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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여섯째 날(11월 1일)
닷새 동안 무사한 것이 아상한 일이었을까.
휴대폰을 비롯해 소지품들을 아침마다 잘 챙겼건만 이 아침에는 왜?
무엇이 그리 급한지 감포항 못미쳐 있는 문무왕(신라의 30대왕)의 수중릉(해중릉) 보는 것도
마다하고 달리던 차를 되돌려야 했으니까.
양상군자의 방문(?)이 잦다 하여 적잖은 돈을 내면서 둔 경비병(SECOM)도 믿지 못하겠는지
아내는 별스럽잖은 것들을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다니는데 몸에서 분리된 것도 몰랐으니...
아무도, 청소인까지도 다녀가지 않은 이른 아침이라 침대 위에 고이 있어 다행이었지만 어느
호구에 스스로 바치고 애통하는 꼴이 될까 걱정이다.
남은 여정이 엉망되는 것은 면해서 다행인 길이 감포를 지났다.
어느 해, 그 때도 우리 셋이 고속버스편으로 경주에 내려가 불국사와 여러 곳을 둘러본 후 이
곳 감포의 내 단골집(바다회)에서 회를 먹었는데 기억은 하면서도 끌리지는 않나.
감포항 찍고 과메기 타령은 하면서도 구룡포도 찍고 호미곶으로 직행했으니.
한반도를 호형(虎形)으로 볼때 범의 꼬리에 해당하며, 장기반도(長鬐)의 끝에 돌출한 곶(串)
이라 하여 호미곶(虎尾串/경북 포항시 남구 호미곶면)이라 한단다.
호미곶면으로 개명(2010년)되기 전에는 대보면(大甫)이었기 때문에 대보곶으로도 불렸으며
밀레니엄(millennium/새천년)을 맞아 면모를 일신한 관광지다.
간절곶과의 경쟁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세월로 대결한다면 단연코 우위를
점하고 있는 관광지다.
전에는 왔던 길로 돌아가야 하는 막다른 곳이었는데 내륙을 거치지 않는 장기반도의 해안로
(929번)가 개설되어 포항신항 경유, 칠포해변으로 달리게 되어 있으므로 한결 편해졌다.
그러나, 한반도 지도에서도 특이한 모습으로 나타나며 공들여 다듬어 놓은 호미곶마저도 이
모녀에게는 별무관심이니 이 여행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오래된 일이지만 포항에는 다른 추억도 있다.
K은행의 이곳 지점장으로 내려와 있으며, 내 아우에 다름아닌 P가 바라는 대로 우리 가족이
대구와 포항을 경유해서 동해안을 북상하던 날의 아침.
포항의 여객선터미널 근처에서 아들딸의 초등학교 담임을 비롯해 여러 선생님을 만났다.
울릉도 여행을 떠나는 그들과의 만남은 의외였으며 애들의 선생님이라 내가 대접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인데도 되레 그들의 대접을 받게 되어 민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내가 관여하고 있는 대학의 병설학교라 묘한 위계의식 때문에 더욱 그랬는데 이미 고인이 된
P와 여러 생각이 간절하였으나 그것마저도 무심한 모녀.
포항에서 고성의 통일전망대까지 북상하는 해안길은 2발로 걸었을뿐 아니라 2발자전거로도
일주했으며 4발로는 헤일 수 없도록 많이 오르내린 길이다.
길에 관심있는 동해안지역민들에게는 해파랑길 또는 블루로드(Blue road)로 알려진 길이며
서해안과는 다른 감칠맛이 있는 길이다.
공단과 원자력발전소가 도처에서 그 맛을 차단하여 유감천만이지만.
감포의 회, 구룡포의 과매기를 건너뛰고 강구의 대게마저도 몰라라 달린 운전자가 기껏 멈춘
곳이 영해(경북 영덕군)휴게소의 썰렁한 식당이라면 마니아 또는 도락가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딸의 심사가 뒤틀린 까닭을 모르는 것 만으로도 실격일텐데 역지사지의 도량은 없고
헐뜯기만 하는 늙은이의 딸인 것이 그녀에게도 속상한 운명이겠다.
이런 분위기로 50년을 살아온 늙은 부부가 여행이랍시고 나선 것도 그렇고.
자포자기 상태에서 30여시간 남아있는 돌아갈 때까지만 무사하기를 바라기에 이르렀다.
