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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일(주일) 주일설교 출애굽기 32:15~35 '여호와께 헌신' 새찬송가 278장 여러해 동안 주떠나
오늘은 출애굽기 32:15~35 말씀을 중심으로 '여호와께 헌신'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장면을 보고 제사장인 형 아론의 변명을 듣고 크게 노한 지도자 모세는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친히 새겨주신 두 십계명 돌판을 깨뜨리고 금송아지를 불사릅니다. 그리고 모세는 죄를 범한 백성 3천명 가량을 레위 자손을 통해 죽이고, 이튿날 백성의 죄사함을 구하고자 여호와께 나아가 중보기도를 합니다. 이것이 본문의 간략한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29절에 “여호와께 헌신”이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여호와께 ‘헌신’은 그리스도의 제자의 필수조건입니다. 여기서 제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러면 성도님들은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의 제자’와의 차이점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같은 말 같기도 하고, 다른 말 같기도 하고 또는 처음에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가 믿음이 더 성숙하면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성경에서 “제자”라는 뜻의 그리스어는 ‘마테테스’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학생’이나 ‘배우는 사람’만을 의미하지는 않구요. 그리스도의 제자는 ‘주님을 따르는 자’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완전히 준수하며, 그 가르침을 자신의 삶과 행동의 원리로 삼는 자를 말합니다. 그 당시 종교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은 교만하게도 자기들을 ‘모세의 제자들’로 여겼습니다(요한복음 9:28). 반면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 훨씬 전부터 ‘제자’라고 불렸습니다. 참고적으로 '제자도'란 말도 있는데요. ‘제자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추구해야 할 가치 및 삶의 자세와 내용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의 제자도는 예수님의 부르심과 함께 시작되었고, 이 제자도에 따라 이들은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기로 했습니다(마태복음 9:9).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도의 대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제자도는 완전히 헌신된 삶을 요구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복음 14:33). 제자도에게는 희생도 필수적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 예수님도 ‘제자’라는 말은 쓰셨지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쓰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최초로 나타난 곳은 사도행전인데요.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사도행전 11:26). 아마도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뜻인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교회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아마도 ‘멸시’의 의미를 담은 명칭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쟁이’라는 말 정도겠지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성경에 단 2 번 더 등장합니다(행 26:28; 벧전 4:16).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가 원래는 ‘경멸적’인 뜻이었다는 근거는 베드로전서 4:16에도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한 번 따라해보세요.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인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보세요.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요한복음 1:12).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요한복음 3:3).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날마다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는 사람입니다(고린도후서 3:18).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은 이름만,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도 되어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제자도의 대가를 알면서도 예수님을 따르는 데 생명을 바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희생을 요구하는 부르심에 순종하고 주께서 이끄시는 곳이 어디든 따르는 사람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 제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고수하며, 그리스도를 삶의 제1순위로 여기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적극적으로 다른 그리스도인 제자를 양육하는 일에 참여합니다(마태복음 29:19-20). 바울은 그리스도인 제자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여호와께 헌신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여호와께 헌신하려면? 깨뜨려져야 합니다(15~20절) 오늘 본문 15~20절에 보면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백성의 우상숭배현장을 목격하고 크게 노하여 두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립니다. 왜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의 상징인 두 돌판을 깨뜨렸을까요? 모세가 산 아래로 하나님이 말씀이 새겨진 돌판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영에 던지는데요. 산 아래서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모세가 하나님이 직접 기록하신 돌 판을 던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감정적으로 성질이 나서 던진 것일까요? 물론 그것도 일부는 있겠지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이 장면을 여러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산 위에서 산 아래 있는 우리에게 떨어지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보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20)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불순종하고 한때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여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처럼 된 사람들을 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들을 어떻게 당신께 돌아오게 하십니까?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쳐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통해서 산 아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제사장 아론이 어떤 자들로 드러나게 되는데요, 하나님을 대신해서 우상을 섬기되 금송아지를 우상으로 섬기는 자들로 폭로됩니다.
