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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와 역경(易經)
Ⅰ. 머리말
라이프니츠는 젊은 시절부터 세상을
뜰 때까지 중국에 관심을 가졌고, 여러 분야에 대해서 연구를 했다.
그는 역경 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특별히 부베(Joachim Bouvet,1656~1730) 신부가
라이프니츠가 발견한 이진법과 복희의 64괘가유사하다고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이진법이 창조의 비밀을 보여주는 수의 체계라고 믿고서 그것을 중국선교에 활용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중국에도 그와 똑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베는 중국에서 선교를 하면서
당시의 중국인들은 무신론자들이지만 아주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은
신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많다고 확신하고 그런 종류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런 연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역경 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의 연구는 조금 독특해서 기존의 주석서를 무시
하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접근하였다.
그는 복희가 역경 의 64괘를 만들었다고 믿고서 그 괘들의 비밀을 풀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해석은 조금 황당하다고 생각될 정도인데, 마치 잃어버린 문명을 찾는 다시 찾으려는 고고학자와 같은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열심히 부베가 64괘에서
비밀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라이프니츠가 보낸 이진법의 설명은
그에게 특별한 영감을 준 것이 분명하다.
거기다가 라이프니츠가 자신의 이진법에다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확신하였을 것
이다.
역경 에 대한 이 두 사람의 연구와 주장은 분명히
이 방면의 연구에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라이프니츠와
부베의 역경 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 대해서 살펴보고 그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하였다.
라이프니츠와 그가 교류했던 많은 인물들이 남긴
방대한 자료들에 접근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지금까지의
많은 연구 성과들 덕에 어느 정도 그 윤곽은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Ⅱ. 라이프니츠와 이진법
일반적으로 이진법은 라이프니츠가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스스로도 자신이 발견했다고 말했으나,
그보다 먼저 이진법을 말한 사람들은 이미 있었다.
해리엇(Thomas Hariot, 1560~1621)은 이진법과 그것의 사산법(四算法)에 대한 글들을 남겼다.
그러나 그 원고들에는 작성한 날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정확한 연대는 알 수가 없다.1)
사실 해리엇 전에도 이미 이진법을 말한 사람은 있었는데, 스코트랜드 귀족 네피어(John Napier, 1550~
1617)가 바로 그 사람이다.2)
그는 네피어봉이라 불리는 곱셉용 계산도구를 만들기도 하여서 이 분야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라이프니츠보다 먼저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도 1605년에
출판된 학문의 진보 에서
a와 b만을 사용하는 이진법적인 알파벳 체계를 소개하였다.
라이프니츠는 이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고 1666년과 1667년에 자신의 글에 사용도 하였다.3)
캐러무엘(Joh. Caramuel, 1606~1682)도 1670년 출판된 양머리의 수학 (Mathesis biceps)에서 12
진법과 이진법 등의 다양한 수의 체계들을 소개하였다.4)
예나대학의 교수였던 바이겔(ErhardWeigel, 1625~1699)도 1672년에 4진법 (Tetractys)를 출판하였고,5)
라이프니츠가 이진법을 연구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라이프니츠는 1698년 5월에
슐렌버그(Joh. Christ. Schulenburg)에게 보낸 편지와 1703년 4월 부베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진법을 자신이 발견한 것이 20년도 더 되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가 이진법을 발견한 시기는 대략 1673년 이후가 될 것이다.6)
호프만(Hofman)은 라이프니츠가 1672년에서 1676년까지 파리에 머물고 있을 때 갑자기 생각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7)
라이프니츠 자신이 말한 내용과 호프만이 주장하는 내용은 어느 정도 일치하는 점이 있어서 대체로 그
시기를 전후해서 이진법을 발견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가 이진법에 관해서쓴 글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은 1679년에 쓴 글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 글에서는 이미 그의 이진법이 완성된 것이어서 최초로 그것을 발견한 시기는 더 이전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8)
라이프니츠의 메달 도안
1697년 1월 2일 라이프니츠는 루돌프 아우구스트(RudolphAugust, 1627~1704) 대공에게 편지를 썼는데,9)
거기서 그는 기념주화 혹은 메달을 위한 도안을 그려서 메달을 주조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메달 도안의 내용이 바로 이진법이라는 것이 특이하다.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이진법을 설명하면서 이진법이 하나님의 창조를 표현한다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진법의 숫자 0은 무(無)를 나타내고 1은 완전한 신(神)을 나타내므로 이진법은 결국 하나님의 창조를
표현하는 수의 체계라는 것이다.
이것을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세속적 학자들은 거의 이해할 수 없고, 또 이교도들에게 전해주기도 어려운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사항
가운데 하나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전능에 의한 무로부터의
창조입니다.
수의 기원이 1과 0 또는 무로 간단명료하게 표상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무로부터의 창조를 이 초안보다 더
훌륭하게 보여 주고 증명해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연이나 철학에서도 실제로 이 비밀에 대한 보다 나은표상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초안했던 메달에 다음과 같은 글을 새겨 놓았습니다.
