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ttps://blog.naver.com/atena02/221462359561
미군이 남한에 처음 들어왔을 때 남한의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독일의 모습을 연상케 할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1945년 11월 남한에서 난립한 좌우파 정치 단체는 205개에 달하였다. 또한 일본이 패망한 뒤 대거 귀국한 광복군, 일본 육사, 학병, 만주군 출신들을 중심으로 사설 군사 단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그 수만 해도 30여 개가 넘었다. 대표적인 단체로 우파 계열에는 김석원, 이응준, 원용덕 등 일본과 만주군 장교 출신들이 조직한 조선임시군사위원회, 학병 출신들이 조직한 학병단, 광복군 출신들이 조직한 대한국군준비위원회, 대한민국군사후원회 등이 있었고 좌파 계열에는 김원봉의 중앙육군사관학교를 비롯하여 학병 동맹, 조선국군준비대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조선국군준비대는 1945년 말 기준으로 무려 상비대원 15000명, 예비대원 6만명에 달하는 거대한 세력을 자랑하였다. 이들은 무정부의 혼란 속에서 백주 대낮에도 집단 난투극을 벌이기 일쑤였다. 미군이나 경찰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나마 미 군정이 무기 소지를 엄중히 단속한 덕분에 시가전이 벌어지는 일만은 피할 수 있었다.
남한의 혼란은 미국이 자초한 결과였다. 미 군정은 남한을 통치할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조선인들의 협조를 얻기보다는 자신들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그 틀 안에서 조선인들을 하수인으로서 써먹기를 원하였다. 김구의 임정이나 여운형의 건준 등 남한 내 정치적 구심점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민족주의 단체들은 배척당하고 조선총독부를 활용하는 쪽을 선택하였다. 덕분에 일제의 끄나풀 노릇을 하던 관료들과 친일 경찰들 대부분이 자신의 자리를 그대로 유지한 채 새로운 상전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과거의 경력은 죄다 없었던 일이 되었다. 이것은 소련이 조급하게 자신들의 방식을 강요하기보다는 적당히 조선인들과 타협하되 차근차근 공산화에 나섰던 것과는 정반대의 방식이었다. 이 때문에 남한의 혼란은 한층 가중되었다.
물론 인재가 부족한 현실에서 구 세력과의 타협은 일정 부분 불가피한 부분이 있었다고 해도 남한 실정을 무시하는 미 군정의 일방적이고 고압적인 행태가 남한 사람들의 불만과 저항을 초래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애초에 트루먼 행정부가 남한을 점령한 목적 자체가 남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한 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었으며 남한은 미국의 식민지였다. 미 군정의 모든 정책은 필리핀, 쿠바 등 식민지에서 했던 방식을 그대로 남한에 써먹는 식이었다. 이 점이 트루먼 행정부에서 유일하게 일관된 남한 정책의 기본 원칙이었고 남한을 유엔에 넘기고 손을 뗀 뒤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군대의 창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한의 국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 군정을 보조하여 치안 유지에 활용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의 남침 준비와 남북한 군사력 격차가 급격하게 벌어지는데도 트루먼 행정부가 모르쇠로 일관한 채 남한군의 증강을 억제한 것도 일부 좌파 수정주의자들의 성급한 주장마냥 남침을 유도하기 위함이 아니라 미국이 남한군을 식민지 군대로 여기는 구태의연한 사고를 버리지 못한 탓이었다.
사전 준비 없이 급작스럽게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극심한 인력 부족으로 행정 요원을 확보하는데도 큰 애로를 겪어야 했다. 1946년 3월 미 제40사단이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남한에 주둔한 미군은 제6사단과 제7사단 2개 사단 등 약 4만4천여명 정도였다. 그 중에서 제7사단이 한반도 중부 지역을, 제6사단이 한반도 남부 지역을 담당하였다. 또한 2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 경찰들이 있었다. 1948년 8월에 오면 45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일제 시대에 남북한을 모두 합하여 2만 명(일본인과 조선인이 각각 1만 명) 정도였던 것에 비해서도 훨씬 많은 숫자였다. 무장에서도 칼빈 소총과 기관총, 야전 전화기, 군용 차량 등 일제 시대보다 훨씬 중무장하는 등 사실상 준군사조직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도 갈수록 악화되는 남한의 치안을 유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바꾸어 말하여 남한을 경찰 국가로 만들어야 할 만큼 미 군정의 통치는 최악이었다.