십계명 안에는 우상숭배 금지의 명령이 들어있습니다. 제1계명(출 20: 3)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 • 제2계명(출 20:4-6)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그것에 절하지 말며" "그것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다. 즉,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의 예배와 사랑을 원하시는 분이시며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의 천대까지 미칩니다. 시내산위에서 하나님이 직접 새겨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진영에 깨어지게 되니 그동안 내가 하나님이라고 믿고 그 하나님께 내 진실한 마음을 바치고, 나름대로 섬기고, 봉양했던 그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우상인 ‘금송아지’라는 것이 만천하에 폭로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 뿐 아니라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님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각자 자신의 우상을 만들고, 섬기고, 숭배합니다. 그것은 바로 에덴동선에서 선악과 열매를 따 먹은 타락한 아담들의 본성입니다. 그런 인생에게 하나님의 두 돌판이 깨어져 구원의 은총이 임할 때 지금까지 내가 섬기고 존중히 여기던 것이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서 알게 됩니다. 언제 그것을 깨닫게 되냐하면 산에서 돌 판,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속으로 떨어질 때 그 자각과 깨달음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돌판이 내 삶에, 내 인생속에 깨어지게 될 때 내 안의 금송아지가 불살라지도 부서어져 가루가 되고 물에 뿌려져서 마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20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그들이 만든 송아지를 가져다가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니라” 자신이 그동안 섬기던 우상을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서 쓰디 쓴 죗값을 마치 오염된 더러운 물을 마시는 것처럼 치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19절의 ‘깨지다’는 히브리어로 “샤바르”인데, 그 의미는 “깨뜨리다, 부수다, 산산조각 내다”입니다. 그래서 “샤바르”는 성전의 우상을 부술 때도 사용되었지만, 성도의 마음이 말씀에 의해 깨질 때도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 예를 살펴보면, [대하14:2~3]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찍고” [시 147:3] “상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시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은 말씀이 깨어져서 그 마음이 상한 자의 마음속에 새겨진 말씀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돌에 새겨진 우리 밖의 말씀은 우리를 심판하지만, 우리 마음에 와서 깨어져서 깊이 우리의 심비에 새겨진 말씀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 새겨져야 합니다. [신 6: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겔36:24~28]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복음성가] 다윗과 요나단의 “부서져야 하리”라는 [찬양 가사] 부서져야 하리 부서져야 하리 무너져야 하리 무너져야 하리 깨져야 하리 더 많이 깨져야 하리 씻겨야 하리 깨끗이 씻겨야 하리 다 버리고 다 고치고 겸손히 낮아져도 주 앞에서 정결 타고 자랑치 못할 거예요 부서져야 하리 무너져야 하리 깨져야 하리 깨끗이 씻겨야 하리
적용) 나의 삶 속에,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오셔서 깨어지고 부서지고 불살라져야 할 나의 금송아지는 무엇입니까?
둘째로, 여호와께 헌신하려면, 언제나 회개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21~24절). 모세가 금송아지를 만든 아론에게 묻습는다. 그러나 아론은 모세의 질책에 변명으로 일관합니다. 21절에서 2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진노하는 모세 앞에서 그 형이자 제사장인 아론은 자기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고 자신의 마음을 찢기보다는 모세의 노를 누그러뜨리려고만 하고, 자신의 악함을 고백하는 대신 백성의 악함을 통해 자신은 뒤에 숨어버립니다. 마치 자신은 그 일에 전혀 잘못이 없는 듯 말합니다. 아론은 지도자로서 부패한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지 않고 백성의 부패한 요구를 들어줍니다. 그럼으로서 아론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 말씀인데요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내가 사람을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하나님의 사람에게 사실 다른 기준이 없습니다. 그 기준은 바로 ‘내가 사람을 좋게 하느냐, 하나님을 좋게 하느냐’입니다. 구약의 다윗왕 역시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때로는 인간적으로 넘어지고 실수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유혹에 넘어가기도 했고, 자기 대신 싸워줄 용사가 몇 명인지 궁금하여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백성을 계수하는 일을 무모하게 감행하기도 했었고, 자기 열정에 취해 웃사에게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기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이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려면 자신의 죄가 드러났을 때 책임전가보다는 회개해야 합니다. 책임전가는 아담과 하와 때부터 내려오던 인류의 중병입니다(창 3:12~13) [창세기 3:11~13]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바울은 늘 세상에 있는 육체의 장막을 빨리 벗어버리고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갔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빨리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 주셔서 주님과 함께 거하는 영원한 나라에서 살게 되길 소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고백합니다(고후5:8). 살려고 발버둥치는 우리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바울을 긴장시키는 문제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죽고 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천국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세상에 살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된다'는 것인데요. 이런 바울의 마음이 고후 5장 10절에 나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할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바울은 이를 위해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바울을 내가 이 세상에 살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9) 세상에 살든지 하나님이 불러 가시든지 간에 우리의 목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바로 자신에게 지금 주어진 과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힘쓴다'는 말은 '필로티무메다'(philotimumeda)라는 헬라어 용어로 그저 한번 해본다, 노력해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야망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인생을 한번 살고 싶다라는 야망입니다. 천국 가서 행복하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남겨놓은 몇 수 십 년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내 삶의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나의 야망으로 삼고 내 인생을 한 번 뛰어 보겠다는 야망입니다.'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는 그런 인생을 두고 칭찬하고 기뻐하실 것이기에 그것만이 사도바울 자신에게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책임전가하지 않고 회개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삶의 전부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삶의 태도와 자세가 바로 헌신하는 자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적용) 내가 죄를 질책받을 때 책임을 전가하며 변명합니까? 아니면 책임을 지며 회개합니까? 나의 약함을 고백합니까? 남의 약함을 고발합니까? 나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합니까?
