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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23일 뉴스화면에는 6살 때 가족과 헤어진 뒤 미국으로 입양됐던 손동석씨가 32년 만에 극적으로 가족을 만난 다시 만난 모습이 공개되었습니다. 손동석 씨라는 분은 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대구의 한 동네에서 길을 잃어버렸고 결국 부모를 찾지 못하고 고아원에서 지내다가 미국으로 입양돼 숀 페티프런이란 이름으로 살아왔습니다. 손씨는 미국인 아내까지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렸지만 계속해서 한국의 가족을 찾아왔지만 계속 찾지 못하다가 이번에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손씨처럼 매년 자신의 뿌리와 친가족을 찾으려는 해외 한인 입양인들은 많지만, 실제로 가족을 만나게 되는 경우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드물다고 합니다. 이번에 이렇게 만나게된 것은 가족을 찾고 싶다는 손씨가 대구경찰청에 자신의 DNA샘플을 국제우편으로 보내면서였습니다. 입양인들이 국내에 직접 방문해 등록해야 했던 기존의 DNA 등록 시스템과 달리 대구경찰청에는 DNA를 우편으로만 접수해도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해외 입양인 가운데 부모를 찾으러 나서는 이들은 많지만, 단서도 부족한 데다 유전자 등록은 절차가 복잡했는데 정부는 내년 1월부터 유전자 등록 절차를 간소화하기로 했습니다. 국내 경찰청에서뿐 아니라 14개국 주요 해외 입양국 재외공관에서도 유전자를 채취하고 등록하는 시스템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기사에 나온 것처럼 성탄절에 선물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속에서 정말 세상 어느 선물보다 귀한 선물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귀중하며 인류에게 가장 소중한 선물을 우리가 받고 이 선물의 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탄절입니다. 우리 교회에 달려 있는 성탄절 현수막의 제일 윗부분에 찍혀 있는 것처럼 “이 세상 최고의 선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 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우리에게 어떤 선물인지 오늘 성탄절감사예배를 드리면서 진정한 예수탄생의 의미를 깨닫고 정말 참된 성탄절 의미있는 날로 하나님께 영광올려드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우리에게 어떤 선물일까요? 첫째는 예수님으로 인해 참된 광명과 회복이라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사야 9장 1절입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사야 9장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성경 본문중 하나입니다. 구약에서 보면 오실 예수님, 신약에서 보면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신 본문들중 특히 구약의 입장에서 오실 예수님에 대한 묘사를 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여주는데 그 첫째는 어두움이 사라지고 광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빛이 생긴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어디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빛이 없었던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왜 흑암이 사라지고 빛이 임한다고 말씀하실까요? 바로 이것은 영적인 의미의 어두움이 이제 사라지고 영적인 빛이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영적인 부분들, 인간의 감정적인 부분들로 사람들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얼마나 어둡고 얼마나 악하고 얼마나 칠흑같은 밤인지, 세상은 사악하고 욕심과 질투를 가진 사람들이 성공하는 듯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악한 자들이 부정을 저지르고 부패를 저지르고 불법을 행하면서 권력으로 출세하고 물질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범죄가 만연하고 잔악한 폭력과 살인의 공포속에서 두려움을 가지고 걱정과 불안에 살아가는 것이 세상이 아닙니까? 왜 그럴까요? 세상에 참된 빛을 찾지 않고 어두움에 살아가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참된 불빛을 가지지 못하고 가짜 불빛을 찾아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세상의 빛을 찾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인간이 만든 인공적인 빛은 세상을 밝히고 있습니다. 가로등불빛, 네온사인불빛, 각종 간판과 심지어 인공태양을 개발하여 밤에 낮과 같은 밝기의 빛을 성공해보려고 과학자들은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세상이 되었어도 세상은 날로 더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밝아졌는데 마음이 어둡고 불안과 초조가운데 인간관계가 어두워진다는 말씀입니다.
