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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4) 황사영의 도피를 도운 사람들
신유년 체포령 내리자 상복 입고 김한빈과 배론으로 피신하다
- 황사영 초상화.
한꺼번에 터진 제방
신유년으로 해가 바뀌면서 조정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11월에 국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12월 17일에 최필공이 전격적으로 체포되었다. 12월 19일 새벽, 최필제의 약방에 모여 기도하던 사람들이 기찰 중이던 포졸들에게 적발되었다. 새해 1월 10일 정순왕후는 천주교인의 전면적 색출을 위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의 연좌제 실시를 윤음으로 선포했다.
급박한 상황에 정약종은 불안감을 느꼈다. 1월 19일, 자신의 집에 보관 중이던 교회 서적과 성물, 주문모 신부의 편지와 신자들 사이에 오간 글이 가득 담긴 상자를 안전한 곳에 옮기려다가 운반 도중 적발된 이른바 책롱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은 가뜩이나 들끓던 여론에 불을 붙였다. 천주교 배척 상소가 조야(朝野)에서 일제히 빗발쳤다. 검거 선풍이 불고 삼엄한 체포령이 내리자, 천주교 수뇌부는 일체의 활동을 중지하고 지하로 들어가 숨을 죽였다.
정약종의 책 상자 속에서 조정이 그토록 찾던 주문모 신부의 편지뿐 아니라 다산과 황사영의 편지까지 나왔다. 정약종의 일기장도 있었다. 황사영은 책롱 사건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당일 집을 떠났다. 1월 20일, 그는 집 근처 제자 김희달의 집에 가서 잤다. 혹시 있을지 모를 기습 검거에 대비해 인근에 은신하며 사태를 관망하려 한 것이다.
당시 포도대장 이유경(李儒敬, 1747~?)은 사건의 파장이 클 것을 우려해 문제를 자기 선에서 덮으려 했다. 그 일로 그가 파직되고, 2월 5일 이후 박장설과 이서구, 최현중 등의 상소가 잇달아 올라가자, 2월 9일 사헌부는 마침내 이가환과 이승훈, 정약용 등의 체포와 국문을 주청했고, 이들은 2월 10일에 체포 수감되었다. 2월 11일에는 권철신과 정약종이 끌려왔다.
2월 10일, 국문장으로 끌려 온 정약용 앞에 당국은 불쑥 정약종의 책 상자에서 나온, 다산이 황사영에게 보낸 친필 편지를 내밀었다. 둘의 관계를 묻자 다산은 “저와는 5촌으로 이모의 외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더 가깝게 조카사위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좀더 먼 쪽을 택했다. 황사영의 편지도 같이 내밀어, 서찰 속 내용으로 심문이 진행되었다.
- 황사영이 신유박해를 피해 상복을 입고 성묘 가는 행색을 꾸려 배론으로 피신하던 중 경기도 평구에서 김한빈을 만나 동행하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잠행과 피신
2월 10일 국청(鞫廳)이 설치되자, 줄줄이 끌려온 신자들이 혹독한 고문 아래 내지르는 신음과 비명이 국청을 메웠다. 매를 못 견뎌 줄줄이 부는 진술 속에서 황사영의 이름은 빠지는 법이 없었다. 심문과 문초가 계속될수록, 교계에서 황사영의 위상은 점점 더 분명해졌다.
강완숙은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의 체포 직후인 2월 10일에, 체포령이 내린 황사영을 계동(桂洞) 용호영 인근의 사학 매파 김연이의 집으로 숨겼다. 중인 신분으로 교계의 지위가 가장 높았던 이합규와 김계완도 강완숙의 지시에 따라 이 집에 합류했다. 이합규는 이용겸(李用謙), 또는 이동화(李東華)란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렸고, 김계완은 김백심(金百深)과 김심원(金深遠) 같은 여러 이름을 바꿔 쓰는 통에 당국을 혼란스럽게 했지만, 사실은 같은 사람이었다. 이들은 너무 다급해 멀리 달아날 시간조차 없어 관부의 턱밑으로 숨어든 것이었다. 세 사람은 강완숙이 뒷날 공초에서 정광수와 함께 남자 교우 중 가장 높다고 꼽았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서울 지역 천주교계의 핵심 중 핵심이었다. 이들마저 체포되면 서울 교회 조직이 완전히 와해되어 재기불능 상태에 빠지고 만다는 위기감마저 감돌았다.
