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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7. 묵상글 들 ( 부활 4주 화요일-무명의 선포자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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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7.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4주 화요일-무명의 선포자들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그리스도교가 설립되고 확장되는 과정이 선명합니다.
처음으로 안티오키아에서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 시작되는데
스테파노 사건으로 박해를 받아 흩어진 사람들이 페니키아나 키프로스나
안티오키아에 가서 말씀을 전했을 때는 유다인에게만 전했는데
그들 중에 일부가 안티오키아에 가서 이방인들에게도 말씀을 전하였고,
이곳 이방인 신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유다인들이었다면 여전히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불리지 않았겠지요.
그런데 어제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전했을 때는 그리스도교인이라
불리지 않았는데 오늘은 누군지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말씀을
전해 받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이 말을 제가 왜 할까요?
그제 어떤 분과 이태석 신부님 얘기를 하다가 이태석 신부님보다 먼저
어쩌면 더 훌륭한 일을 하다가 돌아가신 평신도 선교사 얘기를 들었습니다.
평범한 약사였던 분이 아프리카 선교를 꿈꿔 40이 넘은 나이에 공부를
다시 하여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갔는데 막상 아프리카에 가서 보니
소아과 치료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다시 한국에 와 전공의 공부를
한 뒤 계속 선교하다가 결국 전염병으로 아프리카에서 돌아가셨답니다.
그런데 지금 이분에 대해 알아주는 사람이 비록 아무도 없어도
이런 분이 사실 더 성인이라는 얘기가 그분 말씀의 골자입니다.
사실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사랑하는 사랑이
원수 사랑 못지 않게 하느님 사랑에 가까이 다가간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야말로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사랑 때문에 사랑한 사랑이고
하느님 사랑 때문에 사랑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오늘의 말씀 선포자를 우리는
베드로와 바오로 못지않게 위대한 말씀 선포자임을 알아야 하고,
알뿐 아니라 나도 그런 선포자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능력도 없고 위대한 선포자가 못 될지라도
나도 선포자가 될 수 있음을 알고 발뺌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냐면 베드로든 바오로든 그리고 무명 선포자든 나든 결국
선포자로 쓰시는 것은 하느님이시고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무명의 선포자는 자기가 전한 말씀이 받아들여지리라는 것도 알지
못했고, 자기로부터 말씀을 들은 이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리라는 것도 상상도 못했는데, 실은 그렇기에
그것이 성령께서 그를 도구 삼아 말씀을 선포하신 표시지요.
그러므로 나를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나의 사랑도 업신여기지 말 것입니다.
나의 작은 선포도 성령의 역사 안에선 위대하니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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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7.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신부님.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성전봉헌축제’ 때 벌어진 논쟁을 들려줍니다. 주제는 여전히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것입니다. “때는 겨울이었다.”(요한 10,22)는 표현은 그들 유다인들의 마음이 춥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그들은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직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주시오?”(요한 10,24) 하고 예수님께 따지고 대들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요한 10,25)
그들은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알아듣지 못한 것은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주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아듣게 합니다. 또한 깨달은 바를 믿음으로 따르게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주님의 양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7)
여기에는, ‘듣다’, ‘알다’, ‘따르다’, ‘준다.’ 라는 동사가 연이어 나옵니다. 사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목소리들이 혼탁하게 들려옵니다. 제 안에서도 요란스런 생각들의 소리가 흘러 다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많은 소리들의 홍수 속에 휩쓸려 살아갑니다. 그 속에 주님의 목소리 들려도 듣지를 못하며 살아갑니다. 진정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자기 자신의 목소리인가?
아니면, 주님의 목소리인가? 대체, 나는 지금 누구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무 목소리나 듣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주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면, 분명 그 많은 목소리들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고집을 내려놓고 듣는 일입니다.
“듣다”라는 말의 뜻은 단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는 것, 곧 마음으로 듣는 것을 말합니다. 곧 ‘더 깊이’ 마음으로 깨달아 알아듣는 것을 말함입니다. 그것은 내면적인 것이고, 관계의 형성을 의미하며, 받아들임을 뜻합니다.
“알다”의 뜻은 단순히 정보를 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밀애의 영역에서 체험하여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따르다”는 뜻은 ‘받아들이다’, ‘환영하다’란 의미로 옆에 혹은 근처에 있다는 표현합니다. 곧 ‘옆에서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세 동사는 모두가 깊은 ‘관계성’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관계야말로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에서 옵니다.
주님께서는 믿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요한 10,28).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그들을(내 양들)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7)
당신의 손에서 아무도 당신의 양들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당신의 손’은 권능을 드러냅니다. ‘아무도 우리를 당신의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이 말씀은 ‘아무도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곧 아무도 우리를 당신의 손에서 빼내 갈수는 없지만, 자칫 스스로가 떨어져 내릴 수는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처럼, 스스로 완고함으로 주님의 목소리를 믿지 않고 배척하는 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가리켜 “너희는 내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다.”(요한 10,2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결코 우리는 예수님의 손에서 스스로 빠져나가는 일이 없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27)
주님!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서
숨지 않고 피해 달아나지 않게 하소서!
당신 면전에 나서서 주님임을 알고
당신 사랑의 목소리 듣게 하소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게 하시고 깨달아 알게 하소서!
깨달아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새기게 하시고 따르게 하소서!
당신 말씀을 따름이 제 행복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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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7.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하면 하나가 된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님께서 ‘너는 언제까지 내 속을 태울 작정이냐?’하고 유다인에게 해야 할 말씀이었습니다. 말썽꾸러기 자녀를 둔 어버이 마음입니다. 여러 표징을 보여주면서 이미 다 말하였는데도 믿지 않으면서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소망이 있는 것처럼 교묘히 말하는 그들을 모를 리 없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이 말씀은 입으로 이런 소리 저런 소리 하지 말고 내가 지금까지 한 일을 보아서라도 믿어라.‘먼저 믿어라. 그리고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행하면 행할수록 진실을 깊이 알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소리도 내가 마음을 닫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들리지 않는 것뿐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들려서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하신 말씀은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어떤 것에 대한 자기의 지식, 기대나 생각, 바람, 선입견이 그를 귀먹고 눈멀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듣고 보려는 고집이 문제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먼저 나를 버려야 합니다. 내가 마음을 비우고 상대의 것을 내 안에 담아주지 않는 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숨을 내놓은 아들의 순명에서 온 것입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놓은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22,42). 물론 아버지는 아들이 순명을 하든 그렇지 않든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영원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 사랑을 알게 되면 자녀 또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하나가 됩니다. 완고한 고집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을 지닐 때 비로소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내 뜻을 이루려다 보면 무리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리고 거짓 포장과 술수가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속을 태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하느님과 하나가 되신 예수님을 본받아 내 뜻을 접고 주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님을 가슴에 모셔드려야 할 때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따먹고 동산을 거니시는 하느님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때 주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누가 일러 주더냐?"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사탄의 말을 따랐구나! 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흔들림 없이 주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니“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있는 듯이 하십시오! 또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있는 듯이 기다리십시오”(성 이냐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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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7.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양 냄새나는 목자,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떼
사람들이 오랜 옛날부터 하늘에 관심을 가지고 쳐다보다가
전문적으로 관측하게 되고 오늘날 과학적인 기상예보까지 하게 된 이유는
하늘이 땅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늘로 날아오를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땅에서
일상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하늘의 기후와 날씨는 절대적인 영향을 줍니다.
