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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에게 적용된 테텔레스타이
마가복음 15:33~37
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저는 간혹 죽음의 리허설(rehearsal)을 행할 때가 있습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제 마음을 어떻게 정리하고 무슨 말을 할지를 곱씹어 생각하며 나의 결말을 어떻게 장식할지를 생각하면 정리하는 것입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은 누구도 예외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관문이고 그 후에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과 사심을 말합니다.
그 복음을 우리는 날마다 나의 삶에 싫든 좋든 체험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는 사람이든 하루를 결산하고 잠을 자게 되면 스스로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심장의 박동도 호흡도 피의 돌기와 모든 신진대사를 내 임의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면서 의식을 갖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게 밤을 보내고 나면 새로운 날이 도래하여 또다시 하루를 시작합니다.
문제는 잠을 자고 새벽을 맞는 일련의 과정에서 복음으로 연관 짓는다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를 저녁에서 시작합니다. 창 1: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복음은 창세기에서 천지창조를 할 때부터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 “나는 이제 예수님과 함께 죽습니다. 나의 생명을 주님께 맡깁니다.”하고 새벽에 일어나면서 “주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저 역시 새롭게 살아났습니다.”하면서 감사로 영광을 돌린다면 이것이 복음을 내 삶에 실제화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지내셨던 33년의 생애를 마치시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삶을 결론짓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그분이 걸어오신 길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진리이심을 만천하에 분명하게 알리셨습니다.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행동은 변함이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질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세상의 이치도 그렇습니다.
명품은 변하지 않습니다. 명품 가방도 옷도 그렇습니다. 전자제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 핸드폰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험을 거치게 됩니다. 충격에도 강하고 여러 온도변화에도 견뎌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능이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이렇듯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보이신 모습에서 극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구주인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남기신 일곱 마디를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합니다. 4복음서에 흩어져 있는 말을 모아서 재구성한 것으로 예수님이 어떠한 순서로 그런 말씀을 십자가 위에서 하셨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이 말씀을 통하여 믿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성취되었는지를 함께 나누며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의 가상칠언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늘에 속한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됨을 밝히고 세 번째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인도하심을 보이셨습니다.
첫 번째 죄 사함의 은혜를 선언하셨습니다.
주후 33년 4월 초순 금요일 어느 봄날에 예루살렘 성 밖에서는 화창한 봄과는 대조적인 끔찍한 형상의 십자가에 못 박힌 세 명의 사람이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바로 이 장소가 ‘골고다’(Golgotha)란 곳입니다. 이 뜻은 ‘해골’, ‘두개골’, 이라는 것으로 그곳에 공개적인 처형 장소로 주변에 해골이 널려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고대의 사형 도구 중 가장 극렬한 고통을 안겨주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제 삼시, 우리나라 시간으로는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무려 6시간 동안 고통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눅 23: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분입니다. 구약에는 아버지란 말이 없으나 예수님은 아버지라 부르시면서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근거가 예수님께서 우리의 중보자 되셔서 죄 사함의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범위는 한계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다는 것 자체로 스스로 위안을 얻고 오히려 예수님을 조롱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는 그들이 잠시 평안을 누리는 것 같지만 조만간 그들은 멸망의 무서운 진노와 영원한 지옥에 빠질 것을 아셨기에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옆에 함께 못 박힌 강도가 있었습니다. 그 강도는 세상에서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강도는 십자가 주위에서 예수님을 저주하고 조롱하였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욕하였습니다. 그런데 우편에 매달린 한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부탁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 강도에게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낙원’은 원어에서 ‘파라데이소스 παράδεισος’라고 합니다. 이는 사후에 옮겨지거나 가는 곳이라고 고대인들은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낙원이라는 표현을 하신 것은 주님과의 친교를 강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벗어난 의인이 누리는 영원한 주님과 화평이 있는 곳에 이르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어떤 죄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는 어떤 선한 행위로 낙원을 허락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여 예수님의 용서를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강도의 믿음을 부러워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강도는 겨우 구원에 이르게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되 풍성하기를 원하십니다. 즉, 예수 안에서 우리의 생명이 예수님의 인격과 품성으로 무성하게 자라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자고 깨면서 우리 안에는 예수님의 생명이 왕성하게 자라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른 믿음으로 얻어지는 은혜는 오랜 시간을 겪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지 예수님을 욕한 그 강도까지도 받아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을 감사할 뿐이요, 어떤 죄든 용서함을 얻을 수 있음에 감사할 뿐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십자가는 새로운 가족 관계를 형성하게 하였습니다.