집(인천의 딸)을 나설 때는 들러보고 싶은 곳과 먹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양남의 숙소를 출발한 몇시간 전에도 내 맘속의 내비에는 감포는 몰라도 구룡포항이 있었고
강구항과 백암온천도, 덕구온천과 고포리 미역도 있었다.
영국의 흑백사진작가 마이클 케나에 의해 2007년에 다시 태어난 해망산 옆 솔섬도 포함되어
있었건만 강구항의 대게는 이미 멀어졌고 온천도 멀리 있고 솔섬 감상할 기분인가.
강원도 땅 호산(삼척시 원덕읍 소재지)에 여장을 풀었다.
몇개의 마을은 가족에 다름없는 인연을 맺고 살아오기 40년 세월이 넘은 어민들의 마을인데
근년에 상전벽해의 변혁이 이뤄지고 있다.
해안에 LNG산업단지의 건설이 진행되면서 어촌의 매입 매립과 어민들의 이주를 위해 뿌린
돈의 위력이 변화를 모르는 조용한 어촌의 어민들을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대개, 댐을 비롯해 각종 수리시설의 건설로 인해 수몰지구, 수몰민이 발생한다.
수몰민들은 물이 빠졌을 때는 흔적에 접근하여 향수를 달랠 수 있지만 매립 후 거대 공단이
되기 때문에 지근에 두고도 얼씬도 할 수 없겠다.
동해안은 서남해안과 달리 갯벌이 없기 때문에 후조들처럼 어족들의 이동이 심하다.
성어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남획하기 때문에 소위 자연산 어종은 날로 더 희귀해 가고 있다.
게다가 관광붐을 노리고 도시의 돈이 유입되어 펜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는 것 같다.
졸부가 된 해안지대의 지주들도 이 바람에 편승하고.
잠자리를 걱정하는 토박이 조카딸(혈연은 아니지만) 부부의 성심에 따라서 펜션들을 둘러보
았으나 철 지난 밤이기 때문인지 딸을 끌어가는 인력(引力)이 없는 것 같다.
이 부부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정해야 하는 숙소를 위임받은 딸이 놀랍도록
신속하게 정하고 왔는데 식사 후 숙소에 가서 그 까닭을 알았다.
2개의 방이므로 호불호를 따질 필요 없었다는 것.
소위 금혼여행을 하는 부모와 동행중인데 늘 심사가 뒤틀린 까닭이 자기가 선택한 거제도의
밤 외에는 부모와 하나의 방에서 타율적으로 보냈기 때문이라고?
40대의 딸이 80대의 모와 한 침대에서 단지 몇 밤을 자는 것 마저도 힘겨워 한다면 이런 딸을
두고 편히 눈 감을 부모가 있겠는가.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고 만류를 외면하고 이혼도 한 딸이다.
잘못된 선택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반대한 것이므로 잘 살기를 바랐는데.
무모했거나 경솔한 짓이었다고 자각했다면 한층 어른스러워졌어야 하는데 아닌 것 같다.
큰 딸이 아파트 한채를 만드는 같은 기간에 같은 유형의 아파트를 날려버리고 동가식서가숙
처지가 되어 있으니.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다 해도 신뢰가 가지 않고 늘 물가에서 놀고 있는 어린애 같다.
불안감을 털어버릴 수 없는 것이 단지 부모라는 이유라면 얼마나 좋을까.
묘책은 없지만 찬찬히 살펴보며 얘기를 나눠보려는 것이 운전이라는 이유로 딸과 함께 하는
여정인데 낙심만 커갔을 뿐이다.
양남면 해안 e-motel 방에서 본 동해의 일출(위)과 호미곶(아래)
일곱째 날(11월 2일)
생각이 많으면 정답이 멀어져간다.
공자가 비슷한 말을 했다.(季文子三思而後行子聞之曰再斯可矣)
잠자리는 더 편한데도 잠은 더 멀리 달아났는지 오지 않았다.
나와 달리, 소원대로 방을 따로 쓰는 딸은 더욱 편하고 더더욱 숙면했을까.
마지막 밤이 남아있지만 이미 방 2개가 예약되어 있다.
속초의 그 콘도에 도착한 후에도 최전방의 통일전망대(고성군)가 남아있으나 취소했다.
방문할 때마다 감회가 다르고 새로운 나와는전혀 다른 그들이기 때문이다.
이 모녀에게는 번거로운 입출 수속을 비롯하여 오르내리는 부담이 있을 뿐인 길이기 때문에.