창조의 형상(IMAGOCREATIONIS)10)
라이프니츠는 이진법이 기독교의 교리를 잘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실제로 세계의 비밀을 보여주는 것이
라고 굳게 믿었다.
이진법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그가 보편언어나 보편 기호법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가장 간단한 두 개의 숫자로 모든 수를 다 나타낼 수 있는 이진법은 그가 구상하였던 보편문자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자신이 발견한
이진법이 중국의 선교에 도움을 줄 것이라 믿고 있었음을 이 편지는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선교사들을 통해서 중국의 황제가 수학을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보편적인 진리인 수학을 통해서
황제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루돌프 아우구스트 대공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로마에서 알게 된, 예수회의 일원이자 수학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중국에 머물고 있는
그리말디 신부에게 서신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말디 신부는 고아에서 중국으로 가는 도중에 저에게 서신을 보내 왔습니다.
저는 이 창조의 비밀에 관한 예시가 그 강대한 나라의 군주의 눈앞에서 기독교 신앙의 우월성을 보여주는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으로 이 수의 표상을 알릴 것을 희망해 왔습니다.
그리말디 신부를 통해 알게 된 중국 군주는 수학을 대단히 좋아하며, 그리말디 신부의 선임자인 베르비스트
(Ferdinand
Verbiest, 1623~1688)신부에게서 유럽의 계산법을 배웠다고 합니다.11)
라이프니츠는 1689년 4월에
로마에 가서 6개월 간 머물렀다.
그 때 그는 그리말디(Grimaldi) 신부를 만났고, 그로부터 중국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말디는 1669년에 중국에 도착하여 선교하다가 1686년에서 1691년 사이에 유럽에 다시 가 있었다.
그를 만나고 나서 라이프니츠는 그와 오랫동안 서신왕래를 하면서 중국에 대해서 공부하였다.
그가 그리말디에게 보낸 1689년 7월의 편지에는 30가지의 질문이 들어있어서 그의 관심이 어떠하였나를
잘 보여준다. 그 질문 가운데 몇 가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인공적으로 어떻게 불을 만드는가? 인삼은 정말로 효과가 있는가? 유용한 식물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쇠처럼단단한 나무에 대해서 알려주십시오. 종이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알려주십시오.
어떻게 일 년에 두 번 명주실을 얻는가? 염색약에대해서 알려주십시오. 비단에 어떻게 금을 입힙니까?
어떠한 바람에도 돌아가는 풍차에 대해서 알려주십시오.
이와 같은 질문들이 모두 개나 30 되는데, 그의 관심은 의학과 천문학 그리고 식물학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있다.12)
라이프니츠는 그리말디 신부로부터
당시 중국의 황제 강희(1654~1722)에 대해서 많은 것을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1697년에 출판한 중국의 새소식 (Novissima Sinica)에서 강희를 극찬하기도 하였다.
강희는 선교사들에게 서양의 수학을 배웠는데, 총명해서 선교사들이 감탄을 했던 모양이다.
라이프니츠는 강희가 수학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이진법을 소개하고 나아가서
기독교의 진리를 알리고자 하였을 것이다.
Ⅲ. 라이프니츠와 부베
중국의 새소식 의 내용을 보면 먼저
그의 긴 서문이 있고,1692년에 강희제가 중국에서 기독교의 선교를
인정했다는 소아레스(Soares) 신부의 보고서, 중국에서 출판한 베르비스트(Verbiest)신부의 천문학에
관한 책에서 발췌한 내용, 그리말디 신부가 1693년 고아(Goa)에서
라이프니츠에게 보낸 편지, 토마스
(Thomas) 신부가 북경에서 1695년에 보낸 편지, 중국에 가는 짧은 길을 설명한 것,
러시아와 중국의 평화
조약에 대한 젤비용(Gerbillon) 신부의 편지 등이 들어 있다.13)
이 책의 서문에서 라이프니츠는 중국의 문화를 높이 평가했으며, 특히 윤리도덕의 가르침은 유럽보다 훌륭
해서 유럽인이 오히려 중국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중국이 수학과 같은 자연과학은 유럽보다 뒤떨어지지만 정치와 윤리도덕의분야에서는 유럽을 앞서가고
있으므로 그 분야를 유럽은 배울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하여선교사를 보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도 실천철학을 가르치기
위해서 선교사를 유럽에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4)
1697년 10월에 중국의 새소식 을 읽은 부베가 편지를 했고, 자신이 그 해에 파리에서 출판한 중국 황제전
(Portrait historiquede l'Empereur de la Chine)을 함께 보내주었다.15)
이 중국황제전은 부베가 당시 중국의 황제인 강희제의 초상화와 그에 관해서 설명한 것인데, 루이 14세에게
바치기 위해서 준비한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1699년에 중국의 새소식 을 다시 출판하면서 이것을 추가했다.
부베는 프랑스 사람으로 예수회의 신부인데, 루이 14세가 중국에 파견한 6명의 과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
으로서 1688년에 중국의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는 황제의 측근에서 활동하다가 1693년 강희제의 사신으로
다시 프랑스에 가 있었다.
