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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벽(主壁): 주인 주(主), 벽 벽(壁)
사당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자리에 모신 인물
승원(陞院): 오를 승(陞), 집 원(院)
서당이나 사우를 공식적인 서원으로 승격함
따라서 최근 연구를 따르면, 근암서원은 처음부터 이덕형을 모신 것이 아니라 홍언충을 모신 향현사에 이덕형을 추가로 배향하면서 정식 서원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이병훈, 「16~18세기 문경 근암서원의 변천」
2. 첫 번째 이유: 임진왜란을 극복한 국가적 공적
이덕형은 임진왜란 당시 나라의 존망을 책임진 핵심 관료였습니다.
선조를 평양과 의주 방면으로 호종함
명나라에 파견되어 원군 파병을 요청함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접반관으로 활동함
명군과 조선 조정 사이의 갈등을 조정함
정유재란 때 명군을 따라 울산까지 내려감
전쟁 후 민심을 수습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함
경상·전라·충청·강원 4도의 체찰사를 맡음
체찰사(體察使)는 전시나 국가 비상시기에 여러 도의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던 특별직입니다.
체찰(體察): 몸 체(體), 살필 찰(察)
속뜻: 현장을 직접 살펴 군사와 행정을 총괄함
문경은 조령을 끼고 있는 영남 교통·군사상의 관문이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문경 유림이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고 국난극복의 인물을 숭모하는 과정에서, 이덕형의 체찰사 활동과 임진왜란 공적은 중요한 평가 근거가 되었을 것입니다.
다만 이덕형이 문경에서 장기간 거주하거나 문경 수령을 지냈다는 근거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체찰사로서 영남 지역과 관계가 있었지만, 이것만을 직접적인 배향 이유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3. 두 번째 이유: 당파를 넘어선 공정한 정치
이덕형은 동인·남인계 인맥과 가까웠지만 당론에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의 장인은 북인의 중심인물 이산해였습니다. 그러나 이덕형은 장인의 당파에 휩쓸리지 않았고, 국가의 안위와 백성의 삶을 정치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광해군일기』의 이덕형 졸기에는 다음과 같은 평가가 나옵니다.
그는 당론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부드러우면서도 능히 곧았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고 애석해했다.
문경 유림은 이덕형을 단순한 고위 관료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인물로 받아들였습니다.
당파보다 나라를 앞세운 신하
외교와 국방 능력을 갖춘 재상
부드러우면서도 원칙을 지킨 정치가
국가적 위기에서 몸을 아끼지 않은 충신
후대의 용주 조경은 이덕형을 두고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한음은 나라가 있는 줄만 알았지, 자기 몸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이것이 근암서원이 이덕형에게서 본 가장 중요한 선비정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세 번째 이유: 영창대군·인목대비 문제에서 보인 충절
광해군대 북인 정권은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폐위하려 했습니다. 이덕형은 이항복 등과 함께 이러한 조치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왕권에 무조건 복종한 신하가 아니었습니다. 군주가 유교적 윤리와 명분을 어길 때에는 재상으로서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관직에서 물러나 양근의 시골집에서 지내다가 1613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점은 조선 후기 유림에게 다음과 같은 충절의 모범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권력에 아첨하지 않음
잘못된 왕명에 반대함
어린 왕자와 대비를 보호하려 함
관직보다 의리와 명분을 선택함
문경 근암서원의 사당 이름은 경현사(景賢祠)입니다.
경현(景賢): 우러를 경(景), 어질 현(賢)
속뜻: 어진 선현을 우러러보고 본받음
이덕형은 문경 유생들이 배워야 할 충의와 공정함의 표본으로 선택된 것입니다.
5. 네 번째 이유: 영남 유학자들과의 교유
이덕형은 영남의 동인·남인계 인사들과 폭넓게 교유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다음 인물들과 연결됩니다.
서애 류성룡
우복 정경세
사담 김홍민
영남 지역의 동인계·퇴계학파 인사들
특히 김홍민은 문경·상주권 유림과 밀접한 인물이며, 1693년 홍여하와 함께 근암서원에 추가 배향되었습니다.
