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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7월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청주] 믿는 이들의 행복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에페 2, 19 - 22
† 복음 : 요한 20, 24 - 29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쌍둥이’
라고도 불렸다(요한 20,24 참조). 갈릴래아 출신의 어부였던
토마스는 매우 강직한 제자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해치려는 유다 지방의 베타니아로 가시려 하자 이를 만류하던
다른 제자들과 달리, 그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고 큰 용기를 보였던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뵙지 못한 토마스는 강한 불신도 보였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그러나 살아 계신 주님을
뵙고서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하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토마스 사도는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다가 그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예수님께서 이 건물의 모퉁잇돌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이 건물 안에 살아 계신다(제1독서).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 토마스 사도는
그 자리에 없었다. 제자들이 주님을 뵈었다는 증언에도 그는
주님을 직접 보고 손으로 만져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한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고, 그제야
그는 예수님을 ‘주님, 하느님’으로 고백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안셀름 그륀 신부의 『다시 찾은 마음의 평안』이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의 그림자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걸어가는 동안 계속 자신을 졸졸 쫓아오는 그림자가
못마땅하였습니다. 그래서 ‘빨리 달려 그림자에서 도망치자.’고
생각하며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자는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그의 발이 땅에 닫는 순간마다 다시
따라왔습니다. 그가 ‘좀 더 빨리 달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점점
더 빨리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숨이 턱에 찰 지경에
이르기까지 달렸고, 마침내 그는 땅에 고꾸라져 죽고 말았습니다.
저자 안셀름 그륀 신부는 이 이야기에서, 그가 주변의 나무
그늘로 들어갔더라면 어렵지 않게 자신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며, 더 이상 달릴 필요도 없이 나무 그늘 아래서
편안하게 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전합니다. 곧 어둠이 어둠 안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토마스에게 당신의
상처를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부활이라는 것은 비천한 것에서
영광스러운 몸으로 되살아나고, 약한 것에서 강한 몸으로
되살아나는 것입니다(1코린 15,43 참조). 그래서 사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을 때 굳이 죽음의 상처를 남기지 않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그 자국을 남기시고, 또 이를 토마스에게 보여 주신
데에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그 상처에 담긴 죽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죽음 없이는, 상처 없이는 부활도, 참된 평화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토마스처럼 예수님의 상처 안에 머물도록 합시다. 그래서
우리의 상처를 그분의 상처 안에서 낫게 합시다. 우리의 어둠을
그분의 상처 안에 담긴 어둠을 통하여 지우도록 합시다.
- 매일 미사 -
◈ [청주] 믿는 이들의 행복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7월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 요한 20,24-29
믿는 이들의 행복
믿음의 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주님을
영접하는 체험이 없어서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체험한 이야기를
전해주면 부러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직접체험하지
않았으니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던 사람 중에 토마스라는 사람은
주님께서 죽었던 라자로를 깨우러 갈 때(요한11,16) 거기에
있었고, 고별사를 할 때 ‘아버지께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20,25)하고 말하였을 때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믿어지지 않으니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아주 솔직한 답변입니다.
그렇다면 믿지 못하는 토마스라고 말하는 것보다 정직한
토마스라고 말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여드레 뒤에
토마스도 같이 있는 제자들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셨는데
특별히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에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20,20,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미 토마스의 마음을 아시고 그의 마음을
풀어주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공동으로 받은 은혜에 누락되어 실망할 수 있는
제자를 위한 배려를 볼 수 있고, 앞으로 보지 않고 증언만을
듣고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한 안배를 볼 수 있습니다. 만약
토마스 혼자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였다면
혼자만 왕따가 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서로 하나가 되는데 장애가 될 요소를 없애주시며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큰 사랑으로 함께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믿음을 고백하는
토마스에게 한 말씀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20,29). 초대교회신자
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믿음이 요구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매달리지 말고, 그분께서 남기신 말씀과 성경말씀에 기초하여
참 믿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행복합니다. 주님의 몸을 직접 보지 않고도 믿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성전과 성경을 통해 전해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있으니 행복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보고 만지고
감각적으로 느끼고 싶어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구애 받지 않으시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음이 은총이라는 사실을 믿고 또 믿어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거짓으로 믿는 것보다는 정직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편이 훨씬 더
주님 마음에 듭니다. 따라서 정직한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관계는 행위가 아니라 실존이다.