황사영은 이씨의 호패를 차고 이서방으로 행세하며, 때를 보아 지방으로 종적을 감출 계획을 강완숙과 미리 상의한 상태였다. 이날 밤 황사영은 집에 보낼 편지를 써서 강완숙에게 보냈고, 강완숙은 권철신 집 여종 구애(九愛)를 시켜 편지를 전달했다.
2월 11일, 포도청의 포교들이 계동까지 들이닥쳐 이들이 숨은 동네를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불안한 마음을 못 이겨 삼청동 산 위로 달아나 산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날이 저물자 산에서 내려온 세 사람은 적선동 십자교 근처로 돌아 나와 김가 성을 가진 교우의 집으로 들어갔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주인은 세 사람을 나가 달라며 쫓아냈다. 몰려다니다가는 더 큰 의심을 사겠다 싶어 이들은 그곳에서 각자 헤어졌다. 여기까지는 이합규와 김계완, 그리고 황사영의 공초를 맞춰서 재구성한 내용인데, 기억의 착오로 세 사람의 진술에는 동선과 날짜가 얼마간 차이가 있다.
황사영은 상황을 알아보려 밤중에 석정동에 사는 권상술의 집으로 찾아가 하루를 묵고, 새벽에 그 집을 바로 나왔다. 황사영은 동대문 안쪽 훈련원 근처 황정동(黃井洞), 즉 노랑우물골에 살던 각수 송재기의 집으로 숨어들어 사흘을 더 머물렀다. 황정동은 위치가 불분명한데, 「추안급국안」 중 김한빈의 공초에 송재기의 집이 이교(二橋) 즉 동대문에서 종로 쪽으로 두 번째 다리가 놓인 인근에 있었다고 했으니, 황정동은 훈련원 자리인 지금의 국립의료원 서쪽 방산동 일원을 가리키는 지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대문과 광희문이 지척의 거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근처로 나온 것은 도성 탈출을 용이하게 하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황사영의 탈출을 돕기 위해 아현의 김의호가 건너왔다. 정약종 집 행랑채에 살던 공주 포수 김한빈도 달아나 송재기의 집으로 왔다. 김한빈이 황사영을 보고는 “여태 여기에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상놈 행세로 잡물을 팔며 한양에 숨는 방안과, 사학하는 무리가 없는 강원도 산속에 숨는 것 중에 사정이 다급했으므로 바깥으로 달아나는 쪽에 중의가 모아졌다.
김의호는 황사영에게 머리를 깎아 중 행세를 하자고 제안했다. 황사영은 중은 우리의 도가 아니니 그럴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상복을 입고 상주 행세를 하는 것은 어떠냐고 하자 그제서야 황사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사영이 송재기의 집으로 숨은 시점은 전후 사정을 따져볼 때 2월 13일 경이었을 것이다.
극적인 탈출
김의호가 그 길로 바로 나가 자신의 돈과 송재기의 돈을 합쳐 베를 사왔다. 시간이 없었으므로 송재기의 처와 최설애, 김한빈의 딸이 힘을 합쳐 바로 상복을 지었다. 황사영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아름다운 수염은 족집게로 뽑아 눈에 띄는 특징을 가렸다. 이미 황사영에 대한 검거령이 내린 터여서 도성문마다 그의 용모파기가 나붙었을 것이었다.
황사영은 미리 준비해둔 이씨 성의 호패를 지닌 채 성묘 가는 행색을 꾸몄다. 김한빈의 18세 난 아들 김성분이 시종 행세로 술병을 들고 따랐다. 광희문 쪽의 경계가 삼엄했던지 황사영은 창의문을 통해 김한빈과 함께 도성을 극적으로 빠져나왔다.
황사영은 김한빈과 헤어져 경기도 양주 땅에 속한 평구(平丘: 오늘날 남양주시 삼패동)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다. 김한빈은 포수여서 산속 지리에 훤해 깊은 산 속으로 은신하려 할 경우 아무래도 그의 도움이 절실했다. 두 사람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따로 떨어져서 평구까지 가서 그곳에서 다시 합류했다.