서울을 기.종점으로 삼척 ~ 강릉, 강릉~주문진~속초 간의 모든 길에 깔려있는 우리 가족의
추억들을 대충이라도 챙기면서 가려면 아마도 2자릿수의 날이 필요할 것이다
주말마다 운전자를 바꿔가며 달려가던 삼척 남단의 어촌,
60년대의 열악한 교통에도 끈질기게 오르던 설악산인데 고속도로가 열렸으니 오죽했겠는가.
8도 강산이 다 그러하지만 이 구간에는 특히 많은 사연이 널려있는데 우리 차가 속초까지 논
스톱한 것 처럼 나도 그래야 했다.
관광, 휴양 명소들에는 공공기관들이 운영하는 연수원이라는 이름의 숙박소(콘도)들이 있다.
소속 직원과 그 가족의 복리증진이 목적이지만 비철에는 알음있는 삼자도 이용할 수 있단다.
우리에게 주어진 2개의 방도 마당발 H가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인맥을 동원해 구한 것이다.
속초에 있는 것으로 알고 찾아갔다가 잠시 낙담할 뻔 했는데 친절한 관리인의 수고로 거진에
있는 콘도가 예약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거진은 속초 북단에서 통일전망대까지의 3분의 2가 넘는 거리에 있는 어항이다.
단조롭기는 하나 여정의 마지막 밤으로는 오히려 잘 된 위치다.
통일전망대의 지근까지 가서도 외면하는 것이 아쉽기는 해도.
우리는 거진보다 속초에서 식사하고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관리인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아침겸 점심을 먹으려고 내비를 따라간 곳은 1999년 가을에 관광엑스포가 열렸던 해변(조양
동)의 물회집(황금물회)
옛 행사장에는 엑스포를 기념하는 타워만 외로이 남아있을 뿐 너른 공지가 썰렁하다.
여의도의 단골 왜식집 주인 X와 함께 비를 맞으며 둘러보면서 수일 내로 끝나는 행사 이후를
걱정했는데 내 여행길에 끼고 싶어하던 X는 요절했고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 2번째로 오고
있건만 너른 땅은 빈터 그대로다.
관광 요지인데도 지방 소도시의 한계일까?
주문진 이북의 대한민국, 옛 38도선 북쪽의 한국 국민은 6.25동란이 동족상잔의 비극임에도
축복 행사가 되는 아이러니의 주인공들이다.
휴전선이 38도선 이남까지 밀려옴으로서 비극의 땅이 된 서부와 정 반대로 6.25가 없었다면
질곡의 땅에서 신음하고 있어야 하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여장을 풀고 1박하는 이 곳(거진)은 당연히 북한땅이었다.
북쪽으로 지근에 김일성의 별장이 있고 휴전 후에는 그 위도 선상에 이승만(당시 대통령)의
별장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지역의 경관이 빼어난 것만은 틀림 없는 것 같다.
걷기와는 상극관계인 모녀를 두고 북으로 이웃하고 있는 대진과 거진의 해변을 거닐었다.
대진해변에는 노통이 벌여 놓은 일(행정수도 이천)에 MB의 치다꺼리(총리)로 체면만 구긴
한국 최고대학의 총장이었으며 명망있는 경제학자 J모가 식사하고 갔다는 식당이 있다.
허름하고 식탁 몇개가 전부인, 코딱지만한 집(부두식당)인데 그가 어떤 알음으로 와서 식사
까지 하고 갔을까..
이런 집의 특징은 막일꾼들이 단골이라는 점이다.
음식이 푸짐하고 인심이 후함을 의미한다.
J가 남기고 간 흔적도 "맛 있는 음식과 후한 인심이 국가의 품격을 높여줍니다"
국무총리를 지낸 경제학자 다운 말이지만 그런 거창한 칭호가 없는 나같은 절대 무지렁이도
알고 있는 실정이다.
맛 제일의 집은 기사식당이라는 말은 옛이야기가 되었고 막일꾼들이 드나드는 식당이라면
그냥 들어가도 후회할 일 전혀 없으니까.
거진의 10월 하순은 바쁜 시기다.
해마다 며칠간 열리는 명태축제에 온 면이 총력을 쏟는 듯 한데 나와의 인연은 없는 것 같다.
무심코 와보면 2~3일 이르거나 늦거나 하니까.
저번에는 2일 빨리 왔는데 이번에는 3일 늦었으니까.
민물 짠물 통털어 온갖 물고기 중에서 유일하게 버릴 것이 전무한 생선이라는 명태.