2013년 다해 7월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
복음 : 요한 20,24-2
< 관계는 행위가 아니라 실존이다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학교로 발령이 날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신학교 들어가면 가장 힘들 것이 무엇이겠느냐고
사람들이 물을 때, 가만히 생각해보니 ‘진실 된 관계’가 많이
줄어들 것 같은 것이 걱정된다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처음 신학교 들어갔을 때, 어떤 선배가 손가락으로 한
교수 신부님을 가리키며, “저 신부님만 조심하면 신부 될 수
있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학교 신학생들은
저를 교수로 여기고 잘못하면 자신에게 재시나 과락도 주고
신학교에서 쫓아낼 사람으로 볼 것이고, 깍듯이 예의는 차리지만
참다운 사랑으로 대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관계로부터 오는데 관계가 그렇게
위선적이면 삶이 메마를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저에게
대하든지 친 가족처럼 느끼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왠지 신학교를 군대와 연결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자연스레
연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전에 군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기에게 갑자기 연락이 왔습니다. 요즘 널리 퍼져있는 SNS를
통해 저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찾고 싶으면 어렵지 않게
사람을 찾을 수 있는 시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동기이지만 군대에 일찍 들어와 나이가 저보다
어리고, 또 저는 사제가 되어 있기에 전화 통화를 하면서도 서로
조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시간이 될 때 보자는
식으로 끊었습니다.
저는 반갑기보다는 놀랐습니다. 군대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은
군대 제대하면 각자 자신의 고향으로 가서 살기에, 또 각기
가야할 길이 다르기에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습니다. 아마도
군대에서도 그렇게 그 사람들을 대하고 있었는데 불쑥 연락이
오니 그들을 대할 제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만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생각하니, 잠깐 만났다가
헤어지면 다시는 못 만날 사람들과의 관계, 그 관계의 대부분은
위선으로 이루어져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우라고 하면서 서로를
위해 목숨을 바칠 듯 단결하지만 내심 제대만 하면 만나지 못할
사람들이라 생각하고, 선임에 대한 예우는 아무리 싫은
사람일지라도 내가 편해야 하니 말년 병장들이 제대를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게 대우해 주지만 실제로는 다시는 안 봤으면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후배들에게는 내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평생 못 배울 것처럼 대단한 것을 가르쳐 주는 양 모질게
교육했지만 밖에서는 마주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뭐 다시 만날 사람들 아닌데...’, 그 때는 이렇게 믿고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그러니 모든 관계가 진실 된 관계가 될 수 없었고,
그 때의 사람들을 다시 만난다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색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고 하셨을 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라고 말하던 인물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겉으로는 누구보다도
그분의 충실한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믿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분을
하느님보다는 인간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자신과 함께 있다가 떠나실 분이었지 바로 부활하셔 영원히
사실 하느님은 아직은 아니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게 됩니다. 즉 관계는
행위를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상대를 어떤 사람으로
믿었느냐’가 중요한 것이란 뜻입니다. 즉 성모님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말을 하시지는 않았을지언정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다시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누구와 친해지기 위해 외적인 노력을
하기보다는 먼저 상대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즉 관계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 실존이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아이가 어머니가 계모가 아닐까 의심하지만 그래도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고, 어떤 아이는 말썽을 부려도
어머니가 친모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 둘 사이의 관계가
외적으로는 계모에게 하는 아이가 더 잘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친 어머니임을 믿는 아이가 더 어머니와 가까운
관계란 것입니다.
가끔 우리도 성당에서나 직장에서, ‘어떻게 하면 그와 더
친해지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관계는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존재냐’를 먼저 정립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아무리
굽실거린다고 하더라도 나는 기쁠 수 없습니다. 먼저 하느님이
맺어주셨고, 또 영원히 함께 갈 형제라는 것을 믿읍시다.
가족끼리 ‘어떻게 하면 나의 가족에게 잘 보일까’ 고민하며
행동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가족이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행동해도 가족으로서 받을 수 있는 사랑을 받습니다.
