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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제과점
김 연수
1
나는 이 소설만은 연필로 쓰기로 결심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연필로 소설을 써본 지도 꽤 오래된 일이다.
오래된 일로부터 이 소설은 시작한다.
아직도 나는 뉴욕제과점이 언제 문을 열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내가 태어났을 때, 거기 뉴욕제과점은 있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엄마는 언제부터 장사를 시작했어요?"
겨울이면 늘 코를 흘리고 다녀 소매 끝이 반질반질하던 초등학생 시절이었다.
"니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시작했지."
뉴욕제과점 난로 옆에 앉아 텔레비전 화면과 뜨개질 바늘을 거의 동시에 바라보며 어머니가 말했다. 그 즈음 우리 형제는 부쩍 자라고 있었다. 추석도 지나가 손님이 뜸해지는 가을부터 초겨울까지 어머니는 난로 옆 자리에 방석을 깔고 앉아서는 잘 입지 않는 스웨터를 풀어 새 스웨터를 짰다. 어머니가 스웨터를 짤 즈음부터 우리는 모두 크리스마스 대목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도 그게 정확하게 언제인지 몰랐거나 어머니는 말했는데 내가 너무 어렸던 탓으로 듣고는 잊어버렸던 모양이다. 좀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런 일들이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내 문제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뉴욕제과점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거기에 있었으니까 죽은 뒤에도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인생은 그런 게 아니다.
이 글을 쓰느라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언젠가 어머니가 누나를 낳은 뒤에도 가게를 보느라 제과점 뒤에 딸렸던 골방에 어린 누나를 혼자 내버려둔 적이 많았는데 그게 내내 미안했다고 말한 게 떠올랐다. 내가 태어났을 때 그런 방은 없었다.
"어디다 그런 방을 만들었어요?"
난로에 언발을 녹이고 있었거나 제과점 문을 들락거리면서 물었을 테다.
"저기 수족관 있는데까지가 방이었어. 그때는 집이 없어 갖꼬 한 방에서 다 그래 잠도 자고 밥도 먹고 그랬거든. 호호호."
다행히 내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우리에게는 따로 살림집이 있었다. 그러니까 나만 빼놓고 우리 형제는 모두 뉴욕제과점에서 태어난 셈이다. 단팥빵이나 크림빵처럼. 미운 오리새끼도 아니고 형제간에 그런 식으로 차이가 나다니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누나는 1965년생이다. 그렇다면 뉴욕제과점이 문을 연 것은 1965년 이전의 일이 되는 셈이다. 월남파병이 결정되고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죽고 대학생들의 반대 속에 한일협정이 조인될 무렵이었다. 그 모든 일들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다 일어났다. 그렇게 오래 전부터 뉴욕제과점은 거기에 있었다. 나는 뉴욕제과점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나를 뉴욕제과점 막내아들이라고 불렀다.
서울에서 우연히 고향사람들을 만날 때면 지금도 간혹 뉴욕제과점 얘기가 나올 때가 있다. 모두들 나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들이다. 역전에 있었다고 하면 대부분 기억해낸다.
"어머, 여고시절에 거기서 미팅을 자주 했는데……."
언젠가 인사동 술집 울력에서 만난 한 시인이 내게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그 날 나는 술이 많이 취해 있었다. 나는 이렇게 얘기했으리라.
"이젠 더 이상 제과점을 하지 않아요."
뉴욕제과점을 기억하는 고향 사람들에게 내가 늘 하던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내 말에 놀라거나 충격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학생 시절에 미팅까지 했던 곳이라면,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그런 곳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게 어째서 놀라거나 충격 받을만한 일이 아닐까? 가끔 나는 얘기하다가 멍청한 표정으로 이런 생각에 잠겨 한참 고향 얘기에 열을 올리는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고향 사람들과 얘기할 때, 나는 곧잘 문맥을 놓친다.
나는 뉴욕제과점이 있었던 그 거리에서 사라진 상점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상점과 함께 동네를 떠나버린 사람들도 모두 기억하고 있다. 나란 존재는 그 거리에서 배운 것들과 그 거리 밖에서 배운 것들로 이뤄진 어떤 것이다. 물론 그 거리에서 배운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내 몸 안에는 내가 어려서 본 상인들의 세계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저마다 내걸었던 양철 간판이나 형광등 간판이 어제 본 것처럼 또렷하다. 그 거리는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고향에 있는 거리는 예전에 내가 살았던 곳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실향민이나 마찬가지다. 지물포와 철물상과 목재상과 신발가게와 중국집과 금은방과 전당포와 양복점과 대폿집과 명찰가게와 다방재료상과 전업사와 저울가게와 하숙집과 대서방과 도장가게가 있던 내 고향은 영원히 사라졌다. 개발은 그 모든 작은 상점을 없애버렸다. 대단히 쓸쓸한 일이다. 죽게 되면 자신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되돌아 볼 기회가 찾아온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던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다른 시절에 할애된 시간을 줄여서라도 어렸던 그 시절 그 거리를 오랫동안 공을 들여 천천히 다시 걸어가고 싶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와는 생각이 많이 다른 모양이었다. 대놓고 물어보진 않았지만, 뉴욕제과점은 그저 학창시절에 미팅을 했던 장소 정도라 죽는 마당에 다시 가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들로서는 당연한 마음이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이 좀 야속하다.
