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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45:1-5 내 마음에서
이 시편에는 솔로몬의 품위와 아름다움, 그 나라를 다스리는 그의 미덕과 권세와 풍요로움이 높은 찬사로 묘사됩니다.
더 특별한 사실은 솔로몬이 애굽에서 데려온 아내를 사랑했기에 이에 대한 하나님의 복이 그에게 약속됩니다.
새롭게 결혼한 신부이지만 자기 나라를 향해 작별을 고하고 그 나라에 대한 모든 애착을 버리고 자기 남편에게 전적으로 헌신했습니다.
이 비유로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한 위엄과 부와 그 크기가 정확한 말로 묘사됩니다.
이는 이 왕의 다스림 아래 살고, 그 왕의 다스림에 순응하는 것보다 더 크고 더한 복이 없다는 사실을 신실한 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라 자손의 마스길, 사랑의 노래, 영장으로 소산님에 맞춘 것(고라 자손의 교훈, 사랑의 노래, 영장으로 백합화 곡조에 맞춘 노래 - 칼빈)
이 시편이 솔로몬에 관하여 쓰여 졌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를 지은이가 누구인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우리 의견으로는 선지자들이나 경건한 교사들 가운데 누가 이 내용을 자기가 하려는 말의 주제로 택한 것 같습니다.
또 솔로몬에게서 본 그 훌륭한 것은 무엇이든지 어디에나 잘 응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갖습니다.
이 시편이 ‘사랑의 노래’라고 불려지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그처럼 특별한 방법으로 내려주셨던 그 은혜로 하나님께서 가지신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설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복스럽고 성공적인 결혼으로 즐거워하면서 하는 말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라는 말이 서술 형용사로 쓰여 이 시가 사랑의 노래임을 가리킵니다.
솔로몬은 הידידי(여디디야)라고 호칭되었습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란 의미를 갖습니다(삼하12:25).
시 45 편
그러나 우리 의견은 문맥으로 보아 ‘사랑’이란 의미를 가진 תודידי(예디도트)라는 말이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 서로의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이 ‘사랑’이란 말이 때로는 나쁜 의미로 사용될 경우도 있습니다.
결혼에 따른 감정은 아무리 잘 조정되었더라도 육신의 고르지 못한 감정이 섞입니다.
이 노래는 ליכשמ(마스길)이라고도 불리웁니다.
이는 여기서 취급된 주제가 추잡하거나 음탕한 연애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으로 솔로몬에 관해 이야기된 것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와 자기 교회의 거룩하고 신성한 연합이 묘사되며 설명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제명의 나머지 부분에 관해서도 주석가들이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ןשוש(쇼샨)이란 말은 ‘백합화’를 의미합니다.
시편 60편의 제명은 단수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본 시편의 제명과 같습니다.
이 시편과 80편의 제명에 복수가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제명은 일반 노래를 시작하는 구절이든지 어떤 악기를 말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것을 말하든지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관한 우리 견해를 말하지 않겠고 단정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사실 자체에 손상을 주지 않고도 자기 나름의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1. 본문 1절은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내 마음이 좋은 것으로 끓어 넘쳐 -칼빈)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 입니다.
이 첫마디 말씀은 본 시편의 주제가 일반적인 것이 아닌 사실을 충분히 보여줍니다.
이 시편을 지은 사람이 누구였든 간에 이 시인은 이 말씀 중에서 시초부터 크고 영광스러운 것들을 말하겠다고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들이 지나치게 허풍떠는 말을 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또 성령 하나님은 공중을 향해 헛된 소리를 연발하도록 격려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에 취급된 주제는 단순히 일시적 땅의 나라에 관한 것이 아니고 더욱 뛰어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만일 이 경우가 그렇지 않다면 이 선지자가 그처럼 장려한 말로 그 왕을 찬양하기를 되풀이하는데 마음이 쏠린 그 강렬한 욕망으로부터 자기 마음이 ‘끓어 넘친다’고 선언하는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 말을 ‘말하다’ 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말한 의미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견해는 중요한 사실로 확증됩니다.
시 45 편
이 동사로부터 תשחדמ(마르헤솃)이라는 명사가 파생되었습니다.
이 말은 모세의 글에 한 두번 나타나며 단 음식물을 구워내는 냄비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마치 이 영감받은 시인이 ‘내 마음은 뛰어난 것, 곧 기억하기에 가치 있는 것을 뿜어내려 하고 있다’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시인은 자기 혀를 “필객의 붓”에 비교했을 때 시인은 혀와 마음의 조화를 설명합니다.
2. 본문 2절은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도다(왕은 인생보다 아름답고 은혜가 왕의 입술에 베풀어지니 이는 하나님이 왕을 영영히 복주셨음이로다 - 칼빈)” 입니다.
시인은 그 왕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면서 자기가 말하려는 주제를 논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시인은 왕의 능변을 찬양합니다.
사람에게서 얼굴의 아름다움은 미덕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얼굴의 아름다움을 극히 귀하게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고귀한 마음의 기질이 그 사람의 얼굴에 자주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그 왕이 뛰어난 용모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경우는 솔로몬에게 적용될 것입니다.
솔로몬의 얼굴만 보아도 그가 뛰어난 재능들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의 직권에 의해 권위로 백성을 다스릴 뿐 아니라 이론과 능변으로 그들이 복종하도록 하는 왕이 가지는 그 웅변의 장점 또한 무조건 칭찬하지 않습니다.
이 왕의 지도력은 옛 사람들이 헤라클레스(Hercules)는 그의 입에 황금의 사슬을 가지고 일반 백성의 귀를 얽어매어 자기를 따르도록 끌고 갔다고 상상했던 것과 같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 시대의 야비한 마음을 가진 왕들을 분명하게 견책하게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백성과 대화하는 것과 그 백성이 복종하도록 충고하는 것이 자기들의 권위에 대한 침해라고 간주합니다.
그들은 백성을 설득하는 대신 강요하며 유순하고 복종하는 사람들로 여겨 법과 공평으로 다스리는 것보다는 그들을 노예처럼 학대하면서 야만적인 포악을 발휘합니다.
이와 같이 특출한 재능이 솔로몬에 의해 발휘된 것 같이 이 재능은 후에 그리스도에 의해 더 충분히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께는 그의 진리가 홀(笏)의 역할을 했습니다.
이 사실에 관해 우리는 점차 더 많이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칼빈이 ‘이는’(칼빈)으로 번역한 ןכ־לע(알켄)은 ‘그러므로’ 로 번역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여기서는 솔로몬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과 능변 때문에 복을 받은 것처럼 ‘그러므로’ 라고 번역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 45 편
솔로몬의 아름다움과 능변은 모두 하나님의 복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솔로몬이 이 재능들로 왜 유명하게 되었는지를 밝힌다고 이해해야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번역한 ‘왕이 뛰어나므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로소이다’라는 역문은 그 의미가 약할 뿐만 아니라 무리한 번역입니다.
3. 본문 3-4절은 “(3) 능한 자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4)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위엄있게 타고 승전하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 게 두려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입니다.
솔로몬이 그의 원수들에게 무서움을 주는 그의 전투적 용맹과 그의 다스림을 받는 자들이 그의 권위를 인정하게 하고 그들이 높이 우러러보는 그의 덕망을 찬양합니다.
한편 어떤 왕도 자기 적에게 당당하지 않고는 자기가 다스리고 있는 자들을 보호하고 방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한편 자기 나라의 내적 상태가 의와 공평 안에서 확고하게 질서가 잡혀 있지 않다면 외적과 더불어 용맹스런 전쟁을 한다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감받은 시인이 허리에 차게 될 그 칼은 첫째로 그의 원수들을 물리치고 패주시키는 전투적 무용(武勇)의 표입니다.
둘째로 그 칼은 그 시인이 다스리는 자들에게 경멸을 받지 않게 하는 권위의 표가 될 것을 말합니다.
또 시인은 자신이 얻게 될 영감은 곧 없어져 버리는 왕들의 허세와 헛된 영광과 같은 단순히 일시적인 것이 되지 않고 오래 지속되는 것이며 크게 더해질 것을 덧붙입니다.
시인은 평화의 시대에 가장 번창하는 덕망에 관해 말합니다.
적절한 비유를 들어 나라에 힘과 번영을 주는 참된 수단을 보여줍니다.
얼른 보기에 “진리와 온유와 ........ 타고”라는 말은 격에 맞지 않고 우아하지 못한 표현방식으로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들 덕만을 왕이 큰 위엄을 가지고 눈에 잘 보이도록 높이 앉아 타는 수레에다 매우 적절하게 비교합니다.
시인은 이 미덕들을 땅의 왕들이 교만하게 자랑하는 헛된 위세와 시위 행렬에 뿐 아니라 그들이 권세와 명예를 얻기 위해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악행과 부패에 맞세웁니다.
솔로몬 자신도 잠언 20장 28절에서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 위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 라고 말합니다.
시 45 편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땅의 왕들이 자기의 영토를 넓히고 자기의 권세를 더하고자 할 때에는 야망, 오만, 강포, 잔학, 강탈, 약탈, 그리고 폭력이 그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사용되는 말과 병거 노릇을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오만과 헛된 영광으로 우쭐거리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비틀거리고 쇠약한 왕위로부터 끄집어 내리신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왕들이 성실과 공평을 장려하고 자신의 다스림에 자비와 친절을 포함할 때 이는 그 나라의 참되고 견고한 기반이 되기 때문입니다.
4절의 하반절은 솔로몬이 공평과 자비의 본질을 호전적 용기에 결합시키기만 한다면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할 것을 넌지시 말해줍니다.
맹목적이고 난폭한 충동으로 무모하게 덤비는 왕들은 아마 잠시동안은 자기 주변에 무서움과 놀람을 퍼뜨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애써 얻은 그 힘에 의해 곧 넘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바른 온건함과 한결같은 자제는 용감한 자들의 손이 다른 사람들을 두렵고 떨리게 하는데 최상의 수단입니다.
4. 본문 5절은 “왕의 살이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 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왕의 살이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라고 말함으로서 다시 전투적 힘에 관해 말합니다.