행동은 저절로 그 존재를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먼저 우리는 만나는 사람들을 실존적으로 대하려고
해야지 그 순간만 피해 안 받고 넘어가려는 식의 위선적인
관계는 지양해야합니다. 실존적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이고 상대가 누구인지 명확히 알아야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될 형제들에게 우리가 한 번 스쳐갈
사람처럼 대하는 때는 없습니까? 지금 만나는 사람, 그 사람들은
영원히 함께 살아야 할 형제들입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주님의 틀에 맞추는 우리가 되어야
어제 신학생 한 명이 성소국 사무실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머리카락을 너무 짧게 자른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어색해 보이더군요. 다른 사람들도 이 신학생을 향해서
머리카락을 왜 이렇게 짧게 잘랐느냐, 너무 어색하다는 말들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 신학생이 휴대전화에 있는 어떤 사진을
보여주면서 억울하다는 말을 합니다.
이 신학생은 미용사에게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는 모델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모델처럼 머리카락을 잘라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시원하게 머리카락을 자른 모델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지요.
사진을 잘 보니 분명히 비슷하게 이발했습니다. 그러나 왠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스타일이 신학생에게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이 모델과 같은 헤어스타일을 하면 자기도 멋있을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들의 일상 안에서 이 신학생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항상 세상의 기준을
내세워서 그 틀 안에만 맞추려고 합니다. 남의 모습만을 부러워하고,
그렇게만 살면 행복할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한 세상의 틀 안에 우리를 가두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틀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가장 적합하고 멋있는 모습으로 살 수
있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축일을 지내고 있는 토마스 사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제자로써 능력도
많고 용기도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세상의 기준으로 모든
판단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의심하고
믿지 못했던 것이지요. 다른 모든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고 증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면서 믿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안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그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두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틀을 벗어나 주님을
향해 그리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때 눈으로 보고 직접 만져봐야 믿는 것이
아니라, 직접 보지 않고 또 만져보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혜안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세상의 틀에만 맞추는 내가 아닌, 주님의
틀에 맞추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매 순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라며 고백하면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라. 그러면 그 순간의 에너지가 모든 경계를 넘어
퍼져 나갈 것이다(코리타 켄트).
왼쪽 사진대로 컷트해 달라고 했는데, 오른쪽 모습이
되었습니다.
겉모습 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카레이서 같이 험하게 운전하시는 분들을 종종 목격하게
됩니다. 왜 이렇게도 바쁜지, 물론 바쁘니까 저렇게 운전하겠지
라는 생각은 들지만 사실은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닙니다. 단지
바쁜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줄여주는 것뿐이겠지요.
며칠 전, 이렇게 운전하시다가 신호에 걸려서 어쩔 수없이 서
있는 차 옆에 저 역시 신호대기로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 신호도 바뀌지 않았는데 슬금슬금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진짜로 성격이 급한 분이신가보다.’라는 생각과 함께, 어떤
분이기에 저렇게 험한 운전을 하나 싶어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주 얌전하게 생긴 어려보이는
자매님이셨습니다. 솔직히 험한 운전을 보면서 우락부락한
형제님을 떠올리고 있었거든요.
겉모습만으로는 운전습관을 알 수 없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겉모습만으로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도 그 사람의
일부 모습만을 보고서 마치 전부인 것처럼 판단하고 단죄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닌, 좀 더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한 판단으로는 그 사람의
전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수도회] 진흙탕물이 가라앉을 때
2013년 다해 7월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요한 20,24-29
진흙탕물이 가라앉을 때
여러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 듣고 나서도
일주일간이나 불신과 의혹에 차 그 사실을 믿지 않고 있었던
토마스 사도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부활성야만 다가오면 성대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하고
‘주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를 외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진짜일까? 그게 가능한 일인가? 하는 의구심을
조금씩 갖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토마스 사도는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한 오늘의
우리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토마스 사도는 성격이 조금은 내성적이었지만
마음이 무척이나 너그러웠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다른 그 어떤 제자들보다도 충실히 스승님을
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받았던 심리적, 정신적
충격이 엄청나게 컸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한 토마스 사도의 충격이 얼마나 컸으면 그는 점점 자신
안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의지하고 희망할 대상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삶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열 제자들은 하나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는데,
토마스가 그 자리에 없었던 이유도 뻔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의욕이 완전히 상실되었습니다. 만사가
귀찮아졌습니다. 그 결과 아무도 만나고 싶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처박혀 있었을 것입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그의 실망감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토마스 사도가 얼마나
실망하고 좌절했으면 예수님 부활을 직접 목격한 막달라 여자
마리아나 베드로 사도의 증언도 그를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간 토마스 사도는 홀로 어두컴컴한 회의와
불신의 동굴 속에 웅크리고 앉아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 앞에 너무나 기뻐 환호하고 용약하고
있는데 토마스 사도 혼자 죽음과도 같은 절망감 속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토마스 사도는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고 증언하는
다른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이런 토마스 사도에게 예수님께서는 여드레 뒤에 발현하셨는데,
토마스 사도가 그토록 바라고 있던 뚜렷한 증거를 하나하나
보여주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그 순간 토마스 사도는 마치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순식간에 모든 저항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약한 믿음은
한 순간 크게 비약하게 되었습니다.
