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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창세기 40:1-41:57 “ 하나님의 섭리 “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자 애를 썼는데 감옥에 갇혀 버렸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서 변호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노예에게 무슨 변명의 기회나 주어졌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기회가 왔습니다. 요셉이 갇혀 있는 감옥에 바로왕의 고위 관리가 잡혀 들어 온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입니다. 이들이 무슨 고위직이냐 하시겠지만 술과 떡이란 왕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가장 신뢰할만한 사람을 임명하는 자리이지요?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왕의 술 맡은 관원이었는데 왕에게 청구하여 예루살렘성을 중건하는 허락을 받습니다. 이 정도로 술 맡은 관원이란 높은 지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감옥에 들어온 것은 요나단의 탈굼에 의하면 왕을 독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쳐서 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요셉이 수종을 듭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에 보니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것입니다. 꿈을 꾸었는데 그 뜻을 알 수가 없어서 근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요셉이 그들에게 무어라고 합니까? 8절입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으니 청컨데 나에게 고하소서라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지 않고 하나님께서 해석을 하실 거라고 하면서 그 꿈의 해석을 해줍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은 포도나무의 세 가지에서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에게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해석이 3일안에 당신의 직위가 복직되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떡 맡은 관원장도 그 결론이 좋음을 보고서 자기도 흰떡 세 광주리가 있는데 그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각종 구운 식물이 있는데 새들이 그것을 먹었다는 꿈입니다. 그러자 요셉이 3일안에 당신의 목이 잘리고 그 시체가 나무에 달리고 새들이 당신의 살을 뜯어 먹으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꿈의 해석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해석을 하고서 그대로 되리라고 한 것은 요셉의 능력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요셉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요셉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안 짓고 살았고 정말 믿음으로 살았기에 잘 견뎠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얼마나 감옥에서 억울하게 생각하였을까 하는 면을 등한히 여길 때가 많습니다. 요셉은 우리와 달라, 사무엘은 우리와 달라, 다윗은 우리와 달라, 아브라함은 우리와 달라 그런 생각을 먼저 하고서 성경을 보게 되니 요셉을 사람들이 참 좋아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고결하게 살수가 있을까 하면서 요셉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시면 요셉이 자신이 당한 일이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누구에게 하는 것입니까?
40:14-15절입니다. “봉독”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알려서 여기에서 나를 건져 달라고 합니다. 자신은 히브리에서 끌려온 자인데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에게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구하여 달라고 합니다. 요셉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을까요? 하나님이 응답을 안하시는 것입니다. 그냥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셉인들 기다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꿈은 해몽을 해 주면서도 자신의 꿈은 어떻게 될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주에 시편 105편에서 본 것처럼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저를 단련하였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연단의 기간인 것입니다. 그 때가 차기까지는 감옥에 갇히고 착고에 상하고 쇠사슬에 묶이는 것입니다. 노예에서 감옥까지 무려 13년입니다.
이러한 기간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다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부르시고 약속을 주셨지만 75세에 부름을 받아 이삭을 얻기까지 25년이 걸렸고, 이삭은 네 후손이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받고서도 결혼 20년 만에 자녀를 얻었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의 세월을 보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양치기로 보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훈련이라는 학교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펼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러한 연단의 기간동안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하는가를 보게 됩니다. 인간의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여 봅니다. 그러나 결국은 지쳐서 모든 것을 포기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될 때 하나님이 그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연단의 과정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과정입니다만 그런 기간을 꼭 거치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이루어 내시는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의 꿈 해석대로 되었고 복직을 하였는데도 23절에 보니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오래된 사건도 아닌데 꿈을 꾸고 3일 만에 복직이 되었는데 3일 만에 잊어버린 것입니다. 요셉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을 하고나서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연락만 오면 풀려 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기다렸지만 술 맡은 관원장이 잊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 2년동안 무엇을 하였을까요? 대책 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잊어 버렸지만 요셉에게 꿈으로 계시하신 그 하나님은 요셉을 잊지 않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을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요셉을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물론 요셉은 감옥에서 고통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다시 2년이 지납니다.