황사영이 김한빈과 함께 도성을 벗어난 것은 2월 15일 경이었을 것이다. 이후 제천 배론 땅 김귀동의 옹기점을 향하고 있던 2월 25일, 국청에 나갔던 대신들이 대왕대비를 뵙고 사학죄인의 국문 상황을 보고했다. 이때 대왕대비의 하교가 이랬다. “황사영을 여태 체포하지 못했다니, 어찌 매우 놀랍지 아니한가? 국가의 기강이 이럴 수가 있는가? 각별히 엄히 신칙하여 조속히 체포해 들이도록 하라. 또 만약 지체된다면 엄벌에 처하리라.”
대왕대비의 이 같은 질책이 있자 국청에서는 황사영을 잡기 위해 더욱 혈안이 되었다. 하지만 잡혀 온 신자들은 저마다 다른 진술로 황사영에 대한 추적을 교란시켰다. 대부분 실제로 황사영이 간 곳을 몰라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황사영의 행선지를 알았을 것이 분명한 송재기는 황사영이 가평 읍내에서 위로 20리 남짓 가면 있는 큰 산에 숨었을 것이라고 속여서 진술했다. 변득중은 장덕유와 함께 기찰포교를 대동하고 황사영이 숨을만한 곳을 몇 곳 지목하여 함께 다니면서 이들의 힘을 뺐다. 남제(南悌)는 황사영 어미의 말이라면서, 외사촌인 이학규의 집, 정동 윤종연의 집, 경영교 이청풍의 집 중 하나에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를 앞세워 이 세 집을 다 돌았지만 허탕이었다. 황사영 집 사당터에 부쳐 살던 남송로는 강화(江華)에 있는 삼촌 황석필의 집과 서산(西山)에 있는 그의 선영, 공주에 사는 그의 6촌 대부로 자를 사길(士吉)이라 하는 황생원(黃生員)의 집 등을 지목했고, 그때마다 포졸들은 멀리까지 헛걸음을 계속 해야 했다.
2월 26일 정약종, 최창현,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이승훈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가환과 권철신은 참혹한 고문을 못 견뎌 같은 날 감옥에서 죽었다. 정약종의 문서 속에는 강완숙과 주고받은 언문 서찰도 들어있었다. 교회의 일을 긴밀하게 상의한 내용이었다. 「일성록」 1801년 2월 25일 자 기사에 그 내용이 나온다. 강완숙의 신변 또한 무사할 수 없어 마침내 그녀도 2월 26일에 붙잡혀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배론에 숨은 황사영은 이들의 죽음을 까맣게 몰랐다. 어떤 검거 노력에도 불구하고 황사영의 종적만 계속해서 묘연하자, 조정은 몸이 달았다. 신유년의 옥사는 황사영과 신부를 잡아야만 끝이 날 터였다. 의금부의 집요한 추적에도 불구하고 황사영은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어떤 단서조차 잡히지 않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5) 배론의 토굴
교우촌 토굴에서 기도와 강학 · 일기 쓰며 절망의 시간을 보내다
- 야마구찌의 「조선서교사」에 수록된 1936년 8월 당시 배론 토굴의 입구 사진.
배론 가는 길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황사영이 2월 15일쯤 서울을 떠나 경상도 예천에 머물다가 강원도 접경으로 옮겼고, 이후 제천 배론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사학징의」 중 장덕유(張德裕)의 공초 중에 비슷한 내용이 있다. 누각동에 사는 신자 김국빈(金國彬)이 3월 20일쯤 장덕유를 찾아왔는데, 자신이 2월 중순경 여주에서 김한빈과 우연히 만났더니, 그가 상복 입은 사람을 데리고 예천으로 내려간다고 했다는 전언이었다. 또 배론 옹기점 주인 김귀동(金貴同)이 자신의 공초에서, 2월 그믐께 김한빈이 이상인(李喪人)을 데리고 왔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2월 15일께 도성을 벗어난 황사영은 김한빈과 함께 예천 등지를 거치며 은신처를 찾다가 근 보름 후에 배론에 도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추안급국안」의 10월 9일 자 황사영의 공초는 이것과 조금 다르다. 평구에 도착해서 김한빈과 다시 만나니, 청양 사람 김귀동이 사학으로 제천 땅에 피해 들어갔으니 함께 그리로 가자고 해서, 제천 읍내에서 30리 거리의 근우면(近右面) 배론리(排論里)로 들어가게 되었노라고 했다. 예천 간 일에 대한 언급은 빠지고 없는 셈이다. 하지만 이 경우 서울서 배론까지 가는데 근 보름 가까이 걸린 것이어서 날짜가 잘 맞지 않는다.