그는1699년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는데, 그 후에도 1707년까지 라이프니츠와 서신교환을 하였다.
그러나 부베는 1702년 11월에 라이프니츠에게 편지를 쓰고서 더 이상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라이프니츠는 그 후에도 5번이나 더 편지를 썼고, 부베가 답장을 보내지 않은 것에 대해 매우 실망하기도
하였다.
1700년 11월 8일에 부베가 라이프니츠에게 쓴 편지의 내용에는 그의 관심분야와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먼저 역경 에대해서 중국 나아가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책이라고 말하면서중국의 모든 과학과
철학의 근원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그는 역경에 대한 모든 해설서들에 대해서는 잘못되었으며 점을 치는 방법을 다루는 부분은 완전히
미신이라고 비판하였다.
부베는 또한 4000년 전 고대 중국 복희(伏羲)의 지식과 서양 고대 성인들의 지식 사이에 일치하는 점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도 다른 사람들이 주장했듯이 복희가 중국인이 아니고 전 인류에게 동일한 가르침을 베푼 인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세계의 각 지역에서는 그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만 결국 같은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면 이집트와 그리스에서는 헤르메스 트리메기투스(Hermes Trismegistus)라 부르고, 히브리 사람
들은 에녹(Enoch)라고 부르며, 페르시아 사람들은 조로아스터(Zoroaster)라고 부른다.16)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는 피리를 만들어 아폴론에게 주고, 조약돌로 점을 쳤으며, 음악‧문자․숫자․
천문․체육․올리브 재배법․도량형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부베는 그리스의 헤르메스가 바로 중국에서는 복희로 불리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학문과 과학의 원리가 역경 의 64괘에 들어있다고 믿게 된다.
그런데 후세의 중국인들은 그러한 역경 의 의미를 모두 잊어버려서 아는 것이 없다.
결국 현대의 중국인들은 종교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방면에 있어서도 고대의 중국인을 따라 갈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부베는 현대의 중국인들에게 역경 의 참다운 의미를 가르쳐줌으로써 그들에게 기독교도 전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부베는 모든 선교사들이 함께 고대 중국의 고전을 연구하고 옛것을 존중하는 중국의 전통을 사용하여
잘못된 현대의 해석을 극복하고 복희의 참된 철학을 회복하자고 제안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성의 빛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현대의 고전해석을 거부하고 그가 본래의 의미라고 생각하는 것을 제시하면서 부베는 고전의 참된
의미로 돌아가야 된다는 유학의 전통적인 방법을 따르고 있다.17)
고전의 참된 의미를 찾겠다는 주장은 실제로 사람들의 거부감을 감소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1701년 2월 라이프니츠는 부베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이진법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하였다.
특히 이 편지에는 이진법의 수와 십진법의 수를 함께 나란히 정리한 표를 5개나 싣고 있어서 역경 를 조금
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쉽게 이진법과 연결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제일 처음에 있는 표에서는 십진법의 수 8까지와 이진법의 수를 비교하였다.
여기서 왜 라이프니츠가 8까지 만 보여주었는지가 궁금하다.
라이프니츠가 역경 의 8괘를 생각하고서 8까지의 수를 이진법의 수와 비교한 것을 분명히 아닐 것이다.
두 번째의 표는 십진법의 수 0에서 31까지를 이진법의 수와 비교한 것이다.
이것도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64괘의 절반에 해당하는 32개의 숫자를 비교했다.
세 번째 표에서는 3의 배수들을 비교한 것이고, 네 번째 표는 제곱수를, 다섯 번째는 세제곱수를 비교한
것이다.
여기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역시 십진법의 수 1에서 31까지를 이진법의 수와 비교한 표이다.
역경 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 라이프니츠의 이 표를 보면 금방 64괘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편지를 읽은 부베는 라이프니츠의 이진법이 역경 의 64괘와 너무 닮은 것에 놀랐다.
그래서 부베는 1701년 11월에 라이프니츠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쓰게 된다.
그리고 64괘의방원도(方圓圖)도 함께 보내주었다.
부베와 라이프니츠는 모두 이러한 배열의 64괘를 복희가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송나라 때 소옹
(1011~1077)이 만든 것이다.
부베가 생각한 것은 64괘들에 있는 음효( )를 0으로 보고, 양효(━)를 1로 보면 괘들이수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부베가 이것을 곧바로 생각하게 된 것은 라이프니츠가 그의 이진법을 설명하면서 두 가지 기호를 표시할
때 막대기(|)를 “완전한 것”으로 표현하고, 영(0)을 “불완전한 것”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리라.
부베는 역경 을 연구하면서 양효(━)를 “완전한 것”으로 표현하고 음효( )를 “불완전한 것”으로 표현하는
것에 익숙해 있어서 라이프니츠가 설명한 기호를 바로 역경 의 기호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18)
또한 십진법 수 0에서 31까지를 이진법의 수와 나란히 나열해 놓은 표가 좋은 힌트가 될 수 있다.