날씨는 그날그날의 대기상태, 즉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의 상태를 말하고, 기후는 일년 날씨를 평균낸 결과를 말합니다.
하늘이 땅에 미치는 영향은 기후와 날씨만이 아니라 역사와 운명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여겼기 때문에 생겨난 학문이 점성술(占星術)입니다.
어차피 지구를 둘러싼 행성들은 규칙적으로 운행을 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밤하늘을 쳐다본다고 달라질 질서가 아닙니다.
그 질서 현상에는 아무런 메시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별들이 저마다 크기와 무게와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각기 다른 공전주기와 자전주기를 가지고 있어서,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며, 일식과 월식 현상처럼 겹쳐져 보이기도 합니다.
지구에서 관측하는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천체질서가 바뀌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 하늘의 뜻에 관한 지식수준이 얕았던 시절에는 우리 눈에 보이는
천문 현상의 작은 변화에도 하늘이 땅에 주는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자 반대로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실 메시지가 있을 경우에 인류의 이런 사고
경향을 역으로 이용해서 특별한 현상이 생겨날 때를 겨냥해서 개입하시기도 하셨습니다.
평소에 보이지 않던 커다란 별이 나타날 때에 맞추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구세주 강생 사건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노아 때 전 지구적으로 일어난 대홍수도(창세 6장-10장),
니네베에서 무모해 보이던 요나의 회개 촉구 설교에
두 번의 기근(기원전 765, 759년)과 한 번의 일식(기원전 765년 6월 15일)이
일어나자 소수 민족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운 나머지 하느님을 믿지도 않던
앗시리아 황제와 신하들과 백성들이 느닷없이 회개한 일도(요나 3장)
그런 범주에 속합니다. 그런데 사실 천문 지식이 많아진 오늘날에 하늘이 땅에
미치는 영향을 일기예보 정도로만 국한시켜 알아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영향을 미치는 범주는 기후와 날씨를 넘어섭니다.
일단 구세주가 세상에 오신 이후에는 기후와 날씨보다
구세주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메시지가 곧 하늘의 뜻이었습니다.
시대의 징표를 식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테오 리치와 이벽 요한은 바로 이러한 하늘의 뜻,
곧 진리를 갈망하던 구도자(求道者)들이었고, 자기 시대의 한계 상황을
돌파하고 또 상황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기도 하면서 진리에 이르는 길을
동아시아에서 열었던 선각자(先覺者)들이었습니다.
또한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 듣기 때문에 낯선 목소리에는
따라가지 않는다는 이치를 감안하면, 오늘날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자발적으로 세례받은 사람들의 무려 80%가 냉담하기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목자로 자처하는 성직자들이
섬김의 목소리보다는 권위주의의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따라가지 않겠다고
선택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각자들 이미 보여준
모범대로 진리에의 소명 의식을 회복해야 합니다.
서로 섬김으로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이요 따라서
하늘의 뜻이었음을 역사적으로 회복하여 역사의식을,
사회적으로 회복하여 사회의식을 회복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이미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들어서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다그쳤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주시오”(요한 10,24).
거의 협박조의 이 질문은 궁금하거나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꾸하셨습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요한 10,25).
그들은 하늘의 뜻을 알아 보지 못하는 까막눈들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의 상황은 전혀 다른 반응이 나옵니다.
초대교회 예루살렘 공동체의 이방인 출신 신자들은
스테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졌는데,
박해를 핑계로 냉담하거나 신앙을 포기할 법도 하건만 오히려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유다인들에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박해가 선교의 발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저절로 일어나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그 박해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이 숨어 있다고
믿었던 평신도들의 신앙 덕분임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자 박해로 인해 움츠러들어 있었던 예루살렘의 사도
성직자들도 용기를 내어 신입 지도자였던 바르나바를 파견했습니다.
안티오키아에 공동체를 일구어 어느 정도 성과를 얻기도 했으나
더 이상의 성장이 어려운 한계에 봉착했던지, 바르나바는 박해자였다가
회심했다고 알려져 있던 사울을 타르수스까지 찾아가서 데려옵니다.
이는 이후의 교회 역사를 뒤바꾸어 놓은 매우 중요한 선교 성공 요인들입니다.
우선, 평신도들이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으로 상황을 식별하고 선교할 용기를 냈으며,
둘째로 이에 힘을 얻은 사도들이 바르나바를 파견하여 용감한 평신도들에게 화답했고,
셋째로 바르나바는 아직 선교사로서 신앙과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사울을 자신의 협조자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양 냄새 나는 목자들’이었고,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 들었던 양떼’들이었습니다.
오늘날 하늘의 뜻은 시대의 징표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우리 교회에서도 진리를 향한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회복하여
시대 상황을 식별한다면, 이런 소망스런 일들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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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7.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0,22-30: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성전 봉헌 축제 기간 중 예수께서는 솔로몬 주랑에서 당신에게 빌미를 잡으려 주님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하라고 하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일들로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26절)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27절) 우리가 참으로 양 떼라면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분의 양이라면 그분의 말씀을 기꺼이 듣고 따르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알아듣는다.’라는 말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따른다는 뜻이다. 하느님을 듣는 사람은 그분께서 아시는 사람들이며 하느님의 가족이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른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르며, 말씀의 인도를 받아 은총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라 불린다(마태 5,9 참조).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28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다. 바로 당신이 가지고 계신 생명을 주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요한 6,54)라는 말씀대로 그분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심어 주시도록 성체성사를 통해서 그렇게 하셨다. 이 생명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하셨으며, 좋은 풀밭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29절) 아버지께서는 양들을 아드님께 주셨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또한 아드님이 아버지로부터 나신 분으로 낳으심과 동시에 아들은 당신과 동등한 분으로 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도 양들을 그분의 손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이유이다. 여기서 ‘손’은 권능을 의미하며 아버지와 아들의 권능은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30절)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은 하느님으로서 하나이며, 이것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말이다. 그것은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둘이 하나인 상태이다. ‘아버지와 나는’ 두 위격으로 하나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일치를 말한다. 이 말씀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간의 사랑으로 하나이시다. 바로 성령 안에 하나이시다.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나셨기에, 그분은 아들이시다. 우리도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사랑이라는 관계는 우리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한다. 그러한 모습이 삼위일체의 모습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전혀 다른 분이시지만 사랑이라는 관계, 완전한 사랑 안에 하나이신 하느님이시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가 모두 서로 다르지만, 사랑의 관계로 하나가 되는 것이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여럿이지만 한 몸 그리스도, 교회의 참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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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7.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5-27).”