이 말로 시인은 왕이 그의 권세에 대항하는 원수는 누구든지 먼 곳에 있는 자라 하더라도 때릴 만한 무기를 그 손에 잡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의미로 시인은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 라고 말합니다.
이는 시편기자가 ‘왕은 그와 같은 모든 자들의 완고함을 분쇄할 충분한 힘을 그 손에 가지고 있기에 그의 나라의 안정을 흔들려고 하는 자는 비참하게 멸망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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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45:6-7 하나님이여
메시야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싸우시고(4), 정의를 사랑하여 악을 미워하십니다(7). 그는 이와 같은 통치자로서 그 왕권이 영원하십니다(6).
그러므로 누구든지 메시야와 함께 진리와 온유와 공의의 편에 있는 자는 언제나 영전(靈戰)에서 승리하며 영생합니다(계17:14하반).
본문 6-7절은 “(6)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7)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 입니다.
이 절에서 이 저자는 솔로몬이 가진 다른 기품의 높은 미덕을 칭찬합니다.
곧 그의 보좌의 영구적인 기간과 다스림의 공평함과 정직성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이 하나님을 향한 것인 양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해석은 진지하지 못하며 당치도 않습니다.
그들 중 어떤 자들은 םיהלא(엘로힘)을 소유격으로 읽어 ‘하나님의’ 라고 번역합니다.
그리하여 그 구절을 ‘당신의 하나님의 그 보좌’라고 번역합니다.
이런 번역에 대한 근거는 없으며 그들은 메시아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게 되고자 성경을 심히 부끄럽게 왜곡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들의 주제넘은 행위를 폭로합니다.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의미는 솔로몬이 대부분의 왕들같이 폭군처럼 다스리지 않고 바르고 공평한 법으로 다스리므로 그의 보좌는 영원히 확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영광의 어떤 표적을 왕들에게 주시기에 그가 ‘하나님’으로 호칭되고 있으나 이는 육을 가진 인간에게 잘 적용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 어디에도 사람이나 천사가 어떤 제한을 붙이지 않고는 이 칭호로 두드러지게 된 사실을 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재판관들과 천사들이 집합적으로 םיהלא, 즉 ‘신들’이라고 불려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개체적으로는 그렇게 호칭되지 않으며 모세가 바로에게 신이 되게 되었을 때(출7:1)처럼 누구라도 제한적인 말이 부가되지 않고는 이 명칭으로 불려지지 않습니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이 시를 곧 알게 되겠지만 땅의 어떤 나라보다 더욱 높은 것을 가리키고 있다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다음 절에는 이 군주가 뛰어나게 된 그 의에 대한 더 충분한 진술이 보여집니다.
시 45 편
본 절은 그가 정의를 유지함에 있어서와 똑같이 악을 벌하는데도 엄격하다고 우리에게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왕들이 죄악을 형벌함에서 소홀하고 태만할 경우에 그 악행이 벌을 받지 않고 허용됨으로 심히 크고 많은 악이 생겨남을 압니다.
그러기에 제재를 가하지 않는 왕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것보다는 급료를 주지 않는 왕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것이 더 좋다는 옛 속담이 있습니다.
이와 동일한 목적으로 솔로몬이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잠17:15)라고 말한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정하고도 의로운 정부는 이 두 가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로 다스리는 자는 악을 주의 깊게 제지해야 합니다.
둘째로 다스리는 자는 의를 힘차게 지속시켜야 합니다.
이는 ‘인민의 정부는 보상과 형벌 이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라는 플라토(Plato)의 지혜로운 말과 같습니다.
이 시인이 그 왕은 ‘기름을 부음받고 그의 동류보다 승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의의 효과나 결과로서가 아니라 그 이유로 이해해야 합니다.
솔로몬이 실천했던 의와 공평에 대한 사랑은 그가 하나님에 의해 그 나라에 세우심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나라와 권세의 자리에 앉히면서 여호와는 그 자리에 필요한 재능들도 주셨습니다
불변화사 ןכ־לע(알켄)은 앞에와 같이 여기서도 ‘왜냐하면’의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솔로몬이 정의를 사랑하는 점에 매우 두드러졌기에 그는 수많은 그의 형제들 중에 거룩한 기름부으심으로 성별된 왕이 되기 위해 선택되었다는 내용과 같습니다
신성한 말씀에 의해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 나라의 왕위를 계승할 사람으로 엄숙하게 지명되었습니다.
또 그가 보좌에 앉자 훌륭한 미덕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로 볼 때 기름부으심이 의로운 행위보다 앞섰으므로 의가 기름부으심을 받기 위한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왕의 위엄은 그 기름의 효력으로 ‘즐거움의 기름’ 이라고 호칭됩니다.
교회의 행복과 이익은 다윗의 집에 약속된 그 나라에 의존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본문을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호기심을 가지고 보아왔던 솔로몬과 그리스도에 대한 비교를 약간 더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경건하고 겸손한자들에게는 다윗의 후손은 상징적으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당시 하나님의 백성에게 인식되었다는 사실을 성경말씀에서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시 45 편
그러나 유대인들과 다른 악한 자들이 진리가 지닌 설득력에 굴복하려고 하지 않기에 본문 가운데 말씀하는 것들 중에 솔로몬에게 충분하고 온전하게 적용되지 않은 주요한 이유들을 간략히 설명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 시를 지은 사람의 의도는 신실한 자들의 심령을 확고하게 하고, 즉시 생긴 우울한 변화가 그들의 무서움과 놀라움을 막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나라는 영원히 있을 것을 약속했는데 한 사람이 죽은 후에 쇠망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반박에 시인은 ‘그 영화롭고 권세있는 왕의 처음 계승자였던 르호보암이 자기 지배권을 좁은 범위로 축소시켜 그 백성의 대다수가 그의 지배 밖에 있게 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교회의 믿음이 없어졌다는 이유는 되지 않았다’고 대답합니다.
솔로몬의 나라로 하나님은 당시에도 찾았고 기대되었던 그 영원한 나라의 상징과 특징을 보여주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솔로몬이란 왕의 이름은 단순히 뛰어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여기서 읊고 있는 것이 평범하고 일반적인 왕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보좌는 해와 달이 하늘에서 계속 비치고 있는 만큼(시72:5) 오래 지속되는 뛰어난 주권자에 관한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다윗은 왕이었고 솔로몬의 뒤를 이었던 자들 역시 왕이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령하나님은 그가 최고 지배자로서의 표를 가지게 하여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이 한 사람을 선택하신 것같은 이 말씀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솔로몬에게 전투적인 용맹이 있다고 극히 드높이 칭찬하는 것은 참으로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온유하고 평온한 성질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그 나라가 평화로울 때 왕의 자리에 올라 평화 시대에 적합한 것들을 발전시키는데 헌신했으며 어떤 전쟁을 치름으로서 유명해지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여기서 말하는 그 나라의 영원한 존속이 이 시가 그리스도께 적용됨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이는 해와 달이 하늘에서 비치는 동안 다윗의 보좌는 존속할 것이라는 그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유대인들조차도 이 말씀은 메시아를 가리킴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자기의 말을 다윗의 아들에 관해 말하면서 시작하고 있으나 성령에 의해 더 높은 선율(旋律)로 인도되어 참되고 영원한 메시아의 나라를 그 말 안에 포함시키신 사실에 의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눈여겨 보아야 할 םיהלא(엘로힘)이란 말이 그의 말 속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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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할 여지없이 이 말은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아무 자격 제한 없이 아무 사람에게나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가지신 하나님으로서의 위엄이 이 말 속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이제 우리는 몇 부분의 말씀을 주시하여 간략하게 논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노래를 ‘사랑의 노래’ 또는 ‘결혼의 노래’라고 부르고 있지만 우리가 이 노래를 어떤 호색적이고 육정적인 연애 사건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위해 이 시 안에 신성한 교훈이 서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의미로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아름다우심’으로 호칭되셨음을 압니다.
이는 어떤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같이 그의 얼굴에 어떤 두드러진 아름다움이 있어서가 아니라 특유하게 은사들과 은총을 갖고 있어서 모든 사람들보다 우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가지신 신령한 것이 이 땅에 있는 어떤 것을 비유로 하여 묘사되는 것은 흔히 있는 어법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풍요할 것이고 우리가 큰 번영과 큰 권세가 있는 나라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큰 영광의 상태일 것이고 넘치는 기쁨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실이 세상의 허세로부터 떠나 그리스도의 나라에 글자 그대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를 읊고 있는 자들이 당시 하나님의 백성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 교훈을 적용시키는 것이 그들의 의도였으므로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 나라에서 드리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 관해 설명할 때 그들은 율법의 의식에서 얻은 비유들을 사용합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말씀에 모호한 점이란 없게 될 것입니다.
또 이 시인이 하늘의 왕이 능변을 갖고 계심을 칭찬한 다음에 그가 그의 ‘칼’ 로 무장하였다고 말한 사실 또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자기 권세에 기꺼이 순복하고 유순한 성격을 보이는 자들은 말씀으로 다스리는 것같이 다른 한편으로 각 시대마다 있는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많은 불신앙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무장을 하고 오셨다는 사실이 자기들을 멸망시키기 위함이라고 믿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를 부드럽고 친절하게 자신에게로 이끄실 때 그의 권세에 즉시 유순하게 굴복합시다.
이는 그가 칼과 독한 살로 무장하고 계시므로 우리를 습격하시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은혜가 왕의 입술에 베풀어진’ (2절-칼빈) 것은 극히 적절합니다.
복음은 그 본질로 생명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완고하게 거역하면 이 은혜는 두려움을 갖는 근거가 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의 구원의 교리로 우리를 겨냥한 칼과 살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시 45 편
이 사실을 생각하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의 수가 많고 무례하다 하더라도 이런 일이 우리를 실망시킬 수 없다는 큰 위안을 얻습니다.
우리는 교황과 그를 따르는 자들이 어떠한 오만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배척하면서도 그들은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왕이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불경스런 경멸로 그리스도를 비웃고 터어키 사람들과 유대인들이 얼마나 심술궂게 그리스도를 비난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무질서 중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원수들을 뒤엎고 멸망시키기 위한 충분한 칼과 살을 갖고 계신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 위에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라는 말씀의 의미를 왜곡하여 그릇되게 하려고 아무리 애쓸지라도 이 말씀 자체가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을 확립하는데 충분합니다.