미 군정은 남한에 상륙한 직후부터 미군의 보조와 치안 유지를 위하여 남한군의 창설에 나섰다. 미 군정 헌병 사령관으로 치안 총책임자였던 로렌스 쉬크(Lawrence E. Schick) 준장은 아놀드 군정 장관에게 건의하여 1945년 11월 13일 미 군정 산하에 국방사령부를 설치하였다. 국방사령부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국방부가 되었다. 초대 국방사령관이 된 쉬크는 5만명 규모의 국방군을 편성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맥아더 사령부에 제출하였다. 육군은 1개 군단 3개 보병사단으로, 공군은 2개 전투비행대대 및 1개 수송비행대대로, 해군은 5천명 규모의 해안경비대로 구성하여 1946년 말까지 편성을 완료한다는 내용이었다.
맥아더는 쉬크의 계획을 합참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합참은 미소 공위가 열리는 판에 미국이 남한에서 군대를 만드는 것은 자칫 소련의 오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거부하였다. 그 대신 경찰을 보조하기 위한 민간 경비대의 창설은 허락하였다. 하지 중장은 미 군정 군사 고문이었던 이응준의 조언을 받아들여 당초 계획의 절반인 25,000명 규모의 필리핀식 경찰 예비대를 편성한다는 이른바 '밤부 계획(Bamboo)'을 수립하였다. 이응준은 일본군 대좌 출신으로 광복군 사령관이었던 지청천과는 일본 육사 동기였다. 그는 소위 시절 지청천과 함께 중국으로 탈출을 모의했지만 도중에 포기하고 일본군에 남아서 중일전쟁에 참전하였다. 태평양전쟁 중에는 천황을 찬양하고 학도병 지원을 강요하는 등 대표적인 친일파이기도 했다. 그는 대한민국 군대에서 첫번째 장성이 되었고 초대 육참총장과 제3사단장, 제5사단장, 육군대학장 등을 역임하였다.
1. 남한 각 도에 1개 중대 씩 8개 중대를 설치한다. 편성은 중화기가 없는 미군 보병 중대의 편제를 따르며 정원은 장교 6명, 사병 225명이다.
2. 각 도에 중대를 편성할 때에는 정원의 20%를 초과 편성한다. 중대의 편성과 훈련이 끝나면 초과 병력으로 새로운 중대를 편성한다.
3. 중대를 확대하여 대대로, 그리고 대대를 확대하여 각 도에 1개 연대를 편성한다.
1946년 1월 15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태릉에 있는 일본군 지원병 훈련소에서 제1연대 제1대대 A 중대가 창설되었다. 대대장은 존 마셜(John T, Marshall) 중령이, A중대의 중대장은 일본군 소좌 출신으로 나중에 대한민국 육해공군 총사령관이 되어 한국전쟁을 맞이하게 되는 채병덕 정위(대위)가 각각 임명되었다. 1천 명이 지원하여 구두 심사와 신체 검사를 거친 뒤 187명이 최종 선발되었다. 입대자들은 "우리 조선국방경비대는 부여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 것이며 장래 합법적으로 수립되는 정부에 충성을 다할 것"이라고 맹세하였다. 조선국방경비대(영어로는 '경찰 예비대', Korean Constabulary Reserve)의 탄생이었다.
2월 7일에는 조선국방경비대 총사령부가 설치되어 마셜 중령이 초대 사령관이 되었으나 실제 지휘는 만주군 중교(중령) 출신인 원용덕 참령(소령)이 사령관 대리를 맡았다. 채병덕은 참령(소령)으로 진급하여 대대장이 되었다. 1946년 12월 23일에는 송호성이 미군의 뒤를 이어서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경비대 총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송호성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경비대 간부진에서 보기 드물게 김구의 임정 계열 독립운동가였다. 바오딩 군관학교와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하였고 북벌전쟁과 중일전쟁에 참전하여 중국군 소장(원스타)까지 진급하여 중국군에서도 정예로 이름난 제88사단 부사단장과 기병 제1사단 부사단장,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처장, 광복군 제1지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국방경비대 초기 모습. 군모에 달린 모표를 제외하고는 일본군과 미군의 복장을 뒤섞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총 또한 미군의 칼빈이나 M1소총 대신 구식 38식, 99식 소총으로 무장하는 등 경찰보다도 무장과 장비가 빈약한 실정이었다. 1946년 6월 이후에야 미제 무기가 점진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그조차도 한 세대 이전의 잉여무기였다. 그동안의 관념적인 생각과 달리 스탈린 또한 북한에게 최신 무기 대신 중고 무기를 넘겨주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남한군보다는 사정이 훨씬 나았다.