이 편지에서 부베는 라이프니츠에게 자신이 보내준 64괘들을 이진법의 수들과 비교해 볼 것을 부탁하였다.
부베의 말대로 음효를 0으로 양효를 1로 생각해서 팔괘를 이진법의 수로 바꾸어 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 = 000(0), ☶ = 001(1), ☵ = 010(3), ☴ = 011(4),
☳ = 100(5), ☲ = 101(6), ☱ = 110(7), ☰ = 111(8)
부베는 또한 라이프니츠가 계획한 보편문자에 대해서도 호의적으로 언급하고 그것은 복희의 기호와도
통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또한 라이프니츠의 이진법과도 일치한다고 보았다.
부베에 의하면 가장 간단한 기호는 점(⋅)이고, 이것은 바로 제1원리이다.
다음에 나오는 것은 완전한 것과 불완전한 것인데.
이것은 각 각 (⋅⋅), (⋅⋅⋅)로 나타낼 수가 있다.
(⋅⋅), (⋅⋅⋅)는 다시 (━)와 ( )로 각각 나타낼 수 있다.19)
이와 같은 부베의 생각은 태극에서 음양이 나온다는 역경 의 설명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부베는 색채에 이 이론을 적용하고 있는데, 말하자면 모든 색채는 밝은 것과 어두운 것으로 환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밝은 것은 양(━)이 될 것이고 어두운 것은 음( )이 된다.
부베는 8괘를 4가지 색채로 분류하여서 ☰(乾), ☱(兌)는 흰색, ☲(離), ☳(震)은 노랑색, ☴(巽),
☵(坎)은 푸른색, ☶(艮), ☷(坤)은 검은색에 배당하였다.
부베는 복희가 팔괘를 만들었으며 이것이 모든 과학의 기초가 된다고 소개하였다.20)
부베는 8괘와 64괘를 색채에 적용해서 64가지의 색채를 8가지로 분류할 수 있고 그것들은 다시 8가지
등급으로 분해될 수 있다고 하였다.21)
이 편지에서도 부베는 복희가 그리스의 헤르메스와 같은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증명하려고 노력
하였다.
그는 伏羲(복희)라는 이름을 분석하여서 그가 헤르메스와 같은 인물임을 밝히려하였다.
伏자는 사람(人)과 개(犬)가 결합한 형태를 하고 있는데, 부베는 헤르메스를 머리는 개이고 사람의 몸을
가진 모습으로 표현한다고 주장했다.
羲자는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니 복희는 희생을 바치는 사람이라고 해석하였다.22)
말하자면 복희는 정치적으로 군주이면서 종교적으로는 제사장이라는 것이 부베의 견해다.
부베는 4600년 전에 살았던 복희가 창조에 대해서 알았고 그것이 복희의 기호에 나타나 있다고 생각했다.
64괘의 효들이 6개로 구성된 것은 6일 동안 창조했기 때문이고, 제7효가 없는 것은 안식일에 해당한다.
그리고 하늘과 땅이 가장 먼저 생겼는데, 이것은 양효와 음효가 제일 먼저 생겨난 것과 같다.23)
그는 또한 고대 중국인들이 신이 창조자이며 만물들의 원리라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의
비밀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고대의 경전들을 보면 거기에는 죄에 대한 지식이 있으며, 악을 징벌하는 것, 천사들, 태초의 사람, 죄로
인한 인간본성의 타락, 홍수, 강생(降生), 예수님의 인간 구원 등에 대한 많은 구절들이 나온다고 주장
하였다.24)
그는 중국의 문자에서도 고대 중국인들이 신을 알고 있었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노력을 했다.
예를 들면 한자 가운데 가장 간단한 글자인 주(丶)자는 그 발음이 주(主)와 같아서 고대에는 그 의미가
주인이라고 해석하였다.
또 하나의 가장 간단한 글자는 일(一)인데 이것은 하나를 의미하고 신의 유일함을 뜻하고 있다고 해석하
였다.
그리고 주(主)자는 주(丶)와 왕(王)으로 이루어진 글자이니 신을 의미한다고 풀이하였다.25)
부베는 또한 중국문자를 만든 사람은 중국인이 아니고 세계의 조상들이라고 보았으며, 이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고대 중국문자와 이집트어 사이에 음과 뜻의 유사성이 있었을 것이라 가정하였다.
그는 언어의 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러한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믿었다.26)
라이프니츠가 부탁한 중국어의 정보에 대해 부베는 비스델루(Fr. Claude de Visdelou, 1656~1737) 신부가
중국어 사전을 유럽어로 번역하고 있는데 아직 시작 단계라 대답하면서, 자기도 중국어를 분석하는 글을
쓰고 싶은데, 일이 많아서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중국어 사전을 만주어로 번역하는 대로 곧 선교사들이 라틴어나 불어로 번역할 것이라고 썼다.27)
부베는 그들의 발견을 강희제에게 소개하기 위한 가장 좋은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좀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당시에부베는 전에 황제가 서양의 과학에 많은 관심을 보일 때만큼 그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부베는 라이프니츠에게 황제가 요구했을 때 완전하게 증명할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가질 수 있도록 좀 더
정보를 달라고 주문하였다.28)
부베의 다음 편지는 1702년 11월에 쓴 것으로 앞의 편지보다 간단하고 내용도 중복된다.
