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10월 24일 금요일
[(녹)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주교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그의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냐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7,18-25ㄱ
형제 여러분,
18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19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20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23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54-59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5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6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57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58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59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면 그날 날씨가 어떤지 알아봅니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하루를 준비합니다. 하루 전에 날씨를 가늠하기도 합니다. 밤에 별빛이 밝은 날은 다음 날 해가 쨍쨍합니다. 무릎이 쑤시고 허리가 아프면 어김없이 다음 날 비가 옵니다. 그래서 무릎이 쑤시면 늘 우산을 준비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날씨를 알아보고 그에 맞추어 준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솔직히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지금 살아가는 세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 아프고 고통스럽기에, 그저 이 순간을 살아가기에도 벅차고 빠듯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자꾸 내일로 미룹니다.
라이트 형제가 맨 처음 만든 비행기는 공중에서 겨우 십이 초 머물렀다고 합니다. 시작은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것없었지만, 그들의 첫 시도가 있었기에 지금의 비행기도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일치하기를 바란다면 그분께 가는 여정을 망설여서는 안 됩니다. 그 길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여기서 행동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12,58)라고 하시며, 미루지 말고 행동하라고 하십니다. 나는 어떤지 생각해 봅시다. 지금 해야 할 기도와 선행을 자꾸 미루고 있지는 않는지요?(이찬우 다두 신부)
이 시대는 임마누엘 주님과 함께 하는 구원의 시대요 축제의 시대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말씀 한 마디를 건네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56) 특히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못하느냐?”냐는 표현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지금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시대! 얼마나 은혜로운 시대인지 모릅니다. 하느님의 육화강생으로 인해, 이제는 임마누엘 주님과 항상 함께 하는 시대입니다. 구원의 시대요 축제의 시대입니다.
예수님 탄생 이전은 암흑의 시대였지만 탄생 이후는 광명의 시대입니다. 그전은 슬픔과 고통의 시대였지만 이제는 축제와 환희의 시대입니다. 이전의 시대는 죄와 죽음의 시대였지만 이제는 예수님 탄생으로 인해 구원과 생명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슬퍼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통곡할 필요도 없습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 우리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우리 곁에, 우리 안에 와계시며 우리 매일의 삶을 동반해주십니다. 죽는 순간까지 함께 하실 것이며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는 순간조차 우리를 지켜보실 것이며, 죽고 나서까지 확실하게 애프터서비스해주실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가까이 다가오신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과 함께 매일 매일 축제를 벌여야 할 새 시대인 것입니다. 더 이상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 이상 괴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미래를 확실하게 책임져주실 것이니 매일 그분께 맡기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서 충만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요?
우리가 지내고 있는 이 시대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인한 구원의 시대이자 축복의 시대입니다.