4월 1일까지 남한 8개 도에 8개 연대가 창설되었다. 편제는 3각 편성으로, 1개 연대는 3개 대대, 1개 대대는 3개 중대로 구성하는 식이었다. 초기 인원은 3천여 명 정도였다. 이로서 대한민국 군대가 첫발을 내딛었다. 1946년 7월 2일에는 제주도가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어 도로 승격되었고 "1도에 1개 연대"라는 밤부 계획의 원칙에 따라서 11월 16일 제9연대가 창설되었다. 하지만 조선국방경비대는 정규전을 상정한 정식 군대가 아니라 폭동 진압을 위한 전투 경찰에 가까웠다. 따라서 무기는 일본군이 남기고 간 낡은 38식과 99식 소총이 전부였고 중화기는 없었다. 훈련 역시 제식과 총검술 같은 기초 훈련과 폭동 진압 훈련만을 받았다.
연대명칭 | 창설일 | 초대 중대장 | 주요 간부 | 주둔지 |
제1연대 | 1946.1.15 | 채병덕 | 정일권, 장석륜, 강문봉, 백인엽 | 경기 양주 |
제2연대 | 1946.2.28 | 이형근 | 심언봉, 정진완, 신상철 | 충남 대전 |
제3연대 | 1946.2.26 | 김백일 | 김종오, 이한림, 정래혁, 백인기 | 전북 이리 |
제4연대 | 1946.2.15 | 김홍준 | 조암, 최홍희 | 전남 광산 |
제5연대 | 1946.1.19 | 박병권 | 이치업, 오덕준 | 경남 부산 |
제6연대 | 1946.2.18 | 김영환 | 하재팔, 김완용, 장도영 | 경북 대구 |
제7연대 | 1946.2.7 | 민기식 | 문용채, 오일균, 이희권, 최창언 | 충북 청주 |
제8연대 | 1946.4.1 | 김종갑 | 황헌친, 김형일 | 강원 춘천 |
미 군정이 국방경비대를 조직한 진짜 속내는 정치 깡패나 다름없는 사설군사단체들을 한 곳에 끌어모아서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미 군정은 "남한에서 미국이 인정하는 무장 단체는 오직 국방경비대 밖에 없다."라고 선언하고 모든 사설군사단체의 해산령을 선언하였다. 대한민국 건군의 주역을 기대했던 광복군을 비롯하여 사설군사단체들은 격렬하게 반발했지만 미 군정의 뜻을 꺾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국방경비대에 들어가거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남한의 정세는 찬탁과 반탁, 남북 총선거와 단독 선거를 놓고 끝없는 이념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뜩이나 복잡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인력을 모으기가 쉽지 않다보니 자격 심사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출신과 사상, 배경을 따지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 수배자나 미 군정에 의해 해산된 좌파 단체의 청년들도 정치적 탄압을 피할 요량으로 신분을 숨긴 채 입대하는 경우도 많았다. 자질은 물론이고 경비대 내에서 극심한 알력 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또한 치안을 어지럽히는 골치거리들을 모아두는 것이 목적이었던 미 군정은 경비대를 창설하고서도 막상 무기와 장비는 물론이고 급식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등 찬밥대우를 했다. 이 때문에 미 군정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많은 대원들이 탈영하는 등 모병은 순조롭지 못하였다. 당초 계획대로 8개 연대를 편성하는 것조차 1년 반이나 지난 뒤인 1947년 6월에야 간신히 끝낼 수 있었다. 국방경비대 이등병으로 입대하여 나중에 제2군 부사령관을 지내고 소장으로 예편한 입지전적인 인물인 최갑석 장군은 이렇게 회고하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 막내 아들이라 고향에서도 배곯는 일이 일상사가 되다시피하여 군대 가면 배 곯는 일이 없다는 말을 듣고 자원 입대했더니 더 허기지는 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배 곯는 일처럼 슬프고 괴로운 일은 없었다."