부베는 중국의 고전에서 기독교적인 내용을 찾는데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중국의 고전에서 찬된 종교의 거의 완전한 체계가 발견될 것이라고 믿었고, 그 체계에는 예언적인
방식으로 말씀의 육화에 대한 신비, 구세주의 삶과 죽음, 신성한 성직자의 주요한 작용 등이 들어있다고
믿었다.29)
중국인들은 고전의 지혜와 이 문자들의 상형문자적인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거의 2000년 동안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결국 교리의 피상적인 부분만 남아있을 뿐이다.
잃어버린 지식의 핵심은 보편적이고 중국인들을 앞서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이 핵심을 다른 이교도들보다 더 성실하게 보존하고 있다.30)
부베는 다시 중국고전에 대한 새로운 주석서들과 사전을 편찬하려는 기획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이것들이 모두 한 때 종교의 자연법과 동의어였던 고대 중국의 보편과학을 재건하려는 자신의 이론들을
입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을 위해서 여러 선교사들의 도움이 필요하니, 베르주(Frs. Verjus)와 셰즈(La Chaise)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서 프랑스 왕실에서 이 계획을 위한 자금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라이프니츠에게 부탁하였다.31)
Ⅳ. 라이프니츠와 역경
부베가 1701년 11월에 쓴 편지는 1703년 4월 1일에 베르린에 있던 라이프니츠에게 전달되었다.
이 편지는 거의 18개월이나 걸려서 라이프니츠에게 전달이 되었는데, 이 편지가 영국과 프랑스를 거치는
바람에 늦어졌다. 편지를 읽은 라이프니츠의 놀라움은 컸던 모양이다.
그는 4월 2일이나 3일경에 11장이나 되는 답장을 썼고, 예수회 신부 보타(Carlo Mauritio Vota)에게도
4월 4일 이 사실을 알리는 편지는 썼으며, 4월 7일에는 비뇽(Abbé Jean Bignon)에게도 편지를 보내고,
파리의 학술원에 보내는 논문도 함께 그에게 보냈다.32)
부베에게 보낸 답장에서 라이프니츠는 발견의 의미를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들은 복희를 고대 중국의 군주로 보고 있으며, 세계에 알려진 철학자로 그리고 중국제국과 동양
과학의 창립자로 믿고 있습니다.
이 역경 의 그림은 오늘날 세계에서 찾아낸 과학에 관한 최고의 기념물입니다.
더구나 이 과학은 내가 보는 견지에서는 4000년 이상 고대의 것으로 수천 년 동안 그 의미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나의 새로운 산술법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과 꼭 필요할 때, 즉 귀하가 이 괘들을 해독하려고 노력
하고 있을 때, 내가 산술법에 대해 귀하에게 편지를 써야만 했던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입니다.
나는 귀하에게 고백하는 것이지만 만일 내가 이 이진법 산술을 발명하지 않았다면 이 64괘 체계 즉 복희의
괘상도의 목적을 통찰하지 못하고 막연하게 장시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33)
이 인용문에 대해서는 사실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
이 번역문은 김용정(金鎔貞)의 「라이프니츠의 普遍記號法思想과 易의 論理」라는 논문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였지만 다른 부분이 있다.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그것이 나의 새로운 산술법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과 꼭 필요할 때, 즉 귀하가 이
괘들을 해독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내가 산술법에 대해 귀하에게 편지를 써야만 했던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입니다”라는 문장이다.
원래 논문에는 이 부분이 “그것이 나의 新算術과 완전히 일치하고 貴下가 이 기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을
때, 때마침 貴書翰에 의해서 이것을 적당한 시기에 해답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로 되어 있다.
이 글의 내용을 보면 64괘와 이진법이 같다는 것을 라이프니츠 자신이 발견한 것처럼 되어있다.
그러나 원래 편지의 내용은 그렇지 않다. 실제로 라이프니츠가 그것을 발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이 마치 발견한 것처럼 말할 수는 없다.
아마 김용정의 논문에 나오는 라이프니츠의 편지 내용은 그 출처가 일본 학자 고라이 긴조(五來欣造)의
저서 儒敎の獨逸政治思想に及ぼせる影響 일 것이다.34)
그리고 이부분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 사람들은 아이톤(E. J. Aiton)과 시마오(Eikoh Shimao) 두
사람이다.
이들은 공동으로 1981년에 발표한 논문(Gorai Kinzō's Study of Leibniz and I ching Hexagrams)에서이
부분을 거론하였다. 이 두 사람은 고라이 긴조가 라이프니츠와 부베 사이에 오고간 편지를 다 보지 못해서
라이프니츠가 64괘와 이진법의 유사성을 발견한 것으로 오해했다고 주장하였다.