이조 중기(인조 때?)에 한 함경도 관찰사가 초도순시차 들른 명천군(明川郡)에서 먹은 반찬
중에 담박한 생선이 있었으나 낯설고 이름이 없었다.
단지 태(太)씨 성을 가진 어부가 잡았다는 사실뿐.
관찰사가 명천과 태씨의 첫자를 따서 명태라 부르게 했다는 생선.
이름이 하도 많아 홀란스러운 바닷고기의 이름 '명태'의 내력이란다.
봄에 잡으면 춘태, 가을에 잡히면 추태, 겨울에 잡은 것은 동태라 하고, 그물로 잡은 명태는
망태, 낚시로 낚아올린 명태는 조태, 원양어선이 잡은 명태는 원양태, 근해에서 잡은 명태는
지방태라 부른다.
얼리지 않은 생물 상태는 생태, 꽁꽁 얼리면 동태, 완전히 말리면 북어 또는 건태, 장기간 눈
과 바람을 맞혀 말려 노란 색을 띄면 황태, 반만 건조했으며 코를 꿰어 말린다 해서 코다리,
말린 어린 명태는 노가리. 알젖갈은 명란젖이며 창자로 담은 젖갈은 창란젓이다.
음식으로는 명태국, 북어국, 생태 매운탕과 지리, 각 찌개, 알탕과 완자탕, 동태고명 지짐이,
명태완자와 김말이, 명태전과 표고전, 명태튀김과 탕수, 명태알무침, 죽과 롤샌드위치. 명태
식혜와 아가미식혜, 회무침, 생태김치와 명태속대김치와 아가미깍두기가 있다.
관혼상제에 불가결 품목이며 보양식을 비롯해 치질, 습진, 설사, 단독, 기관지 천식, 심장병,
구완아사, 감기, 무좀, 관절염, 티눈, 포진까지 명태를 이용해 건강을 지켰단다.
축제 준비가 막바지였던 저번에는 행사장 정자에 천막집을 지었는데 행사가 끝난 이번에는
전망 좋은 바닷가 콘도에서 금혼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
은근한 조명을 받아 인상깊었던 파도위 범선의 석조 조형물, 파도를 헤쳐가는 명태떼의 조형
네온사인이 휘황하게 수놓았던 거진1교의 야경이 잊혀지지 않아 다시 찾아갔다.
특히 비발디의 사계를 비롯해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와서 볼일 없이도 찾아갔던 화장실에
다시 갔다가 낙담하고 돌아섰다.
수년 세월에 온전히 보존되고 있을리 없으며 일명 해우실(解憂)이라는 화장실의 느낌을 바꿔
놓았던 신선하고 경쾌한 선율이 멎은지도 오래인 듯 한데 이 상태로 이번 축제를 치뤘는가.
거진항은 휴전선이 지근인 전방이기 때문인지 해군 제1함대의 군함이 정박하는 부두도 있다.
저번에, 천막 안에서 잠자리에 들려 하다가 우렁찬 고동소리에 밖으로 나왔을 때 곳곳에 불이
켜진 거대한 물체가 포효하며 해안을 떠나고 있었다.
맥이 빠진 상태로 그 부두를 찾아가고 있을 때 딸로부터 전화가 왔다.
저녁식사에 초대하기 위해 장보러 가는 중이라며 자기 방에서 저녁을 먹자는 전화다.
아뿔싸.
마지막 밤에 비로소 깨달음이 왔는가.
당초부터 방 2개를 마련했더러면 위기일발의 긴장관계가 없음은 물론 오순도순하고 고소한
여행이었을 것을 내가 얼마의 방값 아끼려다 절호의 기회를 망쳐버린, 소위 소탐대실했나.
작은 딸에게는 큰 딸에 비해 손맛이 있다.
벼락치기로 준비한 저녁이지만 맛있게 잘 먹었다.
남은 것으로 아침까지 먹었다.
신선하고 개운하기를 식당의 음식이 따라올 수 있는가.
이런 면이 있는 딸이기에 더욱 안타깝다.
이번 여정에서 최하위의 불명예식당(위)과 거진항(아래)
(전번에 천막집을 지었던 정자/위)
(귀를 즐겁게 하던 아름다운 선율 대신 코를 막게 하는 냄새가 . . ./위)
황혼여행으로 바뀐 금혼여행(11월 3일)
이혼을 했음에도 그들의 산물인 딸 하나를 위해서 자기를 버리는가.
21c 첨단에서 살면서도 딸에 대해서만은 19c에 갇혀있는 그녀의 인생이야말로 불가사의다.
