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여행 중 특별히 느낀 것
임병식 rbs1144@daum.net
좋은 구경하는데 컨디션까지 따라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인간사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모처럼 해외여행에서 두 가지 행운은 누리지 못했다. 먼저 출발 때부터 심야버스를 타는 바람에 신경이 예민해져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거의 뜬눈으로 새우다시피 해서인지 목이 잠겨오기 시작했다. 이내 감기가 들어버렸다.
그 바람에 본의 아니게 여러 사람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약을 지원받게 된 것이다. 막판에는 설사까지 겹치는 바람에 이동 중에 실수나 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그렇지만 다행히 일행 중 어느 분이 준비한 정로환을 건네주어서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먼저 인상 깊은 구경을 한 것은 대만에서 공자(孔子)님의 흔적을 대하고 임어당(林語堂) 선생의 고택을 만난 것이다. 두 곳의 유적지가 모두 인상적이었다.
내가 林 가라는 상수를 놓고 볼 때 이 두 분은 나와는 잇닿은 인연이 있다. 먼저 공자님은 나의 태시조(太始祖) 되시는 비간공(比干公)과 관계가 깊다. 비간공은 은나라 왕족으로서 말년에 폭군 주왕(紂王)에게 참화를 입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카인 주왕에게 바른 정치를 하도록 간(諫)하자,
“옛 성현의 말에 충신은 심장에 일곱 구멍이 있다는데 확인해 보자”라며 칼로 가슴을 찔러 심장을 꺼내었다. 이 내용은 공자님이 지은 논어(論語) 미자 편에 기술되어 있다.
비간공은 폭정으로 나라를 그르치고 있는 주왕의 마음을 돌려세우려고 했으나 듣지 않았다. 누구 한 사람 선뜻 나서서 바른말을 못 하는 상황에서 공은 홀연히 극간을 했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 연유로 중국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공을 충신의 화신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다.
당신의 충의를 먼저 알아본 사람은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운 무왕이었다. 무왕은 공의 부인과 아들이 장림산에 숨어서 은거한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였다. 그리고는 임 씨라는 성을 사성(賜姓)하고 견(堅)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다음은 공자님이다. 공자님은 비간공 사후 1,000년 후에 공의 무덤을 찾았다. 제자들을 이끌고 와 참배 후 비문 하나를 남겼는데. ‘殷比干莫(은비간막) 이었다. 그것은 비간공의 무덤이란 뜻. 공의 무덤은 중국 복건성 위하시에 있는데 지금까지 공자님의 행적을 더듬어볼 때 가장 오래된 친필 글씨로 알려져 있다.
공의 묘소에는 중국에서 가장 많은 비석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모두 64개인데 위로부터는 진, 한, 당, 송에 걸쳐있다. 그러니 각별한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임어당 선생은 그분의 후손이니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 임 씨는 신라 말 당나라에서 임팔급(林八及) 공이 도래(渡來)함으로써 우리나라에서 핏줄을 이어가게 되었다. 처음 자리 잡은 곳은 지금의 평택. 이전에는 팽성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한데 재미있는 사실은 당신의 고향이 복건성에 있는 팽성(彭城)인데 이곳에 와서도 똑같은 지명을 붙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조상님은 중국에서 넘어오기는 했으나 한족(漢族)은 아니다. 일찍이 한자를 만들어 쓴 동이족이 상(商)나라 세우고 한반도를 비롯하여 산둥 지방 일대에서 터 잡고 살았다. 그것은 홍산문화권이 발굴되고 단군조선의 실체가 드러남으로써 역사적 사실로 증명되었다.
문중에서는 20여 년 전 터 잡고 살아온 세거지(世居地)를 수원대학교에 학술조사를 의뢰하여 고증을 받았다. 그것을 근거로 농성(農城)에다 팔급 공의 동상을 건립하였다.
그밖에 눈여겨보면서 특별히 느낀 것은 옛 건물을 허물어 버리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점이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부수고 없애는 것을 정비나 개발이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와 똑같이 일제의 지배를 받았음에도 그 잔재들을 그대로 보존하여 활용하는 것이 유달라 보였다.
어느 골목에서는 유치원생들과 초등학생들이 야외 학습을 나왔는데, 이색적이었다. 길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 천진난만하고 신선해 보였다. 통행인이 이리저리 비껴가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하는 것에만 열중한 것이 그 나라 민족성을 보는 듯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나는 고궁박물관을 둘러보고서 다소 엉뚱한 확신을 얻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대만 사람들은 우리의 우려와는 달리 중국 침략을 걱정하지 않고 무사태평하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북한 위협에 노출된 한국을 더 걱정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웃었지만, 알고 보니 그럴만한 근거가 있었다.
수천 년대에 걸쳐 만들어진 어마어마한 문화유물을 보유하고 있는데, 어느 정신 나간 침략자가 부수겠는가. 민족과 역사 앞에 죄인 됨을 무릅쓰고 폭격을 감행하겠는가. 그러고 보면 장개석 총통은 혜안이 있어 국가보존과 문화재보호라는 양수겸장의 카드를 쓴 것이 아닌가 한다.
구경하는 동안 내내 입에 맞지 않는 음식과 오한과 발열, 설사로 인하여 기분은 더없이 우울하고 걱정으로 보낸 날이었으나, 그런대로 얻어들은 것이 많은 여행이 아니었는가, 한다. (2024)
첫댓글 귀한 여행을 통해 孔子님, 太始祖 比干公님과 林語堂선생 故宅을 보셨으니 노년에 願없는 즐거움이 되셨겠습니다.
好事多魔라고 감기때문에 어려움을 당하였지만 이제는 快癒되었으니 다행입니다.
고궁박물관이 존재함은 참으로 기가막힌 평화의 遺産이지 싶습니다.
비간공님의 더할 수 없는 충절은 萬歲 永生의 본이 되어 후손에 큰 자랑이 되리라 여깁니다.
좋은 여행 축하드립니다.^^♥
대만 여행은 감기몸살로 인해 컨디션이 좋지 않았으나 많은 곳을 구경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공자님 사당과 임어당의 고택방문은 특별히 뜻이 깊었습니다.
태시조인 비간공을 가장 존경한 분이 공자님인데 공자님의 유일한 친필을 비간공 사당에 보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대왕조와 유명인사들이 64개나 비를 세워놓은 것은 임씨의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 발 객지라는데 모처럼의 해외 나들이에 감기에 배탈까지 겹쳐 고생이 많으셨지만 여러 모로 뜻 깊은 여정이었군요 건강은 회복하셨는지요
밤차를 타느라 잠을 설친데다 감기몸살에 배탈까지 나서 곤욕을 치렀으나 좋은 구경을 많이 했습니다. 공자사당, 운평운하. 야시장, 도교사원, 대만국립문학관, 임어당고거, 장개석기념관등등 볼만한 곳이 많아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