국방경비대 창설과 함께 군사영어학교(Military Language School)가 1945년 12월 5일 문을 열었다. 군사영어학교는 해방 이후 최초의 사관학교이지만 독립 국가의 군대를 지휘하기 위한 간부를 양성한다기보다는 미 군정의 지시를 고분고분하게 수행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선발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 군무 국장 아서 참페니(Arthur Champeny) 대령은 제1기생 60명을 선발하면서 광복군 출신 20명, 일본군 출신 20명, 만주군 출신 20명씩 배정하였다. 지원 자격은 군 경력자 중에서 장교 또는 부사관을 지냈고 중등 이상의 학식과 영어 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해야 했다.
미 군정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특정 파벌을 우대하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출신별로 같은 숫자를 배정했지만 민족적 자존심과 정통성을 내세우는 임정과 광복군 입장에서 본다면 말이 동수이지 실제로는 '친일 부역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했으므로 불만이 매우 컸다. 미 군정은 새로운 군대를 만드는데 다같이 힘을 모아야지 지나간 과거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식이었다.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기여했다는 사실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때까지도 중국에 체류하고 있었던 광복군은 개인 자격으로 각자 알아서 귀국해야 했기에 귀국은 지연되었고 군사영어학교가 개교하는 시점까지도 귀국한 사람은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남한에 광복군 국내지대가 있기는 했지만 이들은 해방 이후에 참여한 사람들이었기에 진정한 광복군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이들 역시 미 군정의 일방적인 결정에 반발하여 불참을 선언하였다. 결국 미 군정은 의도적으로 광복군 출신들을 배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 군정의 방식은 과거에 뭘 했으며 남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지지를 받는가는 따지지 않은 채 자신들에게 얼마나 협조적인가에 따라서 대우가 달라지는 식이었다. 따라서 광복군에 대해서는 찬밥 취급을 하면서 일본군 대좌였던 이응준과 만주군 중교였던 원용덕을 미 군정의 군사고문으로 삼아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막연한 생각마냥 일본군 출신이라고 해서 반드시 친일부역자였던 것도 아니고 아무런 민족주의 의식이 없이 그저 일본 대신 미국을 새로운 상전인양 섬기기에 급급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응준, 김석원, 신태영, 최경록 등 일본 육사 출신들은 김구가 귀국하자 창군 문제를 의논하고 미 군정을 상대로 광복군의 우대와 신생 국군의 근간으로 삼도록 탄원하는데 적극적으로 앞장서기도 했다. 문제는 남한에 대한 아무런 이해 없이 그저 수십 년 전에 필리핀과 쿠바에서 했던 방식을 그대로 써먹으려고 했던 미 군정의 완고한 태도에 있었고 이 때문에 우리 현대사가 그토록 왜곡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군사영어학교는 원칙적으로는 4개월 과정이었으며 과목은 군사영어와 한국사, 자동차 교육, 소총 분해 등이었다. 교재는 미국 초등 영어 교과서를 활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개는 2~3주의 초단기 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하였다. 졸업생은 18기 233명이었다. 일부는 경찰과 미 군정 통역관 등으로 채용되었고 경비대 간부로 임관한 사람은 110명이었다. 110명 중에서 일본군 출신이 87명, 만주군 출신이 21명이었다. 숫적으로는 일본군 출신이 가장 많았지만 정규 육사를 졸업한 사람은 13명 밖에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학도병으로 입대한 사람들이었다. 반면 만주군 출신들은 3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규 육사 졸업생들이었다. 광복군 출신은 이성가, 유해준 2명에 불과하였다. 그 중에서 이성가는 독립운동가인 이관석의 아들로 일본 점령 치하의 난징 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왕징웨이 괴뢰정권의 화평건국군 제12군에서 소교(소령) 참모로 근무하였고 해방 이후에야 광복군에 합류하여 광복군 베이징 잠편지대 군사부장을 역임한 케이스였다.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은 남한군의 창설 주역이 되었다. 창군기 시절이기에 승진도 무척 빨랐다. 소위에서 중위 승진이 7개월, 중위에서 대위까지 5개월, 대위에서 소령까지 13개월이 걸렸다. 인사 적체가 심각한 요즘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대장 8명, 중장 20명을 비롯하여 110명 중에서 약 70%인 78명(5명은 준장 추서)을 장성으로 배출하였다. 중간에 사고나 전사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별을 달지 못한 사람은 5명에 불과하였다. 또한 국방장관 5명(유재흥, 장도영, 박병권, 최영희, 정래혁), 육참총장 13명, 합참의장 7명에 달하는 등 1960년대까지도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이 육군 수뇌진을 완전히 장악한 채 자기들끼리 주고 받는 식이었다. 이 때문에 후배들의 인사 적체가 극심해지면서 나중에 5.16 쿠테타로 이어지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 경비대의 계급 체계는 처음에는 대한제국 육군의 제도를 모방했으나 명칭이 어렵다는 이유로 1946년 12월 1일 대중소로 바꾸었다. 계급장 또한 경찰을 참고했다가 경찰을 '친일파 집단'으로 여기던 간부들의 반발로 1946년 2월 8일 미군식으로 바꾸었다. 처음에는 위관과 영관만 있고 장성 계급이 없었으나 1947년 2월 1일 남조선 과도정부에서 송호성 대령과 손원일 대령을 장군 승진을 결정하면서 제정되었다.