더 이상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그저 단순하게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하느님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것, 비천한 죄인인 우리의 발을 씻어주신 사랑의 하느님을 따라 우리도 이웃 사랑에 투신하는 것, 그저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의 품안에서 행복해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지금 이 시대에 대한 올바른 해석에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은총이 뒤따를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고통이 고통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슬픔이 슬픔이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하느님의 위로 속에서 살기 때문에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의 풍랑 앞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서도 눈부신 미소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거듭되는 불운과 실패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꾸준히 나아갈 것입니다. 깊은 슬픔 속에서도 희망의 창문을 활짝 열어놓을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생손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끔 손톱 옆이 갈라질 때가 있습니다. 가만히 두면 저절로 아물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성격이 급해서 그걸 뜯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상처가 덧나고, 일할 때도 불편하곤 합니다. 모기나 벌레가 물어서 부풀어 오르거나, 물집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때도 약을 바르면 곧 아물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성격이 급해서 그걸 긁거나 뜯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시간도 더 걸리고 상처가 생기게 됩니다. 내 몸은 며칠 지나면 아물고, 작은 상처로 남지만 기업과 국가의 정책이 그리되면 많은 이가 피해를 보게 됩니다. 기업은 큰 손실을 보게 됩니다. 미국 정부는 전문직 비자의 비용을 1,000불에서 100,000불로 올린다고 합니다. 자국의 전문직 인력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라고 합니다. 그런 정책이 생손앓이가 될는지, 작은 상처를 더 크게 덧나게 하지는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MAGA’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Make America great again’이라는 말의 줄임말입니다. 높은 관세와 강력한 이민국의 단속이 생손앓이가 될는지, 작은 상처를 더 크게 덧나게 하지는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불가에서는 선을 수행하면서 깨달음에 방해가 되면 부처의 가르침일지라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넜으면 배를 버리라고 이야기합니다. 폴 카퍼는 ‘열린사회와 적들’에서 인류의 철학적인 스승이라고 존경받는 ‘플라톤, 칼마르크스’를 비판하였습니다. 플라톤의 ‘국가’는 뛰어난 지도자가 통치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국가는 자칫 전체주의에 빠질 수 있고, 우생학을 근간으로 타 인종에 대해 억압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폴 카퍼의 열린사회는 뛰어난 지도자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발전시키는 나라였습니다. 이런 국가는 발전은 느릴 수 있겠지만 국가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칼마르크스는 역사를 필연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봉건사회, 자본주의 사회, 다음은 공산주의 사회가 될 것으로 예측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역사 인식은 맞지도 않고, 있지도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역사는 필연의 과정이고, 인류는 그런 필연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고민하고 성찰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얼마나 쉽게 자기모순에 빠지는 존재인지 보여줍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행하고 맙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절망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희망을 발견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성사와 공동체의 소중함을 깨닫는 시간이었고, 교황님 말씀처럼 ‘나눔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임을 자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을 찾듯이, 우리는 위기의 시대 속에서도 희망의 징표를 발견했습니다.
“인간에게는 경멸보다 찬미할 이유가 더 많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역병 속에서도 서로 돕고 나누며 인간다움을 지켜가는 모습에서 희망의 가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러한 희망의 시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상처를 긁어 덧내는 조급함이 아니라, 인내와 지혜로 상처가 치유되기를 기다릴 줄 아는 눈, 그리고 시대의 징조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읽어내는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던 것이라도 주님께 나아가는 길을 방해한다면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용기, 그것이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입니다.
“주님,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치소서.”
<늘 그렇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 12,56-57)
불신의 시대에
늘 그렇게
오롯한 믿음을
절망의 시대에
늘 그렇게
새하얀 희망을
증오의 시대에
늘 그렇게
뜨거운 사랑을
홀로의 시대에
늘 그렇게
굳건한 함께를
배척의 시대에
늘 그렇게
살가운 포용을
탐욕의 시대에
늘 그렇게
끝없는 나눔을
죽임의 시대에
늘 그렇게
애타는 살림을
오늘의 성인
성 펠릭스 (Felix)
활동년도 : 247-303년
신분 : 주교, 순교자
지역 : 티비우카(Thibiuca)
같은 이름 : 펠리체
북아프리카 티비우카의 주교인 성 펠릭스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다만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순교한 첫 순교자들 중의 한 명으로 여겨진다. 황제가 303년 2월 23일 내린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포고령의 내용은 성서와 전례서를 전부 제출하게 하고 성당들을 모두 파괴하라는 명령이었다. 성 펠릭스 주교는 모든 성서를 내놓으라는 명령을 거절하여 체포되었다.
성 펠릭스 주교는 카르타고(Carthago)의 지방 총독 앞에서도 이를 완강히 거부하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거룩한 책들을 도둑들에게 넘기기보다 차라리 태워버리는 것이 더 낫다. 나는 사람들에게 순종하기보다 하느님께 순종하겠다.” 그는 황제의 명에 불순종한다는 죄목으로 화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56년을 살았습니다. 저는 정결을 지켰고, 복음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신앙과 진리를 선포하였습니다. 하늘과 땅에 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님, 영원히 계시는 주님께 바치는 제물로 제 목을 내어 놓습니다."