םיהלא(엘로힘)이란 칭호가 천사들이나 사람들에게 적용될 때는 보통 그들과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구별하기 위해 어떤 표징이 부가되는데 여기서는 이 말이 단순하게 어떤 제한도 하지 않고 그리스도께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딤전3:16)으로 논의됨을 주시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는 온 세계가 있기 전에 아버지께로 나신 말씀으로 하나님으로 불리어집니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구절로 보아 여기서 그리스도는 중보자의 성격을 띠고 나타나고 계셨기에 하나님께 순종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시요 우리의 복과 이익을 주시고 지켜주시는 분으로 잠시 동안만 우리를 다스리시지 않고 끝없는 지배권을 갖고 계신 사실을 알 때, 만일 우리가 본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원한 존속을 그리스도의 신성에만 국한시킨다면 우리는 이 교리로 얻게 되는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잃게 됩니다.
이 교리로부터 우리는 생명과 죽음 어디에서나 가장 큰 확신을 얻기 때문입니다.
7절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기름을 부어주시되 동류보다 승하게 부어주셨다’고 하셨기에 그리스도는 중보자의 성격을 띠고 계심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사42:1, 히2:17).
이 사실은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에 적용되지 않고 육신을 입은 그리스도께 적용됩니다
그리스도의 이런 자격으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종이시며 우리의 형제가 되십니다.
시 45 편
시45:8-12 왕의 모든 옷은
메시야 왕은 영적 향기, 곧 복음을 가지고 신자들에게 영생을 주십니다(8, 고후2:14-16)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신부와 같으니,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에게 가므로 이 세상과는 인연을 끊어야 됩니다(9-11).
이런 의미에서 10절 하반에서 말하기를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라고 하였습니다.
1. 본문 8-9절은 “(8)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9) 왕의 귀비 중에는 열왕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우편에 서도다” 입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말들의 의미에 관해 우리는 논쟁하고 싶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조차 본문에 기록된 향품들 중 세 번째 것에 관해 발음의 유사성에 의해 이 말은 육계를 가리킬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실 외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그 왕의 옷에 귀하고 감미로운 냄새가 나는 향기가 뿌려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시인은 솔로몬이 모두 박수치며 환호하는 중에 그의 상아궁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ינמ(민니)라는 말을 좋은 의미가 될 수 없기에 ‘나에게서’라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거기서부터’ 라고 번역해 ‘상아궁’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지나친 쾌락은 일반 백성뿐만 아니라 왕들에게도 옳은 것으로 인정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9절에서 이 선지자가 그 왕후가 호화롭고 당당하게 꾸며 입었다고 말하는 것같이 우리가 왕의 위엄에 어울리는 장려함을 적절하게 나타내는 것을 정죄하지 않기 위해 너무 심한 엄격성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솔로몬에 관해 말하는 이 모든 칭찬을 하나님께서 전부 다 인정하지는 아니하였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최초부터 일부다처의 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았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기서 말하는 첩들이 하나님이 주신 복들 중에 포함되고 있습니다.
‘귀비’, ‘존귀한 소녀들’ 이란 말로 선지자는 솔로몬의 아내들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시 45 편
솔로몬의 아내들에 관한 기록은 성경의 다른 구절에 있습니다.
솔로몬이 결혼한 애굽왕의 공주는 그의 소중한 아내였고 그 등급에서 첫째였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의 역사에서 좀 하위의 대열에 서 있었다고 말하는 그의 다른 아내들 역시 후하고 영예로운 대접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들 모두를 선지자는 “열왕의 딸”이라고 부릅니다.
그들 중에 어떤 자들이나 왕국의 혈통에서 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특히 왕들에게 분명하게 정죄하여 말씀하셨는데(신17:17)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많은 아내들을 거느렸던 사실을 어떤 의미로 그에 대한 칭찬 중에 한 가지로 취급했는지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이 선지자가 이 시편에서 하는 것같이 보편적 행위에 준하여 그 왕의 부와 영광을 칭찬함에 있어서 선지자는 그들의 폐습을 말하려는 의도는 없이 그렇게 말을 의심없이 쉽게 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맞서는 한 사람의 실례를 제시하려는 것이 선지자의 의도가 아닙니다.
솔로몬이 누렸던 권세와 위엄과 영광은 하나님이 특별히 그에게 주신 복이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듯이 솔로몬은 자제하지 못하여 그가 주께로부터 받은 복들을 크게 더럽혔으며 그가 복으로 받은 그 큰 부를 지나친 육정에 탐닉하면서 그릇되게 사용했습니다.
솔로몬에게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관대하심을 보여주셨는지가 이 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자기를 위해 많은 아내들을 취하고 허영으로 적절한 온건성을 실천하지 못했던 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그 관대하심에 속한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우연한 사건이었습니다.
2. 본문 10-11절은 “(10)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 을 잊어버릴지어다
(11)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 지어다” 입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여자는 이 시인이 그 왕의 우편에 서 있다고 말하는 애굽의 여자라는 사실에 우리는 의심이 없습니다.
솔로몬이 이방의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합법적이 아님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애굽의 왕처럼 유력한 왕이 그에게 동맹을 요청했던 사실은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중에 하나로 취급되어야 합니다.
시 45 편
또 율법이 정하고 있듯이 유대인들은 혼인하기 전에 아내 될 사람에게 하나님께 드리는 순수한 예배를 힘써 가르쳐 그 여자를 그 우상 숭배로부터 구출해야 했습니다.
이 시에 나타난 이 왕후는 이방 여자였고 결혼에 의해 교회에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 저자는 그 여자를 악한 행습에서 건져내기 위해 새로운 성격과 다른 태도를 갖도록 그 여자에게 자기 나라와 자기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리라고 권면합니다.
만일 그 여자가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우상을 계속 섬길 것이며 자기의 습성을 좇아 그릇된 방식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람 앞에서 이 행위를 자행함으로 많은 사람들을 같은 악한 길로 이끌어갈 위험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태는 잠시 후에 실제로 생겼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시인이 본문 중에서 그 여자에게 그런 권면을 합니다.
그 권면 중에 시인은 자기 말이 더 무게가 있게 하기 위해 ‘딸’이라는 칭호로 말합니다
이 말은 어떤 개인이 왕후에게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새 신부가 전혀 새로운 여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합당한지 더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시인은 그 여자의 주의를 끌려고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지어다”라는 말을 씁니다.
우리가 본성적으로나 습관적으로 하기 좋아하는 것들을 완전히 그만두도록 우리를 인도하고자 할 때는 심히 강렬하고 졸라대는 설득이 필요한 경우일 것입니다.
이 시인은 바로의 딸이 자기 ‘아버지’와 친척과 애굽 땅을 잊는 것에 후회할 이유란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 여자는 그것들을 떠남으로 경험하게 될 슬픔을 달랠 만한 영광스런 보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가 자기 나라를 떠난다는 것을 위로하기 위해 시인은 그 여자가 극히 유명한 왕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하여 그 여자를 격려합니다.
이제 우리의 논제를 그리스도께로 돌립시다.
첫째로 이 시에서 영적인 것은 시인이 비유적으로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선지자들까지도 우둔하기에 땅에 있는 것들을 비유로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경 말씀 중에 이와 같은 유형의 말씀을 우리가 염두에 둔다면 이 거룩한 작가가 이 시에서 ‘상아궁’ ‘금’ ‘보석’ ‘향품’ 등을 말하더라도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로 시인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풍성한 부로 가득 채워지고 모든 좋은 것들로서 갖추어지게 될 것을 암시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를 풍요하게 하시는 영광스럽고 뛰어난 영적인 은사들을 사람들은 그렇게 귀중하게 여기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이 은사들은 세상의 온갖 재물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시 45 편
이 시에서 열거되는 모든 것, 예를 들면 솔로몬이 취했던 많은 아내들과 같은 것을 그리스도께 하나하나 적용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솔로몬이 많은 아내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교회가 여러 갈래라고 상상한다면 연합된 교회의 몸은 산산조각이 날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 각자가 “하나님의 성전”(고전3:17, 6:19)이라고 불리어집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그리스도의 배우자’ 라는 이름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르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배우자는 하나이며 이 배우자는 믿는 자들의 온 몸으로 구성됩니다.
이 배우자는 ‘왕의 옆에 앉는다’ 라고 말했는데 자기만이 가진 어떤 지배권을 행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배우자 안에서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배우자는 ‘우리 어머니’ 라고 불리웁니다.
이 말씀에는 장차 이방인들이 부르심을 받게 될 사실에 관한 한 두드러진 예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부르심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은 이방 사람들이었고 자기 원수였던 자들과 동맹을 맺습니다.
하나님과 할례 받지 못한 민족 사이에는 혹심한 불화가 있었습니다.
택한 백성이었던 아브라함의 자손들과 그들 사이에는 구별의 벽이 있었습니다(엡2:1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언약은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이방인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옛날에 외국의 이방 여자를 자기 아내로 취했던 것처럼 자신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온 세상과 거룩한 결혼의 관계를 맺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으로 인도받기 위해 그의 신부는 정절을 지키고 더럽힘을 받아서는 안 되므로 이 시인은 이방 나라로부터 모여온 교회는 전에 생활하던 태도를 잊고 자기 남편에게 전적으로 헌신할 것을 권면합니다.
아담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새 사람들로 바뀌는 변화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그것의 필요성을 더욱 열정적으로 주장합니다.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라는 말로 자기가 하는 권면을 강요함으로서 이 시인은 신실한 자들이 열심히 힘든 노력을 하지 않고는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여 자기의 이전 습성을 버리지 못하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
만일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또 스스로 그렇게 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그 권면은 필요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실로 우리는 경험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는데 얼마나 둔하고 느린가를 잘압니다
‘생각하라’ , ‘알라’ 는 말로 우리들이 가진 어리석음이 말없는 책망을 받습니다.