미 군정의 푸대접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광복군은 1946년 6월 12일 광복군 참모총장이었던 유동열이 통위부장(국방부 장관)에 취임한 뒤에야 비로소 국방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하였다. 민족 자존심을 지키려다가 오히려 일본, 만주군 출신보다 한발 뒤쳐지게 된 것이다. 게다가 과거의 계급과 경력은 죄다 무시당한 채 소위 계급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제2대 공군참모총장인 최용덕 장군은 나이도 이미 50줄이었고 중국군에서 난창 기지 사령관과 상교(대령)까지 지낸 고급 군인이었지만 아들 뻘의 미군 교관들에게 훈련을 받은 다음 소위로 임관하는 수모를 감수하였다. 미 군정이 끝나고 이승만 정권이 수립된 이후에야 지청천, 김홍일을 비롯하여 몇몇 원로들만이 우대 차원에서 사관학교를 거치지 않고 특별 임관을 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이들은 김구와 결별한 이승만의 강력한 견제로 비주류로 밀려난 채 중요한 보직을 받을 수 없었다. 남한군이 민족주의 계열이 아닌 일본군과 만주군, 그 중에서도 특히 만주군 출신들이 장악하게 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미 군정은 남한 사람들의 민족 의식을 무시한 채 자신들의 원칙론만 고집하는 것이 오히려 반발과 불만을 초래하고 알력 싸움을 격화시켰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식했지만 끝까지 완고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군사영어학교에서 훈련 중인 생도들.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에 있었던 감리교 신학대학을 훈련소로 활용하였다. 1946년 5월 1일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지금의 육군사관학교)가 설립되면서 군사영어학교는 5개월 만에 폐교되었다. 하지만 군사영어학교 졸업생들은 대한민국 건군의 주역이 되었다. 참고로, 군번 1번이 한국전쟁 초기 제2사단장이었던 이형근, 2번이 채병덕, 3번은 유재흥, 5번이 정일권이었다.
물론 단순히 일본군과 만주군에서 복무했다는 것만으로 싸잡아 '친일부역자'라고 매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이들이 남한군의 병영 문화를 왜곡시키고 많은 폐해를 남겼다는 사실에 있었다. 일본군으로 복무하면서 천황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강조하는 군인칙유(軍人勅諭)를 철저하게 세뇌당하였던 일본군 출신들은 자신들이 배운 방식을 아무런 자성 없이 신생 남한군에서도 그대로 써먹었다. 미 군사 고문단의 조언이나 미국식 훈련도 이들의 낡은 사고 방식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때문에 일부 부대에서는 간부들의 가혹 행위와 부정부패함에 반발하여 시위를 벌이거나 항명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1947년 7월 강릉 제8연대 제3대대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대대장을 구타하고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미군이 진압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일본식 훈련을 받은 간부들과 그렇지 않은 사병들이 서로 괴리된 것이다.
