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감상
임병식 rbs1144@daum.ner
티브이를 통해 영화 한 편을 시청했다. 전날 이웃 순천만 국가정원에서 재즈공연이 열리고 있어 구경한 김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더니 피곤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잠이 들어 깨어나니 저녁 열두 시를 막 넘어서고 있었다. 이때는 이미 잠이 날아가 버려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어느 방송에서는 저녁 마감 뉴스를 하고 있고, 어느 방송에서는 전에 방영한 오락프로를 틀어주고 있었다. 그런 중에 모 방송에서 ‘명화 클리닉’이란 제목으로 ‘마부(馬夫)’를 방영했다.
이 영화는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서민적 리얼리즘이 돋보이는 명화이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는지 초반 부분이 방영되고 있었다. 보자마자 바로 시선이 꽂혔다. 그것은 아마도 일전에 내가 국가 정원 내에 조성된 ‘김승옥 문학관’과 ‘정채봉 문학관’을 동시에 둘러본 여운이 남아서인지 몰랐다.
영화 마부는 시나리오가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것으로 서민의 애환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작품이다. 우선 배역으로 등장한 연기자들이 낯익은 배우들이어서 반가웠다. 수레 끄는 중노인으로 등장한 주인공 마부 김승호를 비롯해서 홀아비 주인공을 사랑하는 가정부 황정순. 고시생 아들 신영균과 벙어리 딸 조미령과 철부지 엄앵란. 그리고 주인공과 우호적인 황해. 부잣집 마름 김희갑. 거만한 부잣집 주인 주선태 등등.
다시 보는 것이지만 그중에서도 김승호의 연기는 돋보였다. 이 영화는 1961년 제11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김승호는 혼자서 7할 이상의 몫을 해낸다. 적지 않는 자식들이 딸렸는데도 돈벌이는 시원치 않다. 말수레를 끌고 생업전선에 나서는데 일상은 고단함으로 이어진다. 그때의 상황은 6‧25가 휴전되고 얼마 되지 않은 때라 궁핍한 생활환경이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몸으로 전해오는 실감은 주인공의 뛰어난 연기력이 뒷받침된 것임은 두말할 것이 없다.
검색해 보니 김승호는 향년 51세로 생을 마쳤다. 너무나 빨리 떠났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는 아동문학가 정채봉도 마찬가지다. 나와 같이 1946년생인데 54세에 작고하고 말았다.
나는 특별히 이날 그의 문학관 입구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감회에 젖어 들었다. 학창 시절 동년배로서 전남에서 문청 시절을 보내서였을까. 세 명이 교류했는데 김만옥과 정채봉 그리고 나였다. 우리는 학생교양지 <학원> 지가 마련한 ‘우리네 동산’ 코너에 작품을 투고하였다. 거기서 서로 안면을 텄다.
당시 김만옥은 시를 주로 쓰고 정채봉과 나는 산문을 주로 썼다. 두 친구는 한결같이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다. 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들보다는 농토가 있어서 밥은 굶주리지 않았다.
김만옥은 완도 청산도가 고향으로 몹시 가난했다. 그리고 정채봉은 어릴 때 아버지가 일본으로 들어가 버려서 어머니와 어촌마을에서 어렵게 살았다.
두 사람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김만옥은 30살 전후에서 일찍 결혼한 후 딸까지 낳았는데 생계를 이어가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정채봉은 그런 데로 아동문학으로 입지를 다지며 살았는데 한참 글을 쓰는 절정기에 죽음을 맞고 말았다.
문학관 입구에서 방문 사진을 남기자니 가슴이 뭉클했다. 학창시절 공모전에서 당선한 표창장이 보이는데 나에게도 그런 것이 몇 개 있어 내 경력과 오버랩이 되었다.
옆에 있는 김승옥 문학관을 보면서도 감동했다. 그의 초기작이면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무진기행(霧津紀行)은 그가 23세 때 쓴 작품이다. 한국문학을 통틀어 이 작품만큼 유려한 필치로 써낸 작품은 없다고 나는 평가한다. 그 작품을 불과 약관의 나이에 집필했다니. 그는 문학 천재가 아닐까 한다.
전시물을 보니 이미 10여 년에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는데, 나중 작고하면 금관문화훈장은 예약된 것이 아닐까 한다. 두 작가를 기리는 문학관의 위치가 절묘했다. 메인 국가 정원에서 스카이튜브를 타고 갈대숲을 구경하는 코스 끝에 건물이 지어져 관광객이 자연스럽게 둘러볼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기획이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 사람의 문학관을 둘러봐서인지 예술적 문예 작품이기도 한 마부는 감동을 주었다. 줄거리는 홀아비 중늙은이 마부는 어렵게 살아간다. 부잣집에서 말 한 필을 빌려 짐을 실어 나르는데 벌이는 시원치 않다. 그런데 식구는 네 명이나 된다. 두 번이나 고등고시에 떨어져 공부하는 큰아들, 출가한 벙어리 딸은 내침을 당하여 집에 와 있고, 철부지 딸은 난봉꾼에게 꼬여 지내다가 겨우 직장을 잡는다. 막내아들은 남의 물건을 훔치는 등 애만 태운다.
