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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세기적 음악가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이 메시야를 작곡할 때, 본문인 사 53장 부분에서 펜을 멈추고 장시간을 울고 있었습니다. 이 때 그의 식사를 준비한 하인이 “무슨 일이냐?”며 놀라자, 그는, “나는 지금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고 있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성령의 감동과 영감으로 작곡한 “메시야” 곡은, 그의 음악을 감상하는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지금도 헨델의 “메시야”곡을 들으면, 참으로 웅장함 속에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구세주로 오셔서 참혹한 십자가에 달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떠 올리며, 그 앞에서 숙연해집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성자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늘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고자 참혹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는 그 분의 피조물입니다. 요즘, 애완견, 애완묘를 키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자신의 생명 또는, 자신의 자녀를 희생시킬 부모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독생자이신 성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모진 학대와 참혹한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을까요? 혹자는 이러한 성부 하나님을 “비정한 아버지”라고 조롱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성자를 보내신 성부와 십자가에 달리신 성자의 사랑과 은혜를 모르는 자이며,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성부와 성자의 뜻을 모르는 무지하고, 배은망덕한 자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갈 6: 14에서 고백하기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합니다. 이를 현대어 성경역으로 보시면, “그러나 내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십자가 때문에 나는 오래 전에 이 세상의 온갖 일에 흥미를 잃어버렸고 이 세상도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헨델처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참혹한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믿음 안에서 보아야 합니다. 왜? 나를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성자께서 참혹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는지 또, 그렇게 왜? 나를 사랑하는지를 우리는 고찰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적으로 자랑할 것도 많고, 내세울 것도 많은 사람이지만, 그 모든 것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믿음으로 빌 3: 7 - 9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고백합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장로교의 목사, 신학자, 작가였던, “새뮤얼 루더포드”는, “새에게 그 날개는 무거운 것이나 그것 때문이 날아가며, 배는 그 돛이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항해하듯, 성도는 십자가가 짐이 되나 그것이 그로 하여금 천국을 향해 전진하게 한다”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성도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는 희생이요, 고난이며, 때론 죽음까지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멸시받고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을 전하는 내용으로, 메시아의 사명을 선포합니다. 특히, 다른 예언서와는 달리 본문에서는 초라하고 연약하고 위엄과 존귀도 없는 볼품없는 메시아의 모습을 전합니다. 이렇게,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그리고 양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양으로 비유되는 것은, 우리의 죄를 메시야에게 전가시킴으로 완전한 구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본문을 통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거기에 담겨진 성도로서의 의미를 새김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귀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장식물이 아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달리신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우리의 영혼이 구원에 이르고, 믿음이 더욱 깊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4절을 보시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고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마지노선입니다.
본문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종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혹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순전히 “우리의 죄”때문이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게 하기 위함임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것은, 당시의 제사장이나 본디오 빌라도나 로마병정이 아니라, 바로 “우리, 나” 자신이라는 겁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질고”는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말합니다. 병이 깊을수록 그로 인한 슬픔과 좌절도 깊어집니다. 이러한 슬픔과 좌절을 예수님이 대신 겪으신 겁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병으로 인한 슬픔과 좌절을 겪었는데, 왜? 우리가 또다시 겪어야 하냐며 반박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와 목적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처사입니다. 이러한 이기적인 처사를 행하기에, 그들은 입으로만 나사렛 예수를 부를 뿐, 심중 깊은 곳에서는, 나사렛 예수께서 그리스도되심을 거부합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죄성이 우리의 욕심을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알고 싶은 것만 알려고 할 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아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합니다. 그러한 자에게 믿음이 있겠습니까? 진실한 신앙고백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에 대해 자신의 귀를 가릴 뿐입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의 세속적으로 메시아에 대한 관념을 가진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기독교의 핵심이라는 것을 모르며, 그 모양만 말할 뿐입니다. 여러분, 성도인 우리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나를 위한 대속의 십자가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우리가 져야 할 죽음과 심판과 형벌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대신 지신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이고, 유일한 마지노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 우리의 죄를 도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십자가를 지시고는,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세금을 지불했다”입니다. 곧, 우리의 죄 값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 지불하셨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 된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명부에서 우리의 죄가 모두 삭제되었다는 겁니다. 이러한 성부 하나님의 은혜와 성자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감사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더욱 영광돌리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로서의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5절을 보시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성도된 우리에게 새 생명이 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 성경에는 히브리어 접속사인 “웨”가 생략되었는데, 그 의미는 “그러나”입니다. 곧, 본문은, 앞의 4절의 내용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에 대한 설명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시면, “그”와 “우리”가 대조됩니다. 결과와 그 원인을 대조한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토록 처참하게 도살되듯 죽으신 것은, 우리의 허물과 하나님께 대한 범죄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고전 1: 18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이어, 22 - 24을 보시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왜? 메시야의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과 지혜를 찾는 헬라인 즉, 그리스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미련한 것이겠습니까? 그들은,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고자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없이, 오직 자신들의 욕심만 채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에 대해 사도 요한은 요 3: 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성가 가운데, “보혈을 지나”의 가사를 보면,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와 세상의 모든 사람들, 비 기독교인이든, 안티 기독교인이든 모두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할 때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새 생명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 후반부에 있습니다. 보시면,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합니다. 이를 현대인 성경역으로 보시면, “우리가 범죄하고서도 무사하게 넘긴 것은 그가 대신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 대신에 채찍을 맞아 우리 몸이 성하게 되었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 나가게 되었고, 우리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죄의 질고에서 벗어나게 된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밖에는, 성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요 11: 25 - 26에서 예수님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신 겁니다. 성도된 우리의 육체적인 죽음이,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세상 종말 때까지의 긴 잠에 지나지 않게 됨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참된 평화 즉, 안식을 누리게 된 겁니다. 이렇게 놀라운 축복, 놀라운 은혜를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베푸셨음을 기억하심으로 오직, 성부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6절을 보시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연결점입니다.
최후의 심판 날에 의의 심판을 받길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칭찬하며, 생명의 면류관, 승리의 면류관을 하사하시길 원하십니까? 그것을 위해 어떤 이는 선행을 하고, 어떤 이는 공적을 세우고, 어떤 이는 성도로써의 직함과 교회의 직분을 갖고자 합니다. 또, 어떤 이는 교회를 얼마동안 다녔다는 신앙의 년수를 내세우기도 하고, 헌금을 얼마했다고 내세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이러한 것으로 인해 의의 심판에 이른다는 말은 없습니다. 또, 수행을 하고, 고행을 했다고 해서 의의 심판에 이른다는 말도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가의 보혈을 지나야만 한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를 위한 십자가이며, 나사렛 예수는 나의 구세주이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죄의 문제가 해결됨으로, 최후의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 서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 14: 6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앞에서 찾아본 고린도전서 1장에서나 갈라디아서 6장을 비롯하여 성경 곳곳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는 어떤 교훈과 절대적으로 타협하지 않는 고지식함을 보여줍니다. 또한, 우리 기독교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비하와 고난,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과 중보하심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정수이자,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나 세계사 속에 기록된 수 많은 믿음의 사람들 역시, 우리와 똑같은 나약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안에서의 구원과 새 생명을 확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연결점이 되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도 이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몸에 치장하거나 건물을 치장하는 장식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시고, 행하신 구원의 증표요, 사랑의 증표임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영원하고도 완전하며, 넘치도록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고, 확신하는 가운데,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복된 성도로서의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