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 행 코 스 : 1일차 히타카츠 관광
미우다하마해수욕장~한국 전망대~에보시타케전망대~와타즈마신사등
2일차 이즈하라 관광
아리아케산 등반~덕혜옹주 결혼기념비~팔번궁 신사등
(현지에서 더 좋은 곳을 찿아 다소 변경될 수 있습니다.)
※ 차 량 코 스 : 고래등오거리(새천년약국앞) 02:30⇒삼성생명⇒상공회의소⇒고현교회앞
02:37⇒공고정문입구 02:40⇒북부시장제일산부인과⇒야나기 맞은편 02:45
⇒홈플러스 맞은편 02:47⇒다사랑 앞 02:50⇒부송동화물터미널 02:55
⇒기안아파트 02:58⇒팔봉장례식장 03:08⇒만남의광장 03:10⇒목적지로
※ 협 조 사 항 : 차량 탑승시 정해진 승차지에서 탑승할 수 있도록 협조 부탁드립니다
☏ 문 의 전 화 : 회 장(김창곤) 010-2603-6567 총 무(김영석) 010-3684-5596
재 무(이덕순) 010-5656-3020 기 사 님(최영대) 010-3673-7997
※ 공 지 사 항 : 본 산악회는 순수 비영리 산악회로써 산행중 안전은 각자의 책임이며
불의의 사고에 대한 어떠한 법률적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과 일기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 탑마루 산악회는 매주 토요일 4회 산행하며 회비는 25,000원입니다.
(이번 대마도 관광은 1박2일로 회비는 370,000원입니다)
♧ 대마도는 해외여행으로 꼭 여권이 있어야합니다
여권이 없으신분은 여권사진 1매 지참하셔서 시청 민원실에 신청하며
3일 정도면 나오니까 미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 예약은 산악회 예약방에서 댓글이나 전화로 신청해 주세요..
- 입금은 (이덕순) 농협 : 352-1070-2262-23 입니다.
♠카페명:http://cafe,daum.net/nfiksan (익산탑마루산악회)
대마도의 역사와 현황
대마도(對馬島)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결사 항전한 (대마도) 의병들이 이를 격퇴했고 의병 전적비(戰蹟碑)가 대마도 도처에 있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1949년 1월 7일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첫 연두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이날 이승만은 한일국교재개를 언급하면서 대마도 문제를 꺼냈다.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라는 미국 요구에 맞서기 위한 지렛대로 대마도 카드를 뽑아든 것이다. 이 대통령의 발언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그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 지 사흘 뒤인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다.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외무부를 시켜 그해 9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의 연두 기자회견 직후인 1949년 1월 18일 제헌의원 31명이 '대마도 반환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얼마 후 있게 될 센프란시스코 미일 강화회의에서 대마도 반환을 관철시킬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국내의 한 언론이 2005년 입수한 미국 국무부 외교문서에 따르면 1951년 4월 27일 한국 정부는 미 국무부에 보낸 문서에 다음과 같이 썼다. "한국은 일본이 대마도에 대한 모든 권리, 호칭, 청구를 분명히 포기하고 그것을 한국에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 아쉽게도 같은 해 7월 9일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가 국무부에서 존 덜레스 미국대사를 만나 대마도 문제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전하자 덜레스는 "대마도는 일본이 오랫동안 통제하고 있고 이번 평화조약은 대마도의 현재 지위에 영향을 미치지않는다"며 한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후 우리 정부도 더 이상 대마도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조선 초에도 강력하게 제기됐었다. 그것은 고려 때 대마도에 대한 인식이 여진족과 탐라(제주도) 중간쯤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와 접경한 여진족은 고려 관직을 받는 것을 영예로 생각했고 이 전통은 청나라가 성립되던 조선 중기까지 이어졌다. 탐라도 상대적 독립을 누리다 고려에 복속됐다. 반면 대마도는 상대적 독립을 유지했지만 고려나 조선의 관직을 얻고 생필품을 얻기 위한 교역을 꾸준히 요청했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 대마도를 다루는 고려와 조선의 원칙이었던 것이다. 왜구의 침략이 계속되자 세종 원년(1419년) 상왕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결심한다. 그때 밝힌 교유문(敎諭文)의 서두다.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대마도는 섬으로 본래 우리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들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뛰놀기 시작했다." 태종의 교유문은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그리고 정벌이 끝난 후 대마도 도주에게 고유문에서 그는 다시 한번 대마도가 우리 땅이었음을 명확하게 밝힌다. "대마도가 섬으로 경상도의 계림(鷄林-경주)에 예속되었던 바 본시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이 문적(文籍)에 실려 있어 확실하게 상고할 수 있다." 물론 대마도가 제주도나 거제도 같은 우리 땅은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대마도가 우리에 조공을 바치던 땅이라고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태종 때 대마도가 일본 땅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15세기 초 태종 이방원의 대마도 인식과 20세기 중반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인식은 일맥상통한다. 이후 조선은 대마도에 대해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다. 그저 왜구의 근거지 역할만 해주지 않으면 좋다는 정도였다. 임진왜란이 대마도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양다리를 걸쳤던 대마도주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일본화를 지향했고 임란 직후인 17세기 초 일본의 막번체제에 편입됐다. 조선 전기 때만 해도 조선의 신하임을 당당히 밝혔던 대마도 도주가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적대로 1870년대 완전히 일본화됐다. 지금 대마도는 일본이 실효 지배하고 있다. 근거는 우리가 독도를 실효 지배하는 것보다 훨씬 근거가 약하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에 비하면 대마도가 우리 땅' 이라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고 근거도 있다. 대마도는 3세기 '위지' 왜인전의 기록처럼 산세가 험하여 깊은 숲이 많았고, 길은 거의 없어 새나 사슴이 겨우 다닐 정도라 전답이 드문 자연환경이다. 2015년 대마도 인구는 약 3만 7천명 정도이고 우리나라 남단에서 약 53km 떨어진 위치에 있으며, 일본 큐슈 본도에서 제일 가까운 나고야에서 147km, 그러니 일본보다는 우리나라에 더 가까운 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첫댓글 이미 산악회 알림방에 공지해서 45명 예약 마감했는데 피지 못할 사연이 있어 5분이 취소되여
대마도에 꼭 가실 분 5분만 정중히 초대합니다.
대마도 관광 사진 및 함께 가실분들을 알고 싶으신 분은 우리 산악회 알림방을 참고 하시면 되겠습니다.
싱그러운 연초록 나무잎의 속삭임을 들어가며
함께할 대마도 1박2일 여행은 회원님들의
따뜻한 사랑으로 45명 마감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알림방에서 학인바랍니다.
감사합니다~^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