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
평화를 빕니다!
복음에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얼마 전 평일 미사에서도 이 이야기를 만났는데요.
저에게는 마르타가 유독 짠해 보였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과 일행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루카 10,40 참조) 했습니다.
좋은일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마르타가, 보기에 안타까우신지, 이름을 연신 부르면서 말씀합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루카 10,41)
예수님을 위해서 온통 애썼는데, 그 마르타한테서 예수님은 정작 ‘염려’와 ‘걱정’만을 읽어내십니다.
참 아찔합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좋은 일을 해도 걱정과 염려에 빠지면,
그래서 돕지 않는 동생 때문에 화만 난다면, 그야말로 ‘공염불’이 된다니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지 바르티매오에게서 ‘믿음’을 읽어내십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 외치고, 사람들이 꾸짖고 막아서도 더 크게 외칩니다.
전재산 같은 겉옷마저 던지고, 예수님께 가서 치유를 청합니다.
그도 애를 썼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선언합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르 10,52)
한편으론 다행입니다.
어떤 때는 바르티매오처럼, 정말로 믿음을 드러내는 행위를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제 내년이면 사제 생활 30년입니다.
교회와 세상에서 받은 은혜가 과분해서, 미약하나마 애를 썼는데요.
문득 궁금합니다.
‘분명 교회 일을 했는데, 거기서 예수님은 뭘 읽어내실까?’
일하면서도 다음 일을 걱정하고, 횟수와 양으로 승부를 보려하고,
안 되면 실망하고, 잘 되면 우쭐하며 살았습니다.
바르티매오로 시작해서 줄곧 마르타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주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염려와 걱정은 일종의 불신앙 같습니다.
포도원 소작인이 자신을 주인인 듯 착각할 때 취하는 태도인 것이죠.(마르 12,1-12 참조)
바르티매오는 뭐가 달랐던 걸까요?
분명한 건, 그에게는 걱정과 염려, 짜증이 안 보인다는 점입니다.
누가 막아도 맞서지 않고, 그저 자기 몫의 길을 갈 뿐입니다.
예수님은 어디서 믿음을 읽어내신 걸까요?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갈라 5,6)이라 했습니다.
걱정이 아니라, 사랑만이 우리 몫인가 봅니다.
사랑으로 한거면, 실패도 이미 성공인 겁니다.
사티시 쿠마르라는 환경·평화운동가가 있습니다.
그에게 ‘당신의 활동으로 지구를 구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사람은 지구를 사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지구를 구하는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지구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걱정해야 합니다.”
‘사랑할 것만 걱정하라’는 말씀에, 마음이 환해졌습니다.
저는 공소사목 소임을 맡으면서 붙들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1코린 3,6)
얼마나 자랄까, 열매 맺을까 걱정하는 건, 우리 몫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사랑으로 간절하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 12,33)
그때그때 숨 쉬고, 먹고, 일하고, 걷고, 만나고, 대화하고, 기도하고, 참여하고, 도우면서 살 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행복의 비결이 있지 않을까요?
“행복한 사람들은 행동을 계획하지, 결과를 계획하지 않는다.”-데니스 홀리
정연섭 베드로 신부 공소사목 전담
연중 제30주일 주보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