뉴욕제과점이 언제 문을 열었는지 나는 모르지만, 언제 문을 닫았는지는 안다. 내가 태어나기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고향 거리의 수많은 상점들처럼 뉴욕제과점은 결국 새롭게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1995년 8월 문을 닫았다. 어차피 인생은 그런 것이니까 이걸 비관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나보다 먼저 세상에 온 것들은 대개 나보다 먼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정상적인 세상에서 정상적으로 일어나는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니까 뉴욕제과점이 이 세상에 영영 사라지는 일도 그와 마찬가지다.
하지만 과연 그런 것일 뿐일까? 그저 사라져 버리면 그만일까?
나는 1994년 5월 26일자 《새김천신문》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거기에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기사가 실렸다.
"김천 출생의 김연수군(24세)이 시와 소설로 각각 등단한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
지금은 나도 기자 생활을 해봤으니 이게 얼마나 멋진 도입부인지 잘 안다. 뭔가 흥미진진한 내력이 숨어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기사는 왜 내 등단사실이 '뒤늦게' 밝혀져야만 했는지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는다. 그저 '뒤늦게' 전해들은 것뿐이다. 그 사실을 '뒤늦게' 전한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기사 중 다음 구절에 노란 형광펜으로 줄을 그었다.
"역전파출소 옆 뉴욕제과점이 집이기도 한 작가 김연수군은……."
아버지는 가끔 그렇게 형광펜으로 줄을 그은 신문기사를 편지 봉투에 넣어 보내오곤 했다. 언젠가는 편지 봉투를 뜯어보니 《조선일보》 기사가 나왔다. 그때까지 나는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하거나 글을 실은 적이 없었다. 펼쳐보니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유미리에 관한 기사였다. 아버지는 유미리라는 이름에, 그리고 '방황과 절망이 빚어낸 문학성'이라는 홍사중씨의 칼럼 제목에 각각 붉은 형광펜 칠을 해놓았다. 동봉한 편지에 아버지는 "나는 너를 믿는다. 네 소신껏 희망을 갖고 밀고 나가거라. 어짜피 人生이란 그런것이 아니겠냐"라고 써놓은 뒤, '아니겠냐'의 '겠'과 '냐' 사이에 꺽쇠를 그려놓고 '느'를 부기했다. 그 편지를 읽을 때마다 나는 '아니겠냐'라고 쓴 뒤에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중간에 '느'자를 삽입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다. 아이가 생긴 뒤에야 나는 그게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 알게 됐다.
인터뷰는 뉴욕제과점 수족관 뒤 어두운 자리에서 이뤄졌다. 갓난아기였던 누나가 혼자 울음을 터뜨렸던 곳이기도 하고 인사동에서 만난 시인이 미팅을 한 자리이기도 했다. 그 자리는 무슨 까닭인지 남들 모르게 은밀히 빵을 먹으려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었다. 지금은 제과점에 이런 공간이 필요 없지만, 그때는 일반적이었다. 그 자리에 앉아 《새김천신문》에서 나온 사람과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는데 그 사람은 내 등단소설의 모더니즘 기법이 대단히 훌륭하다며 나를 추켜세웠다. 어쩌면 내 소설을 안 읽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보다 스무 살 정도는 더 많아 보이는 그 사람 앞에서 나는 마늘을 빻듯이 내키지 않는다는 몸짓으로 '모더니즘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바로 잡았다. 그 사람은 내 말을 받아 적었다. 우리 사이에는 어머니가 고른 단팥빵과 크림빵과 곰보빵이 은빛 쟁반에 놓여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빵들이었다.
나중에 나는 이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인생은 그런 게 아니었다. 점점 자기 그림자 쪽으로 퇴락해 가는 뉴욕제과점 구석 자리에서 나이가 스무 살 정도는 더 많은 사람을 앞에 두고 앉아 '모더니즘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바로 잡는,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자라는 만큼 이 세상 어딘가에는 허물어지는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바로 인생의 본뜻이었다. 아이가 자라나 어른이 되는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 사이에 아무리 단단한 것이라도, 제 아무리 견고한 것이거나 무거운 것이라도 모두 부서지거나 녹아 내리거나 혹은 가라앉는다. 그럴 때마다 내 안에서는 부식된 철판에서 녹이 떨어져 나가듯이 검고 붉은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죽어서, 떨어져 나갔다. 밀려드는 파도에 모래톱이 쓸려나가듯이 자잘한 빛들이 마지막으로 반짝이면서 어둠 속으로 영영 사라졌다. 내가 태어나 어른이 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말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모더니즘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 운운하는 바보 같은 말을 서슴없이 내뱉던 때였으니까 나중에 신문을 받아들고는 무슨 신문기사에 '역전파출소 옆 뉴욕제과점이 집이기도 한 작가' 같은 표현이 다 실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는 또 누구란 말인가? 지금은 경기도에 사니까, 또 뉴욕제과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까 누군가를 만나 나를 소개할 때면 "소설을 쓰는 아무개입니다"라고 말하지만, 아직도 고향에서 나는 '역전 뉴욕제과점 막내아들'로 통한다. 이제는 죽어서 떨어져나간, 그 흔적도 존재하지 않는 자잘한 빛, 그 부스러기 같은 것이 아직도 나를 규정한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졌다는 말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내가 뉴욕제과점 막내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늘 똑같다. 