일제 시대에 천황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이 곧 개인적인 출세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뼛속까지 익혔던 일본군 출신들은 그 대상을 국가와 국민이 아닌 권력을 쥔 개인에게 바쳤다. 특히 반공 이념은 어떠한 행위도 정당화하는 절대 반지나 다름없었다. 병사들의 권리와 인권, 합리적인 사고는 무시되었고 엄격한 통제와 가혹한 엄벌만이 능사라는 식이었다. 군법 대신 사적인 구타와 욕설, 기합이 난무하였고 전투에서는 부하들에게 옥쇄를 강요하였다. 잔혹함은 적극성과 용맹함으로 포장되었다. 더욱이 좌우로 나뉜 남한의 복잡한 정세는 이들의 일탈을 한층 부추겼다. 중국과 동남아에서 일본군이 민간인들을 상대로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었던 만행은 국내 토벌 작전과 한국전쟁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1945년 11월 11일에는 해안경비대인 '해방병단(海防兵團)'이 창설되었다. 해방병단은 진해에 사령부를 두었으며 손원일 참령(소령)이 초대 단장에 임명되었다. 손원일은 중국 난징 중앙대학 항해과를 졸업하였고 독일에서 유학했던 당시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해군 인재였다. 또한 일본, 만주군 출신들이 수뇌부를 장악하고 있었던 육군과 공군과는 달리 독립 운동가 출신이기도 하였다. 해방병단은 1946년 6월 15일 조선해안경비대로 개칭되었다. 하지만 이 때까지도 군함이라고는 단 한 척도 없었다. 1946년 9월 15일 처음으로 380톤급 보병 상륙정 2척(서울함, 진주함)을 미 해군으로부터 인수하여 군함을 보유하게 되었다. 또한 1947년 2월 2일에는 280톤급 경비정 'PG-313' 충무공을 확보하였다. 이 경비정은 패전 말기 일본이 건조하다가 중단하고 버리고 간 것을 우리 손으로 완성시킨 군함이지만 고정된 무기가 없어서 수병들이 소총으로 무장하였다. 나중에야 37mm 대전차포를 함포로 탑재하였다. 항공부대의 창설은 육해군에 비하여 훨씬 늦어졌는데 1946년 8월 10일 민간 차원에서 항공건설협회가 조직되었다. 항공계 인사들이 미 군정을 부단히 설득한 연후에야 1948년 5월 15일 항공부대가 창설되었다. 하지만 인원은 105명에 단 한대의 항공기도 없었다.
해안에 보병을 상륙시키기 위하여 개발한 보병 상륙함(LCI, Landing Craft Infantry)이 우리 해군이 처음으로 손에 넣은 군함이었다. 속도는 15노트에 20mm기관포 4문으로 무장하였다. 1947년 말까지 일본제 소해정 11척, 미국제 소해정 18척 등을 인수하면서 점차 해군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고 1947년 8월 30일에는 38선 이남의 해안경비임무를 넘겨받았다.
미 군정은 처음부터 남한군대의 창설이 목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신들을 도와서 치안 유지의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국방경비대를 창설하였다. 그 때만 하더라도 한반도의 상황은 아직은 유동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47년 말에 오면 제2차 미소 공위가 무산되고 냉전의 격화로 한반도 분단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또한 트루먼 행정부는 유럽의 정세가 악화되자 남한을 유엔의 관할로 넘기고 한반도에서 손을 뗄 준비에 착수하였다. 미군의 철수가 점차 현실로 닥치면서 경비대 또한 정식 군대로서의 역할을 준비하게 되었다. 1947년 12월 1일에는 9개 연대를 3개 연대씩 묶어서 3개 여단을 편성하는 한편 모병에 한층 박차를 가하여 여단과 연대의 증편에 나섰다. 1948년 4월에는 제4여단과 제5여단이, 11월에는 제6여단이, 1949년 1월에는 제7여단이 편성되었다. 또한 군수와 공병, 의무, 통신 등 지원부대를 편성하는 등 군대로서의 모습을 점차 갖추어 나갔다.
여단명칭 | 창설일 | 초대 여단장 | 예하 연대 | 창설지 | 관할지 |
제1여단 | 1947.12.1 | 송호성 | 제1연대, 제7연대, 제8연대 | 서울 | 한반도 중부 |
제2여단 | 1947.12.1 | 원용덕 | 제2연대, 제3연대, 제4연대 | 대전 | 한반도 서남부 |
제3여단 | 1947.12.1 | 이응준 | 제5연대, 제6연대, 제9연대 | 부산 | 한반도 동남부 및 제주도 |
하지만 1948년 초까지도 경비대의 인원수는 3개 여단 14,800여명과 해안경비대 2,850명 등 2만명도 채 되지 않았다. 약 3만명에 달했던 경찰보다도 훨씬 적은 숫자였다. 또한 연대별 인원수도 1천여명에서 많게는 3천여명에 달하는 등 천차만별이었고 소총 이외에 중화기는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의 무관심 때문이었다. 1947년 초 미국을 방문 중이던 이승만은 트루먼에게 남한에도 그리스와 동등한 원조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하였다. 특히 미 의회를 장악하고 있었던 공화당은 유럽 이외의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나라들에게까지 원조를 확대한다면 미국에 지나치게 많은 부담을 줄 수 있으며 유럽 재건 계획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군부 역시 남한을 돕기보다는 오히려 손을 떼기를 원하는 쪽이었다.
