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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주] 며칠 전 우연히 펜실베니아州 베들레헴의 지역 일간지 <모닝 콜> 6월15일字 블로그에 실린 한국전쟁 참전용사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다.
이
기사의 주인공은 故 조지 라워 일병이다. 그의 친구인 루디 블롬스톰 씨는 <모닝 콜>의 빌 화이트 기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한 젊은 美軍 병사의 한국전쟁 參戰史(참전사)가 담겨있었다. 블롬스톰 씨와 라워 일병은 중학교 동창이지만 그
둘은 중학교 졸업식 이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조지 라워는 중학교 졸업 다음 날, 열 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한국전쟁에 참전,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戰死(전사)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6개월이 조금 넘는 187일을 복무한 참전용사다.
1950년 6월에 입대, 4개월을 미국에서 훈련받고 일본을 거쳐 그해 11월 원산으로 派兵(파병)됐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美軍 주력부대는 ‘장진호 전투’ 때 패해 퇴각했고, 조지 라워 일병은 추운 겨울의 철수 과정에서 동료들을 살리고
散華(산화)했다. 첫 전투를 벌인 1950년 11월부터 12월의 흥남철수까지, 가장 추운 겨울에 일어난 가장 뜨거운 전우애를
여러분께 소개한다. 아래 내용은 <모닝 콜>의 빌 화이트 기자의 블로그에 실린 글을 번역한 것이다.
▲조지 라워 |
그 글을 읽자마자 나는 한국전쟁에서 銀星(은성) 훈장을 받은 최연소 수훈자 중 한 명인 조지 라워 씨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 문제라면 문제가 블롬스톰 씨가 내게 전달해준 자료가 너무 방대해 내 칼럼에 다 실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난 자료 중 일부를 발췌해 기사화하고, 내 블로그에 全文(전문)을 올리려고 한다. 이제부터 소개될 내용은 블롬스톰
씨가 내게 전달한 자료의 全文이다.
한국전쟁에 대해 최대한 유머러스하면서도 정확한 내용을 담은 영화
‘매쉬(M.A.S.H, 注: 1970년 개봉돼, 한국전쟁 당시 M.A.S.H라는 야전병원에서 생긴 일을 다룬 코미디·전쟁
영화)’를 보고 자라온 우리들은 뛰어난 각본 뒤에 숨겨진 자세한 이야기들을 잘 모른다. 유엔 평화유지軍은 1950년 6월 한국에
처음 발을 들였고, 美軍 병력은 그해 7월 오산을 시작으로 부산과 인천에 차례로 파병됐다. 그로부터 얼마 후, 전쟁은 북한의
남한에 공산주의 전파를 막는 총력전으로 擴戰(확전)됐다.
열 일곱살 중학생, 한국전쟁에 참전!
1950년 11월 북한에는 압록강을 사이로 강한 바람과 눈보라가 끊임없이 몰아쳤다. 이 지역은 美 7보병사단과 1해병사단으로 구성돼 있었던 美 제10군단이 진군한 최북단 지역이었다. 이들은 수 개월간 북한군과 싸워 그들을 계속 밀어내고 있었다. 미국의 3보병사단은 1950년 8월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9월16일 일본에 상륙했다. 이들은 매사추세츠주의 데븐스 기지에서 출발한 병력과 함께 美 제10군단에 합류했다. 그들은 11월21일 북한 원산에 도착했고 그로부터 몇 주 후 예상치 못했던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그해 10월, 펜실베이니아주 베들레헴 출신의 청년 조지 라워 씨는 美 제3보병사단 7연대 2대대의 ‘이지 컴퍼니(Easy Company)’ 중대로 배치됐다. 그는 그의 열 일곱 번째 생일이자 베들레헴 북동쪽에 있는 프랭클린 중학교를 졸업한 날인 1950년 6월9일 입대했다. 라워 이병은 켄터키에 위치한 녹스 기지에서 기초 군사훈련을 받았고 4개월 뒤 일본으로 파병돼 3보병사단으로 배치됐다.