시 45 편
이렇게 말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극히 맹목적인 자기 사랑과 우리의 지혜와 힘이 된다고 여기는 그릇된 견해, 세상의 유혹에 끌려 속하는 것, 또 우리가 본성적으로 가진 오만과 교만은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보화가 얼마나 고귀한가를 우리가 깊이 생각지 않아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주신 은헤에 대한 이 같은 배반의 마음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요하심으로 우리에게 채워주시도록 바울의 본을 받아(빌3:8) 아무 후회 없이 우리가 가장 열망하던 것들을 하찮은 것으로, 혹은 ‘배설물’로 여기지 못하게 합니다.
‘딸’ 이라는 말로 이 시인은 그 새로운 교회를 부드럽고 상냥하게 타이릅니다.
또 그 교회 앞에 후한 보상에 대한 약속을 보여줍니다.
이는 그 교회가 그리스도의 연고로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무엇이든지 자진하여 무시하고 잊어버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가진 땅에 속한 본성을 벗어버릴 때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결코 작은 위안이 아닙니다.
우선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있게 되는 신성한 결합의 시작인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비집’과 ‘네 백성’이란 말은 우리가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항상 가지고 다녔던 혹은 악한 습성으로부터 얻게 된 온갖 더러운 것들을 의미함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 같은 표현 형식 속에는 인간이 스스로 가지는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담습니다.
우리 본성의 어떤 부분도 부패되지 않은 건전하거나 생생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부가되어 있는 그 이유, 즉 교회가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기를 거절한다면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바르고 합당한 권세와 인연을 끊게 된다는 사실 또한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경배’ 라는 말은 눈에 보이는 의식 뿐 아니라 공손한 마음과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자 하는 의욕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아야겠습니다.
마땅히 이 권면은 철저하게 헤아려지기 바랍니다.
당시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더욱 잘 순종하였기 때문이고 오늘날 우리는 교회가 자제력 없는 방종으로 남편인 그리스도께 무례히 행하지 않기 위해 교회가 충분히 높여지지 않았고 존귀하게 되지 못했다고 상상하는 교황과 그를 따르는 자들에 대항해 교회의 권위를 지키려고 큰 투쟁을 하지 말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황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말로는 그리스도 앞에서 모두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께 최고의 권세를 드리고 있습니다.
시 45 편
그러나 교회는 법을 만드는데 있어서 교회가 원하는 대로 무한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제력 없이 지나치게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권세로부터 이탈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는 그들이 교회의 칭호와 명칭을 자기들을 위해 악하게 가로채고 있는지에 관하여 말하지 않기로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야 할 것을 그리스도에게 드리지 않고 그것을 교회에다 돌리는 것은 차마 볼 수 없는 불경스런 행위입니다.
왕의 우편에 앉는 것은 교회가 가진 적지 않은 위엄이며 모든 경건한 자들의 ‘어머니’라고 불리우는 것은 적지 않은 존귀입니다.
경건한 자들을 양육하고 그들을 훈계하는 일은 교회가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가지신 권세를 조금이라도 감하거나 손상시킬 만큼 자기 교회를 높이지는 아니하신 사실을 많은 성경 말씀 구절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3. 본문 12절은 “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리고 백성중 부한 자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입니다.
이 말씀 역시 그 여자가 자기의 이전 상태에 대해 아직도 느낄지도 모르는 그 간절한 욕망을 가라앉히거나 온전히 없애기 위해 이 왕후에게 이 시인이 약속하는 그 보상의 한부분에 관한 것입니다.
시인은 두로 사람들이 선물을 가지고 이 여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겸손하게 찾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두로는 이전에 크게 알려졌던 도시였으므로 유명하고 부유한 성읍으로부터 사람들이 와서 자기들이 이 여자에게 굴복함을 증거하기 위해 문안을 드리는 것은 큰 영예라고 이 저자는 생각합니다.
본문 가운데서 솔로몬의 아내에 관해 말한 모든 것을 교회에 적용시키기 위해 이 말씀을 꼼꼼하게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이 그렇게 되게 하실 경우 우리는 이 예언의 복스런 성과를 보게 됩니다.
이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이 비록 그리스도의 권세 앞에 순응하기를 거절하더라도 교회를 옳은 것으로 주장하고 옹호하면서 교회를 향해 친절하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시 45 편
시45:13-17 왕의 딸이 궁중에서
본문은 영원하신 한 왕이 취한 복에 그 왕궁에 속한 자들 모두가 참여하게 된 사실에 감사하며 찬송하는 말씀입니다.
1. 본문 13-15절은 “(13) 왕의 딸이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
(14) 수 놓은 옷을 입은 저가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동무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15) 저희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입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왕은 모든 백성 앞에서 공공연하게 나타날 때 뿐 아니라 자기의 내실에 혼자 앉아 있을 때에도 언제나 옷을 호사스럽게 입고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그 여자의 몸단장이 보여주는 장려하고 호화로운 외모는 소박한 사람들의 눈을 부시게 하기 위해 계획된 전시물일 뿐 아니라 값지고 참으로 훌륭한 재료들로 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저자는 이 여왕이 사람들 앞에 나타날 특별한 경우에서 뿐 아니라 평범한 매일의 몸치장에서도 찬란한 옷차림을 한다는 환경을 말함으로서 이 여왕의 복되고 고귀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말씀을 ‘그 왕이 가진 모든 영화를 이 여자가 얻음으로 이 여자가 그 왕의 앞으로 절친하게 초대되고 있다’ 고 설명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이 견해를 자지는 것은 수가 많고 영광스러운 수행자들과 함께 이 여자가 왕의 내실로 들어가게 된다는 곧이어 기록된 말씀에 근거를 둡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정당한 온건함의 한계를 넘어선 위세의 과시입니다.
그러나 이 상황으로부터 우리가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그처럼 풍요하게 단장될 경우 이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왕에게 기쁨을 드리기 위해서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 시대에 교회가 그리스도의 영광이 비쳐주는 그 영적 아름다움으로 그같이 풍부하게 단장하지 못한다면 이는 사람들의 배은망덕한 행위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무관심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무시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에 의해 부요하게 되었다가도 가난과 궁핍의 상태로 다시 빠져 들어갑니다.
시 45 편
2. 본문 16절은 “왕의 아들들이 왕의 열조를 계승할 것이라 왕이 저희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입니다.
이 말씀 역시 이 나라의 영광과 뛰어난 우월함을 보여주는데 도움이 됩니다.
자녀들이 그 위엄에서 그들의 선조들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며 그 혈통의 고귀함이 솔로몬이 죽은 이후에 덜하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를 통하여 태어나게 될 후손들이 가장 뛰어난 미덕에서 그들 앞서 다스렸던 선왕들과 같을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그들이 “온 세계의 군왕”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나라는 사방으로 영토가 넓혀져 쉽게 많은 나라들로 나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은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후손들이 그 나라를 자기네들 가운데 서로 나눌 만큼 큰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고 그의 직후에 있었던 후계자가 극히 적은 나라만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누리고 있었던 권세와 동일한 것을 얻었던 그의 참되고 합법적인 후계자는 아무도 없었으며 그 백성 중에 한 지파 반만을 다스리는 왕이 되어 그들은 좁은 한계 안에 갇혀서 이른바 그들의 날개들은 잘려졌습니다.
그러나 옛 교회의 종말과 새 시대의 시초에 임하셨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자녀들이 그리스도에 의해 태어났으며 그들은 그 수에서나 그 우월성에서 그들의 조상들에 못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께서 이들을 온 세상의 주관자로 세우셨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속된 눈으로 평가할 때, 십자가의 치욕은 교회의 영광을 흐리게 합니다.
그러나 그 영광이 줄곧 얼마나 놀랍게 증가되고 영적인 은사들에 의해 얼마나 두드러지게 되었는지를 고려할 때, 본문 중에 교회의 영광이 그처럼 장엄한 말로 기록되었음에 이유가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언급되는 그 지배권은 사람들에게 있지 않고 그 머리되신 분에게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 또한 주목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나는 흔한 표현 형식에 의하면 머리되신 분에게 속해 있고 특별히 그리스도께만 적용되는 지배권과 권세는 성경 말씀의 여러 군데서 그리스도의 지체들에게 돌려집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유명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스리는 자들은 주장하는 자세로 그 지배권을 행사하지 않고 오히려 종들같이 행동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기 나라의 홀(笏)인 자기 복음을 그들에게 맡기셨고 그들이 그것을 계속 갖도록 위임하셨기에 그들은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의 권세를 행사합니다.
시 45 편
진실로 그리스도는 자기 일군들을 통해 온 세상을 자기의 다스림 안에 굴복시키며 그들의 전파에 의해 그에게 모여드는 교회가 있는 것만큼 자기 권세 아래 많은 권력을 확립해 놓으셨습니다.
3. 본문 17절은 “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케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영히 찬송하리로다” 입니다.
이 말씀 역시 솔로몬에게 바르게 적용될 수 없습니다.
솔로몬은 부끄럽고 악한 반역으로 그의 이름은 치욕과 함께 기억에서 흐려졌습니다.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그 땅을 미신적인 가증스러움으로 더럽힘으로서 솔로몬은 지울 수 없는 불명예와 수치를 자신에게 씌우지 않았던가?
이 한 가지 행위만으로도 솔로몬의 이름은 당연히 영원한 망각 속에 묻혀야 합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흐보암 역시 조금도 칭찬을 받을 가치가 없습니다.
그는 그의 어리석고 주제넘은 행동으로 자기나라의 더 나은 부분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것이 참으로 성취된 사실을 찾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계속 흥왕하고 번창하여 잘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이 세상에 의해 멸시당하고 악한 사람들이 마음 속에 교만을 가지고 그의 신성한 이름을 욕하기까지 하고 그 이름을 그들의 발 아래 잔인무도하게 짓밟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조금도 덜하지 않은 위엄을 가지고 살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사방에서 무수한 수로 일어나서 그리스도 나라를 무너뜨리려고 함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리스도 앞에서 이미 무릎을 꿇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그리스도가 자기를 대적하는 모든 세력들을 밟게 되시는 그 시기가 오기까지 사람들은 계속 그리스도에게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사단과 온 세상의 격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은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한 세대로부터 다른 세대로 옮겨지고 그리스도의 영광은 모든 세대마다 보전되고 있으며 오늘날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은 모든 말로 찬양됩니다.