딸의 뒷바라지에 올인하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장래가 불투명한 딸이라 해도 자기의 핏줄에 대한 책임이며 의무라면 어찌 탓하겠는가.
그러나 말을 물가에 데려가는 것은 가능하나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
온갖 노력으로 딸의 대학 문(뉴욕대)을 열어주었으나 자기의 힘이 미치는 곳은 거기까지다.
황금세월이 다 가버린 40대 중반이며 재기의 기회가 시시각각 멀어져 가는데도 아무 대책이
없다면 본인은 물론 자신과의 관계인(關係人) 모두의 문제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답이 있어야 한다.
정답이면 다행이고 오답이면 바로잡으면 되지만 아무 답이 없다면 대책도 없다.
신실한 남편을 만났더라면 건강하고 복스러운 일생을 누릴만한 능력을 타고 났기에 부모인
우리는 맘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텐데 이 무슨 형벌인가.
내게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 때, 이런 말을 했다.
"잿밥을 노리고 열심히 염불했더니 절로 도승이 되고, 도승이 되니까 잿밥이 절로 쌓이더라"
한데, 이무렵에 읽은 글 하나가 문제였다.
'The Times'(1785년에 창간된 영국 신문/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일간지)의 19c 논설문집에
실린 '부와 행복(Wealth Happiness)'에 관한 글이다.
이 글을 읽지 않았더라면, 읽기는 했어도 동의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꽤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필요한 품목을 줄이고 소유가 적을수록 행복지수가 높아가는 진리를 터득한 이후 나는 약간
불편한 적은 있어도 불행한 적이 없다.
진짜 불행과 불편은 부분적으로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필요 이상 많기 때문이니까.
(절대 무소유는 최고의 행복이 아니라 상대적 비교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립되지 않는다)
가진 것이 충분하지 못하으므로 물려줄 것 때문에 다툴 일도 없으니 마지막도 편하다.
그래도 남는 것이 있다면 분배에 공정해야 한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정한 룰이 있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데 반드시 배로 준다.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지금은 받은 것이 공평(비슷)하도록 노력한다.
아들과 큰 딸에 대해서는 걱정할 일은 없으나 공정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으니까.
다가오는 황혼 앞에서 남아있는 앞날을 내다보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아들 딸에게는 이 분배가 약간이나마 도움이 될 것임을 믿어도 된다.
그러나 정작 도움이 필요한 작은 딸은 어떤 반응일까.
마치,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기독교 성서에 축자적으로 충실한 듯이 제시하는 내일이
없으며 있다 한들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화수분이라도 안겨 주지 않는다면 한강투석일 것이 불 보듯 한데.
그러나 얼마동안 전통적 인정에 끌려서 까마득히 망각하고 전전긍긍한 것이다.
아들 딸들에게 나름의 최선을 다했지만 후사(後嗣)의 개념이 아니고 그들이 잉태될 때부터
위탁(委託)으로 받아들였던 것을.
오늘날 DNA 운운하나 소위 태어나는 자식들에게 부모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는가.
성별, 성품, 출생시기 등 부모의 뜻과 다르다면 절대 위탁으로 봐야 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양육 의무만 있을 뿐 부모로서의 권리나 무한책임은 없으며 이 책무를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면 결과의 책임은 위탁권자에게 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 그런 뜻 아닌가.
그러니까 자식으로 인한 어떤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위탁권자에게 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이
를 잊고 무한책임 의식에서 속앓이를 한 것이다.
내 양육의 책임은 성인이 되어 사회적 임무를 수행하게 될 때까지만이라는 서약이었는데.
내 일생에서 한이 있다면 오로지 두 발로 걷지 못하는 것이었는데 이렇게나마 금혼여행까지
마쳐가며 어렵게라도 두 발로 걷기가 진행중이다.
소원이 남아있다면 그것 역시 두 발로 걷기가 끝나는 때와 이승을 떠나는 때가 일치하는 것.
그 뜻을 담아서 두발로 걷고있는 금혼여행을 마지막 여행이 될 황혼여행으로 이름을 바꾸고
거진항을 떠났다.
황혼여행을 마친다는 것은 이승과의 작별을 포함해 모든 인연과의 작별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끝>
거진 콘도의 발코니에서 거진항이...(위) 거진 콘도(아래)
귀로의 진부령 오르는 길(위)과 진부령고개(아래)
첫댓글 형님 의 금혼 여행기 감미 롭습니다.
모처럼의 이번 여수여행 죄송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