문제는 트루먼 행정부의 대소 정책의 모순에 있었다. 대화 대신 대결과 봉쇄를 선택하여 소련과의 긴장 관계를 의도적으로 악화하면서도 막상 국방비와 군사력은 대폭 감축했기 때문이었다. 1948년의 미군 전력은 1945년에 비하여 1/10로 줄어든 상황이었다. 재래식 전력만 따진다면 소련군보다 훨씬 열세에 놓여 있었다. 트루먼 행정부는 핵무기를 미국이 독점하고 있는 이상 소련의 도발을 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소련과 국지적 충돌이 빚어질 경우 변변한 대응 수단이 없었다. 선택의 폭이 좁았던 미국으로서는 아시아에서 철수하고 한정된 전력을 유럽과 중동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남한은 원조의 긴급성에서는 그리스와 터키, 이탈리아, 이란에 이어서 5번째였지만 중요성에서는 16개국 중에서 중국 다음인 15위(마지막은 필리핀)였다. 합참은 남한이 미군을 주둔시킬 만한 전략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1947년 2월 25일 미국 특별위원회는 남한에 대하여 "1948년부터 1950년까지 3년 동안 6억 달러, 첫해인 1948년에는 2억 5천만 달러의 원조"를 권고하였다. 극심한 경제난과 기근에 허덕이는 남한에 식량과 비료, 석유, 교육시설 등을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국무부와 전쟁부 회의를 거치면서 "3년간 5억 4천만 달러, 1948년에는 2억 1500만 달러"로 감축되었고 그나마도 6월 27일 미 상원의 아서 반덴버그 공화당 외교위원장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트루먼 행정부는 딜레마에 놓이게 되었다. 남한이 자립 능력이 없는 현실에서 미국이 손을 떼는 것은 소련에게 넘겨주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것은 미국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남한이 미국의 짐이 되는 것 또한 원치 않았다.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한반도 문제에 무계획적으로 접근했는지 뒤늦게야 절감하는 판이었다. 대안은 유엔에게 떠넘기는 것이었다.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유엔 총회에 상정하자 소련은 조선 문제는 조선인들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미-소 군대의 동시 철군을 제안하였다.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의 요구를 거부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소련의 제안대로 주한미군의 철수가 결코 미국에게 나쁘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가뜩이나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남한에 있는 4만4천여명에 달하는 미군은 더 중요한 곳에 투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인 1948년 9월 15일, 미군의 철수가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철수 연기를 요청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고 오히려 트루먼 행정부의 질책을 받아야 했다. 트루먼 행정부도 미군이 빠져나간 자리를 메꾸어야 했기에 마지못하여 남한군의 증강을 승인하면서도 겨우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 선에서 최소한도로 억제하였다. 미국이 남한을 '계륵'으로 취급하는 가운데, 김일성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출처] 70년 만에 돌아보는 한국전쟁사 - 29화. 국방경비대의 창설|작성자 욱이님
▲ https://blog.naver.com/atena02/221462359561
70년 만에 돌아보는 한국전쟁사 - 29화. 국방경비대의 창설
미군이 남한에 처음 들어왔을 때 남한의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독일의 모습을 연상케 할 정도로...
첫댓글 바로 앞에 조선국 최고의 정보를 두고 몰라본 내가 한심하다 세상의 무엇이든지 간에 잃고 난 다음에야 무릎을 치지만 이미 때는 늦으리 증인과 피해자와 가담자는 날이 갈수록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근과거의 비엣남 상황도 이제는 오히려 비밀에 가깝도록 땅에 묻히고 있다 미연방을 극도로 싫어하는 주된 이유는 라오의 몽족 전사를 부리기만 하고 그냥 버렸다는 사실적 사실이다 똥은 똥끼리 알아본다고 했다 미연방과 일황정은 비슷한 맥락이며 줄기이며 뿌리에서 돋은 불알친구이며.... 아니 형제와 같다 어제와 오늘의 남조선 인민은 이용만 당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며 벗어나는 것은 절대 네버 뿌 불가능한 일이다
공설운동장의 새파란 애송이는 현 총비서동지의 데옥시리보뉴크레익에시드를 생산한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