「추안급국안」 10월 10일 자 공초에서 김한빈은 또 송재기의 집에서 황사영과 동행해 팔송정(八松亭) 도점촌(陶店村) 김귀동의 집에 도착했노라고 했다. 팔송정은 오늘날 배론 성지 인근 제천 10경 중 제9경으로 일컬어지는 탁사정(濯斯亭)의 옛 이름이다.
김귀동은 고산(高山) 백성인데, 그 또한 2월 초에 배론 산중으로 막 옮겨온 터였다. 그 이웃에 살던 청양 사람 김세귀(金世貴)와 김세봉(金世奉) 형제도 김귀동보다 고작 한 달 먼저 이곳에 들어왔다. 당시는 교회에 대한 극심한 탄압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터전을 모두 잃고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고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충청도와 강원도의 깊은 산골로 속속 숨어들거나, 장사를 하면서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었다.
위 김국빈의 진술에는 내포에서 사학을 하다가 달아난 여러 남녀를 여주에서 만나 가평 읍내에서 동쪽으로 10리 남짓 되는 땅으로 데려다 주었다는 내용도 나온다. 당시 천주교도들이 산속에 숨어 들어갈 때도 천주교 조직 내에서 암묵적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네트워크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한빈 또한 그 같은 연락망을 타고 황사영을 배론에 갓 내려온 김귀동의 집으로 안내했고, 그곳은 김세귀ㆍ김세봉 형제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착해, 그 앞서 정착한 사람들과 함께 작은 산골 마을을 이뤄가던 시점이었다.
- 배론 토굴의 현재 모습. 가톨릭평화신문 DB.
교우촌에 마련한 토굴
배론은 교우촌으로, 치악산 동남편에 우뚝 솟은 구학산과 백운산의 연봉으로 둘러싸인 험준한 산악지대라 외부와 절연된 곳이었다. 집주인 김귀동은 김한빈과 함께 땅을 파서 토굴을 짓고 거기에 황사영을 숨겼다. 황사영은 토굴 속에 깊이 숨어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한마을 사람들조차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달레는 “일종의 지하실을 만들고, 그리로 통하는 길은 그 옹기점에서 만드는 큰 옹기그릇으로 덮어놓았다”고 썼다. 황사영의 존재는 김귀동과 그의 아내, 그리고 한(韓) 그레고리오의 어머니만 알고 있었고, 한 그레고리오의 모친이 자주 와서 수발을 들었다고 했다. 한 그레고리오는 다른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불빛조차 새 나가지 않는 좁은 토굴은 어떤 크기였을까? 1929년 4월호 경향잡지에 정규량 신부가 배론 일대의 유적을 답사하면서 굴에 대해 쓴 최초의 글이 실려있다. 그는 배론 점촌(店村)의 지굴(地窟), 즉 땅굴이라고 이 공간을 설명했다. 일본인 학자 야마구찌(山口正之)는 자신의 저서 「황사영 백서의 연구(黃嗣永帛書の硏究)」(全國書房, 1941)와 「조선서교사(朝鮮西敎史)」(雄山閣, 1967)에 각각 1936년 8월 25일에 배론을 답사하고 나서 쓴 「주론토굴답사기(舟論土窟踏査記)」를 수록했다.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제천에서 9㎞의 봉양면 주포(周浦)에 이르러 여기서 8㎞, 도보로 약 2시간의 거리에 있는데 배론 내를 건너 계곡으로 접어든다. 우뚝 솟은 구학산과 백운산 연봉의 가슴패기를 이루고 있다. 옛 기록에는 ‘토기점촌(土器店村)’이라고 적혀 있다. 계곡은 길이가 4㎞에 이르고, 지형이 배 모양이어서 배론이라 불리운다 한다. 문제의 토굴은 봉양면 구학리 644번지 최재현씨 댁 뒤란에 있다. 토굴의 지름은 약 1m 반, 양쪽을 돌로 쌓아 올리고 다시 큰 돌로 천정을 꾸몄다. 이날은 매몰되어 있는 까닭에 굴속에 들어갈 수는 없었으나 한눈에 옹기굴의 요적(窯跡)임을 추정할 수 있었다.”