고라이 긴조는 동경대학교에서 프랑스 법학을 전공하고 1900년 졸업을 하였고, 1904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프랑스에서 7년, 독일에서 2년 공부하였다. 그
는 1907년 하노버 도서관에서 부베가 라이프니츠에게 보내준 64괘방원도를 보았다.
고라이 긴조는 일본으로 돌아와 1919년 와세다대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1929년에 출판한 儒敎の獨逸政治
思想に及ぼせる影響 이라는 책으로 1930년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책에는 부베와 라이프니츠의 편지 내용들이 상당히 많이 실려 있어서 이 분야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
었다.35)
1703년 4월에 보낸 답장에서 라이프니츠는 대체로 복희에 대해 부베가 그에게 설명한 것을 그대로 수용
하고 있고, 복희가 64괘를 그렸으며, 부베가 보내준 64괘방원도(六四卦方圓圖)도 그가 그렸다고 믿었다.
부베가 이미 설명하였듯이 복희가 그린 64괘의 참된 의미를 후세의 중국인들은 잃어버렸는데, 이제야
부베와 자신이 그것의 참된 의미를 찾았다고 믿었다.
라이프니츠는 4000년 전에 복희가 이진법을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그가 하나님의 창조를 이미 알고 있었
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더욱 놀라고 반가웠을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이 편지에서도 역시 0과 1만을 사용하는 이진법
이 창조를 표현하는 것으로써 종교를 설명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보았으며, 그것을 황제에게
설명할 만한 가치가있다고 믿었다.
라이프니츠는 8괘도 창세기의 설화와 연결을 시켜서 해석하였다. 그 설명은 이렇다.
“팔괘 즉 중국인이 근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8개의 선도(線圖)는 복희 스스로가 창조의 눈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믿게 합니다.
즉 모든 것이 1과 0에서 오는 것으로서 이 관계는 창세기의 설화와 결부됩니다.
0은 하늘과 땅의 창조에 앞서는 것으로서 공허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7일 동안 각각의 날에 있어서 이미 존재 한 것, 창조된 것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첫날의 시작에는 1 즉 신이 존재했습니다. 둘째 날의 처음에는 하늘과 땅이 창조되었습니다.
끝으로 일곱째 날의 처음에는 모든 것이 이미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은 가장 완전한 안식일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창조되고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7은 0이 없이 111로 씁니다.
그리고 0과 1로 이와 같이 썼을 때만 우리는 성스러움으로 간주되는 일곱 번째의 완전함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또한 그것의 글자가 삼위일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합니다.”36)
실제로 팔괘를 십진법의 수로 나타낸다면 0에서 7까지로 나타낼 수 있는데 이것을 창세기의 설화를 가지고
해석을 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 0은 무를 나타내고 1은 신을 나타낸다. 여기서 일곱째 날은 완전한 날인데 이것을 이진법의
수로 나타내면 111이 되니 신이 셋이 있게 된다.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삼위일체가 7이라는 숫자에 들어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부베가 그의편지에서 중국인과 히브리인들이 모두 7을 신성하게 여긴다고 한것과 복희가 7을
신성하게 생각했다는 말에서 나왔을 것이다.
부베는 라이프니츠에게 목판본의 64괘방원도를 보내주었는데, 라이프니츠는 그것을 자신의 이진법으로
읽는 방법을 부베에게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64괘들을 원형으로 나열한 그림과 그 원형 안에 네모나게 배열한 그림 두 개로 이루어져 있다.
원형으로 배열된 도형에서 제일 아래에 있는 괘는 곤괘( )이다.
라이프니츠는 이것을 000000으로 보고 바로 오른 쪽에 있는 박괘( )를 000001로 읽었다.
오른 쪽 위로 계속 올라가면 제일 위에 구괘( )가 있는데, 이것을 이진법의 수로 나타내면 011111가 되고
십진법의 수로 나타내면 31이 된다.
그 다음의 괘는 다시 원형의 밑으로 내려 와서 복괘( )가 되는데, 이괘는 이진법으로는 100000가 되고
십진법으로는 32가 된다.
여기서부터는 시계방향으로 올라가는데 제일 위에 가면 건괘( )가 나온다.
건괘는 이진법으로 111111가 되고 십진법으로는 63이 된다.
원형도의 가운데는 좌우 각각 8개의 괘들로 이루어진 정사각형이 있는데, 여기서는 제일 윗줄의 왼쪽에
곤괘가 있고, 다음에 박괘가 있다.
제일 오른 쪽 끝에 이르면 다음 줄로 내려가서 다시 가장 왼쪽에서 출발해서 오른 쪽으로 진행한다.
제일 아랫줄의 오른 쪽 끝에 있는 괘가 건괘가 있다.
부베는 라이프니츠에게 64괘방원도를 보내면서 거기에다가 그리스어로 ἀνω(위)와 κάτω(아래)라고 써넣
어서 보기에 좋도록 했다.
라이프니츠는 그 그림에다가 아라비아 숫자를 모두 붙였다.