성 펠릭스는 사제인 성 아우닥투스(Audactus)와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그리고 독서자인 성 셉티무스(Septimus)와 성 포르투나투스(Fortunatus)와 함께 7월 15일 카르타고에서 순교하였다. 따라서 이날을 그의 축일로 기념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후에 같은 이름의 다른 성인과 혼동되어, 그가 아풀리아(Apulia)의 베노사(Venosa)에서 순교하였다는 주장이 나타났다. 그로 인해 "로마 순교록"에 그의 축일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10월 24일로 기록되었다.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Anthony Mary Claret)
활동년도 : 1807-1870년
신분 : 설립자 ,대주교
지역 : 산티아고데쿠바(Santiago de Cuba)
같은 이름 : 글라렛,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안당
안토니오는 직물공의 아들로 1807년 스페인의 살렌트에서 태어났다.
1835년에 사제가 된 후 여러 해 동안 카탈로니아 지방을 두루 다니며 백성들에게 설교하고 피정을 지도했다.
그 후 그는 보다 더 큰 일을 해보려고 1849년에 선교회를 세웠는데, 지금은 이 회를 클라렛회(Claretian Father)라고 부른다.
같은 해에 그는 이사벨라 2세 여왕의 요청으로 쿠바의 산티아고 대주교로 선임되었다.
주교가 되어,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열심히 일했으며 많은 수확을 거두었다.
1857년, 여왕은 그를 불러 자신의 전속 사제로 임명하고, 설교와 간행물을 통한 선교에 주력하도록 충분한 여유를 주었다.
또한 그는 에스코리 과학 연구소를 설립했는데, 이것은 자연 과학 박물관, 음악 및 언어 교육원 역할을 했고, 바르셀로나에는 수도자 도서관을 세우기도 했다.
스페인에 돌아와 교회를 위해 많은 시련을 겪었다.
1868년 혁명 때 그는 이사벨라 여왕과 함께 유배되어, 영영 스페인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1870년 프랑스의 나르본 근교 퐁프루아드에서 세상을 떠났다.
쿠바의 ’영적 아버지’인 그는 선교사,수도원 창설자,사회 개혁가,여왕의 지도 신부,저술가 겸 출판업자, 주교이자 피난민이었다.
그는 스페인 사람이었지만 일 때문에 카나리아 군도,쿠바,마드리드, 파리 그리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여러 곳을 다녔다.
그는 바르셀로나의 섬유 공장에서 직조 기사와 디자이너로 일하는 여가 시간에 라틴어와 인쇄술을 공부하였으며, 그것은 그가 후에 사제이자 출판업자가 되기 위한 준비이기도 하였다.
28세에 서품을 받은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카르투시안회와 예수회에서 입회를 허락하지 않아 수도생활을 할 길이 막혔지만 스페인의 가장 대중적인 설교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언제나 성체 성사와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강조하면서 10년 동안을 대중 선교와 피정을 하면서 보냈다.
그의 손에서 단 한 번도 묵주가 떠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42세에 5명의 젊은 사제들과 함께 오늘날 클라렛 수도회(Claretian Father)라고 알려진 선교사들의 수도 단체를 창설했다.
안토니오는 평생 동안 가톨릭 신문에 높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는 스페인에 대규모 가톨릭 출판 기업인 종교 서적 출판사를 세웠고, 200권의 책과 팜플렛을 발행하고 쓰기도 하였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는 교리의 절대성을 충실하게 옹호했으며 동료 주교들의 경탄을 자아냈다.
볼티모어의 기본스 추기경은 그를 가리키며 "진정한 성인이 저기 간다"고 하였다.
