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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예수님은 누구이신가?’를 주님께서 스스로 일러주신 ‘에고 에이미’ ‘나는 누구다’는 말씀으로 주일 예배 때에 마다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부터는 이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많은 일들 가운데 특별히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죽어가던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서 열병으로 죽어가던 아들을 예수님께서 살리시는 데, 그 아들의 아버지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그 아버지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46)
우리 성경에는 ‘왕의 신하’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헬라어에서는 ‘바실리코’(basililkos)인데 ‘작은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 유대땅은 로마제국의 식민지입니다. 로마제국에서 파송한 로마 총독부의 통제 하에 헤롯 대왕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헤롯 왕가에서 상당한 높은 관직을 가진 사람, 그것도 바실리코(작은 왕)라고 하니, 헤롯가의 제2인자 정도 되지 않았겠는가 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아주 높은 관직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당시에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재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인맥을 가지고서 무슨 일이든지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자였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나사렛 출신의 목수인 예수를 찾아 나섰습니다. 왜 입니까? 자신의 재력과 권력과 인맥 그리고 백 그라운드로도 어찌 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47)
아들이 병이 들었는데, 거의 죽음 직전입니다. 촌각을 다투어야 하는 위급상황입니다. 죽어가는, 숨을 헐떡이는 아들을 위해서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자신의 모든 권력과 재물을 인맥을 동원해서 용하다는 약을 구입해서 먹였을 것입니다. 전문 의사의 진료와 처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백약이 무효였던 것입니다.
꺼져가는 불을 살리려는 마음, 빠져가는 물 속에서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는 약 32 Km입니다. 80리가 되는 거리입니다. 빠른 걸음으로도 다섯 시간은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서 한 걸음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합니까?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47)
우리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청하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청하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엎드려서 계속 간청하되’라는 뜻입니다. 왜,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 청했을까요? 바로 자신의 근본적인 신분이 무엇인가를 보게 합니다.
그는 왕의 신하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명예와 권세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서 청했습니다. 그는 왕 앞에서도, 총독 앞에서도, 그 어떤 사람에게서도 그렇게 해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까? 그는 아버지 였기 때문입니다. 왕의 신하가 아니라 죽어가는 한 아들의 아버지이기에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영화 미나리로 할머니 역할을 한 배우 윤여정의 전남편 가수 조영남 씨가 잘 입고 다니는 점퍼에 ‘628723’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점퍼에 숫자를 새기고 다닙니까?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 숫자가 자신의 주홍글자라는 것입니다.
조영남 씨가 바람을 피워서 이혼을 하게 되는데, 윤여정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아버지의 역할도 못했고, 아버지 대우도 못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두 아들의 아버지임을 잊지 않기 위해서 아들의 생일을 새겨서 입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출세하고 인기를 누리며 재물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 속의 아버지라는 자신의 신분을 버릴 수 없는 인간 근본의 마음입니다. 진작 그 자신의 신분인 남편과 아버지의 신분을 알고서 살았다면 지금처럼 씁쓸한 모습을 대중 앞에 보이지 않을 것인데 말입니다.
병든 아들을 둔 아버지는 간청했습니다.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 오소서”(49).
대 제국 로마의 고급 관료가 속국인 팔레스타인의 일개 목수에게 [퀴리오스](주님)이라고 부르며 엎드렸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모습입니까? 아주 대단한 겸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퀴리오스’라는 말은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용어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쉽게 쓸 수 없는 이 말을 과감하게 예수님을 향하여 불렸습니다. 어쩌한 그의 이런 행위는 로마 제국 내에게 큰 화젯거리가 될 지도 모르는 일었습니다. 황실의 문책을 받을 수 있는 신하의 행위였습니다. 로마제국의 고급 관리가 체통도 없이 피지배국의 한 젊은 사람에게 무슨 ‘퀴리오스’냐고 힐문을 당할 수 있는 처신이었습니다.
왕의 신하는 아들만 살릴 수 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싶은 마음입니다. 자신이 파면을 당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엎드리고 예수님을 주라고 불렸습니다. 자신의 본래 자리, 아버지의 자리에 충실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성을 방문했을 때에 여리고성에서 세리장(세무처장)으로써 악명을 날리던 삭개오가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서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거리로 나섰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한 군중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키가 작아서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볼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누구 하나라도 키 작은 자신을 배려하여 ‘세리장님, 여기에 자리가 있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나, 많은 사람이 장애가 되었으면, 자신의 처지와 키 작음이 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보고자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지나 가시는 예수님을 나무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보시고 “삭개오야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너의 집에 거해야 하겠다”고 삭개오를 불러 주셨습니다.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쳐다볼 수는 있었지만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가시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불러 주셨을 때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지시대로 나무 위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영접하여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결단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나무 위에 올라가듯이, 자신의 삶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을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하수인으로써 세리장이 되기까지, 그리고 많은 제물들을 모으듯이 나무 위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내려와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인간의 평지, 자신의 본래의 모습으로 예수님 앞에서 연약한 한 인간으로 서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대면해야 했습니다. 그때에 그는 결단했습니다. “내가 누구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으면 다 갚겠다”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선언하셨습니다.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자꾸만 높이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내 존재감이 생기고 성공한 것으로 여깁니다. 남보다 지위가 높아야 하고, 남보다 더 예뻐야 하고, 남보다 더 많은 재물을 모아야 한다고 자꾸만 자꾸만 높이 쌓으려 합니다. 그래서 비교하고, 비참해지고, 자괴감이 들어 패배의식에 사로 잡힙니다.