그 숫자를 보면 가운데 있는 64괘에는 정상적으로 숫자를 썼지만 원형으로 된 64괘는 한자로 된 괘들의
이름과는 반대 방향으로 되어있다.
그렇다면 . 라이프니츠가 원형으로 된 괘들의 위와 아래를 혹시 혼동하였는가?
라이프니츠의 설명을 보면 그는 분명하게 원형의 안쪽에 있는 효가 가장 밑에 온다는 것을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상하게도 설명에서는 곤괘( ) 다음에 박괘( )를 그리지 않고 복괘( )를 그려놓고서 이진법
으로 000001로 읽었다.
아마 이것은 원형으로 된 64괘는 안쪽이 괘의 아래가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옮겨놓았
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37)
라이프니츠는 1703년 4월 7일에는 비뇽(Abbé Jean Bignon)에게 편지를 쓰면서, 파리 학술원에 보내는
논문도 썼다.
이 글에서도 라이프니츠는 복희가 4000년 전에 만들었던 팔괘가 이진법의 수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점을
설명하면서, 부베와 자기가 그것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수천 년 동안 중국인들은 복희가 만든 64괘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는데, 그것을 자신들이 발견했다고
자랑한다.
라이프니츠는 유럽에 십진법을 도입한 사람이 실베스테르 2세(재위 999~1003)라는 사실도 설명한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복희가 중국문자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이 수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가 중요
하고 그것을 지금 부베 신부가 연구하고 있다고 전한다.
라이프니츠가 중국문자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보편문자의 연구와 관련이 있는데, 중국문자에서 그것의
가능성을 찾았다.
라이프니츠는 1716년 세상을 뜨기 전까지 쓴 중국인의 자연 신학론 에서도 역시 복희의 64괘와 이진법을
설명하였다.
여기서도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부베와 자신이 복희 64괘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했다고 강조하고,
이진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그 본래의 의미를 모두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자신들이 그것을 알게 되었다고 자랑한다.
결국 중국의 현대인들은 고대인들보다 종교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종교에 있어서도 뒤떨어져 있다고 주장
한다.
라이프니츠는 다른 선교사들과 같이 현대의 중국인들이 무신론자들이고 유물론자들이라 생각했지만
고대의 중국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믿었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복희의 64괘이기 때문에 라이프니츠는 기뻤을 것이다.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또한 뮐러(Müller)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가 아랍인 압달라 바이다베우스(Abdalla Beida
vaeus)가 중국에 대해서 쓴 글에 주석을 달아 발간하였다고 하였다.
이 아랍인 저자는 자신의 책에서 복희가 특이한 방식의 글쓰기, 산술, 축약, 계산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책을 통해 고대 철인 왕의 문자가 수로 환원된다는 자신의 설명을 확증해주고 있다고 라이프니츠는
믿었다.38)
Ⅴ. 맺음말
이상에서 보았듯이 라이프니츠의 역경 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주로 그의 이진법과 관련된 부분에 한정되어
있다.
그는 부베로 부터 복희의 64괘가 이진법과 유사하다는 연락을 받고 나서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많은 글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였다.
아직 라이프니츠의 편지와 그와 관련된 인물들의 글들이 완전하게 공개되고 연구되지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
많은 사람들의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진법이 하나님의 창조를 표현하고 있다는 라이프니츠의 신념은 현대에 와서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있는
현실로 나타났다.
현대는 디지털의 시대라고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든 것이 컴퓨터에 의해서 이루지고 있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의 이진법은 이제 컴퓨터로 나타나서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라이프니츠는 이진법이 창조의 비밀을 나타낸다고 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시대가 오리라 짐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독교 전파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했던 이진법이 이제 종교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컴퓨터로 나타나서
종교보다 더 널리 전파되고 있다.
중국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은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컴퓨터는 중국에서 성공적으로 전파되고 있다.
가장 간단한 두 개의 기호로 모든 것을 다 나타낼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이미 역경 의 64괘들에 잘
나타나고 있다.
부베와 라이프니츠는 당시에 이미 그런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었기에 그것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다.
당시에 중국인들은 아직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없었다.
물론 중국인들도 고전의 참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꾸준히 하여 왔으나 역경을 라이프니츠와 같이
해석한 사람은 없다.
역경 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은 라이프니츠의 생각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음효와 양효 두 가지 기호
만으로 64괘를 만들어낸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곧 모든 것을 두 가지 기호만으로다 나타낼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 하나를 기억하고 계산하는 시대에는 전혀 효율적이지 못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기억
하고 계산하는 컴퓨터에게는 아주 효율적인 방법이 된다.
어쩌면 역경 은 컴퓨터 시대가 올 것을 미리 예언한 책이었는지도 모른다.
부베와 라이프니츠가 그 진정한 의미를 찾기 전까지 그것은 점술의 책으로 철학의 책으로 변질되어 전해
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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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cher, Hans J., Die Hauptschriften zur Dyadik von G.W. Leibniz,Frankfurt am Main, 1973.
【Abstract】
Leibniz and I ching
Ahn, Jong-Su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study Leibniz's interest in the 64hexagrams of the I ching.
