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에도 꼼짝 없이 집에 박힌 경우가 많다. 달리 할 일이 없으니 뭔가 색다른 먹거리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여름 한 철 저장식품을 준비해야 할 때인지라 열무 물김치를 담그고는 이것을 넣을 공간을 김치냉장고에 만들려다 보니 작년에 사두었던 서리태가 보인다. 작년에 무공해 서리태가 싸게 나온 게 있어서 20kg을 사서는 1/4 정도를 쓰고 남은 것이다.
일부는 시장 뻥튀기 아저씨에게 튀겨 달래서 깡통에 담아 사무실 책상에 두고 매일 조금씩 먹고 있다. 마구 빠지는 머리카락이 심난해서다. 장인 생신을 우리 집에서 치르면서 마무리 입가심 음식으로 검은 콩국수를 대접했더니 그 고소함에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던 기억도 새롭다. 영양이면 영양, 맛이면 맛, 서리태는 콩의 제왕이라고 하지 않던가.
서리태가 보이니 당장 한 여름 먹을 콩국수용 콩국을 장만해 놓기로 쉽게 합의가 되었다.
우선 서리태를 한 되 정도 물에 깨끗이 씻어 밤새 불려 두었다. 서리태를 불릴 때 주의할 점은, 첫째, 충분히 불려주어야 나중에 곱게 갈린다는 것. 둘째, 그렇다고 요즘처럼 날씨가 더우면 자칫 불리다가 콩이 쉬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서늘한 곳(냉장고 안 등)에서 불릴 것 셋째, 물을 충분히 부을 것. 나중에 콩이 불면 물이 부족할 경우가 많다. 지나치게 많은 것도 좋지 않지만 부족하면 안되므로 가끔 보면서 콩이 물 위로 올라올 정도가 된다면 물을 더 부어주어야 한다.
서리태가 불게 되면 마른 콩의 4배 이상의 부피가 되어 완두콩만해지고 검은 껍질을 벗기면 연녹색 속살이 드러나면서 손으로 힘을 주어 비비면 쉽게 뭉게질 정도가 된다. 검은콩은 콩껍질을 버리지 않으니 이를 벗길 필요도 없다. 콩껍질이 부드럽고 맛이 좋고 영양도 많기 때문이다. 사실 콩껍질 벗기는 것이 콩국 만드는데 가장 많은 공력이 드는 부분이고 다음으로 콩 간 것을 천으로 걸러 짜서 하얀 콩물만 받아내는 것이 다음으로 많은 공력이 드는 부분인데, 검은콩으로 할 때에는 이 과정들이 생략되니 훨씬 만들기가 쉽다.
이제 이것을 삶을 차례인데, 이 부분이 콩국의 고소함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단계이다. 어떤 사람은 20초만 끓여라, 어떤 사람은 넘치려 할 때 뚜껑을 열어 10초만 삶아서 찬물에 식혀라 등등 온갖 레시피들이 난무하는 것도 이 단계의 중요성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 10여년 전에 처음 콩국에 도전할 때 콩이 곱게 갈아지지 않는다고 이것을 압력밥솥에 푹푹 삶아서 갈았던 적도 있다. 곱게 갈리기는 하지만 콩의 고소한 맛이 너무 없어서 한동안 무지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콩의 불림 상태, 불의 세기와 솥의 특성, 콩과 물의 양 등등 삶는데 변수가 너무 많아서 특정 상황에 맞춰진 특정 레시피로는 90% 이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 모든 음식의 성패는 레시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성에 있다.^^
나의 경우에는 콩을 삶을 때는 절대 다른 일을 하지 않고 불 옆에 붙어 있다가 물이 끓어 콩 거품이 넘쳐나오려 하면 얼른 불을 약간 줄이고 콩을 직접 씹어보면서 비린내가 날 정도로 덜 익은 상태를 지나 너무 익어 고소함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상태 바로 전에 불을 끈다. 결국은 수시로 콩을 씹어보면서 온 신경을 혀끝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콩을 제대로 삶기만 하면 어려운 과정은 다 끝난 거다. 양푼에 한 번 먹을 분량의 콩과 콩 끓인 물을 적당히 덜어, 양푼째 찬물에 담가 전체를 식힌다.(콩을 식힌답시고 찬물로 씻는 경우가 있는데, 회를 물에 씻어서는 안되는 것처럼 콩국용으로 삶은 콩도 절대로 물에 직접 씻어 식혀서는 안된다. 아까운 고소함이 조금이나마 손실되니까) 적당히 식으면 믹서에 콩과 콩 삶은 물을 함께 넣고 곱게 간다. 땅콩, 통깨, 잣 등을 넣는 것도 좋지만 검은콩 본래의 맛을 느끼고자 한다면 그럴 필요 없다. 아니 검은콩만으로도 충분히 넘칠만큼 고소하다. 회색빛 콩국에 검은콩 껍질 조각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이 독특하다.
소면을 쫄깃하게 삶아서 찬물로 식혀 사리를 만들고,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맞춘 걸쭉한 검은콩국을 부은 다음, 오이, 열무김치, 달걀 등을 얹어서 먹으면 그 극강의 고소함에 다른 콩국수는 먹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나머지 삶은 콩은 잘 식혀서 한 번 갈아먹을 분량씩을 삶은 물과 함께 위생비닐봉지에 담아 밀봉하여 냉동실에 얼려두고, 먹기 전에 바로 갈아먹으면 시원하고 고소한 냉콩국이 된다. 한번만 신경쓰면 여름 한 철 먹을 콩국수용 콩국을 장만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웃이나 친지들에게 한 봉지씩 나눠주기도 편리한데, 나중에 어떻게 이렇게 고소하냐는 전갈이 오면 신비스럽게 미소지어주면 된다.
우리의 연륜은 한 철 먹을 저장식품을 마련하는 '살림'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시집올 때 아무 것도 못하던 아내가 지금은 5월에 한여름에 먹을 열무김치를 담으며 주변에서 '살림꾼' 다 되었다는 소리를 듣는다. 한 철 먹을 콩국까지 장만하는 나는 '살림꾼' 대신 '영감태기' 다 되었다는 소리를 듣는 점이 좀 억울하기는 하다. 그래도 이 나이 되도록 광우병, MSG, 농약, 유전자조작농산물, 중금속 듬뿍 든 불량식품 외식하는 '신사'보다는 내 아이들, 내 가족에게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정감 있고 연륜 있는 살림꾼 영감태기가 더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