세속의 대부분이 그들의 불경스러운 욕설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조각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종들이 충성과 꾸밈없는 열심히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을 외치게 하기 위해 곳곳에서 그들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우리는 모든 세대에서 인간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번창하고 흥왕해야 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이 어느 때에라도 그 명성을 잃지 않도록 우리의 온갖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46:1-2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이 시편은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를 항상 보호하시고 보전하시는 그 지속적인 도우심보다는 어떤 특별한 구원을 이유로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예루살렘 도성이 큰 무서움을 당하고 극도의 위험 중에 놓이게 되었을 때 모두의 예상과는 반대로 예기치 못했던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으로 보전되었던 사실로부터 증명될 수 있습니다.
이 시편을 지은이가 누구였든 시인은 하나님이 그처럼 특유한 방법으로 주신 구원을 찬양하면서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안심하고 자신을 맡길 것을 권합니다.
또 시인은 두려움을 갖기 않고 자신이 치르고 있는 전쟁 중에서 보살피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원수들에 의한 모든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중에 계속적인 보호를 받게 될 것을 의심하지 말 것도 권면합니다.
모든 소란을 진압시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가지신 그의 특별 직무이기 때문입니다.
1. 본문 표제는 “고라 자손의 시, 영장으로 알라못에 맞춘 노래(고라 자손이 시, 지휘자 에 따라 알라못에 맞춘 노래 - 칼빈)” 입니다.
성경 주석가들은 תומלע(알라못)이란 말의 의미에 관해 일치한 견해를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다른 견해들을 논하지 않고 그중에서 두 가지만 말하고자 합니다.
이 말은 어떤 악기를 의미하거나 평범하고 잘 알려진 노래의 시작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추측 가운데 두 번째의 것이 더 그럴 듯합니다.
이 시가 쓰여진 시기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 산헤립의 군대에 무섭고 가혹한 멸망을 내리심으로서 이 도성을 포위한 자들을 치셨을 때(왕하19:35) 쓰였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 외에 다른 분명한 점은 없습니다.
이 견해는 이 시의 전반적인 의도와 대단히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시에 나타내 주셨던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그 호의가 이 시편 가운데서 찬양되고 있다는 사실은 극히 명백합니다.
시 46 편
2. 본문 1-2절은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그에게서 엄청난(또는 최상의) 도움을 찾음이라 - 칼빈)
(2) 그러므로 당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그러므로 우리는 땅이 움직이고 산이 바다가운데 빠질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 칼빈)” 입니다.
이 말씀에서 시인은 특별히 구원에 관해 말하기 전에 일반적인 표현, 혹은 느낌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충분히 보호하실 수 있으며 그 백성이 그 보호를 기대할 만한 넉넉한 근거를 주시고 계신다고 전제하면서 이 시를 시작합니다.
이 내용을 הסחמ(마하세) 라는 말이 적절하게 의미해 줍니다.
1절 하반절에 있는 ‘찾는다’(칼빈)라는 동사를 우리는 현재 시제로 번역했는데 사실은 과거 시제인 ‘찾았다’로 되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이 과거로 번역한 것같이 이 말을 이미 경험한 어떤 특별한 구원에다 한정하더라도 불합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환난’이란 말을 복수로 쓰고 있으므로 어떤 고난이 자기 백성을 괴롭게 할 때마다 때에 맞추어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찾아오시고 우리가 궁핍을 느낄 때에 결코 부족하지 아니하신 분이라는 의미로 우리는 이 말을 계속적 행위로 설명합니다.
만일 시인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경험한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면 이 말을 과거로 번역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의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선하심을 찬양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얼마나 기꺼이 도움을 베푸는가를 설명하고자 함이 분명합니다.
이는 그들이 역경을 만날 때에 그들의 주위 사방을 살피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보호하심만으로 만족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교회를 보존하시고 보호하심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계심을 교회가 알 만큼 그들을 향해 일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으로 시인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과 다른 이방 민족 사이를 구별하고자 하며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심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신 양자의 특전을 찬양하려고 한다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가 앞에서 “일반적인 표현”이라고 한 말은 모든 사람들에 관련된 말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관련된 설명을 하려는 의도가 됩니다.
시인이 목표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 된 사람들을 향해 어떤 방법으로 일하시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시인은 신실한 자들이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시 46 편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을 구원하여 주실 준비를 갖추고 계실 뿐 아니라 그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능력으로 부장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서 시인은 우리의 소망에 대한 참되고 바른 증거란 다음 사실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온갖 일들이 심히 혼란하여 하늘이 크게 무너져 내리는 것 같고 땅이 제자리에서 옮기며 산들이 그 기초부터 갈라질지라도 우리는 마음 속에 고요와 평온을 계속적으로 가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절박한 위험을 당하고 있지 않는 한 마음 속에 큰 확신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만일 온 세상이 모두 파산지경에 있음에도 우리 마음이 계속 동요하지 않고 불안에서 떠나 있다면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에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하는 존귀를 드리고 있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나 이 거룩한 시인이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라고 말했을 때, 시인은 경건한 자들의 마음이 마치 감각을 잃은 것처럼 모든 근심이나 무서움으로부터 면제되었다고 알아서는 안 됩니다.
무감각과 믿음에 의한 신뢰는 크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단지 무슨 일이 생기든지 그들은 두려움으로 압도당하지 않으며 온갖 두려움을 가라앉히기에 넉넉한 힘과 용기를 가다듬게 되는 것을 설명합니다.
“땅이 움직이고 산이 바다 가운데 빠질지라도” 라는 말씀은 표현상 과장법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큰 변화와 온 세상의 전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다 가운데’라는 말씀이 ‘땅’을 가리키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설명을 옳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이 시편이 주는 교훈을 더 충분히 알기 위해 이어 기록된 말씀을 숙고합시다.
시 46 편
시46:3-5 바닷물이 흉용하고
박윤선 주석에서는 이 시편의 전반부를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① 시인은 무서운 것 중에서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피난처와 도움으로 여기는 때라 합니다(1-3).
② 시인은 비유적으로 잔잔한 시냇물이 주는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면서 그 기쁨은 하 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면서 도우시기 때문이라 합니다(4-5).
1. 본문 3-4절은 “(3)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그때 바닷물이 노호하고 격렬히 날뛰리라 또한 그 바닷 물의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 것이라 - 칼빈)
(4)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 쁘게 하도다(그 강의 시냇물들이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할 것이라(칼빈)” 입니다.
이 구절은 이어 기록된 말씀과 연결시켜 읽어야 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완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마치 ‘바다의 물이 노하고 부풀어 올라 그 사나운 맹렬함이 산들까지 흔들어놓는 무서운 소란 중에도 하나님의 거룩한 성은 그중에 작은 시내로 만족하고 계속 위로와 평안을 누리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관계 대명사 ‘그’(칼빈)는 히브리어 일반 용법에는 본문에 꼭 필요한 말이 아닙니다.
시인은 ‘온 세상이 요동하고 멸망되더라도 한 작은 시내가 그 온 성이 기뻐할 충만한 이유를 준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잠시 전에 우리는 이 말씀에 우리가 참으로 유익한 교훈을 얻고 있음을 말했습니다.
우리가 극히 심한 싸움을 해야 우리가 삼키기 위해 지옥까지도 입을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의 믿음은 실제로, 또 참으로 시험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믿음이 온 세상을 이기고 있다는 사실도 설명했습니다
혼란 가운데서도 믿음은 나타나서 그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비록 전 세계가 함께 결탁하여 신자들의 파멸을 꾀한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믿음은 모든 두려움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시 46 편
하나님의 자녀들이 위험을 당할 때 죽음을 비웃고 우습게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도움이 그들의 평가에 있어서 자기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모든 악보다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호레이스가 의인과 죄의식이 없는 사람에 관해 말할 때 그의 정취는 아름답습니다.
호레이스는 “Dux inquieti turbidus Adriæ,
Nec fulminantis magna Jovis manus,
Si fractus illabitur orbis,
Impavidum ferient ruinæ. ” (Car., Lib. iii., Od. 3)
“바다를 지배하는 난폭한 바람으로 맹렬하게,
모든 공포를 일으키게 하라;
죠브(Jove)의 무서운 팔이 천둥과 함께 창공을 찢게 하라;
세상의 소요 속에서 그는 대담하게 나타나도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호레이스가 상상하는 것과 같은 그런 사람을 찾아볼 수 없기에 그가 늘 그렇게 하듯이 실없는 소리를 하듯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용기는 오직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확신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를 신뢰하는 자들이 자기들은 낙심하게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타락된 세상의 황폐에서 무사하고 안전하게 보전될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성에는 노한 바다가 없고 그가 말한 그 파도를 막기 위한 온화하게 흐르는 시내만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성이 기뻐한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실로아에서 흘러 예루살렘 성을 통해 흐르는 그 시내를 암시합니다.
시인은 땅에서 얻는 도움으로 용기를 얻어 자기들은 보호를 잘 받고 있으며 모든 위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상상하는 자들의 헛된 자신감을 간접적으로 책망하고 있음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얻는 당해낼 수 없는 힘 있는 도움으로 자기들의 사방을 강하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마치 자기들의 사방에 바다가 둘려 있는 것처럼 자기들의 원수가 자기들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상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치 태풍이 섬을 덮쳐서 그 섬을 폐허로 만들고 파멸하는 것같이 그들이 세운 방벽이 스스로를 멸망시키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자들은 세상이 볼 때 그들이 갖가지 손상을 당하게 되어 있고 그들에게 임하는 공격을 충분히 격퇴할 수 없는 것 같으나 오히려 그들은 안전한 가운데 편히 쉬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사야는 유대인들을 책망합니다(사8:6).
시 46 편
그들은 고요하게 흐르는 실로아의 물을 멸시하고 깊고 세차게 흐르는 강을 동경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는 한편으로 작은 시내 실로아와 다른 한편으로 나일강 및 유브라데스강 사이에 훌륭한 대조가 있습니다.
