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경환 {쇼펜하우어}
저자서문
쇼펜하우어는 1788년 독일 단치히에서 태어났고, 1860년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사망했다. 괴팅겐 의과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베를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예나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스승들인 피히테, 셸링, 헤겔 등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헤겔의 철학과는 정반대 방향에서 염세주의 사상을 정립했다.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고통이 따르고, 욕망이 충족되면 그 기쁨도 잠시, 곧바로 권태의 습격을 받게 된다. 우리 인간들의 삶은 곤궁, 결핍, 곤경, 불안, 비명, 포효의 연속이고, ‘연기된 사망’이라는 假死 상태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 이것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의 핵심이자 그가 우리 인간들에게 내린 파산선고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하루바삐 제거해야 할 암종처럼 이해하거나 가장 경멸적인 의미에서, 떼거지적인 사고법에 사로잡혀 있는 철새들처럼 때늦은 유행의 사조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는 기독교와 불교를 염세적으로, 유태교와 이교를 낙천적으로 이해한 종교적 기반 위에서 형이상학에 대한 철학적 의미와 인간학적 수용 문제를 폭넓게 천착해 나간 제일급의 철학자----임마뉴엘 칸트의 제자로서----이자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인 니체의 단 하나뿐인 스승이라고 할 수가 있다. 형이상학이란 우리 인간들의 존재, 죽음, 영혼불멸, 신, 종교, 도덕 등을 탐구하는 학문이고,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화두話頭들을 토대로 하여, ‘가능하면 아무도 해치지 말고 도와주라’는 윤리학의 근본명제를 정립했으며, 따라서 자살자의 철학이 아닌 성자의 철학을 완성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이기주의와 도덕적 가치를 극단적으로 대립시켰으며, “어떤 행위가 그 동기로서 이기적인 목적을 갖고 있다면 그 행위는 결코 도덕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없다”라는 단정적인 극언도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동정과 연민은 그의 윤리학의 두 축이며, 그는 삶에의 의지와 성욕조차도 거절함으로써 행복한 염세주의자의 길을 걸어갔던 것처럼도 보인다. 그의 철학은 부처와 예수와도 같은 성자의 철학이며, 타인들과 이웃에 대한 관심으로 하염없이 퍼져나가고 있는 이타적인 사랑의 철학이기도 하다”({행복의 깊이 제2권}).
쇼펜하우어의 저서로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문제}, {소품小品 및 보유집補遺集} 등이 있고, 나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김중기 역, 집문당), {쇼펜하우어}(최혁순 역, 을지출판사)를 참고로 하여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쇼펜하우어를 공부한다는 것은 염세주의 사상의 진수를 배운다는 것을 말하고, 염세주의 사상의 진수를 배운다는 것은 문학, 역사, 철학, 정치, 예술, 종교, 도덕, 독서, 학문에 대하여 더욱더 넓고 깊이 있게 공부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책은 쇼펜하우어의 명언과 명문장을 뽑고, 그 명문과 명문장 속에 살며 쇼펜하우어와 ‘비판적 대화’를 나눈 성찰의 산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나는 염세주의를 부정하는 낙천주의자이고, 따라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마저도 ‘낙천주의 사상’이라고 해석해낸 바가 있다. 삶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도 낙천적이고, 자살을 옹호하는 것도 낙천적이다. 왜냐하면 염세주의마저도 이 세상에서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삶의 공포로부터 구원하고 있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상은 행복에의 약속이며,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아름다운 명문장들은 인류 전체의 영광이자 영원불멸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가 있다. 쇼펜하우어의 글은 그토록 아름답고 깊이가 있지만, 어느 누구도 아주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가 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 즉, 제일급의 사상가들의 글은 아주 쉽고 재미가 있으며, 전인류의 경전經典이자 애송시愛誦詩와도 같다.
우리 한국인들은 하루바삐 학문의 즐거움을 알고, 이 학문의 즐거움으로 전인류의 사상의 신전을 지었으면 하는 마음 뿐이다.
2018년 ‘애지의 숲’을 거닐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