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 대하여
비 내리는 날에 우산을 쓰고 인사동 거리를 슬슬 헤맨다는 것은, 완전히 최백호의 노래같은 것이다.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짙은 섹소폰 소릴 들어보렴' 가사 그대로다.
종로2가 전철역 근처서 만나기로 한 서울 남강문학회 회원 모임에 가려고, 여름비에 우산을 쓰고, 탑골공원 옆탱이를 돌아가니 포장마차들이 먼저 눈에 띄인다.
첫 포장마차는 탕수육 2천원, 짜장면 2천원, 콩국수 3천원 써놓았다. 그 다음은 피냉면 4천5백원 '북촌만두집'. 그 다음 '싸립문 열고 들어가면'이란 집 술이름 이채롭다. 솔순주. 매화주. 죽통주. 문배주. 국화주들이. 그 옆 '깔아놓은 멍석집' 메뉴는 대추차, 오미자차, 갈화차, 수정과에, 지리산 머루주, 석류주, 대나무통술, 이강주, 진도홍주를 해물파전 조개탕과 함께 판다고 써놓았다.
인사동 네거리로 가다가 조금 못미쳐서 우로 꺽어지니, '최진규 약초밥상' 나온다. 이 집이 뭔 집인지 알만한 사람은 안다. 한국 최고 약초꾼 집이다. 만원에 삼채비빔밥 함초비빔밥 팔고 있다. 거기서 흘러간 영화 상영하는 옛날 허리우드극장 실버영화관 지나가니, 60년 전통의 '소문난 집'의 우거지얼큰탕 2천원, 해장국 2천원 글자가 보인다. 이건 완전히 쌍팔년도 가격이다.
그 다음에 1, 3, 5호선 전철이 만나는 종로 3가역 5번 출구가 나오는데, 거기 지하 '마산아구찜', 2층의 '부산초밥집' 민어탕, 보리굴비 메뉴가 입맛 다시게 한다. '광양한우집' 불고기 200그람 1만6천원 써붙인 것도 보인다. 그 다음 4번 출구 옆 복어집, '싱글벙글집'은 거사가 전에 <지구문학> 여사장과 한번 가본 곳이다. 복어탕, 지리, 복죽, 공히 8천원이요, 복어튀김 2만원 하는 곳이다. 생복탕은 1만6천원 한다. 그 앞에 '파전집'이 있다. 모듬, 해물, 녹두전은 1만원이요, 김치, 부추, 두부전은 6천원이다.
그 옆 좌측 골목쟁이 안으로도 들어가볼 필요 있다. '멍석집'의 갈치조림이 6천원이고, 고등어조림 5천원, 청국장 4천원이다. 그 옆에 전문 숯불구이집 동네가 있다. 고창집, 광주집, 마포집, 영동집, 호남선이 나란히 있는데, 막창구이 갈매기살 목살 삽겹살은 만천원이요, 차돌백이 늑간살은 만4천원이다. 마지막으로 '무주집'이 나오는데, 적어도 낭만이 뭔지 알려면 이 집은 반드시 알아둬야 할 집이다. 홍어애탕, 찜, 삼합, 사시미가 나온다. 판소리 하고, 시 쓰는 50대 호남여자하고 꼭 한번 가볼만한 집이다.
그리고 우리 모임 장소인 '박씨가 물고온 제비' 도착하니, 벌써 선배님 네 분이 좌정하고 있다. 이유식, 김형도, 강남구, 안병남, 후배 구자운 박사. 막걸리와 빈대떡도 이미 나와있다. 좀 있으니, 전 국악방송 사장 박준영, 전 언론인 한영탁 선배가 온다.
이유식선배는 61년도 대학 2학년 때 조연현씨를 통해 중앙문단에 평론으로 등단한, 현역 진주 문인 최고참이다. 현재 문인협회 고문이다. 김형도 선배는 서울공대 출신으로 수필집 9권을 낸 분이요, 강남구 소설가는 파성선생 산하의 '영문' 출신 고색찬란한 진주 소설가요, 안병남선배는 진여고 시절 미모와 공부 일등한 일을 아직도 자랑하는 분이다.
이날 우리는 수필에서의 사실과 문학적 가필에 관한 이야기, 소설 이론까지는 질서정연하게 잘 나갔는데, 끝에 가서 문단의 좌빨들 이야기 하다가 열받아 막걸리가 정량초과되고 말았다.
얼큰해지자, 한영탁 선배님이 노래 가사 8천개를 만든 반야월 선생 단골집에서 맥주로 입가심 좀 하고 가잔다. 방송인 송해씨도 거기 단골이란다.
'먹고 갈까 그냥 갈까'. 거긴 딱 1960년대로 타임머신 타고간 곳 같다. 쎅스폰 부는 사회자 아가씨 나름대로 멋있고, 아싸아싸 궁덩이 흔들고 일어나서 춤추는 아저씨들 보니 옛날 기분난다. 다 서울서 가요엔 남다른 애착 가진, 그 바닥에서 한가닥 하는 인물들인 모양이다. 우리 앞자리, 그 아줌마는 왜 손뼉을 치면서 어떤 이유로 자꾸 거사 얼굴을 빠안히 돌아보고 돌아보고 눈을 맞추며 웃어쌓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최백호 노래 생각났다.
샛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 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짙은 섹스폰 소릴 들어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청다선배가 노래 가사대로 그 여인에게 가더니 뭐라 한참 수작을 건다. 거사는 용인까지 가야할 처지라서 그림의 떡, 보고만 있었다, 그냥 생각내로라면 60년대로 팍 빡구해서 돌아가 밤새 놀았으면 좋겠더라마는....밤 10시에 신청곡 받는 곳이라는 바람에, 아쉽게 무대 올라가 마이크 한번 못잡고 돌아왔다.
첫댓글 거사의 인사동 나들이를 옆에서 본듯 합니다."먹고 갈래 지고 갈래"라는집도
들렸다가 오셨구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