다들 "빵 하나는 엄청나게 먹었겠구만"이라고 말한다. 그 부러워하는 표정을 볼 때만은 재벌 2세도 마다할 만하다.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빵의 지위는 그처럼 높았다. 덩달아 제과점 막내아들의 지위도 지금의 소설가 못잖았다. 당연하게도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많은 빵을 먹었다. 거의 매일같이 빵을 먹었다. 그러다 보면 한 가지 깨닫는 게 생긴다. 생과자나 햄버거나 롤케이크처럼 비싼 빵은 매일 먹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매일 먹을 수 있는 빵은 몇 가지 되지 않는다. 단팥빵, 크림빵, 곰보빵, 찹쌀떡, 도넛, 우유식빵 같은 제과점의 기본적인 빵에만 질리지 않을 수 있다. 아마도 자장면과 짬뽕을 가장 즐겨 먹는 중국집 아이가 있다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것이다. 죽기 직전, 어렸을 때의 그 거리를 다시 한 번 걸어갈 일이 생긴다면 내 손에는 단팥빵과 크림빵과 곰보빵과 찹쌀떡과 도넛과 우유식빵이 들려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빵을 그렇게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뉴욕제과점에서 빵을 훔쳐 먹은 경험도 있다. 남들 듣기에는 버스 차장이 무임승차해 본 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고해소에 들어가 고백한다고 해도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얘기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어머니가 보지 않을 때, 빵을 집어서 도망쳤다. 내게 잘 해주던 약국 형제가 있었는데, 그 형제에게 빵을 대접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직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 전이었으니 어머니는 막 40대에 접어들고 있었을 테다. 그때는 마음대로 빵을 먹지 못했다. 뉴욕제과점 막내아들이라는 호칭이 무색할 정도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들 입으로 들어가는데, 그걸 못 먹게 해요?"
뉴욕제과점이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진 뒤에 내가 어머니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한 푼이라도 아쉬웠거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젊었을 때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먹을 빵까지 팔아서 악착같이 돈을 만드셨다.
어쨌든 그 시절에는 일본말로 '기레빠시'라는 것을 먹었다. 우리말로 하자면 자투리, 부스러기 정도가 맞을 것이다. 신문지를 깐 큰 철판에 반죽을 채워 가스오븐에 구우면 한참 뒤에 철판 가득 카스텔라로 바뀌어 나온다. 때에 절은 하얀 가운을 입은 제빵 기술자 형이 일하는 공장은 가스오븐의 열기 때문에 늘 후끈거렸다. 공장 안에는 내 아름만큼이나 큰 대형 선풍기가 있었지만, 여름에는 뜨거운 바람만 토해낼 뿐이었다. 기술자 형은 큰 배터리를 검정테이프로 붙여놓은 빨간색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침 방송을 들으며 가스오븐을 열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카스텔라를 꺼내 밖으로 가져갔다. 잘 구워진 카스텔라는 코팅을 한 듯 저절로 생긴 기하학적 무늬가 그려진 표면이 반질반질했다. 오븐에 들어가기 전의 반죽과 오븐에서 구워진 빵은 같은 물질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빵이 구워지는 모습을 나는 몇 번 정도나 봤을까? 한 5백 번 정도 봤을까, 1천 번 정도 봤을까? 하지만 볼 때마다 그건 기적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그런 일이 사람에게도 가능하다면 나도 기꺼이 가스오븐으로 들어가 뉴욕제과점 막내아들에서 미국 뉴욕의 실업가 아들 정도로 다시 나왔을 텐데. 그런 멍청한 상상이 한참 깊어질 무렵이면 밖에 내놓은 카스텔라도 웬만큼 식었기 때문에 기술자 형은 신문지를 잡고 철판 밖으로 카스텔라를 꺼내 날은 없지만 무척이나 긴 제빵용 칼로 포장할 수 있을 만큼씩 잘라냈다. 가장 먼저 위 아래 좌우의, 조금 타서 딱딱한 부분부터 잘라냈다. 기레빠시는 이렇게 잘라내 못 쓰는 빵을 뜻했다. 모양 때문에 잘라냈지만, 가게에서 파는 카스텔라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그냥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주기에는 모양이 너무 안 좋았다. 결국 기레빠시는 우리 형제들 차지로 돌아왔다. 계란과 박력분이 범벅이 된 기레빠시의 맛은 아직까지도 혀끝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나는 단팥빵과 크림빵과 곰보빵과 찹쌀떡과 도넛과 우유식빵에는 질리지 않았지만, 이 기레빠시에는 질려버리고 말았다. 결국 우리 형제가 기레빠시에 손을 대지 않게 되자, 상하기 직전의 기레빠시는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의 차지가 됐다. 강아지도 얼마간은 맛있게 먹었지만, 곧 기레빠시를 거들떠보지도 않게 됐다. 개들마저도 끝내는 알게 된다.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과하면 질리게 된다.
한 번은 친구들이 놀러왔다가 개 밥그릇에 놓인 기레빠시를 보게 됐다.
"어, 저게 뭐라?"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들이 물었다.
"기레빠시라."
기레빠시가 빵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저거 카스텔라 아이가?"
"저거는 카스텔라가 아이고 기레빠시라 카는 기다. 카스텔라 부스러기다."
"부스러기는 카스텔라 아이가?"
며칠 뒤부터 학교에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누구 집에는 개도 카스텔라를 먹더라는 소문이었다. 지금도 그 때의 초등학교 동기들을 만나면 이 얘기가 나온다. 지금도 나는 그게 카스텔레가 아니라 기레빠시라고 주장한다. 지금도 아이들은 그걸 카스텔라라고 기억한다. 뉴욕제과점에서는 개한테도 카스텔라를 먹였다, 라고 아이들은 회상한다. 어쩐지 풍요로웠던 한 시절이 이로써 끝나버린 느낌이 든다.