캐나다의 케이프 브레톤 섬에는 엄청나게 큰 탄광이 하나 있습니다. 이 탄광에서는 작업을 위해서 여러 마리의 말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들을 한 번 깊고 어두운 탄광 속으로 들여보내면 다시는 탄광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미 오랜 어두움에 적응되어 밖으로 나오는 순간, 말들은 바로 실명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번 탄광 속으로 들어간 말은 늙거나 병들어 죽을 때까지 계속 어두운 땅속에서 일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깊은 탄광 속에 빠져 어둠에 적응하는 순간, 우리의 생명도 끝난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리의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의 삶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입니다. 함께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의 빛이시고 예수님을 따르면 어둠이 거하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둡고 캄캄한 이 세상을 밝혀주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않을 것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우리의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자신을 빛으로 비유하셨을까요? 빛은 어둠을 사라지게 하고 생명을 공급하기 때문입니다. 태양이 나타남과 동시에 밤은 사라지고 새 아침이 됩니다. 태양이 나타남과 동시에 동식물은 왕성한 생명활동을 하게 됩니다. 태양이 등장하는 순간 이제 암흑은 끝입니다. 빛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어두움은 사라지고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아 생명을 얻게 되고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왜 오늘날 세상가운데 좌절하고 낙담하고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지 아십니까? 따라야 할 빛을 따르지 않고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것들이 자신들에게 어둠을 사라지게 하고 생명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생각할 때는 그것이 자신들에게 희망을 죽고 생명을 주는 빛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가짜 빛입니다. 이 세상의 이곳 저곳에서 “내게로 오라 그러면 행복할 것이다.”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은 쾌락이고 죄악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결국 쾌락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짓고 멸망의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빛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만 우리가 따를 때 우리의 삶에 생명을 얻고 소망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35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탄절에 우리가 알아야할 사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선물이 되시는가? 예수님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어떤 삶을 살게 되는가?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이제 예수님을 모신 우리들은 어두운 마음이 사라지고 어두운 말이 사라지고 좌절과 낙담의 어두침침한 삶을 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빛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심을 감사하며 진정 빛의 자녀로 빛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우리에게 어떤 선물일까요? 둘째는 예수님으로 인해 참된 평화의 의미를 알게 된 선물입니다.
이사야 9장 6절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신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는 이름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중에 우리는 신적인 자격에 대한 여러 명칭과 아울러 받으신 평강의 왕이라는 이름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적인 이름은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지만 결국 하나님에게 모든 영광이 돌아갈 이름이십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큰 의미로 와닿는 이름은 평강의 왕이라는 이름일 것입니다.
재정 러시아시대에 러시아의 엄청난 귀족이면서 유명한 작가였던 톨스토이는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부족한 것 없이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평생 갈등속에서 불안과 초조한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인생의 만족을 느끼지 못하며 살았습니다. 언제 큰 일을 당할 지 불안한 마음으로 주변을 항상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적한 시골 길에서 어느 순박한 농부를 만났는데 너무나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고 말과 행동이 너무나 즐겁고 평화로워보였습니다. 톨스토이는 농부에게 평화로운 삶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이죠. 그래서 내 마음은 기쁨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뒤 톨스토이는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고 결국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마음에 모신 이후 그는 더 이상 불안과 공포에 떨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불안합니다. 너무나 두렵습니다. 너무나 앞 길이 막막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느껴야할 감정인 평화는 우리 스스로 찾을 수 없습니다. 정말 소중한 평화이지만 이 세상의 어떤 철학이나 어떤 가치관, 어떤 윤리적인 삶도 우리에게 평화를 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어떤 노력도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 그것은 평화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평화이신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와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평화는 오직 한 분, 우리 주 예수님만 가지고 계시고 그 분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을 평화의 왕, 평강의 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 38절입니다.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중에 평화로다”고 천사들이 노래했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예수님을 환영했던 인파들이 외쳤던 목소리도 바로 예수님께서 평화의 왕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참된 평황의 터전을 만드시고 결국 십자가의 제물이 되시면서 참된 평화를 완성하셨습니다.
자동차왕 헨리 포드는 84세로 죽기 직전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그는 건강비법을 묻는 사람들에게 항상 “적당한 운동. 적당한 음식. 신선한 공기 그리고 마음의 평화인데 그중에 제일은 마음의 평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참 평안을 얻을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4장 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성 프란체스코는 어느 날 우물에서 물 긷는 여인을 관찰했습니다. 물통에 물을 가득 담은 뒤 작은 나뭇조각을 물위에 띄우고 어깨에 메고 가는 것이었습니다.“왜 물항아리에 나뭇조각을 띄우고 갑니까?” 그녀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군요? 항아리가 흔들려도 물이 넘치지 않게 하려는 것이죠”라고 대답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항아리속의 물을 보면서 “격노가 일어날 때, 마음의 동요가 일어날 때,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띄우면 되겠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내면에 분노와 갈등, 마음의 동요를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도 없습니다.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만이 인간에게 참된 평안을 주실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 그것은 바로 평화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이뤄질 평화를 가지고 오신 평화의 왕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세상의 어느 것도, 세상의 어느 존재도 평화를 이뤄낼 수 없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평화의 왕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마음의 평화를 얻고 이 땅의 평화를 사모할 때 진정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께서 부어주실 평화를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우리에게 어떤 선물일까요? 마지막 셋째로는 예수님으로 인해 공정과 정의의 기준을 바로 세운 선물입니다.