이덕형은 특정 당파에 예속되지는 않았지만, 류성룡·정경세·김홍민 등 영남 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영남 사림사회에 좋은 평판을 남겼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소개한 연구서도 이덕형의 교유관계를 “영남권 동인계, 류성룡·김홍민·정경세 등 서애학파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음 이덕형의 학문과 사상』 목차
따라서 이덕형의 근암서원 배향은 아무 연고 없는 중앙관료를 모신 것이 아니라, 영남 사림과 학문적·정치적·인적 관계를 맺었던 명망 높은 재상을 지역 유림이 추숭한 것입니다.
6. 다섯 번째 이유: 근암서원을 정식 서원으로 승격하기 위해서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1665년 처음 세운 사당에는 문경 출신 우암 홍언충이 모셔졌습니다. 홍언충은 지역의 훌륭한 선비였지만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근암의 사우를 정식 서원으로 승격하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이 유리했습니다.
전국적인 명망을 갖춘 인물
국가적 공적이 뚜렷한 인물
학문과 덕행이 널리 인정된 인물
예조의 승인을 얻을 수 있는 인물
이덕형은 영의정을 지냈고 임진왜란 극복에 큰 공을 세운 국가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를 중심 위패인 주벽으로 모시면 근암의 사우가 단순한 지역 사당을 넘어 공식적인 서원으로 인정받을 명분이 강해졌습니다.
실제로 최근 연구는 1669년 이덕형을 함께 모신 뒤 근암서원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를 간단히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flowchart TD A["근암서당·지역 강학소"] --> B["1665년 홍언충 제향"] B --> C["향현사 설립"] C --> D["1669년 이덕형을 주벽으로 봉안"] D --> E["예조 승인"] E --> F["근암서원으로 승격"]
따라서 이덕형 배향에는 두 가지 목적이 함께 있었습니다.
이덕형의 학문·덕행·충절을 추모하는 제향 목적
지역 사우를 권위 있는 서원으로 승격하려는 제도적 목적
7. 활재 이구와 목재 홍여하의 추숭 활동
앞서 살펴본 활재 이구는 1653년경 문경 출신 우암 홍언충을 모실 사당 건립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상주목사에게 정문(呈文)을 올려 관의 허가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이구는 1654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서원이 완성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후 지역 유림과 목재 홍여하 등이 사업을 계승했습니다.
후대 연구에서는 이구와 홍여하가 이덕형의 학문과 공적을 높이고 근암서원에서 추숭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이는 근암서원의 배향 인물이 우연하게 모인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정신적 연결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홍언충: 문경의 절의 있는 선비
이덕형: 국난을 극복하고 당파를 초월한 재상
김홍민·홍여하: 영남의 학문과 현실정치를 고민한 유학자
이구: 병자호란 후 의리와 도학을 지킨 학자
이만부·권상일: 영남남인 학문을 계승한 후학
8. ‘문경 연고’보다 ‘문경 유림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한음 이덕형은 문경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문경에 은거하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덕형이 문경과 직접적인 생활 연고가 있어서 배향되었다”는 설명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정확한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덕형은 문경 출신은 아니었지만, 임진왜란 때 국난을 극복한 공적과 당파를 초월한 정치, 광해군대의 충절, 영남 유학자들과의 교유로 문경 유림의 존경을 받았다. 문경 유림은 그를 근암사우의 주벽으로 모셔 학문과 덕행을 본받게 했으며, 동시에 근암사우를 정식 서원으로 승격시킬 권위와 명분을 확보했다.
9. 결론
한음 이덕형이 근암서원에 배향된 것은 지역 연고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배경에는 세 겹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국가적 기억입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외교와 군사 행정을 통해 나라를 구했습니다.
둘째는 도덕적 기억입니다. 그는 당파와 권력보다 국가와 의리를 앞세웠고, 영창대군 처형과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했습니다.
셋째는 지역 유림의 현실적 선택입니다. 문경 유림은 전국적 명망을 가진 이덕형을 주벽으로 모심으로써 근암의 향현사를 권위 있는 서원으로 성장시켰습니다.
요점 정리
이덕형은 문경 출신이 아니며, 문경에 장기간 거주한 인물도 아닙니다.
임진왜란 극복 공적, 당파를 초월한 정치, 광해군대의 충절 때문에 문경 유림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류성룡·정경세·김홍민 등 영남 유학자들과 교유한 인적 관계도 배향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1665년에는 홍언충을 모신 향현사가 세워졌고, 1669년 이덕형을 주벽으로 봉안하면서 근암서원으로 승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덕형의 배향은 선현 추모와 서원 승격이라는 두 목적이 결합한 결과라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