연못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폭우가 와서 진흙들이
많이 밀려들어왔습니다. 당연히 연못이 흐려졌습니다. 원래
연못 안에는 크고 예쁜 비단잉어들이 살고 있었는데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잉어의 멋진 자태를 우리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방법은
무엇입니까? 진흙탕 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예수님 부활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부족한 우리들 영혼의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흙으로 흐려진 연못 같은 우리들의
눈이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뚜렷이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의 잡다한 걱정거리들, 유혹거리들로 우리의 영혼이 흐린
상태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진흙탕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작업입니다.
그 작업이 바로 침묵이요 기도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기타] 성 토마스 사도 축일
2013년 다해 7월3일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오늘은 토마스 사도축일입니다. 동창 신부들 중에 토마본명을
가진 신부가 2명 있습니다. 한 친구는 11년 동안 ‘교정사목’을
하였습니다. 사형수들을 위해서 교리를 가르치고, 상담을
하였습니다. 특히 그 친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출소자들을
위한 배려였습니다. 출소자들이 일자리를 찾을 때까지 머물 수
있는 숙소를 마련하였고, 출소자들이 재활 할 수 있도록 대출해
주는 은행도 마련하였습니다. 10여 년 전에 저는 출소자들과
함께 생활하는 친구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룻밤 잠을
자는데도 사실 저는 겁도 나고, 의심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10년 이상 출소자들과 함께 생활하였습니다. 또 다른
친구는 행정 능력이 뛰어나서 학교 법인의 일을 보고 있습니다.
토마 본명을 가진 동창들이 주님의 사랑 안에 늘 건강하기를
기도드립니다.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한명입니다. 성서는
토마스 사도와 관련해서 우리들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잠시 어딜 다녀왔고, 그래서 주님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다른 제자들에게 유명한 말을 합니다. ‘나는
그분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고, 그분의 못자국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토마스
사도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참으로 복되다!’ 토마스 사도는
주님 앞에 엎드려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우리 모두는 살아가면서 토마스 사도와 같은 ‘불신’을 가지게
됩니다. 세상이 험해서 그렇기도 합니다. ‘우체국이라고 하면서
사기를 치기도 하고, 전화를 해서 신용카드에 문제가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낯선 사람이 벨을 누르면 문을 열어주기가
겁나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모르는 어른들의 친절함을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거짓과
진실을 분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불신과 의혹만으로 세상을 살 수
없습니다.
의정부에 사시는 부모님을 위해서 ‘정수기’를 놓아드린 적이
있습니다. 정수기를 판매하는 직원이 계좌번호와 저의
주민등록번호가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휴대폰 요금이
자동으로 결제 되듯이 저의 통장에게 자동으로 정수기
이용요금이 결제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선뜻
계좌번호를 불러드리기가 겁이 났습니다. 하지만 곧
불러드렸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신용카드 거래’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많이 이용하는 ‘홈 쇼핑, 인터넷 쇼핑’은
근본적으로 믿음이 바탕이 되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지나치게 저렴한 것’은 피하거나, 꼼꼼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잠시의 잘못으로 방황의 길을 걷던 사람들을 믿어주고, 함께
일하며, 재활의 길을 마련해 주던 친구가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웠습니다. 믿음과 관련해서 공자는 아주 중요한 말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을 믿기도 어렵지만 의심하지 않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인들에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바로 신앙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가족, 이웃들을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거짓으로 상처난 마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 마음은 하느님께서만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2013년 다해 7월3일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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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못하는 마음은 상처에서 비롯된다.