2
서른이 넘어가면 누구나 그때까지도 자기 안에 남은 불빛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 들여다보게 마련이고 어디서 그런 불빛이 자기 안으로 들어오게 됐는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한때나마 자신을 밝혀줬던 그 불빛이 과연 무엇으로 이뤄졌는지 알아야만 한다. 한때나마. 한때 반짝였다가 기레빠시마냥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게 된 불빛이나마. 이제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불빛이나마.
내 마음을 풍요롭게 만든 것은 어디까지나 불빛들이었다. 추석 즈음 역전 근처 평화시장에 붐비던 노점상의 카바이드 등빛과 상점마다 물건을 쌓아놓은 거리에 내걸었던 60촉 백열등의 그 오렌지 불빛들, 혹은 크리스마스 가까울 무렵이면 상점 진열창마다 서로의 빛 속으로 스며들며 반짝이던 울긋불긋한 불빛들이나 역전에 모여든 빈 택시들의 차폭등과 브레이크등이 내뿜은 붉은 불빛, 또 귀성열차가 도착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운전수들이 피우던, 그만큼이나 붉었던 담뱃불빛들. 그 가물거리는 것들. 내 기억 속에서 그 불빛들이 하나 둘 켜지면 절로 행복한 마음에 젖어들게 된다. 어두운 역전 밤거리에 붐비던 그 불빛들은 따스했다. 우리가 지금 대목을 지나가고 있음을 알려줬으니까. 사람들이 줄지어선 서울역 광장이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빠져나가는 귀성버스를 향해 손을 흔드는 구로공단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저녁 거리를 향한 금성대리점의 칼라 텔레비전. 대목 장사를 바라고 제과회사나 양조회사에서 공짜로 나눠주는 초라한 디자인의 포장지에 일률적으로 포장한 뒤 상점 앞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종합선물세트, 혹은 경주법주나 백화수복 같은 것들. 서울이나 울산이나 대전, 대구 같은 대도시 생활의 고단한 표정일랑 빈집에 남겨두고 내려온 귀성객들이 홍조 띤 얼굴로 말끄러미 들여다보던 선물세트 견본품 비닐 위에서 번득이던 백열등. 왕복요금까지 챙기고 부리나케 시골 구석까지 들어갔다가는 다시 역으로 돌아온 뒤 택시 승강장 앞에 내려서서는 팔을 흔들며 다음 귀성열차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던 택시운전사들의 뿌연 담배연기. 명절 특별 수송기간을 맞이해 상점 진열창보다도 더 큰 널빤지에 만든 임시시각표를 들고 와 대합실 입구 옆에다 세워놓던 역 노무자들의 주름진 얼굴. 그 모든 광경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 반짝이는 불빛들이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풀풀풀 가슴 한켠에서 불빛이 날리듯 반짝인다.
또 이런 기억도 있다. 다락에는 낡은 옷가지를 넣어두는, 종이로 만든 사각형 의류함이 있었다. 모두 두 개가 있었는데, 한쪽에 크리스마스 장식물 박스가 들어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우리는 그 장식물 박스를 의류함에서 꺼냈다. 아버지가 미군 PX를 통해 구입했다는 비싼 장식품들이 그 안에 가득했다. 색깔공도 모두 진짜 크리스탈이었고 금은색 별도 대단히 정교했다. 아버지가 평소에는 살림집 이층에서 키우던 어린 전나무를 가져오면 우리 형제는 그 나무에 둘러서서 먼저 꼬마전구를 두른 뒤에 색동지팡이나 빨간 구두 같은 장식물과 형형색색으로 반짝이는 줄을 내걸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모두 꾸미고 나면 가게 안에다 남은 색줄을 늘어뜨리고 크리스탈 공을 매달았다. 난로 주위로 늘어진 줄들은 연탄불이 활활 타오를 때면 어린 스티븐슨이 증기기관의 원리를 발견하던 에피소드를 연상시키며 뜨거운 열기에 저 혼자서 흔들리곤 했다. 약국에서 탈지면을 사와 창에다가 눈처럼 붙이고 가게문에다 'Merry Christmas'라는 글자와 천으로 만든 호랑가시나뭇잎과 종이 은종이 맵시 좋게 어울린 화환을 내걸면 크리스마스 준비는 모두 끝났다. 크리스마스 장식을 모두 설치한 뉴욕제과점은 가스오븐에 들어갔다가 나온 카스텔라 반죽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게 안의 모든 것들이 불빛을 반짝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머니도, 우리도, 탁자도, 수족관도, 진열된 빵들도 모두 저마다 빛을 발했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거의 10분에 한 번씩 케이크를 사러오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빛을 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보통 때는 하루에 서너 개, 많아야 대여섯 개 정도만 팔렸으니까 엄청난 일이었다. 어머니는 3백 개는 족히 넘을 만큼 케이크를 준비했지만, 사람들에게 아직도 팔아야 할 케이크가 많다는 느낌을 주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가게에 조금만 갖다놓고 팔리는 족족 우리가 케이크를 옥상에서 가져왔다. "5호 다섯 개하고 4호 세 개 가져와라"라고 외치던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대목이 지나면 한동안 돈이 궁해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어찌됐건 힘을 내야만 했다.