이것이 황사영이 숨어지낸 배론 토굴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 답사 기록이다. 토굴은 입구가 직경 150㎝ 크기였다. 성인이 몸을 숙여야 들어갈 높이다. 깊이는 얼마쯤인지, 내부의 넓이는 어떤지 위 기록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여러 기록을 종합할 때 이곳은 옹기를 굽는 옹기 가마는 아니고 가마에 넣기 전 옹기를 쌓아두던 토굴 형태의 움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입구가 매몰된 상태여서 그는 토굴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짐작건대 입구는 옹색하고 작아도 안으로 꽤 깊숙이 파 들어가 황사영이 불을 밝혀 글을 쓰고 두세 사람과 함께 공부하거나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크기였을 것이다. 입구는 옹기 등으로 막아 뒷공간을 은폐했다.
「사학징의」의 공초 기록을 믿을 경우, 김한빈은 김귀동의 집에 보름쯤 머문 뒤, 생활비 마련을 위해 제천 일대를 한 달 남짓 다니며 사냥을 했고, 황사영은 토굴에 혼자 남았다. 토굴에서도 황사영은 김세귀ㆍ김세봉 형제를 앉혀놓고 천주학을 부지런히 강론했다. 그들에게 십계를 가르쳤고, 그 밖의 교리를 정성을 쏟아 강습했다. 그 일마저 하지 않고는 그 절망적 시간을 감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낙담과 절망
교회와 가족의 소식이 궁금했던 황사영은 3월 말 김한빈을 서울로 보냈다. 이미 정약종과 최창현,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이승훈은 목이 잘려 죽었고, 이가환과 권철신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송재기의 집에 잠깐 들른 김한빈은 황사영 집안의 소식도 물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주문모 신부는 3월 12일 의금부에 자수했고, 강완숙도 끌려갔다. 당시는 심문 중이었고, 외교 문제로 말썽이 날까 염려한 조정이 쉬쉬하여 외부로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황사영은 이때 주 신부의 자수 사실까지는 확인했을 것이다.
절망적 상황 속에 기약 없는 시간이 토굴 속에서 흘러갔다. 기도와 강학, 그리고 일기를 쓰면서 황사영은 간절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먼저 세상을 뜬 순교자들에 관한 기록을 하나하나 공책에 적어 나갔다. 자신 외에는 증언을 남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조선 교회가 실낱같은 빛을 회복하기 위한 행동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6월 2일, 재차 소식을 탐문하기 위해 읍내 장터에 나갔던 김한빈이 그만 서울에서 내려온 포교에게 체포되었다. 다급해진 황사영이 이곳에서 다시 달아날 궁리를 하고 있는데, 이틀 만에 김한빈이 돌아왔다. 원주 안창까지 끌려갔다가 포교가 술에 취해 조는 틈에 몸을 빼서 도망온 길이었다.
8월 말에는 황심 토마스가 배론 토굴로 찾아왔다. 그는 내포 지방 덕산 용머리 출신으로 1796년과 1797년에 주문모 신부의 편지를 들고 두 차례나 북경에 다녀온 사람이었다. 그에게서 황사영은 비로소 주문모 신부의 순교 소식을 상세히 접했던 듯하다. 주 신부는 교인들의 참혹한 죽음을 대속하고자 자진 출두하여 4월 19일에 효수형에 처해져서 죽었다는 전언이었다. 황심은 주 신부가 세상을 뜰 때의 의연한 모습과 당시 일어났던 여러 이적들에 대해 전해주었고, 다른 순교자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
절망스러웠다. 조선 교회는 이대로 주저앉고 마는 것인가? 신부의 성사와 세례를 그토록 목이 타게 기다리던 지방의 신자들은 이제 어찌하는가? 구원의 빛은 꺼졌다. 지도부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믿었던 강완숙마저도 지난 5월에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뒤였다. 지도부 중 남은 것은 혈혈단신 자신 하나뿐이었다. 황심이 황사영을 찾아온 것도 앞이 보이지 않는 조선 교회의 현실 타개 방안을 묻고자 함이었다.
깜깜한 토굴 속처럼 길은 보이지 않았다. 빛은 없었다. 황사영은 토굴 속에서 평소 북경 주교에게 보내기 위해 작성해온 보고와 탄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행상에게서 구입한 반 자짜리 명주천을 꺼내 종이에 쓴 초고를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쏟아 옮겨적기 시작했다.