1)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실 때,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그동안 자기들이 들었던 율법학자들의 설교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2).”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권위’를 느꼈다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힘’을 느꼈다고 해서, 곧바로 예수님을 믿은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요한 3,31-32).”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요한 3,34).”
복음서 저자는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 말은 과장된 말이고(아무도 없었던 것은 아니고),
사도들과 몇몇 신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꼈고,
그래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똑같은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왜 누구는 믿고,
누구는 안 믿는 일이 생기는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마태 13,15).”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딴 생각을 하느라고 제대로 안 듣는 경우도 있고,
듣기 싫은 말씀은 흘려듣고 자기 입맛에 맞는 말씀만 골라서 듣는 경우도 있고,
말씀을 듣기만 하고서 그 말씀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삶으로 실천하지 않고)
그냥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강론을 듣는 동안에는 ‘참 좋은 강론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듣지만,
미사가 끝난 뒤에는 무슨 강론을 들었는지 다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과는 상관없는 ‘남의 일에 관한 말’로만 들을 때 흔히 그렇게 됩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도 그런 일이 많이 생깁니다.
우리 마음의 밭에 ‘말씀의 씨’를 뿌리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지만,
그 씨를 잘 가꾸어서 열매를 맺는 일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2)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이 말씀은, 당신이 하시는 일들이 곧 당신의 신원을 증명하는,
즉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아버지의 일’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 일은 메시아이신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메시아이신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시는 분이라면,
그분은 곧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사람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을 믿지 않아도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믿으면 안 됩니다.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라는
말씀은, “내가 하는 일들이 ‘아버지의 일’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처음에는 나를 믿지 않았더라도
이제 그 일들을 통해서 나를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3)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보면, 처음부터 예수님의 양이 아닌 사람이
있다는 말씀으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그런 말씀은 아니고,
“너희가 나를 믿지 않으면, 너희는 내 양이 될 수 없다.” 라는 뜻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의 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함으로써
예수님의 양이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부해서 예수님의 양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쫓아내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떠나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안 믿을까?
그들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요한 5,42).
예수님께서 하시는 아버지의 일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또는 사랑 실천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사랑이 사랑을 알아봅니다.)
마음속에 욕심과 이기심만 가득 차 있는 사람은, 그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랑을 받아도 받은 줄을 모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4)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이 말씀에서 ‘알아듣는다.’는 ‘알아들어라.’ 라는 권고로,
‘나를 따른다.’는 ‘나를 따라라.’ 라는 권고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나는 그들을 알고”는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입니다.)
그리고 ‘알아들어라.’ 라는 권고는, “나의 가르침을 잘 새겨듣고 실천하여라.” 라는
가르침으로, ‘나를 따라라.’ 라는 권고는,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라.” 라는 가르침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이고(요한 15,9-10),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만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예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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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7.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12월 중순, 겨울에 거행되는 성전 봉헌 축제는 유다 마카베오가 시리아인들을 몰아낸 뒤 그들의 제단을 허물고 새 제단을 다시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축제 기간 내내 촛불을 켜 놓고 압제의 어둠에 시달리던 그들이 자유의 빛을 되찾은 기쁨을 기념하였습니다.
기원후 1세기 유다인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자 이 성전 봉헌 축제를 더 장엄하게 지내며 하느님께서 메시아, 곧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줄 구세주를 보내 주시기를 학수고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다그칩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이들은 마카베오가 시리아 왕국을 물리쳐 승리한 것처럼, 로마 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힘 있는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당신 스스로 메시아라고 말씀하시도록 하여 예수님을 반역죄로 죽일 근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으시고, 다만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라고 하시며, “당신이 메시아요?” 하는 질문에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내가 한 일을 보아라.”(요한 10,38 참조) 하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하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신성과 당신의 신성이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이시기에 오로지 내어 주는 사랑만 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온 생애가 양을 위하여 언제나 함께하고, 목숨까지 내놓는 삶이었음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라나서듯이 우리에게 당신의 삶을 보고 그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삶을 살 때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는 그분의 양이 될지, 다른 메시아를 찾아 나서는 ‘다른 양’이 될지 선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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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7.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를 다닐 때입니다. 여러 명이 같이 다니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곤 합니다. 소지품을 분실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여권을 분실하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아침에 차에 탑승하면 기도하기 전에 ‘여권’을 확인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아픈 사람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여행자 보험은 들었지만 아픈 사람도 힘들고, 의료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가장 힘든 것은 순례 중에 한 사람이 길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광장이나 시장에는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도 사람이 많습니다. 앞과 뒤에서 신경을 쓰지만 간혹 길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길을 잃어버리는 경우를 예상해서 꼭 들려드리는 말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계세요.” 당황해서 이동을 하면 더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 있으면 인솔자가 가서 모셔 올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몇 번 길을 잃어버린 분이 있었지만 모두 무사히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워싱턴 DC로 자전거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뉴욕에서 기차를 타고 워싱턴 DC의 유니온 역에서 내려서 워싱턴 대성당도 가고, 링컨 기념관도 가고, 백악관도 가고,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기차로 돌아오는 일정이었습니다. 자전거가 아직 몸에 익숙하지 않아서 늘 뒤에서 따라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순간 일행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링컨 기념관에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여러 갈래의 길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거나, 일행에게 전화를 하면 좋았는데 당황해서인지 다른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그 사이에 일행들이 전화를 하였고, 저는 처음 있던 곳으로 돌아가서 일행과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기차가 출발하기 전에 도착해서 뉴욕으로 잘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성지순례 중에 길을 잃어버린 분들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차분하게 기다려 준 신부님들이 고마웠습니다. 그렇습니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면 잠시 멈추어서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메시아이심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말하였다고 하십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징을 보여 주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과 말씀을 보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175년 전입니다. 관리들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 “당신이 천주교인이요?”라고 물었습니다. 천주교인이라고 인정하면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길 수 있었습니다. 박해를 받아서 감옥에 갇힐 수 있었습니다. 가족들까지 모진 고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당당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요.” 조선의 첫 번째 사제였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천주교인이라고 말하였고, 사제생활 1년 만에 순교하였습니다. 당시 신부님의 나이는 25살이었습니다. 천주교인이라고 이야기하였던 신부님은 이 세상에서는 비록 짧은 삶을 사셨지만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말과 행동으로 천주교인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모진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과연 우리는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천주교인으로서 말과 행동에 부끄러움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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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7.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생명
- 예수님과 하나된 삶 -
지난 4월25일 저녁(현지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 소식으로 세상이 떠들썩 합니다. 인터뷰 내용중 참 기막힌 대목에 탄복했습니다.