믿음을 저버린 사건들이 만든 상처들이 반복될수록
불신이라는 방어기제는 더욱 강하게 작동한다.
시간이 흘러도 늘 주변에는 거짓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믿지 않는 것이, 그리고 의심하는 것이 지혜가
되고 만다.
결국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것은 상처받지 않기 위한
선별작업과 의지를 통해서 얻어지는 마음이 되어버렸다..
보통의 우리의 모습이다.
상처는 불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믿음을 주지 못하게
만든다. 자신도 모르게 거짓을 타인에게 전한다는 말이다.
거짓으로 인한 상처의 악순환이다.
신앙. 즉 하느님을 믿는 것에도 이러한 상처의 영향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사도 토마스가 보여준 태도는 사실
예수님께 나무람을 들을 내용이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결국 만나게
되었고, 그의 상처는 치유가 된다. 믿음의 가치를 깨닫는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믿음을 순교로 증거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맹목적 믿음이 현명하거나 올바르다는
표현을 쓰지 못하는 삶, 이것이 우리의 죄의 결과이고 실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한계를 넘어서는 관계가 하느님과
우리의 믿음이라는 관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국 올바른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상처의 치유에서 온다.
그 치유는 우리의 희망에 대한 응답으로서 하느님께서 해주시는
치유이다.
치유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주신 그 마음을 되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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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사도에 대한 묵상은 지난 4월 7일자 복음묵상에 올렸습니다.
읽어보시지 않은 분들께서는 꼭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
559664990722243&set=pb.491783984177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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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진리 길 생명이신 주님까지도 의심한다면
인터넷쇼핑이 점점 대세가 됩니다. 만져보지 못하고 맛도
못보고, 실제로 신거나 입어보지 않고도 사는가 하면 반품도
잘 받아줍니다. 평가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며 서비스도 날로
좋아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아진다 해도 세상은 역시 보고 만져봐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결혼도 살아보고 해야 된다 할 정도니까. 의심만
커가는 세상입니다. 그렇다고 진리 길 생명이신 주님까지도
의심한다면 이건 문제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29)”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도회] 정제천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복음의 사건으로 인해 토마스 사도는 믿지 않는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토마스와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
보면 이를 재고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예수님을 목격한 다른 제자들은 한결같이 그 일을
자랑 삼아 고백했을 것이다. 토마스는 하필 자신이 없을 때 나타나신
예수님께 서운한 감정을 느꼈을 수도 있고, 다른 제자들에게 소외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체험하지 않은 일에 대해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믿음이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토마스의 마음에 공감하며 잠시 그 마음에 머물러 보자.
예수님은 토마스를 위해 다시 한 번 발현하셨다. 그분 앞에서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는 가장 짧고 아름다운 신경을 고백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고서야 믿는 토마스한테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을 남기신다. 이 말씀에 토마스의 외고집이나 불신앙을
비난하시는 듯한 어감이 담겨 있어 토마스가 불신앙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예수님이 발현하시어 토마스 사도의 청을 들어주셨지만 속으로는
그를 비난하신 것일까?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이중적인 태도로
대하는 분이 아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은 토마스와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는 수많은 이들을 축복하시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데에는 ‘보고서야 믿는’ 직접 체험의 길과 ‘보지 않고도 믿는’ 간접
체험의 길이 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도 여전히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고집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고도 믿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들을 지지하고
축복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예수님이 다시금 발현하신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보고서야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대변인이 된
토마스가 믿을 수 있도록 나타나셨다. 현대인들은 의심을 이겨낸
믿음을 원하는 것 같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복음서의 장면처럼
실제로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손을 넣어볼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주관적인 차원에서 의심을 해소할 만큼의 증거가 주어지면
그 의심은 극복될 수 있다. 실제로 그런 방식으로 믿음에 이른
사람들을 주변에서 얼마나 자주 보는가!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처럼
지금도 제2, 제3의 토마스가 된 사람들의 소망을 들어주신다. 오늘
하루 토마스 사도가 남긴 아름다운 고백인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으로 자주 화살기도를 바쳤으면 한다.
- 정 제천 신부(예수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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