셋째로, 여호와께 헌신하려면,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25~35절). 모세는 본문 25절에서 29절 말씀에서 레위 자손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에 빠뜨릴 큰 죄를 범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 3천 명 가량을 처형합니다. 모세는 26절에 ‘여호와의 편’에 선 레위 자손을 통해 회개하지도 않고 방자한 자들을 칼로 칩니다. 여호와께 헌신하려면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레위 지파는 복을 받은 지파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레위 지파는 큰 저주를 받은 지파였습니다. 창세기 49:5절 말씀에 보면 “그들의 칼은 잔해 하는 기계”라고 했습니다. 야곱의 아내 레아의 아들이었던 ‘시므온과 레위’를 가리켜 성경은 “잔해 하는 기계” 즉, 살인 기계라고 했습니다. 창49:6절에는 “그들은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성격이 얼마나 포학했는지 이어지는 7절에서는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저주 받은 결과로 그들은 야곱 중에서 나누어지고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날 레위 지파하면 우리는 저주 받은 지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제사장이 된 지파’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복을 선언하는 복된 지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신명기 33:10~11절에는 레위지파가 하나님께 받은 복에 대해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단 위에 드리리로다. 여호와여 그 재산을 풍족케 하시고 그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복을 받았는지 하나님께 대표로 제사를 드리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물질의 복을 받아 재산이 풍족한 복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그들을 대적하거나 그들을 미워하는 사람의 허리를 하나님께서 꺾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은 참으로 놀라운 복을 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저주 받은 레위 지파가 복의 근원이 되는 지파가 되었을까요? 그들이 이렇게 복을 받고 인생이 역전되고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게 된 사건이 오늘 본문인 출애굽기 3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너무나도 진노하여 십계명의 돌 판을 던져 깨어 버리고 금송아지를 불살라 그것을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물에 타서 마시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 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만든 금송아지를 부순 모세를 원망하고 시비를 걸면서 방자하게 행동하며 그 원수 마귀 편에 서서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이에 모세가 분노하여 진문에 서서 12지파를 모두 모으고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오라”(출32:26) 이 때 11 지파가 잠잠했지만 오직 한 지파만이 그 마음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 모세 앞에 나왔습니다. 그 한 지파가 어떤 지파겠습니까? 바로 ‘레위지파’입니다. 모세는 레위 지파에게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죽이라”(출 32:27)고 명령을 내리자 레위 지파는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여 칼로 하나님을 거역한 자신의 민족을 그 자리에서 3천명이나 죽이는 아주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범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죄를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에 모세는 레위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 32:29)고 축복하였습니다. 사실 레위지파가 행한 행동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거짓 우상을 만들고 거짓 우상을 경배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 큰 죄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형제요 가족이었기 때문에 칼을 들고 자신들의 이웃과 형제와 친척을 죽인다는 것은 도무지 인간의 인정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레위인들은 이런 인간의 정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레위 지파는 오직 사람의 얼굴을 보고 사람의 편에 설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편에 서서 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여호와께 헌신하는 것은 혈연관계도 넘어섭니다. 주님께 오는 자는 자기 가족과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능히 그의 제자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여호와께 헌신하고 여호와 편에 서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이러한 결단과 각오가 없이는 아무도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주님의 제자도는 분명한 우선순위와 대가지불이 있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주님을 사랑하고 따라간다고 하는 것은 가족에게 버림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라는 제자의 길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가족관계에 대한 도전을 극복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좁은 길입니다. 레위자손은 하나님 편에 서서 그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그 형제를 뛰어넘었고, 그 친구를 뛰어넘었고, 자기 이웃도 뛰어넘었습니다. 그런 힘겨운 결단이 있었끼에 그들에게 임했던 저주가 바뀌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면 반드시 저주가 변하여 축복이 됩니다.
적용) 여호와께 헌신하고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서 내가 칼로 치고 끊어내야 할 죄의 유혹과 모임은 무엇입니까?
결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헌신된 그리스도인, 헌신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헌신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어지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깨어질 때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 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헌신하려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삶의 우선순위를 정립하시고, 또한 인정을 뛰어넘어 하나님 편에 헌신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터인데, 그 때 우리의 삶이 오늘 말씀처럼 여호와께 헌신되었느냐의 기준으로 판단받을 때 오늘 본문의 레위 지파처럼 하나님께 인정받는 그런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