조지와 같이 근무한 웰덴 배셋(미네소타 출신), 존 케글로비츠(펜실베이니아 출신), 로버트 클렌데닌(노스캐롤라이나 출신) 그리고 칼 앤더슨(펜실베이니아 출신)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크리스마스 전에는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소문을 접하게 됐다.
원산의 잔혹한 겨울
조지가 소속된 미군 병력이 11월 원산에 도착했을 때 기온은 화씨 10도(섭씨 영하 12도)였고 동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강해지면 금방 0도(섭씨 영하 17도)를 웃돌았다. 그곳의 날씨는 추웠다. 그의 어머니 마가렛 씨가 아들이 과일가게에서 따뜻하게 일할 수 있게 수프와 자켓을 사주던 고향 펜실베이니아와 비교해 너무 추웠다. 조지 라워는 그가 살아온 짧은 기간 동안 이런 추위를 겪어본 적이 없었다. 7연대는 함흥에서 하루만 보내고 다음날 바로 북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들은 압록강을 향해 계속 전진해 나갔다.
그해 겨울은 1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할 정도로 잔혹한 겨울이었다. 북극의 찬 공기가 만주벌판을 지나 엄습할 때면 수통에 담긴 물은 꽁꽁 얼어버렸다. 조지는 정확한 날짜개념은 없었지만, 추수감사절이 다가온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注: 매년 11월 마지막 주 목요일).
하루 아침에 입대를 결정
나(注: 루디 블룸스톰)는 베들레헴에 위치한
프랭클린 중학교 재학 당시 조지 라워의 짝꿍이었다. 그는 터프했지만 자상했고, 학교 미식축구 팀에서 공격과 수비팀 가드로
활약했다. 같은 학년이었던 내 친구 래리 엔스트롬도 조지와 함께 미식축구팀에 속해있었다. 그 둘은 다른 팀의 어떤 공격수들도
자신들을 제칠 수 없다는 것을 즐겼다. 실제로도 그들을 뚫을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 후 조지는 입대했고, 래리는 성공적인
미식축구 커리어를 쌓아갔다. 같은 학년의 뛰어난 운동선수였던 프랭크 거티에레즈 역시 조지를 강인하고, 몸집도 컸으며, 나이도
조금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같은 학년이었던 할 앰브로스, 미키 데파올라, 론 오스트 역시 조지를 터프하고 호감형이었다고
기억한다.
조지와 래리는 둘 다 한 학년씩을 유급했기 때문에 내가 그중 막내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즈음 우리 셋은 군대에 지원하는 것을 논의했다. 하지만 나는 입대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래리 역시 부모님의 반대로 지원하지 못했다. 반면에 조지는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계획을 실천했다. 조지는 우리와 웃고 농담을 주고받다 한순간에 美 육군 소속이 되어 버렸다. 중학교의 마지막 날 미키와 래리를 포함한 우리는 베들레헴의 센터 스트리트와 유니온 블루바드 사이에 위치한 윌마 레스토랑에서 초콜릿 우유를 마시며 웃고 떠들었다. 그리고 그날 조지는 자신이 내일 입대한다고 했다.
美 제10군단은 맥아더 장군의 '크리스마스 공세'에 맞춰 압록강 진격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전설의 장군은
10군단을 맞이하는 30만의 중공군과 강추위에 대해 몰랐거나 과소평가했다. 중공군이 북한을 도울 리 없다는 맥아더 장군의 판단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정보실패 중 하나로 꼽힌다. 맥아더 장군과 그의 참모진은 최소 12개 여단의 수십만 중공군이 유엔군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북한으로 진입한 중공군은 동굴과 터널 숨기에 아주 능숙했으며 주로 야간에만
이동했다.