나중에 의금부에 백서와 함께 압수된 그의 일기장에는 토굴에서 끼적여 둔 시와 서울에 살아남은 교우를 생각하며 쓴 시가 남아 있었다. 제목만 남은 시작품에 ‘가을밤에 마암을 그리며(秋夜懷摩庵)’, ‘암로(巖老)에게 부치다(寄巖老)’, ‘중간(仲簡)에게 부치다(寄仲簡)’, ‘묵옹(翁)을 송별하며(送別翁)’, ‘과회(寡悔)가 죽는 꿈을 꾸고(夢寡悔死)’ 등이 더 있다. 「추안급국안」에 제목만 나온다. 마암은 이국승, 암로는 김경우, 중간은 인언민, 묵옹이 황심이었다. 과회는 이경도로 이윤하의 곱사등이 아들이었다. 화원(花園) 또는 근형(芹兄)으로 불린 외사촌 이학규의 이름도 글 속에서 자주 나왔다. 이국승은 1797년 이래 자기 집에 함께 살았던 사람이었고, 황사영이 붙잡혔을 때 그는 이미 사형을 당한 뒤였다. 이경도가 죽는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 쓴 시는 당시의 불안 심리를 잘 보여주는 슬픈 제목이다. 이렇듯 황사영은 배론에서도 여러 경로를 통해 교계의 소식을 탐문하고 있었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6) 황사영은 역적인가?
광적인 종교 탄압에 맞서 오로지 천주 섬기는 자유 청원
- 황사영 백서. 가로 62㎝, 세로 38㎝의 명주천에 깨알 같이 적어나간 글은 글자 수만 1만 3384자에 달한다.
1㎝에 세 글자씩 쓴 1만 3384자
황심은 8월 23일 서울로 왔다가 이튿날 제천으로 떠났다. 그는 아마 8월 26일경에 배론에 도착했을 것이다. 황심의 제천행은 황사영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간의 교회 소식을 전했다.황사영은 자신이 그간 토굴 속에서 준비한 종이에 쓴 백서의 초고를 황심에게 보여주었다. 10월에 떠나는 동지사 행차 편에 북경 주교에게 전달할 글이었다. 황심을 통해 신부의 최후에 대한 전언을 들은 황사영은 보완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황심이 말미를 두고 다시 오겠다며 길을 떠났다. 황사영은 내용을 추가해 초고를 완성한 뒤, 이를 명주천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가로 62㎝, 세로 38㎝의 올이 가는 명주천에 한 글자의 오자 없이 깨알 같이 적어나간 글은 글자 수만 1만 3384자였다. 38㎝ 길이의 천에 한 줄에 96자에서 124자에 달하는 글자로 122행을 썼다. 말이 그렇지, 실제로는 1㎝ 안에 세 글자가량 써야 하는 크기다. 옷 속에 넣어 꿰매야 했기에 부피 때문에라도 글씨는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백서는 9월 22일에 완성되었다. 그런데 9월 25일에 황심이 돌연 체포되었고, 그가 황사영이 숨은 곳을 알리는 바람에 은신 8개월 만인 9월 29일에 제천 토굴에서 체포되었다. 백서가 그의 품속에서 나왔다. 백서를 본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앞쪽은 자신들이 조선 정부에 의해 어떤 탄압을 받았는지를 적었고, 이미 죽은 순교자들의 전기를 하나하나 기술하고 있었다. 문제는 글의 맨 끝쪽에 있었다. 황사영이 북경 주교에게 요청한 사항 중, 교황이 중국 황제에게 편지를 써서 조선 국왕을 협박하고, 청나라가 조선을 부마의 나라로 삼아 내정을 감호(監護), 즉 감독 보호해달라는 요청, 수천 척의 서양 선박에 수만 명의 군대를 끌고 와서 조선에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강박해 달라는 내용이 문제가 되었다.
이 편지로 인해 천주교도는 이전 무부무군(無父無君)의 패륜멸상(悖倫滅常)의 무리에서 순식간에 나라를 전복시키려는 역모 집단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것은 두고두고 천주교 박해의 근거가 되었다.
가백서(假帛書)와 가짜 논란
조정은 황사영을 문초하는 중에 동지사가 북경으로 출발하게 되자, 10월 27일 대제학 이만수(1752~1820)를 시켜 황제께 올릴 「토사주문(討邪奏文)」을 작성케 했다.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처형 사실을 황사영의 검거에서 나온 백서와 맞물려 정면 돌파하려고 했다. 주문모를 조선 사람인 줄 알고 죽였는데, 뒤늦게 황사영의 백서로 인해 그가 중국 사람임을 알았다면서, 두루뭉수리로 얼버무렸다. 증거 자료로 황사영의 백서 중에 조선 정부에 유리한 내용만 발췌해서 1만 3384자를 고작 16행 923자로 축약해 흰 비단에 옮겨 적어 증거자료로 첨부했다. 이때 맥락 없이 입맛에 맞게 임의로 줄인 백서가 후대에 논란을 빚은 가백서(假帛書)다.
