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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산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호현낙선
말씀을 듣고 행하는 신앙 마7:24-27, 약1:23-27
튀르키예의 지진으로 많은 인명 피해를 입어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진앙 지에서 가장 가까운 가지안테프는 도시 대부분 파괴되었고 대규모 정전, 추운 날씨, 강풍 등 악천후로 이미 동사자까지 발생했습니다. 게다가 통신, 교통망은 끊겼고, 장비와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여 구조 활동 자체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튀르키예는 4개의 지각 판이 접하고 있어 언제 지진이 나도 이상하지 않았던 여건 가운데 있었지만, 관리 감독은 허술했습니다. 내진 설계가 의무화 되어 있지만 그 의무를 지키지 않아 건물이 맥없이 무너져 더 큰 인명 피해가 발생하게 된 것이기에 인재라고도 말합니다. 내진 설계를 해서 재대로 지은 건물은 강진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비용도 많이 들고, 기간도 오래 걸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법으로 쉽게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비용이 많이 들어도, 많은 노력이 필요해도 재대로 지은 사람들은 지진 중에도 안전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서 본문의 산상수훈의 말씀에서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건축자와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건축자에 대해 말씀 하셨습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신앙”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신앙의 사람은,
1.반석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신앙의 사람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우기는 겨울입니다. 우기가 되면 많은 비로 인해 집을 지을 수 없기에 유대인들은 비가오지 않는 건기에 집을 짓습니다. 그런데 집을 짓다 깊이 파는 것이 힘들면 그만 모래 위에 집을 지어버립니다. 우기가 닥치고 비가 내리면 없던 시내가 생겨지고, 지대가 낮은 곳에는 물웅덩이가 생깁니다. 그러면 모래 위에 지은 집들이 하나씩 무너지며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힘이 들어도 깊이 파고 기초를 반석 위에 세운 집들은 무너지지 않고 서 있습니다.
성도가 신앙의 집을 지을 때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모습에 대해 본문 24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했고, 26절에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느냐, 행치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평소에는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반석 위에 지은 집보다 외관상으로는 더 좋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기초를 닦는데,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투자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만큼 외적인 면에 더 많은 신경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누가 봐도 신앙에 열심히 있었고, 열심히 구제도 했고, 십일조도 했고,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고, 열심히 기도와 금식도 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것들에 집중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기초, 곧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속죄와 구원을 위해서 세상에 보내신 메시야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반석으로 삼는 일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불신앙으로 배척했습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고 외식하는 자들이요,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적인 의를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어리석은 신앙인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이 폭풍우를 견딜 수 없는 것처럼 그런 외식적인 신앙은 마치 바벨탑처럼 되어 결국에는 다 무너지고 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모래는 한마디로 말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랑한 인간의 의입니다. 이런 자들의 실상은 세상 것에만 마음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일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기초로 삼는 것과는 전연 상관없는 삶으로 세상 것이나 인간의 의만을 소중히 여기는 삶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 날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청둥오리는 기러기 과의 철새인데 북쪽 시베리아 지역에서 번식하고 우리나라에는 겨울철에 날아옵니다. 강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새입니다.
분명 청둥오리는 시베리아에서 우리나라까지 그 먼 거리를 날아왔다가 날아가는 날개의 힘이 굉장히 좋은 새입니다. 청둥오리 농장에 가면 수천마리의 청둥오리들이 어기적거리며 걸어 다닙니다. 그런데 청둥오리 사육장은 울타리만 있을 뿐 하늘에는 아무것도 없이 그냥 열려있습니다. 어느 분이 저러다 청둥오리가 날아가 버리면 어떡하느냐고 주인에게 물어보니 “하하 그럴 일은 없습니다. 저놈들은 아주 미련한 녀석들이어서 자신들이 전에 날았다는 것을 몰라요. 청둥오리에게 영양가 많은 사료를 듬뿍 먹입니다. 청둥오리들이 처음에는 잘 날아다니다가 살이 쪄 몸무게가 무거워지면 날기가 수월치 않게 됩니다. 그러면 이내 날기를 포기하고 그냥 눌러앉아 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살면서 먹을 것 걱정이 없어지자 하늘을 나는 것을 포기한 것이지요. 그 덕분에 사람들은 맛있는 고기를 먹게 되지요.“라고 말했습니다.