조지 라워는 그의 어머니와 할아버지를 따라 포코노 마운틴(注: 펜실베니아 주에 있는 산) 에 소풍을 간
경험이 있었다. 한국의 시골 지역은 펜실베니아의 산간 지역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추웠다. 아주 많이. 그리고 훨씬 더 큰
위협이 따랐다. 석 달 전만 하더라도 조지는 지도에서 딱 어디라고 지목할 수 없는 플로리다주 정도 크기의 한 아시아 국가에서
군사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마전동에서 처음 총을 쏘다
한국의 겨울은 날이 갈수록 추워졌다. 전방의 미군들은 지속적으로 맥아더 장군에게 중공군의 진군을 보고했다. 당시 일본에 있었던 맥아더 장군과 10군단 아몬드 지휘관은 현장의 보고를 무시하고 그들에게 北進(북진)만을 명령했다. 폭우 속에서 추수감사절 칠면조를 포함한 식사가 제공됐다. 철제 軍用 식기에 담긴 요리는 금방 차가워졌다. 조지와 그의 동료들은 오랜만에 찾아온 만찬이 식기 전에 빠르게 음식을 해치웠다.
동료의 戰死
섭씨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추위는 조지에게 前例(전례)없는 고통을 줬다. 그는 지급받은 여름용 전투복에 담요를 걸쳤고 야전上衣(상의) 위에는 한 해병에게 빌린 파카를 입었다. 11월27일 중공군은 장진호의 북쪽, 동쪽, 서쪽으로 포위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튿날까지 이어진 공격은 1대대와 2대대를 타격했고, 11월29일 라워가 속한 2대대는 흑수리에 포위된 1대대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0만 명의 중공군이 10군단을 향해 전진해왔을 때 조지는 세 번째로 M1 소총을 사용했다. 2대대는 흑수리 외곽에 있는 고지에서 鎭營(진영)을 가다듬고 있었다. 조지는 M1 소총 세 자루와 브라우닝 자동 소총 하나를 메고 3명의 분대원들과 함께 참호 근무를 섰다. 꽁꽁 얼어붙은 땅을 파내 참호를 만들 수 없었기에 얼음 뭉치와 나뭇조각을 쌓아 올려 몸을 숨겼다. 중공군은 산발적인 공격을 지속해왔다.
12월 초에도 눈은 계속 내렸고 2대대 이지 컴퍼니 중대를 향한 중공군의 공격도 계속됐다. 전세가 역전됐고 공격의 강도도 증가했다. 조지와 그의 동료 웰든, 조느 로버트는 살기 위해 근접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7연대는 피해를 최소화하며 버티고 있었다. 결국 700명이 넘는 사상자가 생긴 중공군은 철수했지만, 조지의 동료 칼 앤더슨도 전투 중 사망했다.
이지 컴퍼니 중대는 이른 아침 흑수리에서 최대한 빠르게 철수해 대기하고 있던 트럭에 탑승했다. 판자로 지붕만 겨우 가린 트럭으로 이동한다는 것이 안전하고 이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살아서 함흥 방면인 남쪽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클레이 블레어라는 작가는 2대대와 이지 컴퍼니 중대 덕분에 장진호에서 지칠대로 지친 美 해병 1사단의 패퇴를 막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용기란 공포를 1분 더 참는 것이다”
12월8일 역시 눈이 내렸고 온도는 화씨 영하 20도(섭씨 영하 28도)까지 내려갔다. 이지 컴퍼니 중대는 1대대와 2대대
소속의 다른 중대와 함께 10군단 병력이 흥남부두를 이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함흥시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이 작전이 이들이
살아서 북한을 떠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중공군은 12월8일부터 12일까지 함흥시 주변을 지속적으로 공격해 왔다. 美軍의
박격포와 공습이 중공군의 진영을 흐트려버렸고 이지 컴퍼니 중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순찰을 돌았다.
12일과 13일
사이 중공군 400명이 다시 한 번 이지 컴퍼니 중대를 공격했다. 중공군은 전쟁에서 사망한 미군 옷을 훔쳐 입고 공격하는 등
미군을 속였다. 이지 컴퍼니 중대는 흥남에서 배를 타고 철수하는 미군을 호위하는 8개 중대 중 하나였다. 조지 라워가 속한 소대와
분대는 다가올 중공군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었다. 美軍은 얼어붙은 땅을 파내어 참호를 만들었고 총기와 탄약을 점검하며 다음 명령이
있기까지 대기했다. 중공군과 맞닥뜨리는 상황은 점점 늘어만 갔다. 전설적인 戰艦(전함) 미주리號의 지원을 포함해 박격포, 전략적
공습 등이 美軍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해줬다. 하지만 결국에 전투의 승패는 戰線(전선)에서 싸우는 조지 라워 같은
군인들의 몫이었다.