-“최고의 순간을 보내고 있다 생각한다. 지금이 최고의 순간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가?
“최고의 순간은 없을 것이다. 나는 최고, 그런 거 싫다. 1등 되는 것 하지 말고 ‘최중이 되면 안 되나. 같이 살면 안 되나. 아카데미가가 전부는 아니지 않나. 동양 사람들에게 아카데미 벽이 너무 높다. ’최고最高’가 되려고 하지 말고 ‘최중最中’만 하고 살자. 그럼 사회주의자가 되려나.”-
우리 삶의 최중의 중심 자리에는 바로 섬김의 예수님께서 자리하고 계시니 최중의 삶은 바로 최중의 예수님과 하나된 영원한 생명의 삶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난생 처음 들은 최중最中이란 말마디가 참 놀랍습니다.
새벽에 본 교황님께서 글라라 수녀들에 하신, “기도하는, 위로하는 현존을 제공하는 데 결코 지치지 마십시오.” 한 말씀도 뇌리에 깊이 남아있습니다. 참으로 주님과 하나된 영원한 생명의 삶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지칠줄 모르는 기도와 위로의 현존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믿는 이들의 궁극의 희망이자 소원은 영원한 생명의 삶일 것입니다. 어제의 깨달음이 새롭습니다. 수도원 십자로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예수님 성심상이 신록의 단풍나무와 진홍색 철쭉꽃, 그리고 샛노란 애기똥풀꽃을 배경으로 하나 되니 참 잘 어울려 자꾸 눈길이 갔습니다.
여전히 밤낮, 봄, 여름 가을 겨울 일년사계 언제나 예수님 발치에 엎디어 기도하다가 바위가 된 모습의 사람 형상도 볼 때 마다 감동입니다. 순간 변화무쌍한 배경에 상관없이 늘 담담한 한결같은 모습의 예수님 성심상이 새롭게 마음이 와닿습니다. 이어 써놓은 ‘영원한 생명-예수님과 하나된 삶-’이란 장시長詩요, 그대로 오늘의 강론 제목입니다.
-“배경을 탓하지 마라
배경에 연연하지 마라
배경에 집착하지 마라
배경에 일희일비하지 마라
부끄러운 일이다
초연하라
늘 하늘을 바라보라
사람이 좋으면
사람이 매력이 있으면
배경은 저절로 어울려 좋아진다
배경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따라 가는 배경이다
예수님을 보라
그렇지 않은가
봄, 여름, 가을, 겨울 배경의 변화에 상관없이
늘 담담하다
깊고 고요하다
수도원 십자로 예수님 성심상!
배경으로 하면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을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좋다
모두가 다 좋다
변해야 할 것은 ‘나’지 ‘배경’이 아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평화가 너희와 함께!”
주님과 늘 함께 할 때
나 늘 주님의 배경이 될 때
주님이 늘 내 배경이 되어 주실 때
영원한 생명이다
주님과 하나된 삶이다
늘 한결같은 참 좋은 성인聖人의 삶이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의 궁극의 소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 명쾌한 답을 주십니다. 위 시 고백이 참됨을 입증합니다. 예수님과 아버지와 하나되었듯이 우리도 예수님과 하나되어 영원한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들이, 제자들이 되어 한결같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 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고백하셨듯이 우리도 ‘예수님과 나는 하나다’ 고백할 수 있어야 비로소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바로 이의 결정적 모범이 사도행전의 바르나바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 교회에 파견된, 주님과 하나되어 영원한 생명으로 빛나는 바르나바의 모습이 참 순수하고 아름답고 매력적입니다.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늘 주님께서 그의 배경이 되어 주셨고, 늘 주님의 배경이 되어 주님과 하나된 영원한 생명을 살았기에 이처럼 순수하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바르나바 사도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시어 당신의 현존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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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7.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 세계의 산림은 완전히 황폐해졌습니다. 그런데 1982년에 세계식량농업기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산림 복구에 성공한 유일한 국가로 우리나라를 뽑은 것입니다.
UN은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를 ‘희생 불가’라는 평가를 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격전지는 아니었지만,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민둥산이 된 우리나라였습니다. 겨울에 난방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에, 얼어 죽지 않으려면 풀뿌리까지 긁어모아 불을 때야 했던 우리나라였습니다. 당연히 나무가 남아날 리가 없었습니다.
그랬던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4번째로 산림 비율이 높은 나라가 되었고, 영국, 독일, 뉴질랜드와 함께 세계 4대 조림 성공국가로 이름이 등록되었습니다.
UN에서도 희생 불가라고 했던 나라였지만, 우리나라는 커다란 반전을 이루었습니다. 바로 아버지, 할아버지 대의 노력이 지금을 만든 것입니다. 그들의 노고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기성세대에 대한 젊은 사람의 비판이 많습니다. 꼰대짓을 한다면서 인터넷 안에 많은 비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행했던 큰 노력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함부로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 지도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 역시 비판이 먼저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 스스로가 얼마나 많은 기적을 목격했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믿지 않습니다. 무조건 부정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적대감을 드러내면서 예수님에게 당신이 그리스도인지 대답하라고 요구합니다. 이를 충분히 말씀하셨고, 행동으로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믿지 않는 것은 들으려고만 하는 것만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선포하십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을 사는 우리는 과연 주님의 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주님 말씀을 듣고 따르면서 주님 안에서 참 기쁨의 생활을 하고 있나요?
주님의 양은 비판보다는 굳은 믿음으로 함께 사는데 필요한 것을 먼저 합니다. 서로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정해주며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되도록 노력합니다. 이 모습을 성실하게 따르는 사람만이 주님으로부터 “내 양이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성실하고 충실한 종이 될 수 있도록 부정적인 마음보다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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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기다리는지, 무엇이 다가오는지 아무도 모른다. 모든 것은 열려 있다. 그 열림 앞에서 네가 할 일은 단 하나, 사랑하는 일이다(김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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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두 배로 늘립니다.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은 자신의 책에 한 의사와의 대화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저는 의사가 된 지 30년이 됐습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에게 처방했습니다. 그리고 아픈 사람에게 가장 좋은 약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월트 휘트먼은 크게 공감했지만, 문득 의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사랑이란 약이 잘 안 들을 땐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의사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투약을 2배로 늘립니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이다 보니 아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실천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 보입니다. 자신이 사랑을 주었음에도 상대방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면서 사랑을 멈추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히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쏟아붓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때 더 필요한 것은 내 사랑을 두 배로 늘리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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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7. 부활 제4주간 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 30)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앙의 여정은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하나됨의
여정이다.