내게 보낸 편지에서 "어짜피 人生이란 그런것이 아니겠느냐"라고 아버지는 쓰시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니겠냐'와 '아니겠느냐'가 어떻게 다른지 나는 아직도 모르고 있다. 세월이 흘러서 나도 내 아이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한 편지를 쓸 때쯤이면 그 뉘앙스 차이를 알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나도 왜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되는지, 왜 세상의 모든 불빛은 결국 풀풀풀 반짝이면서 멀어지는지, 왜 모든 것은 기억 속에서만 영원한 것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내 다음 아이들이 자라게 되면,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그 정도의 짧은 시간만 흐르고 나면 나도 '아니겠냐'와 '아니겠느냐'의 차이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짧았던 뉴욕제과점의 전성기가 끝난 뒤부터 벌어진 일들이다. 내가 아이에서 등단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청년이 되기까지 뉴욕제과점 그 빛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담은 얘기다.
"자, 어떤 걸로 사면 좋겠냐?"
아버지가 제과점용 진열장 카탈로그를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말했다. 코팅지로 만든 카탈로그에는 미끈하게 생긴 다양한 제과점용 진열장 사진이 인쇄돼 있었다. 그때까지 어머니는 나무로 만든 진열장을 사용하고 있었다. 백열등을 이용한 조명이 좋지 않아 빵이 탐스럽게 보이지 않았는데다가 밀고 닫을 때마다 접촉 부분이 닳은 나무문에서는 끽끽 비명소리가 들렸다. 냉장장치도 없었기 때문에 더운 여름날이면 케이크를 냉장고에다 넣어둬야 할 형편이었고 제대로 닫히지 않는 문은 쥐들도 쉽게 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형편이었으니 카탈로그에 실린 진열장은 어떤 것이라도 좋았다.
"이것도 괜찮고 저것도 좋고……."
아버지는 아마도 미리 가격과 쓰임새를 알아 봐 구입할 모델을 점찍어두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형제는 하나같이 금빛, 은빛 불빛을 번득이며 근사하게 배치된 최신형 진열장을 꼼꼼히 살폈다. 카탈로그에 실린 진열장은 정말 근사했다. 냉장 기능을 갖춘 데다가 잘못하면 불꽃을 튀기는 플러그를 매번 꽂았다가 떼었다가 할 필요도 없이 스위치만 작동시키면 환한 불을 밝힐 수 있었으며 프레임을 철제로 만들어 나무 진열장에 길들여진 쥐들은 체력단련을 새로 하지 않는 한, 침으로 수염을 적시며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을 게 틀림없었다. 아버지는 유선형으로 약간 경사가 진 케이크 진열장과 원목의 느낌이 나는 중후한 모양의 빵 진열대를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그 김에 탁자와 의자도 바꾸기로 했으며 손으로 돌리던 빙수기계도 자동형으로 교체했고 식빵 자르는 기계도 구입했다. 그러니까 제5공화국도 막바지로 치닫느라 그 조그만 도시에서도 국민본부가 결성되는 등 사회가 어수선하던 무렵이었다.
내가 아는 한, 뉴욕제과점은 세 번에 걸쳐서 변화의 기회를 맞이했다. 처음에는 박정희가 죽고 난 뒤에 찾아왔다. 빵이라면 고급 생과자만을 생각하던 사람들도 그 즈음부터 일상적으로 빵을 사먹기 시작했다. 근검절약과 저축을 미덕으로 내세우던 시대가 지나가고 레포츠니 마이카니 하는 신조어와 함께 소비가 미덕인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내 마음속에 지금도 남은 불빛들은 모두 그 즈음 뉴욕제과점의 전성기 시절의 것들이다. 설날에는 선물용 롤케이크와 케이크를, 2월 발렌타인데이에는 초콜릿을, 3월 화이트데이에는 사탕꾸러미를, 6월부터는 빙수를, 추석에는 다시 선물용 롤케이크와 케이크를, 입시 무렵에는 찹쌀떡을, 동지 무렵에는 단팥죽을, 크리스마스에는 케이크를 팔았다. 그 시절, 어머니는 그 대목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두 번째 기회는 제5공화국이 끝나갈 때쯤부터 찾아왔다. 이제 뉴욕제과점에서 대목장사의 몫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손님들은 최신식 인테리어를 갖춘 제과점을 선호하기 시작했고 바게트빵, 피자빵, 야채빵 등 서울에서 내려오기 시작한 새로운 종류의 빵을 찾기 시작했다. 기술자 형은 《월간 베이커리》에 실린 조리법을 한참 들여다보기도 하고 시내의 다른 기술자나 대구의 기술자들에게 직접 배우기도 하더니 피자, 야채빵, 밤빵, 옥수수식빵 따위의 새 메뉴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바게트빵만은 끝내 만들지 못했다. 조리법대로 만들긴 했는데, 바게트빵 특유의 바싹바싹하고 질긴 느낌이 나지 않아서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긴 해도 뉴욕제과점은 나름대로 성실하게 두 번째 기회를 맞이할 준비를 마친 셈이었다.