이사야 9장 7절입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오늘 본문에서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뤄질 때 세워질 것은 바로 정의와 공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의가 존재할 수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처음 창조되어 하나님안에서 선한 세상으로 유지되려고 하였지만 사탄마귀의 유혹에 빠진 인간의 죄악으로 이 세상은 타락했고 완전 죄악된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눈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선행을 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얼음판에서 놀던 아이 하나가 엷은 얼음을 딛고 물에 빠졌습니다. 곁에 있던 소년이 얼른 가서 건져주었습니다. 물에 빠졌던 아이의 어머니가 와서 칭찬했습니다. “정말 너는 용감한 소년이야. 얼음물에 뛰어들어 내 아들을 건져주다니!”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그 아이가 내 스케이트를 신고 있었기 때문이예요.”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가 하는 소위 선행이라고 부르는 행위가 결국 나의 명예, 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이지 않습니까?
로마서 3장 10~12절입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의 눈앞에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구원받아야 합니다.” 라는 고백을 해야합니다.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의인은 없습니다. 정의를 말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없습니다. 참된 의는 예수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오실 예수님께서 정의과 공의를 세우시고 영원한 정의, 완전한 공평은 예수님만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사실 정의와 공평보다 먹고 사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지금 이 시대 세상의 여러 나라 정권을 보면서도 참 인간이 이것밖에 안되는구나를 느낍니다. 정부가 불법을 저지르고 편법적인 통치를 해도 국가경제가 잘되면 지지도가 높습니다. 반면 아무리 정직하고 바른 일을 한다고 해도 경제가 좋지 못하면 정부지지도가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상의 기준은 정의나 공평보다 먹고 사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막을 여행하다가 마실 물이 동이 났습니다. 물은 찾을 길이 없고 목은 점점 말라왔습니다.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자기가 타고 있는 낙타를 죽여 그 속에 있는 물을 마시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자살 행위와 같다는 것을 알았지만 타는 듯한 목마름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배고픔과 갈증은 이렇게 강렬합니다.
주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재물과 지식과 명예와 이성은 추구할지언정 가장 중요한 의를 위해서는 작은 희생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은 ‘의’입니다. 우리는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고, 죄와 싸워 이겨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배부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이 완전한 정의이시고 완벽한 공의이심을 믿으십니까? 세상에서는 우리에게 정의과 공의를 보여줄 수 없습니다. 각자 자기의 기준에 맞게 정의를 말하고 공의를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상황도 보십시오. 남들에게는 그것이 정의고 공의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은 온갖 불법, 편법, 비리를 저지르지 않습니까? 인간의 공의가 그렇습니다. 인간의 정의가 그렇습니다. 남에게는 잔혹하게 잣대를 대고 자기에게는 관대하게 잣대를 댑니다. 우리 예수님의 정의와 공의는 완전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한 의, 예수님을 통한 참된 삶이 가능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모두 어떤 선물을 기다리지만 정말 성탄절에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은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세상의 사람들도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가장 아끼는 사람에게 줍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계산하고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조건없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두 딸이 차가운 바닷물에 빠지자 순식간에 물속에 뛰어 들어가 아이들을 물밖으로 끌어올리고 자신은 힘을 다해서 죽은 어느 아버지의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불이 난 집에 있어 뛰어들어가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머릿속에 살릴 수 있을 지 없을 지 계산 먼저 하겠지만 아이의 부모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최고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담긴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물이십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에게 보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은 죄로 인해 죽어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을 인간을 영적 사망에서 살리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뜻입니다. 성탄절을 보낼 때 우리가 마음속에 간직해야할 의미입니다. 토마스 켄피스는 “현명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선물보다 그 선물을 주는 사람의 사랑을 귀중하게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감격하는 성탄절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