하나됨의
신비는
사랑이다.
사랑은
영원하다.
삶의 여정은
사랑의
여정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하시다.
하느님 사랑을
만나지 않고서는
행복할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삶의 본질은
하나되게 하시는
하느님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을
알아가는
여정중에
우리가 있다.
사랑은
주고 받는
최상의
기쁨이다.
사랑은
생활로
드러난다.
생활이라는
삶의 자리가
사랑을
실천하는
참된 자리이다.
사랑은
우리가 사는
참된
이유이다.
하나되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성장시킨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사람으로
오셨다.
하나되는
사랑은
거짓이 없다.
하나되는
사랑은
하느님의
뜻이며
하느님의
참된 행복이다.
하나되는
하느님
사랑으로
우리가
있다.
온 마음으로
사랑할
사랑의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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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7.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가서 복음을 전하라.!’라는 주님의 말씀은 초대 교회의 사명으로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의 박해 중에 스테파노의 공개처형은 신자들을 두려움으로 몰아넣어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다시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에 있는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은 안티오키아에서는 유다인들 뿐 아니라 그리스 계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 공동체는 바르타바를 안티오키아로 파견합니다.
그는 타르수스에 머물고 있는 사울에게 들려서 그와 함께 안티오키아로 향합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이 사실을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사도 11,26)라고 전합니다.
그리스도 공동체는 유다인들의 박해에서 그를 보호하려고 사울을 고향으로 보냈던 것입니다.
타르수스는 사울에게는 고향이기도하지만 다시 힘을 회복하는 쉼터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유대교의 열렬한 신봉자이면서 신자들을 박해하던 그가 예수님을 체험하고 나서 그리스도교로 돌아섰던 것이 유다인들에게는 미움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도 사실 사울의 존재는 환영받지 못하고 두려움까지 주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그의 고향에서 머물며 이러한 갈등과 혼란에서 재 정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누구도 사울이 장차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유다인들의 오만과 편견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거닐고 계시는 주님을 둘러싸고 의기양양하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요한 10,24) 그들은 애당초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기지 않고 '떠보기 식의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메시아라고 해도 또 그렇지 않다고 해도 다 걸려드는 질문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속셈을 알아차리시고 대답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요한 10,25-26)
믿지 않는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한낱 ‘군중의 선동자’로 간주되겠지만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들은 그분을 알아봅니다. 주님께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1)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 27-28)
진실한 사람은 그 표현이 비록 투박하고 서툴러도 진리를 말하지만, 교활하고 이중적인 사람은 아무리 그 표현이 부드럽고 논리 정연한 것 같아도 그 안에는 사람을 죽이는 올가미가 도사리고 있음을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유다인들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양들을 향해 약속의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10,28)
주님께서는 당신의 양들과 아버지와 연결해서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10,29-30)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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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시나이 사막에서 지내며 체험했던 생활에서 지워지지 않는 단어가 ‘사막’과 ‘양떼’입니다.
성서대학의 한 과정으로 시나이반도를 열흘 동안 횡단하면서 숨 쉬기 조차 힘든 열기와 모래먼지와 땀이 뒤범벅이 된 채, 고대 이스라엘 민족이 이동하던 경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오아시스라는 곳에 이르면 그래도 물이 있어 살만했습니다.
길게 만든 수로를 따라 수 많은 양들이 서로 섞여 물을 마시고 목자들도 그 사이에서 물을 마십니다. 그러다가 한 목자가 소리를 높이거나 피리 종류로 신호를 보내면 약속이나 한 듯이 양들이 그 목자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참 신기했습니다.
주님께서 양와 목자와의 관계를 들어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라는 말씀이 실감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주님을 따르면서 우리도 마리아 막달레나가(20,16), 토마스가(2028)가 비로소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았듯이 우리도 종말의 어느 날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볼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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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7.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강조하시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요한 10,25)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거듭 질문을 던집니다. 사실 그동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여러 경로로 보여 주셨음에도 그들이 믿지 않았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시거나 치유와 구마로 사람들을 구원해 주실 때 결코 당신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은 아버지께서 시키시는 일만 할 뿐이고, 그분의 말씀만 전할 뿐이라고 누차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통해 보이지 않는 아버지 하느님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요한 10,29)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을 얻기 위해 그분 주변으로 모여드는 이들은 모두 아버지께서 보내신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내치지 않고 맞아들이시어 모두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목숨을 바쳐 끝까지 지켜주시는 착한 목자시지요. 아버지께서 선택해 아드님에게 보내시는 이들은 구원의 여정 안에 든, 복된 이들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예수님 입에서 드디어 결정적인 말씀이 선포됩니다. 유다인들이 가장 궁금해하던, 아마도 명확하게 듣고 싶기는 하지만, 실은 직면하기 두려운 내용일 겁니다. 그런데 유일신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아들이란, 그것도 율법이 정한 신분에 속하지 않는, 출신이 뻔한 일개 목수 아들의 자기 계시는 유다인들에게 신성모독으로 들릴 뿐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하지만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이 말씀은 사랑의 확증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으로 하나라는 사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랑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그 사랑이 바로 우리가 닮아갈 수 있는, 우리에게도 실현 가능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이 말씀은 만물의 근원이시고 창조주이신 분, 우리의 주인이신 분이 친히 우리 곁에 내려와 우리 곁에 사시며 목숨까지 바쳐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 당신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결코 어둠 속에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우리가 큰 죄인이어도 그렇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교회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의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사도 11,22)
박해로 흩어진 이들이 처음에는 이방 지역에 사는 유다인들에게, 그리고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주 예수님의 복음은 많은 이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 곳곳에 신도의 무리가 형성되게 되지요.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는 그곳에 바르나바를 파견해 그들의 신앙이 잘 성장하도록 돕습니다. 지역이 다르고 민족이 달라도 하느님의 백성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사도 11,25-26)
바르나바는 주님을 체험한 후 돌아선 사울을 이방인을 위한 복음 선포의 협력자로 합류시키지요. 사도행전 저자가 서술한 대로 바르나바가 착하고 선하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가능했을 겁니다. 이 둘의 관계가 물론 끝까지 이어진 건 아니지만 그 또한 교회 성장을 위한 주님의 계획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도행전 안에 역동적으로 보여지는 교회의 모습, 즉 교회가 교회를 낳고, 신생 교회의 성장을 도우며 함께 자라나는 여정의 모범이며 희망은 아버지와 아들, 성령 안의 사랑과 일치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시고, 삼위 하느님이 사랑의 유대로 한 분이신 것처럼, 교회는 끊임없이 이 일치를 지향하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이 말씀을 통해 그 사랑 안에 푹 잠기고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언젠가 천상 혼인잔치에서 주님 얼굴을 마주뵙고 누릴 영원한 행복을 주님께서 잠시나마 미리 맛보게 해 주시는 은총을 허락해 주시길 빕니다. 아버지와 아들, 그 사랑의 유대 안으로 초대되어 주님 안에 한 형제된 우리 모두는 복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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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7.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10,30)
'착한 양들이 되자!'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그런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말합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요한10,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요한10,25-26)
그리고 그들에게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10,30)라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신성을 지니신 메시아이심을 선언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양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 말씀에 순종하는 착한 양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는 안티오키아로 파견된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르나바'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 밖인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인도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소식도 전하고 있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양들은 바르나바처럼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 복음화를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선교를 잘하려면 주변 사람들에게 착한 사람으로 소문나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기쁨과 평화가 충만한 사람으로 소문나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다가오고,
그래야 "하느님을 믿자!"라는 말이 먹혀들어갑니다.