그러나 뉴욕제과점은 그 두 번째 기회를 첫 번째 기회만큼 제대로 맞이하지 못했다. 더 이상 바게트를 만들지 못해서도 아니었고 대목이라는 게 사라졌기 때문도 아니었다. 사실상 뉴욕제과점을 이끌었던 어머니가 자궁암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족 중 누구에게서도 수술의 성공 확률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왜 그런지 그때의 기억은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내가 스스로 지워버린 것일까, 아니면 기억에 남겨둘 만큼 심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저 학교와 집만 오간 것은 아닐까고 추측할 뿐이다. 가게는 누나가 지켰으며 아버지는 수술을 앞둔 어머니와 함께 대구 병원에 내려가 있었다. 가끔 휴일이면 누나를 대신해 혼자서 뉴욕제과점을 볼 때도 있었다. 나는 빵 가격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내키는 대로 빵을 팔고는 했으며 끝내 팔기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면 저는 잘 모르니까 나중에 어머니 있을 때 사세요, 라고 말하며 손님을 돌려보냈다. 하지만 어머니가 다시 올지 안 올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어머니는 거의 혼자서 뉴욕제과점을 지켜왔다. 어머니가 없는 뉴욕제과점이라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새 진열장과 기계를 갖춘 뉴욕제과점은, 그러나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음산해졌다. 공정하게 한 가운데를 달린다고 했을 때, 예감은 좋은 일과 나쁜 일 중 나쁜 일 쪽으로 곧잘 쓰러지곤 했다. 추억이 곧잘 좋은 일 쪽으로만 쏠리는 것과는 참 다르다. 많이 다르다.
그러므로 삶이란 추억으로만 얘기하는 게 좋겠다. 어찌된 일인지 기억나는 것은 대구역에서 이모들과 함께 올라탄 택시에서 들리던 라디오방송이다. 남녀가 나와 만담을 하듯 한없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오후의 한가한 시간을 메우는, 그런 종류의 프로그램이었다. 동성로니 서문시장이니 하는 대구의 지명도 기억이 난다. 이모들은 집안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모르겠다.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나는 낯선 대구 시내를 바라보며 자꾸만 들리지 않던 라디오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요새도 나는 한가한 오후에 만담식 라디오 프로그램을 틀어놓은 택시를 타고 낯선 동네를 지나갈 때면 그때 생각을 한다. 이 현실에서 다른 현실로 빠져 들어가는 순간을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다. 병원에 갔더니 어머니는 파리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나는 이모들이 내미는 쌕쌕인가 붕붕인가 하는 음료수를 마셨고 이내 병실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병원의 복도는 베이지색이었지만 그늘진 곳은 밤색에 가까웠다. 복도의 끝에는 중정(中庭)으로 나가는 나무문이 있었다. 뉴욕제과점보다도 더 오래 전에 지어진 병원이었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뜰에 심어놓은 나무와 풀 같은 것들을 바라보면서 서 있었다. 햇살을 받고 서 있었는지, 바람은 불어왔는지 아무런 기억이 없다. 다만 그 나무와 풀 같은 것들을 예전과 마찬가지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 고마울 뿐이었다는 기억밖에. 그러니까 어머니는 혼자서 위험한 고비를 넘어온 것이다. 추석이나 크리스마스 대목을 넘어가듯이 말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뉴욕제과점 막내아들로 남을 수 있게 됐다.
3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나는 여름이면 빙수를 직접 만들어먹었다. 제과점에서 빵은 잘 사먹는 편인데 빙수만은 절대로 사먹지 않는다. 빙수의 생명은 팥죽에 있는데, 요즘에는 이 팥죽을 직접 만들어 빙수를 파는 집이 없기 때문이다. 빙수는 곱게 간 얼음에 팥죽만 끼얹어서 먹는 게 가장 맛있다. 그래서 빙수하면 첫 번째가 팥죽 맛이고 두 번째가 정말 눈처럼 얼음을 갈 수 있는 빙수기계의 칼날 맛이다. 여름이면 나도 가게에서 빙수를 꽤나 많이 팔았다. 가장 기록적인 날은 1994년 여름방학 때 찾아왔다. 그러니까 내가 시와 소설로 등단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고향에 알려진 바로 그 해다. 그 여름은 꽤나 무더웠던 모양이다. 매일 빙수 파는 양이 늘어나더니 어느 날은 결산해보니 134그릇이나 판 것으로 나왔다. 그 사실을 알고 내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른다. 당장이라도 어머니에게 자랑하고 싶었지만, 그 해 여름에도 어머니는 연례행사처럼 병원에 입원 중이었고 나는 방학 내내 가게를 봤다. 나는 나중에 어머니가 퇴원하면 자랑하려고 그 숫자를 암기했다. 134그릇. 정말 대단한 숫자였다.
"그래, 많이 팔았네."
며칠 뒤, 대구의 병원으로 내려간 내가 숫자를 말하자 어머니가 누워서 피식 웃었다.
"이제까지 하루동안 빙수 판 것 중에서 제일 많이 판 것 아니에요?"
"그거보다는 내가 더 많이 팔았지."
"몇 그릇이나 팔았는데요?"
"옛날에는 얼마나 많이 팔았다구. 여름에 빙수 팔아 가지고 가을에 너희들 학교도 보내고 옷도 사 입히고 그랬으니까 얼마나 많이 팔아야됐겠냐?"
나는 병원 보호자용 침대에 앉아 떨어지는 링겔 방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이제 가게 그만 해요."
"니가 아직 대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는데, 가게 그만 두면 네 등록금은 어떻게 마련하냐?"
"내가 글 써서 벌면 되지."