- 절두산순교성지 소장 <황사영백서입수전말의기록>. 황사영 백서는 1801년 압수된 이후 줄곧 의금부에 보관돼 오다가 1894년 뮈텔 주교가 입수했다. 이를 1925년 79위 순교자 시복식 때 교황청에 전달했다는 일련의 기록을 담고 있다.
원본 백서는 의금부 비밀 창고에 들어가 봉인되었다가, 1894년 갑오경장 당시 대한제국 정부에서 의금부와 포도청에 산더미처럼 쌓인 문서를 소각 처리할 때 비로소 세상에 나왔다. 담당 관리가 폐기 직전 천주교 신자 친구인 이건영(李健榮)에게 원본을 건넸고, 이건영이 이를 당시 조선 교구장이던 뮈텔(Muttel, 1854~1933) 주교에게 바쳤다. 뮈텔 주교는 이를 다시 1925년 로마 바티칸에서 거행된 조선 천주교 순교자 79위 시복식 당시에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정해, 현재 바티칸 민속박물관에 원본이 소장되었다.
「벽위편」을 증보할 때 이만채는 「사영백서(嗣永帛書)」를 실으면서 등출 경위를 적고 나서 이렇게 썼다. “조금 오래되자 사학하는 무리들이 ‘이것은 홍희운이 가짜로 지은 것’이라고 떠들어대어, 당시 재상 중에도 간혹 이 말을 듣고 믿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다가 기해년(1839)에 사학을 다스릴 때 그 글이 다시 드러나 윤음과 보감(寶鑑)에 올랐다. 이로부터 사학하는 무리가 마침내 감히 다시 이 같은 주장을 하지 못하였다.”
황사영의 청원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었고, 특별히 중국에 보낸 가백서의 경우는 앞뒤 맥락이 다 빠진 상태에서 극단적 주장 내용만 도드라지게 편집한 것이어서, 천주교 신자들뿐 아니라, 조정 관료들까지도 의구심을 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원본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의심도 무리는 아니었다.
거기에다 원본을 베껴 쓰는 과정에서 악의적 왜곡도 끼어들었다. 예를 들어 백서 68행에서 강완숙에 대한 주문모 신부의 신뢰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신부가 총애하여 맡김이 몹시 대단해서 달리 견줄만한 사람이 없었다(神父寵任甚隆, 無人可擬)”라 한 것을 “신부가 총애하여 맡김이 몹시 대단해서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神父寵任甚隆, 無人不疑)”고 바꿔 놓아,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남녀 관계가 있었던 듯한 뉘앙스를 풍겨 놓은 것이 한 가지 예이다.
또 102행에서 “천주의 인자하심으로 오히려 완전히 버리지 아니하시고, 이같이 잔혹하게 부서진 가운데서도 다만 한 줄기 길을 남기셨으니, 분명 동국을 기꺼이 구원하시려는 드러난 증거와 닿아 있습니다(主之仁慈, 猶未全棄, 似此殘破之中, 特留一線之路, 明係肯救東國之表證)”라고 한 것을 왜곡하여 “분명 동국을 배교케 하려는 드러난 증거와 닿아있다(明係背敎東國之表證)”고 바꿔 놓는 등 군데군데 예민한 대목에서 말을 줄이거나 글자를 교체한 자취가 여러 곳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진천 신부의 「황사영 백서 이본에 대한 비교 연구」에 상세한 분석이 있어 여기에 미룬다.)
「토역반교문」 속 3가지 흉계
12월 22일에 대비는 다시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을 발표했다. 이글 또한 앞서 중국에 보낸 「토사주문」을 썼던 이만수가 지었다. 글 속에 황사영에 대한 내용이 짧지 않다. 글은 “이리의 심보에다 여우의 낯짝이라. 도성에서 사주 보며 부적으로 오래도록 이름이 있더니, 천진(天津) 저녁 볕에 감히 초개 같은 목숨 구해 달아났구나. 한 조각 흰 비단에 쓴 편지가 나오니, 세 조목의 흉악한 계책을 꾸몄다네. 차마 3백 개 고을, 명교(名敎)의 고장에다 문을 열어 도적을 받아들이고, 9만 리 큰 바다의 선박을 불러들여 날을 정해 지경을 범하려 했지. 배척하여 꾸짖어 욕함은 역적 정약종보다 1백 배나 더하고, 교통하여 서로 오간 것은 역적 황심과 한 통속이었다네.”