13일의 금요일, 중공군은 세 번에 걸친 공격에 나섰고 조지 라워가 속해 있던 분대는 그들과 최전방에서 맞섰다. 중공군은 수로 미군을 제압했고 용감한 이지 컴퍼니 중대는 끝까지 그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조지와 그의 분대원들은 버글(注: 호루라기 소리)과 중국인들이 소리 지르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이지 컴퍼니 중대원들의 발포와 함께 쌓여있던 눈들이 바람에 날리기 시작했다. 나는 조지 라워가 중학교 미식축구 선수 시절 “너는 나를 통과할 수 없어”라고 소리쳤을 때처럼 중국인들에게도 똑같이 외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약간의 욕설을 곁들여서 말이다.
조명탄과 섬광탄이 戰場(전장)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카포크 자켓과 테니스화 같은 흰색 신을 신은 敵(적)들은 쉽게 확인됐다. 그들은 수류탄이 담긴가방을 어깨에 메고 톰슨 기관단총과 자동 권총, 그리고 美軍에게 포획한 火器(화기)들을 들고 있었다. 중공군은 전력을 보강해가며 계속 전진하던 반면에 이지 컴퍼니 중대는 탄약, 의무병, 그리고 의약용품들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대대 소속의 의무병 두 명은 이미 작전 중 사망한 상태였다. 조지와 그의 분대원들은 마땅한 대안도 없이 중공군과 계속해서 근접전을 펼쳤다. 그의 동료들과 함께 조지는 동분서주했다. 조지의 분대는 진열을 가다듬고 새로운 마음으로 싸울 준비를 했지만, 중공군은 美軍의 방어전선을 무너뜨리고 美軍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열일곱 살의 소년이 그와 그의 동료들의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는 게 어떤 심정일지 생각해 보라. 자신의 동료, 가족, 그리고 조국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 삶의 의지다. 전쟁의 열기가 추운 겨울을 녹였고, 조지 라워는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다. 물론 그는 무서웠다. 하지만 조지는 패튼 장군이 말했듯 “용기란 공포를 1분 더 참는 것이다”란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12명의 분대원들은 중공군에 포위되어 도망치거나 다 죽게 되는 상황에 빠졌다. 분대원을 살리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누군가 남아 나머지 분대원들의 철수를 은폐하며 엄호하는 방법뿐이었다.
포효하는 중공군과 激戰
戰場에 울려 퍼지는 소리는 아비규환을 연상케 했고, 분대원 간의 소통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황냄새가 자욱하게 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탈출로는 모두 차단됐다. 휘파람 소리와 버글 소리 사이에서 조지 헨리 라워는 분대원들에게 “내가 엄호할 테니 퇴각하라”고 소리쳤다. 이제는 열일곱 살 소년병과 포효하는 중공군의 싸움이었다.
조지는 M1 소총의 수 개의 탄창을 비워가며 중공군과 맞섰다. 중공군이 그들을 향해 총을 쏘는 한 명의 미군에 총력을 다할 동안 조지의 나머지 분대원들은 탈출할 수 있었다. 敵軍(적군)의 무리가 조지를 공격했지만 조지는 굳건히 버텨냈다. 총알이 그가 있던 참호를 뚫었다. 조지는 敵軍을 겨냥하기 위해 자신을 여러 차례 노출시켰다.
