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추가 어느 순간 슬며시 추억을 더듬는 쪽으로 기울고 말았습니다. 어느 산모퉁이를 돌아 잠시 쉬는 동안 앞날을 계획하고 희망을 가져보는 일보다는 지나간 일을 추억하는 일이 훨씬 많아졌습니다. 이제는 내 손에 칼자루를 쥐어준다고 한들 천하를 뒤엎을 만한 계획은커녕 보잘것없는 계획조차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희망이란 아이들이 평온하고, 내 몸 건강한 채로 크게 아프지 않고 지내다 본향으로 회귀하는 정도가 전부입니다. 어쩌면 사는 동안 우리가 궁극적으로 소망했던 바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별의별 궁리를 다 해보던 젊은 날의 계획이란 더 이상 가져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송년회를 한다고 친구들과 모여서 하는 이야기라는 것이 장래의 이야기는 없고 온통 지난날의 추억을 끄집어내는 것이지만 그나마도 기억이 흐릿한지 그때 그 상황을 옳게 말하지는 못하고 몇 사람의 수정 보완 작업을 거쳐야만 대충 아귀가 맞습니다. 가끔은 우스갯소리도 있고, 기억해 보아야 누군가에게는 부끄러운 일도 있지만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럴 만한 친구들이 모여 있다는 것일 테고 그 일이 우리에게는 즐거운 추억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뒤로 넘어져 새로 산 양복을 입은 채 물속으로 곤두박질치던 일도 즐거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내 머릿속에 든 기억은 시간의 순서 없이 들고 납니다. 어렸을 적의 일이라고 해서 생각이 더디 나는 것은 아니고, 어제 일이라고 해서 먼저 떠오르지도 않습니다. 아직도 내 눈과 귀의 감각은 예민해서 무엇을 보고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기억해 내는 순서도 추억의 종류도 다릅니다. 어느 친구가 스무 살 적의 명동 이야기를 하면 모두의 입에서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추억의 샘은 같은 곳에서 솟아납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는 이맘때쯤이면 공연히 설레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대체 그것이 뭔지도 모르는 농촌의 부모님은 단 한 푼의 크리스마스 자금도 지원하지 않지만-어떻게든 성탄절 축하인파에 휩쓸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지요. 우리는 성탄절 날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축복’의 성스런 행사를 치르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착하고 어리석은(?) 양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를 용서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지만 인천에서 배를 빌려 먼 바다로 나가 어느 섬에서 머무르면서 여름휴가를 즐긴 적이 있었습니다. 술잔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안 누군가가 후배에게 종이컵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킨 후에 배가 떠나버렸습니다. 그가 배에 타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때는 뱃머리를 돌릴 수 없을 지경으로 먼 바다로 나와 있었습니다.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 온 후배의 절망감이라니요. 마침 인천에 있는 처가댁으로 가니 장인께서 그런 모임에 나가서 무엇을 하느냐고 당장 탈퇴하라고 했다는 일화는 사십여 년 전의 즐거운 추억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내가 장인의 입장이 되었어도 종이컵을 두 줄이나 사들고 터덜거리며 문을 넘어서는 새 사위를 보는 기분이란 우습기도 했지만 한 편 무슨 이런 일이 했을 겁니다.
그래도 돌아보면 후회가 되거나 수치스런 추억보다는 그럭저럭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추억의 종류를 모두 꺼내놓고 일별하자면 설사 더러는 수치스럽거나 부끄러운 일이었다고 해도 그런 대로 자랑스러운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누구나 많은 일들이 사는 동안 오고 갔겠지만 특별히 어떤 일에 대해 후회를 남기거나 수치를 느끼지 않는 까닭은 당시에 잘잘못을 가려 반성하고, 사과하며, 용서를 구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새삼 안도의 한숨이 나옵니다. 남의 원망이나 손가락질을 받기라도 한다면 형편없는 삶을 산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올 것입니다. 산모퉁이를 돌아 숨을 고르며 지나간 날을 뒤돌아보면서 그 점은 참 다행이라고 느끼는 까닭입니다. 물론 다 잘 하기야 했겠습니까. 누군가는 내가 모르는 나의 잘못을 알고 있겠지만 말입니다. 주위 사람들의 너그러움과 격려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꽤나 심각해 하고, 때로는 고뇌에 휩싸여 어쩔 줄 몰라 했겠지만 지나고 나니 추억 말고는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쥐어지지 않는 구름 같은 인생입니다. 세월도 빠져 달아났고, 젊음도 사라졌으며 다만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된다는 걸 안다고 해도 세월 말고는 아무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추억일 뿐이지만 그 추억보다 더 정확하고 빈틈없이 내 삶의 궤적을 그려주는 것은 없습니다. 다행히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다닌 길을 곧잘 기억하고 있어서 그 길을 잊을 리는 없습니다. 내과에서, 안과로 그곳에서 비뇨기과로 옮겨간 아버지의 마지막 종착역은 할아버지 곁입니다.