"하이구, 돈 버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아나? 형하고 누나도 대학교 등록금까지는 내가 벌어서 냈으니까 너도 졸업할 때까지만 학비 대 줄께. 그 다음부터는 니가 벌어서 살아라."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수술을 받은 뒤로는 어머니는 사소한 일에도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들 중에서 제일 훌륭한 것은 대학교 등록금이 아니라 그 웃음이라고 말하면 어머니는 서운해할까? 결국 나는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어머니에게서 등록금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정말 어머니는 돈을 주지 않았다. 대학 졸업 뒤, 한 해 동안 나는 여기 저기 굉장히 많은 글을 썼는데, 번 돈이 전성기 때 뉴욕제과점 대목 장사는커녕 며칠 번 돈만큼도 되지 않았다.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내가 아는 한 마지막 기회가 뉴욕제과점에 찾아왔다. 김영삼 대통령이 세계화를 주창할 때만 해도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는데, 파리크라상이나 크라운베이커리 같은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빵집이 그 작은 도시에도 생기고 나서야 우리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봐도 그 가게에서 파는 빵과 비교해 뉴욕제과점의 빵은 형편없었다. 뉴욕제과점과 함께 빵 장사를 시작했던 다른 가게들이 하나둘 파리크라상이나 크라운베이커리 같은 가게로 바뀌거나 업종을 전환했다. 그러나 뉴욕제과점은 꿋꿋하게 1980년대 풍으로 그 자리를 지켰다. 이젠 더 이상 새롭게 바뀔 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뉴욕제과점은 우리 3남매가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 필요한 돈과 어머니 수술비와 병원비와 약값만을 만들어내고는 그 생명을 마감할 처지에 이른 것이다. 어머니는 며칠에 한 번씩 팔지 못해서 상한 빵들을 검은색 봉투에 넣어 쓰레기와 함께 내다버리고는 했다. 예전에는 막내아들에게도 빵을 주지 않았던 분이었는데, 기레빠시도 버리지 않고 다 먹었던 분이었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심정은 매우 처참했다. 어차피 인생은 그런 것이었던가? 어머니의 자존심은 빵을 팔지 못해서 버린다는 사실을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비닐봉투에 꽁꽁 묶어서 버리는 정도로만 남아 있었다. 그나마도 집 잃은 고양이들이 빵 냄새를 맡고 쓰레기봉투를 죄다 뒤져놓아 청소차가 다니는 새벽이면 가게 앞거리에 빵 봉지가 난무했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가게를 그만 두겠다는 말만은 하지 않았다. 그저 내게 말한 것처럼 어느 해 여름에는 빙수를 얼마나 많이 팔았었는지, 어느 해 크리스마스에는 케이크를 얼마나 많이 팔았었는지, 어떤 기술자가 얼마나 속을 섞였는지 그런 말씀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어머니도 당신이 문을 연 뉴욕제과점이 이제 그 생명을 다했다는 사실을 납득하는 것 같았다. 그런 사실을 납득하는 게 과연 어떤 기분일까? 나로서는 상상이 가질 않는다.
대학을 졸업한 그 해, 처음으로 돈을 벌기 위해 아등바등 애를 쓰던 어느 날 고향에서 전화가 왔다. 뉴욕제과점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는 연락이었다. 새로 인수한 사람은 그 자리에 기차 승객들을 상대로 한 24시간 국밥집을 차린다고 했다. 나는 잘 됐다고 말했다. 뉴욕제과점이 문을 열 때도 나는 거기에 없었는데, 문을 닫을 때도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 나는 국밥집이 된 뉴욕제과점 자리를 상상해봤다.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이제 이 세상 어디에도 뉴욕제과점은 없다고 생각하니 쓸쓸한 기분이 조금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역시 그 당시 내가 처한 문제만으로도 걱정할 일은 많았기 때문이다. 그 얼마 뒤, 살던 집마저도 역전에서 시 외곽으로 이사했다. 가끔 고향에 내려가면 도무지 내가 살던 동네가 아닌 것만 같았다. 나는 이제 기차에서 내리면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예전에 논이 펼쳐졌던 자리에 새로 건설된 아파트촌으로 직행했다. 24시간 국밥집으로 바뀐 뒤로 뉴욕제과점이 있던 곳으로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 나는 문득 이제 내가 살아갈 세상에는 괴로운 일만 남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앞으로 내가 살아갈 세상에는 늘 누군가 내가 알던 사람이 죽을 것이고 내가 알던 거리가 바뀔 것이고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떠나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문득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러면서 자꾸만 내 안에 간직한 불빛들을 하나 둘 꺼내보는 일이 잦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사탕을 넣어둔 유리항아리 뚜껑을 자꾸만 열어대는 아이처럼 나는 뻔히 보이는 그 불빛들을 잊을 수 없어 자꾸만 과거 속으로 치달았다. 추억 속에서 조금씩 밝혀지는 그 불빛들의 중심에는 뉴욕제과점이 늘 존재한다.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어른이 되는 동안, 뉴욕제과점이 있었다는 사실은 내게는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뉴욕제과점이 내게 만들어준 추억으로 나는 살아가는 셈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뭔가가 나를 살아가게 한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 다음에 나는 깨달았다. 이제 내가 살아갈 세상에 괴로운 일만 남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도 누군가에게 내가 없어진 뒤에도 오랫동안 위안이 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삶에서 시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그저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은 내 안에 고스란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깨닫게 됐다. 