착하지도 않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지도 않으면, 당당하게 "성당에 다니자!"라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10,27)
착한 양,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양,
기쁨과 평화가 충만한 양이 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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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7.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 있는 이유 : 집은 주인과 하나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고 재촉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분명히 그렇다고 말했는데 믿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믿지 않는 이유는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예수님은 ‘성전’으로 표상되고 있고 그 성전이 ‘양의 우리’로 상징됩니다. 성전 안에 있는 양들만이 성전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10장 전체를 훑어보려 합니다. 예수님은 처음엔 당신 자신을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하셨다가 그다음엔 ‘목자’, 이제는 ‘양 우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말씀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문’은 ‘길’과 같습니다. 그 길을 통하지 않으면 아버지께 갈 수 없듯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으로 갈 수 없습니다.
또 ‘목자’는 ‘진리’와 같습니다. 그분의 이끄심이 아니면 오류로 빠집니다.
이제는 양의 ‘우리’라고 말씀하시며, 마치 성전에 들어와 있는 이들은 성전 주인이신 하느님에 의해 ‘생명’을 보장받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느님께서 지켜주시는 집이기에 누구도 당신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이를 예수님은 이렇게 정리하십니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제가 있는 곳은 죽산 성지입니다. 죽산 성지는 ‘이진터’로 불렸습니다. 고려 시대 때 몽골인들이 진을 쳤기 때문에 오랑캐들의 진터라고 불린 것입니다. 이전까지 고려는 몽고인들에게 전투에서 제대로 승리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여기 이진터만 빼놓고는 말입니다. 이곳에는 ‘죽주산성’을 지키고 있었던 송문주 장군이 있었습니다.
송문주 장군은 몽골인들과 전투를 벌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공격해 올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성은 쉽게 함락되었지만, 송문주 장군이 지키는 성은 그래서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군사들은 어떻게 그들의 전술을 다 알고 있느냐며 장군을 ‘신명(神明)’이라 불렀고 15일간의 전투 끝에 몽골족은 대패하고 도망을 갑니다. 그 이후 승기를 잡은 고려인들은 원나라의 3번째 침략도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성은 그 성을 지키는 이와 하나이고 그 안에 있는 이들은 그 지키는 이에 따라 생사가 갈립니다. 성전은 하느님께서 지키시는 성전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참 성전인 그리스도의 품에 머문다면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당신이 가장 강하신 하느님의 성이요, 성전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전 봉헌 축제’일이고 성전을 봉헌했던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있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누카라고 하는 이 축제는 이방인들에게 더럽혀졌던 성전을 마카베오가 다시 봉헌한 것에서 유래합니다.
이때 메노라, 즉 불을 밝히며 축제를 벌이는데 예수님은 이 시기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이시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오면 빛 안에 있는 것이고 예수님을 벗어나면 어둠이요, 밤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아버지께 봉헌된 참된 성전이라 하시며 당신을 허물어도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봉헌된 참된 성전이고 그 안에 머무르는 이들은 아버지께서 하느님이시기에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어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우리도 참 성전이 됩니다. 하지만 성전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될 수 있을까요? 빛 안에 머묾으로 증명됩니다.
빛은 죄에서 벗어나 그분의 계명 안에 머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 위해 요한복음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으로 자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의 성전이시기 때문에 아버지와 하나이고 그래서 하느님과 대등하다고 말씀하십니다.우리도 그리스도의 참 성전이 되었음은 내가 하느님과 하나 되고 곧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음으로서 증명됩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이것을 부정하고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합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십니다. 성서상으로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우리 자신을 하느님으로 여겨도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하느님이라 믿는 것이 중요할까요? 그 이유는 그래야 하느님이 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되려는 것은 어둠이고 죄입니다. 우리의 죄는 ‘하느님처럼 되려는 시도’에 의해 시작됩니다. 우리 자아인 뱀은 우리가 하느님의 것까지 우리의 것으로 여기게 하고, 우리 스스로 창조자가 되어 육체적 쾌락을 즐기게 하고, 이웃을 심판하여 하느님이 되라고 유혹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느님임을 믿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자아를 섬겨서 하느님이 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 죄에서 벗어나려면 이미 하느님이 되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더는 돈에 대한 욕구나, 쾌락, 혹은 교만이 자신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기 때문에 더 가질 필요가 없고, 하느님이기 때문에 피를 흘려 창조사업에 동참할 수 있으며, 하느님인데 그처럼 살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 그 누구도 심판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알려주시기 위해 끝까지 하느님과 대등하다고 주장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로 가야 하고, 예수님이 알려주신 진리를 믿어야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누립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핵심입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성전으로서 하느님임을 믿고 여러분 안에 들어온 이들을 구원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모셨기에 우리도 하느님임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집과 주인은 하나입니다. 우리 각자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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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7.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는 게 녹록치 않을 때
동료 신부님과 산책 나갔다가 가게 앞에 세워놓은 입간판에 완전 매료되어 막걸리를 한 잔 하게 되었습니다.
‘삶이 애잔해질 때...속 훑어주는 ○○홍어’
“사는 게 녹록치 않을 때가 있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그럴 땐 속 훑어주는 잘 삭힌 홍어 한 점과 탁주 한 사발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겉으로는 꽤나 화려하고 요란스러운 대한민국입니다.
그러나 내부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처참하리만치 암담한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좌절과 낙담 속에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서민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런 시절 우리 국민들에게 가장 좋은 치료제는
누군가로부터의 위로와 격려, 관심과 지지입니다.
숱한 암초 앞에 서 있는 대한민국호의 선장이 가려질 순간이 드디어 목전에 다가왔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분은 소박하고 마음이 따뜻한 분이면 좋겠습니다.
선한 미소와 넉넉한 웃음의 소유자였으면 좋겠습니다.
