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1연에는 햇살이 교회당의 십자가에 비춰지는 장면이다. 이 교회는 명동마을 윤동주의 집에서 창문을 열면 보이던 언덕 위 교회이다.
2연에서는 첨탑이 너무 높은데 어떻게 올라가느냐는 윤동주의 염려가 나온다. 해석을 읽기전에도 저 문장은 첨탑이 높다는 말이 아니라 십자가에 올라가 달리셨던 예수님은 어떻게 그곳에 올라가셨을까 라는 뜻이라는걸 눈치 챌 수 있었다. 책에서는 이것이 십자가에 올라갔던 이를 따르기보다는 외면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연에서 풍경의 일부인 십자가와 다르게 2연에서는 십자가가 풍경 이상으로 나아가 헌신의 의미를 가지고있다.
3연은 배경을 모르면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다. 종소리는 예언자의 종소리, 그리고 말 그래도 교회 종소리, 두 뜻을 다 포함한다. 어두운 시대에 예언자적 종교가 해야할 일은 많은데 교회는 친일을 했다. 그래서 교회에서 예언자의 종소리가 들려오지 않은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무기를 만들려고 쇠붙이를 끌어모으자 교회에서 종을 갖다바쳤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 때문에도 실제로 교회에서는 종소리가 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책에선 그런 교회옆을 서성거리는 것이 꿈을 상실한 자들의 아픔이라고 했다.
4연에서는 괴로운데 행복한 사람이자 신인 예수님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이라고 대립적인 단어들이 나열된다. 괴로운 행복은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것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을 말한다고 나와있다.
5연에서는 갈등끝에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을 자신도 가겠다고 다짐하며 말한다. 나는 3연에서는 휘파람이나 불면서 서성거린다는 것이 꿈을 상실한 아픔보다도 친일하는 타락한 교회를 애써 모른척 외면하려는 것으로 보였고 4연부터 그러한 예수님이 가셨던 길과 다른 길을 걷는 교회를 모른척 눈감는 것이 아닌 예수님의 길을 자신이 걷겠다는 다짐의 태도로 바뀌어지는 것 같았다.
교회마저 나라를 배신하는 시대에 가장 솔직한 자신의 내면을 써도 되는 시 속에서도 결코 이 타락한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걷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그런 사람이 비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윤동주는 살아있을 때 시를 출판한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시인이고 독립운동가라고 불리는 이유에 대해 느낀 것이다. 얼마전 역사시간에 우리 역사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실 우리나라는 독립운동가들의 투쟁으로 독립이 된 것이 아니라 그냥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면서 자연스럽게 독립이 된것이죠? 그렇지만 독립운동가들이 없었으면 얼마나 창피하겠어요. 우리 나라를 뺏는데 가만히 뺏기는게 얼마나 창피해요.' 윤동주 시인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는걸 생각하면서 선생님의 이 말씀이 생각이 났다. 사실 다른 독립운동가들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직접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나라를 잃고 치욕스럽고 비굴하게 살지 않으려 발버둥쳤던 그 노력들이 우리를 부끄럽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선상에서 봤을 때 모두 같은 길을 걷는다 해도 반대방향으로 걸을 다짐, 예수님의 길을 교회가 저버려도 자신은 따르려는 독립을 위한 다짐을 지극히 개인적인 시 속에서도 몇번을 쓰고 또 써내렸던 윤동주는 정말 독립운동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