아버지는 말년에 이르러 주말이 되면 창밖을 내다보며 손주들이 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자식들이 드리고 간 용돈을 모아놓았다가 피자며, 통닭이며, 손주들의 밤참거리를 위해 쾌척하셨지요. 그것은 단순히 돈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손주들에게 퍼붓는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그런 아버지의 추억을 반추하며 그런 날이 오기를 희망하는 것뿐입니다. 그것도 할 수 없는 날이 오고야 만다는 것을 아버지를 보며 알았지만, 알았다 해도 어쩔 수 없었던 말년에 당신이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기쁨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소망을 깨지 않으려고 조카들에게 은근히 이번 휴일에도 올 것을 압박하고는 했지요. 착한 손주들은 제 할아버지의 작은 소망을 잘 들어드렸습니다.
주말이면 사막에서 까치발로 망을 보는 미어캣 같이 아버지가 무료하고 한심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아버지에게 그 밖의 일상이란 그저 지난날을 회상하며 고개를 끄덕여 보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나는 누우면 때도 없이 잠이 들고 마는 아버지의 세월에 지친 모습을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무기력함이며, 무저항이며, 막막한 기다림이며…걸어서 운동하기에도 이미 힘들어진 다리로 갈 수 있는 곳도 마땅치가 않다는 걸 알았습니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생각이라고는 없어 보이던 노인이었지요.
나 역시 지금 기억해낼 수 있는 추억이란 그나마 종류도 다양하고 느낌도 여러 가지지만 더 시간이 흐르면 그 일조차도 흥미를 잃고 말 것입니다. 또 다른 미어캣이 되어 이층 창문에서 손주들이 오기를 기다릴 것이 빤합니다. 곤충 학자가 그러하듯 아버지를 잘 관찰해 두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야하는 길이기 때문이었죠. 이제는 점점 더 친구들과의 추억이나, 젊었을 때의 일이거나, 자식들과 함께 했던 추억들보다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신 길을 따라가며 돌아보는 추억이 더 많이 떠오를 때가 많다는 걸 느낍니다.
이런 글이 때로는 선배 문인이나 나를 아끼는 동료들로부터 너무 앞서가며 때 이르게 쓰는 글이라는 질책의 말을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글이란 깨달음이나 느낌이 왔을 때 쓰는 것임으로 못 쓸 글도 아닙니다. 모든 글이 희망을 주어야 하고, 낙관적이어야 하며, 패배주의적 인생관을 배제하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십에 죽은 이의 나이란 구십에 죽은 이의 나이와 다르더라도 죽음에 임하는 마음이 같은 것처럼 내가 느끼는 것을 느껴야 할 때 느끼는 것뿐입니다.
나는 이럴 때 적어도 작가이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나를 후배로 아는 사람들은 그저 나이 어린 후배로 알고, 집안의 동생으로 아는 사람은 그렇게 알며, 친구는 그저 친구로만 안다면 이런 나의 글은 연민과 동정 그리고 사랑으로 읽은 끝에 나를 질책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물론 글을 옳게 못 쓴 책임은 피할 수 없겠지만 삶에 대한 시각이 다르다고 해서 그래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내가 삶의 희망을 포기한 채 마치 다 산 사람처럼 추억을 말하고, 곧 그만 살 것처럼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나의 문학적 생산품일 뿐 그것이 곧 나의 길이거나 삶을 비관하는 태도는 아니라는 겁니다. 나아가서는 삶을 보는 이런 방식이 자신에게는 어떻게 작용하는지도 생각해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시간적 차이일 뿐 어떤 낭만적이거나 비관적인 요소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 나이 칠십이 가까웠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