다정한 위로와 자상한 격려의 전문가였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입사 면접에 고배를 마시고 낙담해하고 있는 청년들을
따뜻이 안아주며 힘내라고 말해주는 그런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사는 게 너무 막막해 주름이 한층 깊어가는 어르신들과 둘러앉아 스스럼없이 막걸리 한잔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직장생활에다 육아에다 삶이 너무 힘겨운 젊은 부모들을 내 자식처럼 여기고 배려하는 그런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암울하고 힘겨웠던 군부독재 시절, 철권통치 앞에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맞서 청춘을 불살라본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투옥되어 인생의 가장 밑바닥 체험을 해 본 사람, 그래서 세상의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의 고통스런 심정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 그 어디 가고 기댈 언덕 하나 없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사심 없이 봉사해본 경험이 있는 그런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있는 사람 앞에 비굴하지 않고, 없는 사람 무시하지 않으며, 겸손하고 예의바른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막말이나 폭언하지 않고, 저속하고 쌍스러운 표현 쓰지 않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가까운 사람들, 특히 부모 자식들과 친지들, 또한 장인장모님도 지극정성으로 배려하고 정성껏 봉양하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어떤 유다인들에게 있어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목숨 걸고 준수해왔던 안식일 규정이며 정결예식을 보란 듯이 파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혹시라도 이분이 정말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일말의 걱정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예수님께 던진 것입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요한복음 10장 24절)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오래도록 제 마음 속에 메아리쳤습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요한복음 10장 25절)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이름으로 행하신 모든 사랑의 기적들, 수많은 치유활동들, 극적인 구마행위들,
엄청난 사랑의 기적들이 모두 그분이 메시아성을 명명백백하게 확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많은 일들을 직접 자신들의 눈으로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심에 찬 시선을 거두지 않았던 유다인들의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우리 역시 영적 눈이 어두워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이자, 더 나아가서 그분과 한 마음 한 몸이신 분,
하느님 그분 자체라는 진리를 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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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7.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복음.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많이 듭니다. 사람의 모습을 하면 일단 근원적으로는 아담과 화와의 후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아담과 화와는 하느님의 창조물입니다. 하느님 역시 예수님과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과 사람의 관계를 따지면 예수님이 목자이고 사람의 모습을 하는 사람은 모두 다 양이라고 해야 정상적인 모습일 겁니다. 근데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복음에 나오는 유다인들을 향해서 “너희는 내 양이 아니다.” 라고 하십니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그들은 분명 사람입니다. 사람이라면 분명 하느님의 창작물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로 본다면 당연히 당신의 양이라고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조금 모순적인 양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 왜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가를 한번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육의 관계를 따져서는 해석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알려주시는 듯합니다. 당연히 육적으로만 봤을 땐 양이 맞습니다. 그럼에도 아니라고 하시는 것은, 목자와 양의 관계는 영의 관계라는 걸 분명히 밝혀주시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영의 관계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때 영의 관계는 세상인 땅에서만 통용되는 세속의 논리를 초월한 관계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씀 자체는 이 세상의 논리로는 잘 납득이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에서 통용되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비근한 예로 ‘산상설교’ 말씀이 세상의 논리로 보면 그게 잘 납득이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으려면,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야만이 알아듣고 이해가 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이 예수님 당신이 메시아라면 왜 메시아인지 그 근거를 속시원하게 제시해주시기를 원하는 상황에서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유다인들을 향해서 던지는 말씀이 “너희는 내 양이 아니다.” 라고 하십니다. 그 근거로 제시하는 게 예수님께서 그동안 하셨던 여러 가지 일이 있는데, 그들은 그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제대로 이해를 했다면 예수님 당신이 메시아인지 질문을 할 하등의 가치가 없었는데도 하늘 걸로 봐서, 내 양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런 원리는 우리에게도 적용될 겁니다. 지금 우리는 본당이라는 공동체 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공동체는 양 우리와 같을 겁니다. 공동체 안에 있다고 해서 우리가 다 양이라고 볼 수 없다는 말씀으로 이해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그 기준이 무엇이 될까요? 그건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느냐 듣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건 복음에 나오는 단순한 목소리 구분을 의미하는 게 아닐 겁니다.
그 목소리는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하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말씀하시며, 그곳에서 살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일러주신 그 말씀을 알아듣고, 이해하고, 더 나아가서는 실천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한 공동체에 있어도 예수님이 원하시는 양이 되지 못한다는 말씀으로 이해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을 향해서 “내 양이 아니다.” 라고 하신 말씀이 이해가 될 듯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양인지, 아닌지는, 예수님 말씀대로 사느냐, 살지 못하느냐에 따라 판가름이 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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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7. 부활 제4주간 화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제1독서(사도 11,19-26)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22~24)
사도행전 11장 22절의 '그들에 대한 소문'은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방인 회심사건을 말한다.
예루살렘은 안티오키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져 이방인이 주님께 돌아온 사안이기에, 예루살렘 교회는 그 소식에 관심을 갖고 들었던 것이다.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에 해당하는 원문을 직역하면, '교회의 귀들에 소문(말)이 들렸다'이다.
원문에서는 '귀들'(the ears)에 해당하는 '타 오타'(ta ota)를 써서 예루살렘 교회보다는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 개개인들이 안티오키아 교회에 대한 소문에 큰 관심을 갖고 들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듣고'에 해당하는 '에쿠스테'(ekusthe)는 '아쿠오'(akuo)의 수동태로서 어떤 소문이 외부에서 들려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소문의 내용은 안티오키아에서 복음 선포자를 통하여 복음이 수많은 이방인에게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안티오키아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은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게 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관심사에 대하여 점검하기 위해 교회 지도자를 파견한 것이다.
이것은 사도들이 중심이 된 모교회로서 다른 교회를 보살피려는 사랑과 관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사도8,14).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는 이미 베드로 사도를 통한 경험으로 이방인에 대한 편협한 편견을 버렸기에, 바르나바를 멀리 떨어져 있는 안티오키아에까지 보낼 수 있었다.
여기서 '보냈다'에 해당하는 '엑사페스테일란'(eksapesteilan)의 원형 '엑사포스텔로' (eksapostello)는 어떤 사람에게 임무를 맡기어 어떤 장소로 보낸다는 의미로 '파견하다', '파송하다'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바르나바를 선택하여 파견한 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선교를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롭게 개종한 자에 대한 관심과 염려와 더불어 안티오키아에 있는 믿는 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형제들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서 예루살렘 교회의 주요 인물 가운데 하나인 바르나바를 보냈던 것이다.