It was Bouvet who first identified the hexagrams of the I ching with the binary numbers. Before it,
Leibniz explained to Bouvet the principles of his binary arithmetic in his letter of 15 February 1701.
Bouvet immediately recognize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hexagrams and the binary numbers
and he announced his discovery in a letter written in Peking on 4 November 1701. With this letter he
sent to Leibniz a woodcut diagram of the Fu-Hsi arrangement of the hexagrams, which provides the
key to the analogy.
Leibniz readily accepted the identification of the hexagrams with his binary numbers. He had no
reason to doubt the antiquity of the Fu-Hsi arrangement that Bouvet had sent him. Leibniz believed
that Fu-Hsi, the most ancient prince and philosopher of the Chinese, had understood the origin of
things from unity and nothing, i.e., his mysterious figures reveal something of an analogy to Creation.
Leibniz believed that his binary system presents an instance of how God created the world out of the
units of 0(nothing) and 1(God).
Leibniz deduced from the identification of the hexagrams with his binary numbers that Fu-Hsi had k
nowledge of the science of combinations which the later Chinese had lost. It seemed clear to Leibniz
that the ancient Chinese surpassed the moderns not only in piety but also in science.
1) Hans J. Zacher, Die Hauptschriften zur Dyadik von G. W. Leibniz,Frankfurt am Main, 1973, p. 21,
참고.52 10
2) 같은 책, p. 23, 참고.
3) 같은 책, p. 29, 참고.
4) 같은 책, p. 30.
5) 같은 책, p. 32, 참고.
6) 같은 책, p. 10
7) 같은 책, p. 9
8) 같은 곳.
9) 이 편지는 한국어로 번역이 되었다. G. W.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가 만난 중국 , 이동희 편역,
(서울: 이학사, 2003), pp. 25~32.
10) G. W.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가 만난 중국 , 이동희 편역, (서울: 이학사,2003), p. 26.
11) 같은 책, p. 27.
12) Leibniz, G. W., Das Neueste von China(1697): Novissima Sinica, hrsg.u. übers. v. H. G.
Nesselrath u. H. Reinbothe, Köln, 1979, pp. 83-86.
13) 같은 책, 참조.
14) 같은 책, p. 19.
15) Mungello, D. E., Leibniz and Confucianism: The Search for Accord,(Honolulu: The University
Press of Hawaii, 1977), p. 42.
16) 같은 책, p. 47.
17) 같은 책, p. 48, 참조.
18) Hans J. Zacher, Die Hauptschriften zur Dyadik von G.W. Leibniz,Frankfurt am Main, 1973, p.
110, 참고.
19) 같은 책, p. 53, 참조.
20) 같은 곳, 참조.
21) 같은 책, p. 54.
22) 같은 곳.
23) 같은 책, p. 55.
24) 같은 곳.
25) John Ho, Quellenuntersuchung zur Chinakenntnis bei Leibniz undWolff, Hongkong 1962, pp.
42~43, 참조.
26) Mungello, D. E., Leibniz and Confucianism: The Search for Accord,(Honolulu: The University
Press of Hawaii, 1977), p. 56.
27) 같은 곳.
28) 같은 곳, 참조.
29) 같은 책 , p. 59.
30) 같은 곳, 참조.
31) 같은 책, p. 60, 참조.
32) Hans J. Zacher, Die Hauptschriften zur Dyadik von G.W. Leibniz,Frankfurt am Main, 1973, p.
116, 참고.
33) Hans J. Zacher, Die Hauptschriften zur Dyadik von G.W. Leibniz,Frankfurt am Main, 1973, pp.
276~277. 김용정, 「라이프니츠의 普遍記
號法思想과 易의 論理」 주역의 현대적 조명 , 한국주역학회, 범양사,1992, pp. 300~301. E. J. Aiton and
Eikoh Shimao, ‘Gorai Kinzō'sStudy of Leibniz and I ching Hexagrams’, in: Annals of Science,38(1981),
p. 86.
34) 五來欣造, 儒敎の獨逸政治思想に及ぼせる影響 , 東京, 1929, p. 444 참조.
35) E. J. Aiton and Eikoh Shimao, ‘Gorai Kinzō's Study of Leibniz and Iching Hexagrams’, in: Annals
of Science, 38(1981), pp. 75~76, 참조.
36) Hans J. Zacher, Die Hauptschriften zur Dyadik von G.W. Leibniz,Frankfurt am Main, 1973, p.
285. E. J. Aiton and Eikoh Shimao,‘Gorai Kinzō's Study of Leibniz and I ching Hexagrams’, in:
Annals of Science, 38(1981), p.89.
37) Hans J. Zacher, Die Hauptschriften zur Dyadik von G. W. Leibniz,Frankfurt am Main, 1973, p.
277, 참조, 72 10
38) G. W.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가 만난 중국 , 이동희 편역, (서울: 이학사,2003), p. 161.
첫댓글 라이프니츠가 중국에 다녀갔다더니
간접적으로 심도 있게 다녀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