다른 중대들도 사면초가에 몰린 이지 컴퍼니 중대를 구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 중공군은 300명의 전사자를 뒤로 한 채 퇴각했다. 심한 피해를 당한 7연대 2대대의 생존자들은 12월24일 LST[상륙용 舟艇(주정)]에 올라타 따뜻한 침구와 음식이 준비된 대형 함선으로 이동했다. 그들이 흥남부두를 떠난 최후의 병사들이었다. 생존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을 것이다. 金星(금성)훈장 수여자들의 어머니, 부인, 그리고 자식들에게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敵들의 총탄과 수류탄 공격에 전사하다”
17년 6개월 4일간의 일생을 살고 떠난 조지 헨리 라워에게 수여된 표창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1950년 12월13일 조지 라워 일병이 한국 함흥에서 소대원들과 떨어져 홀로 적들과 맞서 싸운 용맹함을 기리기 위해 미국 대통령이 은성훈장을 내렸다. 소대장이 조지 라워가 속해있던 분대에 소대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조지 라워는 분대원들 모두가 움직일 時 전원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을 알고 혼자 잔류해 퇴각하는 분대원들을 엄호했다. 그는 분대원들 전원이 퇴각할 때까지 적들과 맞서 싸워 많은 사상자를 냈다. 결국 그는 동료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敵들의 총탄과 수류탄 공격으로 인해 전사했다. 그가 보여준 살신성인과 헌신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그는 펜실베이니아주에서 軍 생활을 시작했다.”
이 이야기에 대해 자료를 찾는 동안, 나는 여러 역사학자와 예비역들을 만났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모두 같았다. “은성훈장이 아니라 명예훈장을 받았어야 한다.” 많은 이들은 그가 명예훈장을 받지 못한 이유로 젊은 나이(17세)와 그의 계급(일병)을 언급했다. 한국전쟁 당시 너무 많은 수의 무공훈장 등이 수여됐다는 증언도 있었다.
美 국방부 ‘전사 및 실종자 처리국’에 따르면, 아직 8000여 명의 미군이 한국에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1950년 12월 처음 2주 동안 7연대에서만 100명이 넘게 전사했고 5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조지 라워의 遺骸(유해)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는 웰든, 밥, 존, 그리고 칼과 같은 여러 동료와 함께 북한의 황량하고 쓸쓸한 어느 언덕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아마 평생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나는 아직도 조지와 그의 동료들이 겨울에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담소를 나누거나, 한여름 쓸쓸한 언덕에 드러누워 햇볕을 쬐고 있을 것 같다. 영원한 젊음. 죽음이 어찌 보면 그들에게 영원한 젊음을 안겨줬을 수도 있다. 그들은 그들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남겨주고 떠났다. 바로 그들의 목숨을.
美 7연대는 그들이 함흥에서 보여준 용맹함을 기리는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 조지 라워는 은성훈장, 퍼플 하트 훈장(注: 미국에서 전투 중 부상을 입은 군인에게 주는 훈장), 전투 보병 기장, 한국전쟁 종군기장, 국제연합 종군기장, 국방 종군기장,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 표창, 그리고 6·25사변 종군기장을 받았다.
사람이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조지 헨리 라워는 그가 태어나 뛰놀았던 고향 펜실베이니아주 베들레헴으로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 마가렛 라워, 할아버지 조지 H 라워, 양아버지 찰스 스튜어트, 그리고 그의 형제 자매들과 친척들은 모두 조지가 그의 가족을 자랑스럽게 했다고 말했다. 조지는 항상 자신감이 넘쳤고, 넘치는 에너지와 용기로 무엇이든 끝을 보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생존했다면 과연 어떻게 성장했을까? 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은 딱 한 가지다. 그리고 나는 이를 아주 자랑스럽게 말하겠다. “그는 나의 친구였다고.”
조지 라워의 이름은 하와이 호놀룰루 전쟁 기념묘지(注: 펀치볼)에 있는 ‘실종자의 뜰’에 새겨져 있다. 나는 가슴이 조여오는
듯한 느낌의 그곳에서 조지 라워의 이름을 보게 됐다. 내가 그날 그의 이름에 손을 댔을 때 나는 내가 그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해야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가 당연히 받아 마땅할 명예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사람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여태껏 최연소 은성훈장 수훈자 중 한 명인 조지 라워를 기리는 행사나 歸鄕(귀향)을 기리는 행사는 한 번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