그런 중에도 남의 집 식모로 분한 황정순이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 막판에는 주인집 자동차에 치여 다쳐, 일을 못 하게 되는데, 주인은 말을 팔겠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고시생 아들은 시험을 치르고 나서 발표를 앞두고 아버지 대신 말을 부리는데 주인으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한다. 차에 치여 아버지가 다쳤는데 말까지 파는 건 너무한 처사가 아니냐고 따지니 ‘법 공부했다고 유세 떠냐.’며 교만을 부린다.
이것은 나중 황정순이 대신 돈을 대주어 말을 되사는 장면과 함께 관객들의 마음을 한껏 고조시킨다. 이어서 큰아들은 마침내 고시에 합격한다. 발표를 한날 이들은 서로 끌어안고 기쁨을 나눈다. 전형적인 해피엔드 작품이다. 나는 이것을 보면서 60여 년 전 이 영화를 보면 감동을 새삼 느꼈다. 당시 극장 안은 아들이 사법고시 합격한 장면이 나오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는데 그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그 무렵 영화 ‘춘향전’에서 변 사또가 수청을 거부한 춘향이를 옥에 가두고 거하게 잔치를 열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주흥이 물의 익어 갈 때 행색이 허름한 차림의 암행어사가 나타난다. 암행어사가 음식을 청하니 사또는 상갓집 개 홀대하듯 마지못해 초라한 술상을 내준다. 이때 암행어사는 목청을 높여서 시 한 수를 읊는다.
‘金樽美酒千人血(금준미주천인혈)이요
玉盤佳餚萬姓膏(옥반가효만성고)라(이하생략)
즉, 금술잔에 좋은 술은 천 백성의 피요.
옥쟁반에 담긴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땀이라‘
시를 읊자 분위기는 갑자기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가라앉아 버린다. 이와 동시에,
“암행어사 출또야!”
외침에 장내는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이것은 지극히 고전적인 기법이지만 그래도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관객들은 한껏 감정이입이 되어 마음껏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영화 한 편을 보고 나니 새벽 두 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나는 새벽잠을 놓쳤지만 하나도 피곤하지가 않았다. 구태의연한 테마 이기는 하지만 통쾌함을 선사해 주었다.
모처럼 통쾌함에 젖어본 것은 하도 요즘 세상이 답답하고 불안한 기운이 엄습하고 있어 별로 웃을 일이 없는데 비록 영화 속에서나마 극적인 대반전이 일어나고 있어선지 몰랐다. 2024)
첫댓글 순천만국가정원 한 곳에 순천이 배출한 김승옥 정채봉문학관을 지어 놓아 정원도 보고 갈대밭축제장도 다 함께 봤으니 다양한 구경을 잘 한 것 같습니다. 특히 정채봉작가와 소년 시절에 함께 문학활동을 하셨으니 감개가 무량하셨겠습니다. 50대에 고인이 되었으나 아동문학의 큰 궤적을 남겨 문학관이 마련 되었으니 정작가는 일찍 고인이 되었어도 세상을 잘 살다 갔습니다. 정작가를 생각하면서 감회가 새롭고 많은 상념이 떠오르겠습니다. 임선생님도 보성이 낳은 훌륭한 문학가이시니 차후 좋은 결과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마부의 김승호연기는 천하 명연기 일 것입니다. 당시 명배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좋은 영화를 잘 보셨습니다. 좋은 작품 잘 읽었습니다.^^♡
김승옥문학관과 정채봉문학관을 둘러보고 와서 인지 리얼리즘이 짙은 마부 영화가 무척 실감나게 느껴졌습니다.
옥죄이고 사는 사람들에게 부잣집 사장을 머쑥하게 만들어주며 대리만족을 하게 만든 고등고시합격. 60년 전에
그영화를 볼때 관객들이 우래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내던 일이 떠올라 덩달아서 흥분된 기분이 되었습니다.
마치 옛날 "암행어사 출도야!" 외칠때 터져나온 박수도 새삼 소환이 되었습니다.
그 기분이 가시기 전에 느낌을 남기려고 작품을 서둘로 써봤습니다.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김승옥 정채봉 문학관 관람과 추억 짙은 영화감상이 교차하면서 문학적 감성이 어우러집니다 선생님께서는 옛 학원지의 동기였던 정채봉 작가와 불우했던 김만옥 작가와의 아쉬운 인연을 가끔 떠올리시는군요 시대를 거슬러 그때 선생님께서 일찍 문학에 전념하셨더라면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수필의 길은 창작의 자유에 제약이 많아 어느 장르보다 어려움이 크다할 것이나 선생님께선 이미 일가를 이루셨으니 이제 남은 일은 불세출의 명작을 밪어내는 것 뿐이지요 명작은 작가의 손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평에 의해 탄생하는 것일진대 기 발표작 중에서도 명품이 탄생하리라 믿습니다
두분의 문학관을 돌아보니 많은 감회가 서렸습니다.
문학관은 명당자리에 위치하고 있어 순천만정원을 둘러보러온 온 사람들은
자연스레 방문을 할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더군요.
모처럼 명화 마부를 시청했는데 다시 보아도 명화가 아닌가 싶더군요.
배우 김승호는 튀어난 연기력으로 영화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