'바르나바'(Barnabas)는 '휘오스 파라클레세오스'(hyos parakleseos), 즉 '위로의 아들', '권면의 아들'이라는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권면과 위로의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사도4,36) 안티오키아 교회 파견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서 출중한 교사였고 선교사였으며, 사도 바오로의 협력자로서 초대 교회 복음 전파의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였다(사도9,27; 11,30; 12,25; 13~15장; 1코린9,6; 갈라2,1.9.13; 콜로4,10).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파견된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 도착해서 그곳의 회심한 이방인들과 몇몇 복음 전파자들을 함께 만나보고, 그곳에 하느님의 은총, 곧 성령께서 임재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기뻐한다. 그리고는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한다.
여기서 '격려하였다'고 하는 '파레칼레이'(parekalei)는 여러 말로써 '권면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파라칼레오'(parakaleo)의 미완료 과거 시제이다.
희랍어에서 미완료 과거 시제는 반복과 계속을 나타내므로, 이러한 표현은 바르나바의 권고가 그들에게 계속되고 반복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르나바의 따뜻하고 세심한 기질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는 뜻은 '마음에 분명한 목적과 뜻을 가지고 주님께 확고부동하게 늘 헌신하고 있으라'는 것이다.바르나바가 이렇게 권면하는 이유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들에게 많은 박해와 시련들이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르나바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보다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주님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 지속성을 갖는다는 것은 받은 축복과 은혜를 상실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한다는 의미이며, 제자로서의 기본자세이기도 한 것이다.
한편, 사도행전 11장 24절의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실한 사람'이라고 나온다. 여기서 '사실'로 번역된 '호티'(hoti)는 '왜냐하면', '~때문에', '~이므로'라는 뜻을 지닌 접속사이다.
이 단어는 바르나바가 안티오키아 교우들에게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계속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가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착한'에 해당되는 단어 '아가토스'(agathos)는 '놀라다', '경탄하다', '높이 평가하다'의 '아가마이'(agamai)와 '감탄할 만한', '훌륭한'의 '아가스토스'(agasthos)의 같은 계열의 단어로서 주위 사람들이 경탄하고 높이 평가할 정도로
바르나바의 성품이 훌륭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바르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원문은 '플레레스 프뉴마토스 하기우 카이 피스테오스'(pleres pneumatos hagiu kai pisteos)인데, 여기서 '플레레스'(pleres)는 물이 가득 차서 넘치는 정도까지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이 단어는 바르나바에게 있는 성령과 믿음이 그의 언어, 표정, 사고, 삶을 통해 외적으로 넘치도록 표현이 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르나바는 영적으로 풍부한 은혜를 소유한 사람으로서 그의 삶 가운데서 이러한 사실이 입증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여기서 '인도되었다'는 '프로세테테'(prosethete)의 원형은 '프로스티테미'(prostithemi)로서, 수효를 '더하다', '가입시키다', '부과하다'는 뜻이다. 루가에게 있어서 이 단어는 교회 성장을 의미하는 전문 용어로 쓰였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르나바로 말미암아 안티오키아 교회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모든 것을 이루신 주체가 하느님이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프로세테테'(prosetethe)가 수동형이라는 사실이 증명해준다.
그렇게 때문에 교회가 성장했다고 해서, 지도자들이 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하여 그 배후에서 역사(役事)하시는 하느님을 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종교 행위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믿음
저(로마노)를 절대 빼앗기지 않겠다. 약속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요한10,22-30)
22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 여름이 지난 겨울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를 뜻합니다.
(예레8,19-20) 19 이 땅 저 멀리서부터 내 딸 내 백성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주님께서는 시온에 안 계신가? 시온의 임금님께서 그곳에 안 계신가?” 어쩌자고 그들은 우상들로, 낯선 헛것들로 나를 화나게 만들었는가? 20 수확이 끝나고 여름이 지났건만 저희는 아직도 구원받지 못하였습니다.
= 수확은 구원을 뜻합니다. 그 구원의 때에 구원을 받지 못한 겨울입니다. 헛 것들 때문입니다. 그 겨울의 성전 축제가 부서져야 합니다.
내 뜻을 구하기 위해 하느님께 제물을 바쳤던 그 헛된 거래, 그 장사의 성전을 부수고~ 우리의 생명, 빛이신(요한1,4) 참 성전이신 예수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성전과 하나가 되는 것, 참입니다.
(요한2,16.19.21)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 ‘사흘 안에’를 직역하면 ‘세 번째 것으로’라 했습니다. 첫 번째- 보이는 건물, 성전. 두 번째- 예수님. 세 번째- 보호자 성령입니다.(요한14,16참조)
(1코린6,19)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로마8,9)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 성전 봉헌축제, 그 행위가 아닌 내가 예수님의 영을 모신 성전, 그리스도인 임을 깨닫는 것이 참입니다.
23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 참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그분을 모형한 건물, 성전에 밀려 성전의 맨 끝자락에 있는 솔로몬 주랑에 계십니다. 참 성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24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 예수님은 여러 번에 걸쳐 ‘아버지의 일을 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요한6,38-39)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구원의 메시아 예수님 입니다.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요한1,9-11)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 하늘의 생명을 위한 신앙인은 알아듣습니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 아멘.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얻어 그분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돌아가시기 전날 기도하십니다.
(요한17,20-21) 20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21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 그리고 당신의 죽음으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여러 표징으로, 또 말씀으로 가르쳐도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돌아가십니다.
믿지 못하는 완악한 마음, 그 꿈뜨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짊어지시고 그들의 죄로 대신 죽으시는 것입니다. 빼앗기지 않으시기 위해~ 이제 남은 건 우리의 몫입니다.
(요한6,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 종교 행위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믿음입니다. 깨달음으로 얻을 수 있는 믿음입니다. 아멘.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복음(요한10,22~30)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30)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 간접적으로 밝힌 예수님과 성부 하느님의 일체성이 여기서는 명시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성부 하느님과 본질과 근본에서 일치됨을 밝히신 것이다.
여기서 '하나'로 번역된 '헨'(hen; one)은 중성이며, 여기서 중성이 사용된 것은 희랍어 어법을 잘 반영한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 철학에서 '토 헨'(to hen; the one)은 존재의 궁극적인 통일성, 영원성, 불변하고 파생되지 않는 단일한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서, 구별이 없는 존재의 동일성(oneness)을 나타낸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배경을 지니는 '헨'(he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임을 밝히셨는데, 아버지와 아들은 협력자의 관계 이상이며, 본질상 본래 하나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는 존재의 통일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실은 '~이다'로 번역된 '에스멘'(esmen; are)이 '에이미'(eimi)의 현재 시제라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희랍어에서 현재 시제는 현재와 계속, 그리고 변함없음을 나타내므로,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이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심을 알게 한다.
예수님의 이같은 주장은 모여 있던 유대인들로 하여금 당장 돌을 집어들어 던지게 할 만큼 커다란 분노를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의 선언은 신성(神性) 모독의 극치였던 것이다.
하지만 실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실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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