요 19: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십자가에서 하신 예수님의 세 번째의 말씀은 육적 모친이라 할 수 있는 마리아를 챙기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육신으로 계실 때에 형제 자매들이 있었습니다. 막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는 말씀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제와 자매들에게 마리아를 돌보실 것을 말씀하지 않으시고 제자인 요한에게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요 19: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요한에게 맡기신 것은 마리아로서는 자식이 한둘이 아닌데 사실 남이라 할 수 있는 요한에게 얹혀산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으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어머니이지만 그에게도 어머니도 있었을 터인데 마리아를 모시고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늘에 속한 영원한 가족 관계가 십자가로 통일하였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성경에 나타난 정황을 살펴볼 때 예수님은 육신의 아버지 요셉을 일찍 잃고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동생들을 30세가 되기 이전까지는 충실하게 돌보았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을 당하며 수모를 겪게 되자 나사렛에서 가버나움까지 거리가 대략 20㎞ 정도 되는 먼 거리를 모친이신 마리아와 동생들이 찾아 왔습니다. 그렇게 먼 거리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게 하려고 찾아온 것인데 반갑게 맞아 주기는커녕 막 3:34~35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라고 하시면서 새로운 질서에 의한 가족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됨을 말합니다. 오직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고 새로운 하늘의 질서가 이뤄짐을 밝히고 있습니다.
세 번째 예수님께서 지옥의 형벌을 대신 감당하시므로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셨음을 말씀하십니다.
막 15: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부르신 이유는 사랑의 아버지 관계에서 심판의 하나님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순간은 바로 영원 사랑에서 분리되는 순간일 것입니다. 바로 이런 순간을 예수님이 맞이하시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왜요? 이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사람을 죄에서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시면서 죄인이 가야 할 지옥의 형벌을 받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옥은 하나님께 분리된 사람들이 머무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수없이 많은 시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많은 경고도 하셨고, 징조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제한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철저하게 사랑을 거부하였기에 하나님 나라에 스스로 들어올 수 없어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감사하는 자에게 지옥을 면하여 영원한 천국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상에서의 예수님의 다섯 번째 말씀은 요 19: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도 가장 크게 마음을 쓰시는 부분은 바로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사역의 하나로서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소리를 듣고 막 15: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방법으로는 죄의 형벌을 감소하지도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옥의 형벌입니다. 지옥의 형벌을 바로 보여주는 장면이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입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천국의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는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그곳에서의 고통이 눅 16: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라는 외침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옥은 일평생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였던 여러 가지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수면욕이 있지만, 영원히 잠들지 못하는 곳이요, 식욕은 왕성하지만 배고픔의 시달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목마름이 있지만, 혀끝에 물 한 방울 축일 수 없는 욕망의 불덩어리가 온 마음으로 괴롭히는 곳이 지옥입니다. 어쩌면 육신으로 있을 때 가졌던 욕망 보다는 더욱 강렬한 욕구가 불타오르는 곳입니다. 이것을 해소할 수 없어 고통당하는 곳이 지옥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의 목마름을 우리의 죄를 위하여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받아들이면 영원히 목마름이 없고, 생수의 강이 흐르는 천국을 유업으로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 완결 부분을 요 19:30에서는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신포도주를 받은 신 후’에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을 헬라어 원문에서는 ‘테텔레스타이(Τετέλεσται)’라고 하는데 ‘값을 지불했다’, ‘완불했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속죄의 모든 대가를 지급했다는 것입니다. 다 이룬 것을 이제는 우리의 각 사람이 성취할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장장 6시간의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시고 스스로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시고 돌아가셨습니다.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죽음은 자발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확히 하나님의 때를 아시고 머리를 숙이고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신 것입니다.
이 때의 상황을 본문 15: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고 하였고 눅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고 자세하고 기록하였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씀을 영어에서는 “Father, into your hands I commit my spirit.”라고 하였습니다. 나의 영혼은 전적으로 아버지께 위임한다는 말씀으로 예수님도 죽음 앞에서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으시고 살리는 영 성령을 보내셔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저와 여러분은 ‘테텔레스타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구체적으로 내 안에서 적용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한 걱처럼 이웃의 죄를 용서하고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소속된 내 이웃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옥의 권세는 사탄을 통하여 밀 까부르듯 우리를 시험하고 낙심하게 합니다. 때로는 괴로움을 안겨 주고 욕망에 부풀려 원망을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 때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지옥의 형벌을 감당하시므로 내 영혼이 자유를 얻었음을 감사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 회개하시길 바랍니다.
날마다 자고 깨는 과정을 통하여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아침에 잠에서 깰 때에 부활의 주님을 인정할 때 우리 안에는 예수님의 영광의 빛이 점차 강하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막 4: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다스리시는 성령의 인도로 나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생명이 점차 자라게 될 것입니다. 이미 이뤄진 놀라운 주님의 은혜가 날마다 자고 깨는 중에 얻어지는 복음의 권세가 충만하게 열매를 맺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