반석위에 신앙의 집을 짓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위에 그 기초를 두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 닮기를 소망 하면서 사랑으로 섬기며, 좁은 문, 좁은 길이지만 주님의 십자가 발자취를 따르는 자로 살기를 힘씁니다. 세상 것을 보지 않고 하늘 소망을 바라보며 믿음의 날개를 펴서 저 높은 곳을 향해 날아갑니다. 주님은 그런 자들을 찾으시고 귀히 여기십니다. 우리 모두 반석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참된 경건을 소유한 진실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참 경건은 노아나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입니다. 요셉처럼 이성의 유혹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할 수 없다고 말하며 시험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욥처럼 불 시험을 당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변치 않는 것입니다. 다니엘처럼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불굴의 신앙을 가지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자신의 죄를 깨달았을 때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회개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시몬, 안나, 스가랴처럼 성령에 이끌림을 받아 사는 것입니다. 바울, 바나바, 스데반처럼 생명 바쳐 복음을 위해 충성하며 사는 것입니다. 고넬료처럼 기도와 구제를 힘쓰다가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말로만 신앙생활 잘하는 것처럼 떠벌이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뒤따르는 신앙의 사람입니다. 행함이 따르지 않고 말로만 신앙생활 잘하는 것처럼 떠벌이는 사람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도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게 됩니다. 가나안농군학교를 창시한 김용기(金容基) 장로는 일제 강점기 때 경기도 광주에서 농촌운동을 하였습니다. 일제가 요구하는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하지 않자 아들은 퇴학을 당하였고 그는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한번은 다다끼(立芝)라는 일본 고등계 주임에게 피투성이가 되도록 매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고문을 당하고 비틀거리며 나오는데 일본 형사들이 뒤에서 김 장로를 향해 “훌륭해! 암, 훌륭하고말고. 저래야 되지!’ 하는 겁니다. 그때 김용기 장로는 “아,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았구나!” 감사하며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들은 김용기 장로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박해자 였던 일본 경찰들이 김용기 장로의 경건한 믿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믿음은 스스로 자기 의나 공로를 자랑하고, 인정하는 믿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인정하는 경건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서신서 본문 약1:26-27에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참 경건은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교회에서의 모습만 보아서는 알 수 없습니다.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면 그 사람이 정말 경건한 사람인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일2:16에서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했습니다. 타락한 세상은 우리를 여러 가지로 유혹합니다. 물질로, 타락한 성으로, 명예와 권세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살면서도 세속에 물들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여 성결하게 사는 사람이 진정한 경건의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2:5)했습니다. 말씀을 지켜 행할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고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뜨겁게 되어 살아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참된 경건을 소유한 진실한 신앙인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받은 은총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복 있는 신앙의 사람입니다.
서신서 본문 27절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했습니다. 여기의 ‘돌보고’는 원어로 ‘에피스켑테스다이’인데 ‘찾아가 방문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가리킵니다. 경건은 환난 중에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는 것으로 증거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건은 이웃과의 사랑의 관계가 바로 서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경건하다고 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경건이 아니며, 또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진정한 사랑도, 경건도 아닙니다. 이웃에 대한 돌봄은 억지로나 강요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가 많다고 느껴지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기본 덕목은 이웃사랑입니다. 경건은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비에 샐래자(Bea Salazar)는 척추 수술을 받은 뒤 허리를 쓰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우울증에 걸려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밖에 나갔다가 어린 소년이 쓰레기통을 뒤지며 먹을 것을 찾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순간적으로 불쌍한 마음이 들어 소년을 데리고 들어와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샌드위치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운 소년은 집을 나간 뒤 불과 15분도 지나지 않아 친구를 여섯 명이나 데리고 왔습니다. 아이들이 물었습니다. “아줌마가 샌드위치를 공짜로 준다는 게 사실이에요?” 샐래자는 부모들이 일에 시달려 돌보지 못하자 아이들이 쓰레기통을 뒤지며 먹을 것을 해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었던 그녀는 지역사회의 교회들에 이런 현실을 알리고 자원봉사자들과 구호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선행에 감동받은 한 사람이 건물을 기증했습니다. 그곳을 본거지로 모여드는 100명의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날마다 먹을 것을 주며 돌보아 주었습니다.
10년이 지난 뒤 아이들 가운데 5명이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진학하였습니다. 샐래자는 고백했습니다. “샌드위치 하나가 내 인생은 물론이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게 될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만 생각하고 이웃을 돌보다 보니 나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본문 25절에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믿음이 될 때 비로소 참된 경건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고, 그런 사람은 주님 앞에서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 모두 받은 은총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복 있는 신앙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두 본문을 중심으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신앙”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신앙의 사람은,
◎.반석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신앙의 사람입니다.
◎.참된 경건을 소유한 진실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받은 은총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복 있는 신앙의 사람입니다. 아멘.
<2023. 02. 22. 호현낙선>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