교리겸 경연시독관, 함경북도병마평사 등 내외 관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당쟁에 혐오를 느껴 40세에 관료생활을 포기하고 지금의 의정부시 장암동(당시는 양주 석천동)에 칩거하면서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며 학문연구와 저술, 그리고 제자 양성에 매진하였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농사에 관하여 쓴 「색경(穡經)」이 있는데 이 책은 선생 본인이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체험한 것을 글로서 남긴 책으로서 귀중한 사료로 인정된다. 또한 고전연구에 관한 저술로서 「사변록(思辯錄)」등이 있다.
현재의 서계선생 사랑채는 당시 선생이 기거하며 저술활동을 하였던 곳으로 원래는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그리고 행랑채로 이루어진 조선후기 사대부가의 배치로서 집 앞 어귀에 있는 고목인 은행나무와 그 옆의 계류를 따라 세워진 정자, 학당터 및 그 뒤의 영당과 묘택 등의 일곽이 조선후기 사대부 건축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뿐 아니라 교육적, 문화적 가치 또한 매우 높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6·25전란 당시 대부분 소실되고 지금은 바깥 사랑채만이 원형을 유지하여 남아 있고 나머지 건물은 부분적으로 현대식의 건물이 세워져 후손들이 살림을 하고 있어 전체적인 가옥의 구조를 파악할 수 없다고 한다. 1999년 8월에 경기도 전통종가로 지정되었고 2000. 4. 17일에 사랑채가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3호로 지정되었단다.
- 그런데 내가 더욱 관심이 가면서 참으로 가슴 속이 아릿한 것은 이분의 족적 가운데서도 삶의 마무리부분이다. 다른 기록에 보니 아래와 같은 글이 있다.
『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장원, 64년 부수찬(副修撰)으로 황해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67년 수찬에 이어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장형(杖刑)을 받았다. 그 해 동지사서장관(冬至使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예조참의 등을 지낸 뒤, 94년 갑술옥사에 소론이 득세하자 승지로 특진하였다. 이어서 공조판서를 거쳐 이조·형조의 판서를 지냈다. 1703년 중추부판사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사변록(思辨錄)》을 저술, 주자학을 비판하고 독자적 견해를 발표하였다. 이에 반주자(反朱子)로서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이 찍혀 삭직, 유배 도중 옥과(玉果)에서 죽었다. 』
-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잘 나고 훌륭하였는데 두분 다 행적과 올곧음이 똑같아 곤장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시기는 다르지만 두분 다 전라도로 유배령을 받았고 또 유배가는 도중에 쓰러져 그렇게 돌아가셨는가 말이다…
- 너무 이야기가 길어져 아무도 읽지 않을까 하여 이제부터는 가능하면 요점만 쓰기로 한다.
- 이런저런 생각을 나누며 올라가려니 시멘트 기둥으로 만들어 둔탁한 느낌을 주는 석림사(石林寺)라는 절의 일주문과 작은 절집이 나타났다. 절 앞의 다리에 수락산 등산객은 우측으로 돌아가라는 표지를 보고 사람 착한 유영기와 권오창은 다리를 건너 돌아서 가고, 몇 걸음 늦었지만 우리는 절 구경을 하고 가기로 했다.
- 박기병과 함께 절 경내로 들어서는데 그 친구 왈 "지리학하는 사람하고 건축학하는 사람만 이런데 관심이 있는가 보구나. 이곳까지 와서 왜 안 보고 그냥 가지?"하고 의아해 한다.
- 입구 오른쪽의 범종각에는 범종(梵鐘)과 법고(法鼓), 운판(雲版)과 목어(木魚)의 절집 4물이 다 갖추어져 있고 주련(柱聯)도 한글로 쉽게 써 놓았다.
- 이 절은 대웅전에 해당되는 본당 건물에 「큰법당」이라고 한글 현판을 크게 써 붙였으며 시멘트구조물에 돌을 붙여서 나름대로 현대식 2층 집으로 지었는데 물론 주련을 한글로 붙여 법보, 불보, 승보의 삼보(三寶)를 잘 지키라고 써 놓았다.