왕의 신하는 아버지로써 자신이 어떤 자리에 빠졌는가를 파악합니다. 그리고는 어떤 행보를 보입니까?
사실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때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 앞에서 마음이 강퍅해 집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 문을 닫아 버리고 원망하고 이 세상을 염세적으로 봅니다.
그런 가하면 어떤 사람은 고난과 역경으로 인해 겸손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겸손히 무릎을 꿇고 긍휼을 호소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존심을 버릴수록 큰 위로와 은혜를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자존심을 과감하게 버림으로써 큰 은혜와 복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한 사람은 앗수르의 국방부 장관을 자냈던 나아만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나아만은 군인으로써 최고의 영예를 누리는 사람이지만 그에게는 큰 핸디캡이 있습니다. 바로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문둥병을 고치고자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고침을 받고자 먼 여행길을 나섭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신분 때문에 자존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선지자가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가라고 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기분이 상합니다. 이 먼 거리까지 와서 왔는데, 조그마한 요단 강에 가서 몸을 씻으라고 … 그는 무시당했다는 기분만 상하고 마음의 상처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종 드는 이스라엘 여종의 조언을 듣고서 요단 강가에 가서 몸을 씻습니다.
그는 제국 앗수르의 국방 장관이라는 신분 의식을 버리고 흙탕물 속에 들어가 몸을 씻자 문둥병이 그 자리에서 낫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자기 자신만(나만) 생각하고 자만심을 부렸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평생 문둥병자로 고생하다가 죽어갔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낮추어서, 자신의 처지를 냉철하게 들어다 보고, 선지자의 말에 순종했을 때에 나음을 입었습니다. 하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오늘 내가 내려가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내가 올라 서고 싶은 자리가 아니라, 고난 속에서 진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간청해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지만 겸손한 사람에게는 은혜를 주십니다. 마음의 그릇을 겸손하게 비우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왕의 신하에게 열병으로 죽어가는 아들은 어떤 아들이었을까요? 46절에 보면 ‘그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어에서는 정관사가 붙어 있는데, 정관사가 붙어 있다는 하나일 때에 사용됩니다. 그러니 왕의 신하에게는 아들이 하나 밖에 없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들에 향한 그 마음이 얼마나 애틋했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어떤 아들(자식) 딸들이 있습니까? 모두들 안녕하십니까? 혹시 열병으로 죽어가고 있지는 않지만 영적으로 죽어가는 안타까운 상황은 아닙니까? 육신의 부모로써, 영적인 부모로써 자녀들을 위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 겸허한 자세로 죽어가는 아들을 살려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이신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왕의 신하의 애틋한 마음과는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8)
한 마디로, 기적 중심의 신앙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무 냉정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사경을 헤매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80리를 달려온 아버지에게, 너무나 혹독한 설교처럼 들립니다.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굴욕감마저 느끼게 하는 그런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버지는 예수님의 매정한 태도에 크게 동요하지 않고 역동적인 신앙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49)
그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주눅 들고, 낙심이나 원망이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면서 간청의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개구리 두 마리가 그만 우유 통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힘껏 점프를 하여도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개구리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몇 번 애서 보다가 스스로 삶을 포기하여 우유 통 속에서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개구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통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며 두 뒷다리를 움직여 계속 헤엄쳐 다녔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유는 어느새 굳어져 버터가 되었습니다. 그 개구리는 단단한 버터를 도약판 삼아 무사히 통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쉽게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모색할 동안 뜻하지 않은 출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 속담에 “포기하지 않는 개구리가 버터를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삶 가운데 난관에 붙이치며 실패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세워나가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자녀에 대한 것, 특별히 신앙적인 부분에는 부모들이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겸허히 서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겸허하게 애절하게 간청하는 왕의 신하에게 아주 간단한 처방을 내려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50)
보십시오. 예수님은 아이의 상태에 대하여 열이 몇 도인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한 마디도 묻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살았으니 그냥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보이는 반응이 참으로 신기합니다.
“ …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50)
예수님의 명령에 한 마디 군말도 없이 액면 그대로 순종하여 나가셨습니다. ‘장군 멍군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장군’하니까 이 아버지는 ‘멍군’이라고 응수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는 신앙입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잡고서 나아가는 그 시각에 죽어가던 아들은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의 불안과 고통 속에서 놀라운 위로와 평화가 임했습니다. 온 가정이 믿음으로 온전히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도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으며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므로 자녀들을 살리고 믿음의 가정을 세워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