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어려움을 들어 경전의 유통을 권하다 2가령 겁화(劫火)가 활활 탈 때
마른 풀을 등에 지고 불 속에 들어가도
타지 아니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내가 열반한 뒤에 이 법화경을 지니고 한 사람에게라도 말하기는
이것이 가장 어려우니라.
겁화라고 하는 것도 육조단경에 나오지만
성·주·괴·공, 성립되는 과정과 그대로 머물러있는 과정과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는 과정과 그다음에 완전히 부서져서
공으로 돌아가는 그런 과정, 그렇게 4기(四期)로 나누죠.
과학적으로 거의 증명되다시피 했는데
45억년전인가요? 지구가 비로소 성립되기 시작했죠.
작은 먼지들의 충돌과 폭발의 반복,
밀어내고 당기고 밀어내고 당기는 과정을 거쳐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별들이
수시로 만들어지고 멈추어 있고 서서히 파괴 되어가고
어느 기간이 지나면 완전히 분해해서 없어져 가는 것.
이건 지금 천문학에서 다 알고 있는 일 아닙니까?
이 지구가 그런 괴·공,
공의 겁에 도달했을 때 불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맞는 이야기 같애요.
지금 천문학에서 살펴보면 수많은 별들 중에서
어느 별이 소멸하느라 최후의 빛을 발하는 것들이 관측되고 있지 않습니까.
불교에서 일찍이 '지구가 소멸할 때 겁의 불이 일어난다.' 그랬어요.
불 중에 제일 큰 불이라는 거죠.
그래서 육조단경에는 '겁화소해저(劫火燒海底)' 라는 말이 있어요.
지구가 마지막 분해될 때 일어나는 그 겁의 불길이
바다 밑을 태운다는 말이 있어요.
바다인들 남아있겠습니까.
바다까지 다 타고 마는거죠.
‘겁화소해저(劫火燒海底)하고 풍고산상격(風鼓山相擊)이라도
無相寂滅樂(무상적멸락)은 열반상여시(涅槃相如是)라.’
정말 고요한 그 마음자리는 처음부터 조금도 동요함 없이 늘 이러하다' 는
육조스님의 멋진 법문이 있지요.
'겁화소해저 하고 풍고산상격 이라도 무상적별락은 열반상여시니라.'
무상적별의 경지는 지구가 다 깨지고 바다까지 다 타더라도
거기에는 아무 상관없는 그런 여여한 자리가 있다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여기에도 '가령 겁화(劫火)가 활활 탈 때
마른 풀을 등에 지고 불 속에 들어가도 타지 않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이건 안 되는 일이죠.
바닷물이 다 타는데 마른 풀을 등에 지고 들어가서 안타기가 그게 쉬운 일입니까.
그러나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거요.
"내가 열반한 뒤에 이 법화경을 지니고 한 사람에게라도 말하기는
이것이 가장 어려우니라."
어떤 사람이 팔만 사천 많은 법장(法藏)과 십이부경(十二部經) 모두 지녀
사람들에게 널리 설하여 이 경을 듣는 사람들에게 여섯 가지 신통을 얻게 해도
이와 같이 하는 일은 어려울 것이 없지마는
내가 열반한 뒤에 이 경전을 듣고 받아들여서
그 이치를 묻는 것이 가장 어려우니라.
그렇습니다.
다른 경전, 법화경외에 십이부경 일체 경을 전부 자기가 다 알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설하여도,
또 이 경전을 듣는 사람들에게 공부를 잘하게 하여서 육신통을 얻게 하여도
그 까짓것은 어려울 것이 없다.
내가 열반한 뒤에 이 이치, 이 경전 법화경을 듣고 받아들여서
이 이치를 묻는 것이 가장 어려우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설법을 하여
백 천 만억 한량없고 수가 없는 항하사의 중생들에게
아라한의 도(道)를 얻게 하고
여섯 가지 신통을 구족케 하는 이익을 얻게 해도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내가 열반한 뒤에 이 묘법연화경을 능히 받들어 지닌다면
이 일이 가장 어려우니라.
갈수록 어려운 것을 자꾸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 비유한 것 중에 처음부터 하나도 우리 상식으로서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더라도
법화경을 공부하는 것에는 비교가 안 된다는 이런 표현이죠.
내가 불도(佛道)를 위해 한량없는 국토에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여러 경전을 설했지만
그 많은 경전 중에서 이 법화경이 제일이니
저 앞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있었죠.
법화경이 경중의 왕이다.
내가 수많은 경전을 설했지만 이 법화경이 제일이니
만약 능히 지닌다면 부처님의 몸을 지니는 것이니라.
"부처님의 몸을 지니는 것이다."
경전을 가지고 다니면 부처님을 가지고 다니는 것과 똑같다는 이런 뜻입니다.
표현할 수 있는데 까지 표현한 거예요.
그만큼 법화경의 가르침이 소중하다는 것이고,
법화경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회삼귀일" 이라는 말로 요약이 되니까,
온갖 다종다양한 삶의 양상도
결국은 부처님의 삶으로 귀결되는 것이고,
그렇게 알고 부처님의 삶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걸 또 높이 볼 건 아니예요.
부처님은 삶은 이렇게 말하고 보고 듣고
인간의 온갖 희로애락과 번뇌 망상과 모순을 다 가지고 있는
이대로가 부처님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제법의 실상이죠.
제법을 실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받아들이기 어렵습니까.
차라리 앞에서 비교한 그런 지구를 머리에 이고 간다던지
발 위에 얹어놓고 어딜 간다던지 하는 일이 차라리 쉬울지 몰라도
법화경의 종지를 받아들인다는 그것은 실지로 어려울 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