그 즈음 내게는 아이가 생겼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아주 오랫동안 그 아이가 나 없는 세상을 살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어느 해 추석이었던가 설날이었던가, 고향 친구들과 술을 많이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꽤나 늦은 시간이었다. 문득 24시간 국밥집이 떠올랐다. 나는 얼마간 망설인 뒤에 그 집에 가보기로 결심했다. 김천역을 빠져 나오면 역전 광장 왼쪽에 뉴욕제과점이 있었다. 양옆에 샤시로 만든 진열창이, 그 가운데 역시 샤시로 만든 출입문이 있었다. 출입문 오른쪽에는 스티로폼으로 만든 모형 케이크를 늘 진열해놓았고 왼쪽에는 주방이 있었다. 오후면 잠깐 기울어진 햇살이 들어오는 바람에 차양을 드리워야 했다. 가게를 볼 때, 나는 오후 네 시경이면 줄을 풀어 초록색 차양을 드리웠었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으로 1980년대 후반에 새로 들여놓은 최신형 케이크 진열대가, 오른쪽으로 개방된 형태의 빵 진열대가 있었고 한쪽에는 위로 문을 여닫는 아이스크림 냉동고가 있었으며 들어가는 길 맞은편은 식빵, 롤케이크, 밤빵, 피자빵 등 좀 덩치가 큰 빵과 사탕 따위를 놓아두는 진열대가 하나 더 있었다. 거기를 돌아 들어가면 1번부터 9번까지 테이블이 있었다. 8번과 9번은 수족관 뒤에 있었기 때문에 들어가면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출입문의 정반대편 벽에는 컬러방송이 처음 시작된 해에 구입했던 텔레비전이 높이 설치한 받침대에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늘 케이크 상자나 포장용 비닐을 쌓아두는 1번 테이블 한쪽에 앉아서 낮에는 출입문 쪽을, 밤에는 텔레비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 영원히 남은 뉴욕제과점의 모습은 그와 같았다. 24시간 국밥집에 들어간 나는 옛날로 치자면 2번 테이블이 있던 곳쯤 돼 보이는 자리에 앉아 국밥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텔레비전도 옛날 그 받침대에 놓여 있었고 바닥의 무늬도 그대로였으며 나무로 치장해놓은 천장도 마찬가지였다. 내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서 나는 우리 가족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곳에서 나는 어린아이였다가 초등학생이었다가 걱정에 잠긴 고등학생이었다가 자신만만한 신출내기 작가였다가 빙수 판매 신기록을 세운 대학생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고개를 들고 실내를 바라볼 수 없었다. 이윽고 국밥이 나왔고 나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국밥을 먹었다. 국밥은 따뜻했다. 나는 셈을 치른 뒤, 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역전 거리의 불빛들이 둥글게 아롱져 보였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그렇게 많은 불빛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조금만 있으면 된다.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게 아니겠는가.(끝)
** 출처 : 김연수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문학동네 (2002년 1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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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읽었던 기억이 새삼스럽네요. 내 어릴 적 추억 속에도 '뉴욕제과점'이 남아 있습니다. 잠시 독일제과로 착각하기도 했었지만...^^*참 훌륭한 작가입니다.
면소재지 장거리엔 어디든 뉴욕제과 빵집이 하나씩 있었을걸요. 수원 시내도 돌아다니다 보면 주인이 직접 빵을 구워 파는 뉴욕제과가 있어요. 지금도 있나 모르겠네요. 참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 제과점... 김천 뉴욕제과에서는 그에 걸맞게 소설가가 한 분 태어났네요^^
뉴욕제과점... 행정구역이 시규모인 곳은 이름이 '뉴욕제과점'인 빵집이 하나씩 정도는 있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김연수님의 추억은 모두의 공감을 끌어내기에 충분하구요. 제가 어릴 때 살던곳은 '모나미 제과점'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날 아버지께서 모나미제과점으로 우리4형제를 불러 내어 빵을 실컷 먹여주셨는데 생각보다 많이 먹지도 못했고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파티였고 제가 친구와 다툰후 서로 사과를 한 곳도 그곳이었습니다. 오늘은 소핀님 덕분에 ...김연수님 덕분에 잠시 달콤한 빵 대신 추억속으로 다녀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김천 뉴욕제과점의 진열장이며, TV 받침대며, 수족관이며, 100원짜리 운수보는 재털이며, 안동대학교 미대 교수인 조각가 이상무님의 학창시절 제작한 꼴라쥬와 소설가 김중혁의 집에서 가져왔다던 김중혁의 형이 그린 정물화 등을 만났던 많은 추억들이 있던 곳입니다. 그 옛날 김천의 여러 제과점, 맘모스, 만나당, 독일제과점, 런던제과점 중에서도 추억이 있기에 정이 많이 가는 그런 곳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여러 지방의 소도시에서도 비슷한 추억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오늘에서야 알았습니다. 그때는 다 그랬군요. 그곳들도 아마 비슷한 전철을 밟았나 봅니다.
김천의 뉴욕제과를 읽으며 저는 제 고향의 쟝글제과를 떠 올려 보았습니다. 빵집에 관한 추억 하나 없는 사람 있을까요? 요즘의 화려하고 더 맛난 빵들 보다 추억속에 있는 곰보빵을 사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 2~30십년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뉴욕제과점이 역전 파출소와 도로 사이(택시 승강장)에 있었는지, 파출소와 아카데미 극장 사이에 있었는지 기억이 흐릿합니다. ^^* 아무튼, 30년 세월을 거슬러 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