41:1절입니다. 만 2년 후에 바로가 꿈을 꿉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고서 만 2년이나 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섭리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서 복직 후에 요셉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면 그래 그 자를 풀어 주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풀려 나왔을 것이라는 겁니다. 이 때는 바로가 아직 꿈을 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성경밖의 기록들이지만 이집트의 관리로 나아가는 나이가 30세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요셉이 총리가 될 때에 애굽의 왕조가 셈 계통의 왕이었다고 합니다. 이집트의 왕조는 주로 함 계통이었는데 요셉 때에 셈 계통의 왕이 등극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란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의 꿈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살찌고 좋은 일곱 암소를 파리하고 흉악한 일곱 암소가 잡아먹어 버리는 것과 충실한 일곱 이삭을 세약하고 마른 일곱 이삭이 삼켜 버린 것입니다. 이 꿈을 바로가 꾸고서 그 해석을 애굽의 술객과 박사들에게 고하였으나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기억을 합니다. 3일 만에 잊어먹은 것을 2년이 지나서 기억을 하고서 요셉을 추천하는 것입니다. 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급하게 요셉을 준비시켜 왕 앞에 데리고 갑니다. 목욕하고 옷을 입히고 수염을 깎습니다. 유대인들은 수염을 깍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요셉을 형들이 알아보지 못한 것은 수염을 깎고 있었기에 더 알아보지 못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수염이 깎이는 것은 수치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왕 앞에 나왔습니다.
41:15-16절입니다. “봉독” 바로왕의 질문과 요셉의 대답을 볼 수 있습니다. 너 꿈 해석 잘한다면서 그러자 요셉의 대답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요셉됨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게 됩니다. 17살 때 하나님이 계시를 꿈으로 받고서는 그 꿈을 마구 자랑하였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있는 지금은 꿈의 해석이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아마 자기의 꿈이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에 겸손하여 졌는가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감옥에서 연단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앞에서 꿈의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을 말하고서 해석을 합니다. 해석뿐만 아니라 처방까지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해석을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돌립니다.
41:25, 하나님이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임이라. 41:32, 두 번 겹쳐 꿈을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속히 이루시기로 정하셨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자 바로가 요셉을 총리로 임명을 합니다. 그 임명의 이유는 하나님의 신이 요셉을 감동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애굽의 온 땅을 치리하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총리가 되고 애굽의 제사장의 딸과 결혼을 하고서 아들을 낳습니다. 그리고서 그 이름을 무어라고 합니까? 51절입니다. 자신의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이 아직도 무슨 뜻인지 정확히 파악을 못하고 있다고 보아집니다. 그 총리가 되고서 아들을 낳고 이름을 므낫세 라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로 나의 고난과 아비의 온 집안의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이름을 짓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난과 아비의 집에서 자신이 팔린 것을 잊어버리게 하신 것으로 애굽의 총리직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풍년과 흉년이 일어나게 하시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예정된 프로그램입니다. 요셉 개인의 고난과 형통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서 이렇게 하심으로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애굽만이 아니라 온 땅에 기근이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7년 풍년동안 저축을 하지 않은 나라들은 당장 양식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약속을 하나님이 이루어 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란 요셉의 노예로의 팔림과 감옥행 총리가 됨. 이런 모든 것을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크고 멀리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되면 우리 앞에 닥친 자잘한 것들에 대하여 어떤 자세가 됩니까. 금요일 저녁에 성경 공부 한 것처럼 종말론적인 자세와 영원의 시각으로 사건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낮추시면 낮추어지라는 것입니다. 정당하고 옳다고 고함을 지르지 마시고 감옥에 있으라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술 맡은 관원장에게 호소하여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대가 주의 손에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시적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세미하게 역사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하고서는 늘 자신의 주변의 상황에만 빠져서 허덕이는 것입니다. 나는 왜 일이 이렇게 풀리지 않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 요셉을 단련하듯이 우리를 단련시키는 것입니다. 요셉 자신의 꿈이 자신의 개인의 성공이나 출세의 차원이 아니라 형제를 살리는 희생자로서의 부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지 형제들의 주만 되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의 주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자들입니까? 우리고 하나님의 계시를 다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않고서는 누구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계시는 이미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에도 꿈 이야기를 자주 하는 사람이 있는데 요즈음 우리가 꾸는 꿈이 계시가 아니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꿈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이 평소에 늘 생각하는 것들이 꿈에 꾸어 지는 것이고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로 스트레스 받는데 꿈에서 대리 만족을 하기도 함으로 정신 건강을 지킨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요즈음의 꿈을 지나치게 의존하여 해석하려 하지 마시고 우리는 이미 주어진 계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꿈이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꿈에 매달려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꿈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우리의 꿈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섭리를 보면서 살게 됩니다. 주의 말씀을 보고 묵상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의 섭리에 인도함을 받아 사는 것이 복있는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지금 고난 중에 계십니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인도하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노예 같고 감옥 같을 지라도 하나님이 계시를 주셔서 자신의 자녀를 삼은 자를 결코 잊지 않고 계십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의 억울함을 잊어버린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기대하고 바라던 사람이 전혀 반응이 없을 때 그것으로 인하여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저것 다 놓게 하셔서 지푸라기라도 잡을 것이 없게 하시고서 주님을 붙들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섭리의 손길을 믿고서 마음 푹 놓고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때는 우리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전도서 3:1-11절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시종을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섭리와 인도를 받으며 사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