예의(禮義) 동방에 도적을 받아들이고, 서양 선박을 불러들여 우리나라를 치게 한 것을 이리의 심보에 여우의 낯짝이라 하고, 그 죄가 역적 정약종의 1백 배쯤 된다고 적은 것에서 그를 향한 조정의 분노가 느껴진다. 한편 글 속에서는 ‘삼조흉계(三條凶計)’가 유난히 눈에 걸린다. 그것은 첫째, 황제의 뜻으로 글을 내려 조선 정부가 서양인을 받아들이게 해달라는 것과 둘째 안주(安州)에 무안사(撫安司)를 열어 친왕(親王)이 조선을 감호(監護)케 하는 방안, 셋째, 서양국과 통하여 큰 배 수백 척에 정병 5, 6만을 태우고 대포 등의 병기를 싣고 와 종교의 자유를 허락게 하라는 세 가지를 꼽은 것이다. 「순조실록」 1801년 10월 6일 자 기사에 보인다.
이 부분에 대한 세밀한 검토와 평가는 이 짧은 글에서 자세하게 논의하기 어렵다. 다만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던 대박청래(大舶請來)에 대한 논의는 사실 황사영이 처음 꺼낸 얘기가 아니다. 1796년 주문모 신부가 북경에 보낸 편지에서 최초로 나오고, 이는 유항검ㆍ유관검 형제의 공초에서 큰 이슈가 되었다. 또 그 바탕에는 조선 후기 미륵하생 신앙이 「정감록」 신앙과 결합되어 해도진인설(海島眞人說)로 확장되던 민간 신앙이 서학과 습합되는 별도의 긴 서사가 잠재되어 있다. 이 부분은 따로 떼어 살펴보겠다.
당시 유럽 교회는 1789년 발생한 프랑스 혁명 이후 교황의 권위는 추락했고, 국가 교회의 개념이 확산되어 국가가 교회권 위에 군림하던 시기였다. 당시 교황 비오 6세(재임 1775~1799)는 프랑스에 감금된 상태로 서거하였고, 나폴레옹의 권력이 확대되면서 교황권은 추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를 이은 비오 7세 교황(재임 1800~1823)은 유럽 자체의 문제를 감당해나가기도 벅찬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유럽에서 9만 리를 항해하여 몇천 척의 배와 수만 명의 군대를 조선에 보내 조선 국왕을 겁박해 종교의 자유를 얻도록 해달라는 조선 교회의 거듭된 청원은 참으로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이를 두고 다블뤼 주교조차도 「조선순교자 역사비망기」에서 백서의 뒷부분이 다양하고 풍부한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하지 못한 결과 너무 경솔하게 앞서간 부분이 있었고, 말에 조심성이 너무 없어, 천주교 적대자들과 노론 세력에 대한 복수심에서 비롯된 표현이란 생각마저 든다고 지적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상황 판단에 적절치 못한 부분이 있었다 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국가의 위에 두었던 이들의 순진한 신심을 덮어놓고 폄훼할 일은 아니다. 황사영은 단지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종교에 대한 광적인 폭압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오로지 자유로 천주를 섬기는 권리를 존중받게 해달라고 청원했던 것이었다. 당시 세계사의 현장적 전망을 갖지 못했던 조선의 지식인이 꿈꾼 천주와 교황의 권능은 9만 리의 거리가 문제 될 수 없었다.
황사영은 토사반교가 반포된 뒤인 11월 5일에 처형되었다. 유감스럽게도 그가 죽을 당시의 정황은 남은 기록이 없다. 당시는 모든 조직이 멸절되어 입회할 사람도 기록할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황사영의 처형으로 조선 정부는 신유년 옥사의 실제적 종결을 선언했다. 처벌받은 자들의 재심청구권도 금지했다. 새 왕은 보위에 오른 직후에 너무 많은 피를 보았다. 황사영을 마지막으로 주모자급이 모두 처형되었다는 판단이어서, 확실한 국면 전환이 필요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