마치 시인은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선택하셨을 때 그 성을 지키시고 보전하시기 위하여 힘과 방어에 있어서 필요한 것을 갖추어 놓으시지 않았다는 가치없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고 있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이 시가 산헤립의 군대가 죽임을 당하고 도망을 간 후에 쓰여졌다면 영감을 받은 시인은 세상의 도움과는 관계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그들에게 충분한 보호가 된다는 사실을 모든 세대에 가르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동일한 은유를 사용했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계속 우리를 권면하며 격려하여 확신을 갖도록 하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를 대적하여 오만스럽게 자기들을 자랑하는 자들의 모든 수단을 격멸함으로서 불안과 고통 가운데서도 평온을 보존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뻗쳐져 있는 한 우리들이 무방비 사애로 인하여 신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잔잔하게 흐르는 시내같이 은밀하고 온전하게 우리에게 임하고 있지만 이 도우심은 세상에 있는 모든 세력이 우리를 돕기 위해 함께 모이는 것보다 마음 속에 더욱 더 평온을 줍니다.
예루살렘을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로 말함에 있어서 시인은 당시 환경과 상태를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모든 지파에 대한 자기의 권세를 행사하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온 나라를 다스리시기 위한 임금의 처소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들은 유대의 모든 곳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장막들이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들이 함께 모아져 한 성소 안에 연합되어야만 했습니다.
2. 본문 5절은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입니다.
이제 이 시인은 교회가 크게 안전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교회 안에 계시는 사실에 있다는 의미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요동하다’ 라고 번역한 동사는 여성 동사입니다.
시 46 편
마치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요동치 아니하신 사실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처럼 그 동사가 가리켜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은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에 계시고 언제나 그 성을 도우시려 하시기에 그 성은 요동하거나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라고 설명되어져야 합니다.
‘새벽에’ 라는 말은 ‘매일’을 의미합니다.
또 “새벽”은 해가 떠오르는 직후의 시간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요약하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보호 받고자 할 경우에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 사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전을 원하는 모든 희망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 목적은 우리가 손상당하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소원을 가지고 끈질기게 재촉하는 대로 언제나 서둘러 우리를 도와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적합한 때에 맞추어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이는 성경 다른 구절에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121:4)라는 진리를 하나님께서 친히 분명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시 46 편
시46:6-11 이방이 훤화하며
본문은 떠드는 이방을 진정하신 하나님의 행적을 노래한 것입니다.
1. 본문 6절은 “이방이 훤화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 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항상 원수들이 있습니다. 이 원수들은 대단히 큰 힘을 가지고 있고 잔인하고 난폭한 분노로서 끊임없이 교회를 대적하여 싸우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지금 자기가 진술해 왔던 감히 이겨낼 수 없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호의 성격을 근거로 확증합니다.
그리하여 시인은 이 보호로부터 위안에 대한 일반적인 근거를 끌어내어 말합니다.
모든 소동을 억누르고 가라앉히는 일은 하나님께서 계속 하십니다.
하나님의 팔은 원수의 온갖 노력을 분쇄하는데 충분한 힘을 가지십니다.
이 말씀은 더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은 많은 폭풍과 태풍에 공격받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이 성은 언제나 안전하게 보전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시인은 어떤 유명한 구원에 관해 말한다고 생각해야 더 합당할 것입니다.
이 특별한 구원을 통해 하나님은 교회를 지속적으로 보존하시면서 베풀어 주시는 그 능력과 은총에 대한 두드러진 증거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전에 있었던 사실을 말합니다.
교회의 원수들이 교회의 황폐와 멸망을 위해 무서울 만큼 많은 떼를 이끌고 왔습니다. 그러나 즉시 하나님께서 “소리를 발하시매” 그 원수들은 ‘녹아서’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지극히 값진 위안의 근거를 얻습니다.
온 세상이 우리를 대적해 일어나 그들이 결심한 분노로 모든 일을 혼란케 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호의를 베풀고 계심을 보이시는 순간 그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 혹은 명령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이 말로 하나님의 약속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위한 보호와 방어가 되시겠다는 사실을 약속으로 선언하셨습니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음성과 이 세상에 속한 나라들이 가지고 있는 사나운 소란 사이에 보여지는 대조를 눈여겨봅시다.
시 46 편
2. 본문 7절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입니다.
이 구절은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에 관하여 여러 구절에서 말하는 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우리 소용에 적용시킬 수 있는지 교훈해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금까지 아버지의 사랑으로 감싸주셨고 앞으로도 소중히 여겨주실 자들의 수에 우리가 속해 있음을 믿을 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찬양의 어조로 이스라엘이 땅 위에 있는 모든 다른 나라들이 공동으로 가진 상태와는 구별되게 한 선택에 관해 다시 암시적으로 말합니다.
이 사실은 그렇다 해도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그 설명은 우리를 두렵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보존하시고 지켜 주시면서 그 능력을 보여주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자신에 찬 자랑스런 마음이 생깁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저자는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라고 부름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한 다음에 “야곱의 하나님”이란 또 하나의 별칭을 덧붙입니다.
이 별칭으로 시인은 옛날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 언약은 약속해 주신 은총을 갖게 된 그의 후손이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을 향해서도 호의적이신 사실을 의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참되고 확고하게 믿기 위해 하나님이 갖고 계신 이 두 가지 성격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자기 아래 굴복시키실 수 있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 안에서 설명해 주고 계시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될 때 우리를 대적해 일어나는 모든 원수들을 이겨내지 못하도록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약속하셨으므로 그 약속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능력에서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이기에 자기 약속을 충분히 성취하십니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관하여 성경 말씀의 모든 말씀을 온전히 적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아버지가 되어주실 것을 확실히 믿지 못하는 자들은 성경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 엄청나게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양무리이며 아들로 삼으신 자들 중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시 46 편
3. 본문 8-9절은 “(8)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9)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 다” 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 교회를 가장 능률적이고 성실하게 보호하시는 분이심을 충분한 증거로 보여주셨던 그 구원의 내력을 이 구절에서도 계속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경건한 자들이 차후에 어떤 시험에 부딪쳐도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이 증거로부터 얻게 할 목적이었습니다.
우리를 보전하심에서 우리에게 나타내주신 은혜를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확실성을 우리 마음에 확고히 다짐하는 한 수단으로 우리 눈앞에 항상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 권면의 말씀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무관심과 어리석음을 말없이 책망합니다.
오히려 온 세상은 은혜를 배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충분한 도우심과 안전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백명 중에 한명도 있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전혀 소경이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자기들의 믿음을 강하게 해줄 최상의 수단이 될 만한 것들을 향하여 고의적으로 눈을 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섭리로 인정해야 될 사실들을 운명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자기에게 내려주신 것을 자기가 열심히 일해 얻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을 다른 데에서 나온 것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모든 감각을 잃어버린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자는 하나님의 일을 깊이 생각하도록 모든 사람에게 부탁하고 권면합니다.
시인은 마치 ‘사람들이 자기들의 복과 이익에 대한 희망을 하나님께 두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생각하지 않거나 감사할 줄 모르기에 그 일들을 그들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만큼의 절반도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 않다’ 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시인은 모든 사람을 향해 전반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경건한 자들까지도 각성하기 전에는 이 점에 둔하거나 무관심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 택하신 백성을 보전하심에서 나타내신 능력을 높게 찬양합니다.
이 능력이 일반 방법으로 나타나면 이는 보통 무시되고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만큼 중요하게 평가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많은 나라가 황폐된 것과 놀라운 힘에 의한 참화와 다른 기적적인 사실들을 제시합니다.
시 46 편
이와 같은 것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힘 있게 움직입니다.
이어 기록된 “저가 ....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라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어떤 특별한 도우심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믿는 자들이 전에 도우심을 경험한 만큼 장래에도 도와주실 것을 기대하도록 유도하려는 의도라는 사실을 간주해야 됩니다.
시인은 한 가지 특별한 경우를 들어 하나님이 자기 교회를 얼마나 능력 있게 보호하시는가를 전반적으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온갖 위태로운 소란을 유대 땅 모든 곳에서 진압시키신 일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그들의 원수들에게서 용기를 빼앗고 그들의 활을 꺾으시며 병거를 불태우시고 그 땅으로부터 전쟁을 제하여 몰아내셨습니다.
시인은 한 가지 특별한 실례를 들어 유대인들로 하나님이 그 원수들의 큰 노력을 얼마나 자주 실패하게 하셨는지를 회상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이 말씀 가운데 하나님을 여러 모습으로 표현한 것은 우리가 온 세상이 소동하고 무섭게 요동하고 있을 때에라도 하나님께 평안을 갈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4. 본문 10-11절은 “(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11)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입니다.
이제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악을 행하고 또 보복하려는 정욕에 빠져 있는 그 백성의 원수들에게로 이야기의 방향을 돌리는 것 같습니다.
이 원수들은 성도들에게 손상을 주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대항해 싸움을 걸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단지 사람들과만 상관하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성도들을 주제넘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그들의 오만을 제지시킵니다.
자기가 하는 말이 더욱 무게를 갖게 하려고 시인은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말씀하신다고 말합니다.
첫째로 시인은 그들이 ‘그가 하나님 되심을 알기 위해 잠잠할 것’을 명합니다.
시 46 편
우리는 사람들이 주의 깊게 행동하지 못할 때 모든 한계와 분량을 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교회의 원수들이 가만히 있으면서 잠잠할 것을 바르게 요청합니다.
이는 그들이 품고 있는 분노가 가라앉을 때 자기들이 하나님을 대항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시편 4편 4절에서 이 말씀과 비슷한 감상을 읽을 수 있습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시인은 세상이 그들의 소란한 감정을 억누르고 제지시켜 마땅히 받으셔야 하는 그 영광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드릴 것을 권합니다.
또 그들을 향해 ‘만일 그들이 계속 미친 사람들같이 행동하면 하나님의 권세는 유대 땅과 같은 좁은 곳 안에 갇혀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어느 땅에서나 자기를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 이방사람들과 다른 신앙을 가진 나라들을 향해 그 손을 드신다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경고합니다.
