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몇 년 전부터, 친구들에게 '죄책감 없이 쉬는 법'에 대한 책을 쓰겠다고 말했었다. '여유'와 '자유'를 구별하고, '쉬는 것'과 '노는 것', '외로움'과 '고독'을 세심히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2015년,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원고를 했다. 생각해보니 무려 여섯 개의 연재를 신문과 잡지, 인터넷에 동시에 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계간지에 발표한 단편소설과 앤솔로지 형식의 공저 두 권도 포함되어 있었다. 포털 사이트에서 연재하는 웹소설도 있었으니 말을 말자. 원고지 매수로 계산해보니 책 일고여덟 권 분량이었다. 이 정도로 많이 썼다는 건, 그것이 분명 예술은 아니라는 뜻과 같다. 나는 자괴감 속에서 시간 부족에 시달렸다. '죄책감 없이 쉬는 법'에 대해 쓰겠다는 말은 결국 나 자신에게 내뱉는 절규였던 셈이다.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여주인공은 남자주인공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사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오고 싶었어요."
일본 '나라'의 명물인 사슴조차 사색에 방해가 돼서 싫었다고 고백한 여자는 '아무것도 없음'을 찾아 '고조'라는 도시로 왔다. 나는 그 여자의 심리상태가 너무나 잘 이해되었기 때문에, 실제 일본의 고조가 어떤 곳인지 궁금해졌다.
영화 <안경>의 주인공 역시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곳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그녀는 일본 가고시마 현의 요론 섬을 찾는다. <안경>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사색하는 것 이외에는 정말이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영화다. 심지어 화면조차 자주 바뀌지 않는다. 여행을 가고 싶은 건지, 달아나고 싶은 건지, 쉬고 싶은 건지 전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내 상태에 대해 S에게 이야기했더니 , 그녀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셋 다야. 여행을 빙자로 달아나서 쉬고 싶은 게지. 너 번아웃 된 거 같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외치는 광고 속 유해진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자유란 실질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자유'가 아니라 '해야만 할 것 같은 일을 하지 않을 자유'만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돈을 버는 이유를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한 시니컬한 후배가 있었는데, 그때 나는 그녀에게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사는 건 100퍼센트의 삶이 아니며, 또 합리적이지도 않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다. 인생의 목표를 행복에 맞추면 아이러니하게도 행복해지기 힘들다는 걸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행복은 완결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과정중에 일어나며, 지속가능하지도 않다. 심리학에는'행복의 평균값'이란 용어가 있는데, 이 말은 인간의 행복이 적정선을 넘어서면 더 이상 증폭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행복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 중에 일어나는 일이라면, 그것을 제대로 느끼기 위헤 우리가 의도적으로 해야 할 것은 '뭔가 하기 위해' 달리는 게 아니라, '뭔가 하지 않기 위해' 때때로 멈춰 서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원고를 쓰지 않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인터넷이 되지 않는 곳으로 이동해야 원고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극단적인 조치였지만 나는 심각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방전되기 직전의 3년 넘은 내 아이폰 같다고 해야 하나.
여행의 또 다른 조건도 있었다. 뭔가 대단히 아름다워서 기록하고, 찍고, 어딘가에 남겨둬야 할 것 같은 장소는 피하고 싶었다. 파리, 뉴욕, 도쿄 같은 대도시는 내겐 적당한 여행지가 아니었다. 고급 휴양지나 리조트도 피하고 싶었다. 나는 휴식이 아니라 여행을 하고 싶었는데, 그러기 위해선 전 세계적으로 균일화되어 있는 호텔이나 리조트가 아니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도시와 전혀 다른 풍경이 필요했다.
나는 언제나 페허의 풍경에 이끌렸다. 무엇인가 대단한 것이 있다가 사라지고 남은 쓸쓸한 풍경은 늘 내 마음을 끌었다. 2015년 12월과 1월, 미국 서부의 5개주를 자동차로 여행했다. 그곳에서 내가 태어난 고향에선 죽었다 깨어나도 볼 수 없는 텅 빈 공허를 달리는 길 위에서 봤다. 데스밸리로 향하는 모하비 사막에서, 모뉴먼트 밸리로 가는 유타의 어느 길 위에서, 나는 가도 가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을 보았다.
길은 소실점까지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내 눈앞에서 사라지곤 했다. 그 길의 끝에는 하늘과 땅이 샴쌍둥이처럼 붙어 있을 것 같았다. 한 시간을 달려도 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 이런 길을 달리다 보면, 어느새 내가 도시에서 체득한 시간들이 무의미해진다는 것도 알게 됐다. 시간은 모든 것을 천천히 바꾼다. 하지만 공간은 많은 것들을 빠른 시간 안에 뒤바꾼다.
사막을 달리다가 충동적으로 차를 세워놓고 길가에 누워 있거나 그저 서 있었다. 방전된 핸드폰 같은 내 몸이 거대한 태양을 집열판 삼아 충전되고 있다고 느꼈다. 오직 조슈아 트리만 있는 사막의 길 위에서 내가 본 건 모래, 바람, 태양뿐. 그곳이 한때, 깊은 바다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거대한 계곡과 협곡들 위로 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내 몸 여기저기에 박혀 있던 지독한 고단함은 사막의 뜨거운 태양과 텅 빈 길을 달리는 동안, 어느 사이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 곳에서의 외로움은 조금 더 증폭돼 내게 고독의 형태로 다가와 있었다. 내가 선택한 건 24시간 연결이 아닌 타인과 단절된 채, 나 자신과 나누는 대화였다. 그곳에서 내가 느낀 건 행복이 아니라 다행스러움이었다. '무엇을 할 자유'가 아니라 '하지 않을 자유'를 만끽하며, 나는 정말 그렇게 느꼈다. 이곳까지 올 수 있어 다행이라고.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중에서
백영옥 에세이
첫댓글 이제는 일이 있다는게 소중하고 귀하다 우리의 욕심이 끝이없듯이 너무 많을때도 너무 없을때도 지금은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