그는 63세에 스페인 국경 근처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1950년에 시성되었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당신의 대리자가 되는 사람들은 당신이 당한 것과 같은 박해를 당하리라고 예언했다.
안토니오는 그의 생애 중 14차례에 걸쳐서 ’클라렛’이라는 이름 그 자체가 천대와 불행의 대명사가 될 만큼 가장 추악한 중상 모략을 받으며 견뎌내야 했다.
그러나 악의 세력은 자기의 희생 제물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도 박해를 찾아다닐 필요는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자신의 변덕이나, 무모함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진정한 신앙 때문에 고통당한다는 것을 확신하면 그것이 전부이다.
한번은 이사벨라 2세 여왕이 자기 지도 신부인 안토니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솔직하고 분명하게 나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습니다."그러고는, "모든 사람은 언제나 나에게 와서 호의를 구하는데 당신은 절대로 그러지 않습니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자, 그는 "예, 있습니다. 저를 이 직책에서 물러나게 해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여왕은 더 이상 아무런 제안도하지 않았다.
-바오로수도회에서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 주교의 글에서(L’Egoismo vinto, Romae 1869,60)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요합니다.
사도들은 성령으로 불타 올라 온 세상을 두루 다녔습니다.
사도적 선교사들도 같은 불로 타올라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고자 북극에서 남극까지,
세상 한 끝에서 그 극변에까지 이르렀고 또 이르고 있으며, 장차 이를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요합니다.”라는
바울로 사도의 말씀을 자신들에게 응당히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강요하여 힘차게 달리게 하며
거룩한 열성의 날개로 날아가도록 고무시킵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큰 열성을 가진 사람은 더욱 높은 사랑으로, 더욱 높은 사랑의 단계에 따라 사랑하며,
그 사랑이 크면 클수록 더 큰 열성으로 강요됩니다.
어떤 이에게 열성이 없다면 그것은 마음안에 사랑의 불이 꺼져 버렸다는 확실한 표시가 됩니다.
한편 열성을 지니는 사람은 그의 사랑에 한계가 없는 만큼 가능한 온갖 수단을 써서
하느님이 현세와 후세에서 언제나 알려지시고 사랑받으시며 섬김 받으시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힘씁니다.
그런 사람은 이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합니다.
모든 이들이 현세에서 기쁘게 살고 후세에서 행복하고도 복되게 살기를 원하며
또 그렇게 되도록 노력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구원을 받고 아무도 영벌을 받지 않으며,
아무도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으며,
잠시나마 아무도 죄악에 머물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사도들에게서나 사도적 정신을 가진 사람에게서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자주 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의 티없으신 성심의 자녀는 사랑으로 불타는 사람이고 가는 곳마다 열기를 주는 사람이며
온 세상이 하느님의 사랑의 불로 타오르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있는 수단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를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핍은 그에게 기쁨만 가져다 줄 뿐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 그것에 달려듭니다.
중상 모략을 기꺼하고 고통의 시련 가운데 즐거워 합니다.
그는 일하고 고통 당하면서도 항상 하느님의 가장 큰 영광과 영혼들의 구원만을 찾는 데에 있어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본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입니다.
성 아레타 (Aretas)
활동년도 : +523년
신분 : 순교자
지역 : 나그란(Nagran)
같은 이름 : 아레따스, 아레타스
아라비아 남서부 하드란(Hadran)의 베니 하리트(Beni Harith) 공동체의 원장이며, 압둘라 이븐 칸(Abdullah Ibn Kahn)으로도 알려진 성 아레타와 340명의 주민들이 듀 노와스(Dhu Nowas) 또는 두난(Dunaan) 휘하의 유대인들의 무리들로부터 특사를 받은 직후에 학살되었다. 두난은 유대교로 개종한 인물이며, 악수미트 에티오피아인들을 상대로 폭동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 학살은 도시 전체를 황폐하게 만들었고, 모하메드에 의해 코란 속에도 기록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