결론으로 시인은 앞서 말한 것을 반복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자기의 아들과 말씀으로 택하신 자기 교회를 보존하고 지키시기 위해 충분한 무기와 힘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시47:1-4 너희 만민들아
어떤 이들은 이 시가 성전이 봉헌되고 언약궤가 성소에 놓일 때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그 근거가 충분하지 않은 하나의 추측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못 알지 않는 한, 이 생각을 옳다고 여기는 것보다 본 시의 주제와 그 주제가 특별하게 적용되는 그 용도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시의 전반적인 경향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이 시는 그 거룩한 모임을 위해 정해진 것이었습니다.
아마 다윗이 이를 지었을 것이며 성전이 지어지기 전 언약궤가 아직 성막에 있었을 때 레위인들이 노래하도록 그들에게 맡겨졌을 것입니다.
이 시를 지은 자가 누구였든 간에 시인은 이스라엘 사람뿐 아니라 모든 민족을 향해 참되신 하나님 한분을 섬기도록 권합니다.
이 시는 당시의 상황에 따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은혜롭게 내려주신 그 은총과 온 세상이 그 근원으로부터 얻게 될 구원을 주로 찬양합니다.
이 시는 장차 있게 될 그리스도의 나라에 관한 예언도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이 시는 왕들과 민족들이 아브라함의 후손들과 연합하여 서로 교제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은혜의 빛을 먼 나라로 비치게 하실 때 당시의 물질로 만들어져 있는 성소의 모습으로부터 빛나고 있는 영광이 그 찬란한 빛을 멀리, 넓게 비치게 될 것을 교훈합니다.
고라 자손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1. 본문 1-2절은 “(1)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2)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 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감사 표시로 손뼉을 치라고 모든 민족에게 요청합니다.
오히려 시인은 놀라운 기쁨 때문에 외부로 표현되고 터져 나오는 열정을 권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주신 구원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중에 어떤 만만치 않은 나라를 세우셨다면 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노래하고 기뻐 뛸 만한 조건을 주심보다는 그들이 용기를 잃게 하고 그들을 낙심시키는 결과가 되었을 것입니다.
시 47 편
그 뿐 아니라 이 영감을 받은 작가는 이 말씀 중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복을 논하고 있지 않으며 온 세상을 설명할 수 없는 기쁨으로 채우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불러일으킬 만한 복을 논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잠시 후에 덧붙인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에게 굴복하게 되었다는 말씀은 노예적인 굴복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보다 더욱 훌륭하고 더욱 바랄만한 어떤 굴복이라고 이해해야 됩니다.
횡포와 위협에 의해 굴복되고 복종하여 기쁨으로 뛴다면 이는 거북스러운 노릇입니다.
많은 나라들이 다윗에게 조공을 바치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게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평을 그치지 않았으며 자기들에게 얹힌 멍에를 억지로 참았습니다.
하나님께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감사를 드린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전에 반역하던 자들을 자기 아들 그리스도의 기치와 권세 아래로 데리고 오셔서 복종하게 하시는 것 외에 그 어떤 노예적 신분도 기쁘거나 바람직한 것이 못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2절의 “지존하시고 엄위하신 임금” 그리스도의 나라에만 적용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가련한 자들을 자기 마음대로 포악과 강포로 떨게 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전에 멸시를 당했던 그의 위엄이 온 세상의 반역을 가라앉히는데 넉넉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 가운데서 성령께서 교훈하고자 하는 의도를 눈여겨 보아야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무참하게 취급당했고 그릇되게 억압당했으며 여러 재난으로 시시각각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나라가 사방에 있는 이웃 나라들을 굴복시키고 그처럼 높은 영광을 얻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관대하심은 지금 그만큼 더욱 분명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으로 불려졌을 때, 이 예언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적용된다고 한 말의 진실성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까지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을 강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는 이러한 칭호들로 기념되고 있었음에 의심이 없습니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의기에 찬 상태는 희미해졌을 뿐 아니라 그 백성은 가장 혹심하고 무참하게 압제를 당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맛보지 못하고 그 은혜에 의한 위안을 받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해주신 약속만을 의지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옛 백성들이 속하고 있었던 그 나라의 장려함이 오랫동안 중단되고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 기간은 솔로몬이 죽은 뒤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시 47 편
이 간격은 넘을 수 없는 큰 간격, 혹은 깊은 구렁을 만들었습니다.
만일 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축되지 않고 세움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이 간격과 구렁에 영영 빠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이 시가 찬양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형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잠시 후 다윗 왕국의 영광은 슬프고 거의 부끄러울 정도까지 약해져 버렸습니다.
이윽고 다윗 왕국은 가장 슬픈 재난을 겪었고 마침내는 포로로 잡혀가고 완전한 멸망이나 다를 바가 없는 가장 비참한 민족적인 분산이 있었습니다.
그럴지라도 성령께서는 약속되신 구원자가 나타나시기까지 믿는 자들이 기쁨으로 손뼉을 치라고 격려하셨습니다.
2. 본문 3절은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열방을 우리 발 아래 복종케 하시며(여호 와께서 민족을 우리 밑에 질서 있게 두셨으며 - 칼빈)”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문장의 동사를 ‘그가 복종케 하시며’ 라고 번역합니다.
‘그가 인도하시며’ 라고 번역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그 본래의 의미에서 멉니다.
그렇다고 이 동사 דבדי(야데베르)를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같이 ‘멸망시키다’라고 이해하면 이는 이 시인의 생각과는 일치하지 않은 해석이 됩니다.
본문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유익하고 즐겁고 바랄만한 복종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로 이 동사는 ‘그가 질서 있게 두실 것이다’라는 미래 시제입니다.
동사 시제 문제를 보류시키려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윗의 나라를 내세워 앞으로 임하게 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기에 우리는 다른 주석가들에 의한 번역을 기꺼이 택합니다.
또 이 구절에서 이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자기들이 주변의 여러 민족을 다스리게 되었으므로 자기 나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할 것을 특별하게 권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인은 복종케 된 그들이 이 기쁨 속에서 유대인들과 연합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옛적에 이방 나라들이 다윗을 영화롭게 하면서 나타낸 그 가식적인 기쁨은 전 세계의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면서 갖는 기쁨과 다른 것같이 이 연합체는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면서 갖는 기쁨은 스스로 순종하는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법궤가 성전에 옮겨진 이후에 그것의 실상이 되는 훨씬 귀한 어떤 것이 그 법궤에 숨어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그 궤 안에 계시는 것으로 보고 그와 같이 좁은 한계 속에 하나님을 가두어둔다는 것은 유치한 기쁨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시 47 편
그러나 성막 안에 임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위엄이 온 세계를 향해 나타나고 모든 나라가 그 권세 아래 복종했을 때,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가졌던 특권은 두드러지게 보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이 굴복하고 그들이 택한 백성에게 복종하기를 거절하지 않게 될 것을 이 시인이 선언했을 때 시인은 자기가 전에 말했던 그 나라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인이 이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전 세계를 다스리시는 그 비밀한 섭리를 논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 말씀을 통해 행사하시는 그 특별한 능력을 논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왕으로 합당하게 불려지기 위해 그의 백성은 필연적으로 그를 그런 분으로 인정해야 됩니다. 그러나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유일하신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 위에 뛰어나게 서시고 모든 믿는 자들이 큰 자로부터 작은 자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지체의 겸비한 위치에 서지 않으면 교회의 질서가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할 만큼 바르게 확립될 수 없음을 우리가 알고 있기에 어떤 의미에서 만민이 유대인들에게 굴복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자기의 권세와 하늘의 능력 아래로 이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 뿐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전 세계에 자기의 나라를 세우셨을 때 전에는 한 백성에게 주어진 특권이었던 ‘아들 삼으심’이 만민에게 공통된 특권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모든 사람에게 자유가 주어졌으며 참된 형제애의 결속에 의하여 서로 연합하게 됨으로서 그들은 하늘의 유업을 동경하게 되었습니다.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쉽습니다.
이방인들도 율법의 멍에 아래 있었을 때 유대인들은 그들에 대한 지배권을 얻었습니다
이는 교회의 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의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여왕으로와 모든 경건한 자들의 어머니로 호칭됩니다(갈4:26).
우리 모두를 굴복시키는 홀과 같은 신성한 진리는 교회에 위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밝히 드러났을 때 유대인들은 이방나라들 밑에서 비참하고 명예롭지 못한 복종을 해야 하는 상태에 있었고 그들의 노예들이 되어 있었지만 지배권은 진실로 정당하게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시온에서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고”(시110:2) 그들이 율법을 맡았기에 그들의 직임은 그 율법의 권세로 이방인들을 억제하고 굴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 외에 세계의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 순복하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 스스로 유순하고 온순하게 유대인들에게 굴복하고 그들의 다스림 아래 있는 것입니다.
시 47 편
이는 다른 구절에서 “그 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슥8:23)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3. 4절은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 입니다.
이 영감을 받은 시인은 이 말씀 중에 하나님이 선하심 안에서 선택된 아브라함의 거룩한 씨에게 내리신 그 특별한 은혜를 더욱 명백하게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그들 외에 세계의 모든 민족을 택하지 아니하시고 수적으로 적고 무시 받을 만한 한 백성을 자녀로 택하셨다면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그 명백한 서약이 모든 인류에게 차별 없이 임한 그가 베푸시는 일반적인 은혜와는 달라야 함은 당연했습니다.
그러므로 ‘택하시나니’라는 말은 특이하게 강조적 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다른 민족들을 아무렇게나 다스리셨던 것같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그렇게 다스리시지 않고 상속권을 주심으로서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게 될 특별한 위엄을 그들에게 내려주셨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와 동일한 내용은 ‘영화’라는 말로 곧이어 표명됩니다.
이 시인은 그들이 하나님을 향해 감사해야 함을 명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자기들의 상태는 다른 모든민족과 다름을 자랑하게 하기 위해 야곱이라는 사람을 통해 자기가 택하신 백성을 가장 높은 존귀의 수준에까지 높여주셨습니다
시인은 이 은혜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또 아무 공로가 없음에도 주시는 그의 은혜라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이 문장에 쓰인 관계 대명사(whom ; ‘곧’에 해당)는 마치 이 시인은 유대인들이 뛰어나게 된 이 특권이 하나님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유의 불변화사 ‘그 이유는’, 혹은 ‘왜냐하면’ 이라는 말 대신 쓰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들을 사랑하셨기에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그 은총을 찬양할 때는 사람이 가진 모든 공덕은 무효라는 원칙을 언제나 명심해 두어야 합니다.