- 석림사의 최초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자주 머물던 수락사지(水落寺址)에 박세당선생이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창건했다고 하니 서계의 생존연대(1629∼1703년)로 보면 석림사의 초창은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그러나 새 절이라는 냄새가 나서 금방 돌아나와 산길로 접어 들었는데 곧 바로 석천동계곡이 시작되었다.
이 곳에는 큰골, 긴골, 험한골, 열두개울 등이 있다고 하나 초행길인 까닭에 알 수가 없었고 아무튼 사람들이 거의 없어 맑고 깨끗한 계류가 참으로 좋았다.
- 수락산은 마주선 도봉산과 함께 암벽의 아름다움이 빼어난 명산으로 산세가 웅장할 뿐만 아니라 전망 또한 빼어 난 곳이다.
산을 타고 오르는 동안 바라보이는 산 전체가 깍아지른 듯한 화강암 석벽과 암반으로 되어 있고 산정을 따라 도처에 기암괴석이 즐비한 곳이다.
- 희미한 등산로를 따라 오르니 곧장 가파른 경사를 타고 올라가야 했다. 숨을 고르면서 바위에 앉아 돌아보니 도봉산의 신선봉 암벽과 북한산의 인수봉과 백운대까지 그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할 수 있어 좋았다.
- 도중에 유영기와 권오창으로 부터 전화가 와서 "어디냐?"고 물어오길레 딱히 어디라고 말할 표지판도 없어서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산속이야. 바위도 있고 나무도 있어."라고 愚問 愚答을 하려니 "그래 맞아. 바위와 나무와 계곡 물이 있지?"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아니. 여기는 물은 없다네."하고 대답하였는데 이때 그들은 우리와 코스가 다르구나 하고 짐작을 했다.
- 암벽길을 재촉하여 로프도 잡고 바윗길을 힘들여 올라서, 앞서 간 이종율일행을 만났는데 이들 다른 친구들은 모두 계곡코스를 이용하다가 깔딱고개를 올라 왔으며 뒤쳐졌던 박소장과 나는 계속 암능을 타고 왔던 것이다.
- 권오창과 유영기는 계곡끝에서 남아 탱지탱자하고 놀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니, 기겁을 하고 곧장 올라오겠다고 하는데 김용덕왈 "이들이 20-30분 거리는 더 뒤쳐져 있는데 권오창이 깔딱고개 아래에서 그냥 돌아가겠다고 고집부릴까 걱정이다"라는 것이었다.
- 박기병이 "기다리면서 느긋하게 참외나 깍아 먹고 쉬자."고 배낭에서 참외를 꺼내는데 장민기이사는 부인이 예쁘게 깍아서 그릇에 담아준 참외그릇을 내놓으면서 이것부터 먹자고 선수를 친다.
모두들 참외를 맛있게 나누어 먹고 나머지 1개를 남겨 두고 기다렸는데 김의현 왈 "오늘 우리 팀의 마스코트"라는 검정등산복 차림의 아줌마가 뒤따라 와서 "처녀 같다"느니 "아줌마라고 부르기는 좀 뭣하다"느니 뭐니 하면서 몇 마디들 걸치고 있었는데 늦게 올라온 권오창이 "그녀-는(발음을 잘 할 것) 내가 점찍어 두었는데 벌써 말을 걸고 했단 말이냐?"고 아쉬워해서 한바탕 웃었다.
- 꼭대기에 올라서니 수락산역 쪽이나 다른 곳에서 올라온 등산객들이 떼로 몰려다니고 있어 앉아 막걸리 한잔하고 쉴 곳을 찾기도 어려웠다. 김용덕은 좀더 좀더 하면서 끌고 가는데 마땅히 쉴 곳을 찾지 못 한 채로 철모바위를 지나고 빵바위, 남근바위를 거치고 치마바위까지 지났다.