거룩한 족장들의 탁월함과 자랑이 순전히, 단순하게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의존되었다면 누가 어떤 것을 독특하게 자기 자신에 의한 것이라고 감히 자랑할 수 있겠는가?
만일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이 얻지 못하는 어떤 것을 특전으로 우리에게 주셨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양으로 택하셨으므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아버지로서의 사랑에 의한 것으로 인정하기를 배우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으로부터 또 하나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가 택하신 자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중에서 소수를 구분시키는 특전입니다.
시 47 편
시47:5-9 하나님이 즐거이
시인은 이 시편에서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업을 완성하시고 승천하실 사실을 내다봅니다
1. 본문 5-6절은 “(5) 하나님이 즐거이 부르는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6)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찬양하라 우리 왕을 찬양하라” 입니다.
이 말씀에는 그들이 율법 아래서 지키고 있던 옛 의식에 대한 암시가 있습니다.
거룩한 총회를 신성하게 하는데 나팔소리가 사용되었던 것같이 시인은 나팔소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크다고 말하고 찬양하도록 사람들을 고무하고 격려할 때 하나님께서 ‘올라가신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옛적에 이 의식이 시행되었을 때는 왕이 자기 백성 사이에 들어가면서 그들의 칭찬과 존경을 얻는 장려한 차림과 큰 호사로움을 보이는 것과 같았었습니다.
이 신성한 작가는 이 그림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의식으로 우리가 더욱 의기양양한 또 하나의 ‘올라감’을 생각하게 하고 있음에 의심이 없습니다.
그 ‘올라감’이란 그리스도께서 올라가심입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엡4:10) 분이시며 하늘의 권능으로 무장하시고 모든 교만과 높아진 것들을 정복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여호와’ 라는 이름이 법궤에 적용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본질과 위엄이 그 궤 안에 갇혀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이 그 궤에 고정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궤는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헛되고 허탄한 상징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 자신이 친히 율법 안에 정해 놓으신 규범을 좇아 자기를 섬기기만 하면 그 백성 중에 계시겠다는 사실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그들과 진실로 함께 하심과 그들이 자기를 찾는 것이 헛되지 않음을 실제로 증거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진술하는 사실은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빛나게 될 그 영광에 더욱 잘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 시인이 하는 말의 의미는 율법에 정해져 있는 대로 유대인들 중에 나팔이 울리면 이 소리는 공중에 사라져 없어지는 아무 의미가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시 47 편
언약궤가 자기의 임재에 대한 약속과 표가 되도록 하셨던 하나님께서 진실로 그 총회를 다스리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로부터 시인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의무를 강력히 주장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 미신을 믿는 사람들처럼 맹목적이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미신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앙에 대한 그릇된 방식에 대한 확신도 없이 자기들의 우상 앞에서 헛되이 통곡하며 고함을 칩니다.
시인은 신실한 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서 그들의 입과 즐거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바른 근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자기 보좌를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세우신 것처럼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신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본문 7절은 “하나님은 온 땅에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양할지어다” 입니다.
시인은 앞 절 마지막에서 하나님을 택하신 백성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지금은 시인이 하나님을 “온 땅에 왕”이라고 부릅니다.
시인은 유대인들이 장자로서 권리와 영예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들과 같은 복에 함께 참여한 자들로서 이방인들을 그 유대인들에게 연합시킵니다.
이렇게 말함으로 시인은 하나님의 나라가 메시아께서 오실 때는 율법 아래서 그림자와 같은 그 시대보다 더욱 장려하고 영광스러울 것을 넌지시 말합니다.
그 나라는 그 경계가 땅 끝까지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자기가 하고 있는 권면이 더욱 진지함을 보이기 위해 ‘찬양할지어다’라는 말을 다섯 번이나 반복합니다.
ליכשמ(마스길)이란 말은 복수 대신 단수로 쓰였습니다. 시인이 노래에 능숙한 모든 자들을 이 ‘찬양’에 초대하는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음악의 기교의 지식에 관해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시인은 하나님 예배에 지식을 갖추어 찬양할 것을 요망합니다.
이는 교황과 그를 섬기는 사람들처럼 혀 놀리는 소리만 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공중에서 사라지고 흩어져버리는 목소리만이 있게 될 경우에 분명히 하나님의 이름은 모독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시 47 편
3. 본문 8절은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민족을 우리 밑에 열방을 우리 발 아래 두셨으며 - 칼빈)” 입니다.
‘하나님이 이방인들 위에 왕국을 가지심이여’ (칼빈) ,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그가 .....다스리시며’ 입니다.
그러나 ךלמ(말라크)라는 동사가 과거 시제로 쓰였고 히브리어에서 계속적 행위를 의미하기에 우리는 이 말을 ‘그가 ......나라를 가지고 계시며’ 라고 번역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다스리고 계심을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알려줍니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시인이 여기서 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다스림의 모습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나라, 혹은 왕국을 유대의 경계 안에 제한하셨던 율법의 시대와 그리스도께서 그 나라를 멀리 그리고 넓게 확장시켜 땅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점령하셨던 그리스도의 강림 사이에 암시된 대조가 있습니다.
다윗이 열방을 조공 드리는 자들로 만들었을 때 하나님의 위엄에 의해 열방 중에는 그 위엄의 광채가 빛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 중에 다스렸다고 옳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참 신앙을 무시할 뿐 아니라 교회가 온전히 소멸되어 버리는 것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리스도를 살펴야 합니다 하반절에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는 말씀은 두 가지로 이해됩니다.
이와 같은 표현은 ‘성막’ 또는 ‘성전’을 의미하고 있다고 이해될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하늘’을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이 말이 ‘성전’을 가리키고 있다고 설명하려 한다면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열방을 자기 지배 아래 두셨을 때 하나님은 자신의 주요한 자리를 예루살렘에 두셨으며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을 자기의 지배 하에 두셨던 그 복음의 가르침은 바로 이곳으로부터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이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고 인정해야 매우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굴복시키고 그들을 자기 권세 아래 복종시킴에 하늘 보좌로부터 그들을 다스리고 계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능력과 명백하고 가까이 보이는 표적에 의한 역사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배자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시 47 편
4. 본문 9절은 “열방의 방백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여호와의 것임이여 저는 지존하시도다” 입니다.
시인은 여러 표현으로 앞 문장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고 그 내용을 확대시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까지 다스리게 되신 그 방법이 전에는 관계가 없던 자들이 동일한 믿음에 의한 양자됨으로 유대인들과 연합되었으며 유대인들과는 다른 민족들이 불행한 흩어진 상태로부터 한 몸으로 모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선언합니다.
복음의 교훈이 나타나고 명백해졌을 때 이 교훈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유대인들과 맺으셨던 그 언약으로부터 그들을 이탈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이 복음의 교리는 이방인이었던 우리를 유대인들에게 연합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의 부르심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가족에 접붙인 바가 되고 편입되게 하는 방편이었으므로 이 시인은 사방으로부터 나그네들, 혹은 유대인들과는 관계가 없던 자들이 선택된 백성에게로 ‘모임’은 그와 같은 수적인 증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의 모든 곳에까지 확장되기 위함이라고 바르게 말합니다.
이러한 이유를 근거로 이방인들이 영원한 유업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해 유대인들과 한 몸을 이루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엡3:6).
모세에 의한 법의 의식들이 철폐됨으로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구별하는 “중간에 막힌 담”(엡2:14)은 이제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의 혈통에 접붙인 바 되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시인은 일반 사람들에 관해서만 말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왕들도 유대인들과 함께 함이 최상의 복으로 여기게 될 것을 말해 줍니다.
이 사실은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나니”(시87:5)라는 다른 구절에서 하신 말씀에서 알아보게 될 사실과 같습니다.
이 ‘모임’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에게로의 모임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육신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것을 갖고 있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유대인들이 가진 우월함이란 그들 중에 하나님께 드리는 순수한 예배가 성행되고 있었고 그들이 하늘로부터 받은 교훈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의존되고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불신앙으로 교회로부터 끊어져 나간 사생아, 혹은 버림당한 유대인들에 관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롬11:16)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들도 거룩하므로 떨어져 나온 적은 수의 사람들 때문에 이 존귀가 남아 있는 그들 대부분의 사람에게 속하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 47 편
그러므로 이사야의 예언 중에 진술같이 온 세상에 넘치는 공의로 ‘훼멸’(毁滅)이 작정되었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믿던 하나님의 백성에 관한 것입니다(사10:22,23).
이 말씀은 극히 중요하고 교훈적인 두 가지 진리를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은 자는 경건한 모든 자들과 연합을 유지하기 위해 교회 안에서 한 자리를 얻고 그 교회에 자신을 가담시키려고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교회의 연합을 말할 경우에 오직 한 우리와 한 목자가 있게 하기 위해 교회의 연합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가식이 없는 일치된 마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간주해야 됩니다.
그 뿐 아니라 명예와 재물에 있어서 이 세상에서 높아진 자들은 모든 자만을 버리고 자신은 교회에 속한 순종하는 자녀인 사실을 보이기 위해 자진하여 유순하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멍에를 메라고 이 말씀은 권면합니다.
바로 뒤에 나오는 “세상의 모든 방패는 여호와의 것”이란 말씀을 많은 사람들은 군주들에 관한 말씀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은유가 성경 말씀 중에 자주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의미가 이 말씀의 의도에 적합한 사실도 인정합니다.
이 시인은 마치 하나님은 그들도 다스리고 계시므로 언제나 자기가 원하시기만 하면 세상의 훌륭한 자들을 자기 교회에 합치시키는 권세를 갖고 계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을 이렇게 설명하면 그 의미는 한층 더 단순해집니다.
세상을 지키고 보전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보전하는 일과 같은 극히 찬양할 만하고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는 그 높고 절대적인 위엄을 우리는 찬탄의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신성한 작가는 ‘방패’라는 말을 분명히 복수로 사용합니다.
세상의 모든 분야에서 끊임없는 위협을 가해 오는 거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잡다한 위험들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돌보심은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개입되어야 하고 수많은 방패들처럼 활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