- 곳곳의 바위가 다 기암으로 눈길을 뗄 수 없었는데 치마바위 뒤로는 박기병의 표현 그대로 『눈밭』이었다. 수많은 등산객의 발길 아래 화강암의 속살이 벗겨져 드러나고 부드러운 암릉위를 흰 모래가 뒤덮고 있는 모습을 그렇게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다. 물론 환상적인 그 흰 모래에 미끄러지면 한참을 구르고 까지는 등 한바탕 소동이 날 위험한 코스였다.
- 그렇게 한참을 고생하다가 12시넘어서 약간 외진 쪽으로 자리를 잡고 예의, 장수 막걸리와 조껍데기술을 몇 순배 돌렸다. 빈대떡 담당인 남승우가 빠졌으니 안주는 마땅찮았지만 그래도 땀흘린 정상에서 마시는 사이다같은 막걸리맛이야 마셔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지. 그치?
- 물론 빠지면 서운한 김의현이 가져온 양갱과 내가 가져간 미니멘토스사탕도 나누어 먹었고…
- 이종율의 부인이 명일역 근처에 Take Out점포를 개업하여 새로운 사업에 바쁜 관계로 매번 산행 때 마다 챙겨 넣어 주던 샌드위치가 빠져 그 또한 아쉬웠었지. 아무튼 사업에 성공하시길 바라고…
- 하산 길은 곧장 수락산 전철방향으로 정하고 서둘렀는데 수락계곡 공원을 거쳐 가자니 마침 어린이날이라 수많은 이 나라의 새싹들과 줄기인지 뿌리들이 골짜기의 그늘과 물가를 메우고 있더군.
- 수락 전철역 가까이 내려 와서 전에 들러 먹었던 「민속두부마을」집에 찾아가 깔끔한 순두부와 삼색두부를, 익힌 김치볶음에 싸서 먹는 두부김치와 두부전골을 시켰다. 이집 두부전골은 버섯과 두부의 어울림이 환상적이었다. 황태구이 등 깔끔하고 맛있는 밑반찬도 푸짐하였는데 이에 더하여 비지찌게까지 시켜서 모두들 입을 즐겁게 해 주었으며 소주와 동동주도 곁들여 먹었다네. (물론 이날 당일 회비뿐만 아니라 연회비 보조 5만원을 이용하여 적은 식구가 푸짐하게 나누어 먹었던 거지. )
- 서빙하는 아가씨의 훤출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흘깃흘깃하는 눈빛과 "이런 집에 있기는 아깝다"거나 "그러니까 이 집이 좋은 거지"라고 하면서 한마디라도 더 시켜보려는 농담이 오가는데 김용덕은 「생불고기가 없는, 북창동 아가씨들의 죽여주는 서비스」를 화제로 꺼내 모든 이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곤 하였답니다.
- 이 자리에서 5월 18일의 《 중동고 졸업30주년기념 홈커밍데이 행사》에 우리 백등회원들이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많은 동문들의 참여를 이끌자고 하였습니다. 특히 저녁의 힐튼호텔 연회에는 부부동반하여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자고 다짐하였으니 이번 수락산 산행에 참가하지 못한 회원들도 꼭 참석하기를 바라며 각반 대표나 간사에게 지금 즉시 연락하여 참석여부를 통보해 주기 바랍니다.
- 다음 달(6월 2일)의 산행은 사전에 박회장과 상의 하였는데 과천의 정부청사전철역에서 만나 관악산의 연주암과 연주대를 오른뒤 사당동으로 하산하여 이수역 부근에 개업한 박승찬(016-229-0220)동문의 【등촌샤브칼국수 사당점, 전화 595-7114 】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였으니 널리 홍보하고 많이 참가해 주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좋은정보 고맙습니다
노강서원의 안내판만 들여다 보고 왔지요..
박세당 선생은 반남 박씨후손이라면 훌륭한 선조님으로 알고 추앙하지요..
저야 자세히는 모르지만요....ㅎㅎ
예전부터 박세당 선생의 유적지는 유명한 곳이라고 들었습니다..ㅎㅎ
좋은 정보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