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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6일(오순절 후 열 번째 주일)
사도행전 18:1~8
위로와 힘이 되는 동역자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중국 베이징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궁궐인 ‘자금성’이 있습니다. 이 성은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 황제가 거했던 곳으로,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란 사실을 과시하기 위해 지은 건축물입니다.
자금성에는 크고 작은 방이 무려 9,999개가 있습니다. 중국 문화에서는 하늘의 옥황상제가 사는 궁궐의 방 개수가 1만 개라고 여겼습니다. 때문에, 황제는 그보다 1개가 작은 9,999개의 방을 가진 궁궐을 지어놓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황제의 집이었던 자금성에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황제의 침소라고 불리는, 똑같이 생긴 약 10평짜리 방이 399개가 있습니다. 황제는 한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황제가 자는 방은 399개가 있는 것입니다.
황제는 날마다 다른 방에서 잠들었습니다. 황제가 그날 밤 어디서 자는지는 오직 황제의 경호원들만 알았고, 심지어 황제도 자신이 어디서 잘지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황제가 밤마다 방을 옮기며 잠을 잤던 이유는 늘 암살의 위협에 시달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거대한 성이 생명을 지켜 줄 수 없습니다. 많은 경호원도 소용없을 수 있습니다. 요즘은 수많은 의료 장비와 의료 전문가가 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디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요?
-조영민,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 (죠이북스, 2023); 「생명의 삶」 (두란노, 2023년 8월호, 127에서 재인용).
<낭독의 발견>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원재훈 시인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작년 가을에 잠자리 한 마리가 사무실로 날아 들어왔습니다. 사무실에는 아홉 개의 창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잠자리가 창문 밖을 나가지 못하는 겁니다.
잠자리는 겹눈, 홑눈 다 합해서 무려 만개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만개의 눈이 다 필요 없었습니다. 밖으로 나가는 길을 볼 수 있는 한 개의 눈만 있으면 되는데, 잠자리에게는 오직 그 한 개의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과 기술은 천 개, 만 개로 놀랍게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만 개의 지식이 있어도 결정적인 한 가지 지식이 없어 무너집니다. 과연 우리에게 필요한 결정적인 지식 한 가지는 무엇일까요?
-최병락, 「바람을 잡는 그대에게」 (두란노, 2023); 「생명의 삶」 (두란노, 2023년 8월호, 37에서 재인용).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 중에 있던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유대인의 회당에서 세 안식일 동안 구약성경을 강해했습니다. 바울은 성경의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오히려 바울을 시기했습니다. 그들은 시장에서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모아다가 바울을 죽이기 위해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다행히 데살로니가에 있던 형제들이 이 사실을 알고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울을 잡기 위해 베뢰아까지 쫓아와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베뢰아에 있던 형제들은 바울을 배에 태워 아덴으로 보냈습니다. 아덴에서 사역을 마친 바울은 홀로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고린도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로서, 크고 발달 된 항구도시였습니다. 이때 바울의 심적인 상태는 어떠했을까요?
바울은 유대인들의 대적을 받고 데살로니가에서 아덴으로, 그리고 고린도로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더구나 바울과 함께했던 실라와 디모데는 아덴에 남겨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급하게 아덴을 떠나면서 디모데에게 다시 데살로니가를 방문할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디모데를 통해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을 살피고, 교인들을 굳건하게 위로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살전 3:1~5).
바울은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동역자 없이 혼자 남겨진 상황이었습니다. 함께 마음을 나눌 동역자가 없다는 것처럼 사역자를 힘들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더구나 바울의 아덴 전도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물론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아덴에 있던 사람 중에 몇 사람이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아덴 전도는 바울이 기대했던 것보다 신통치 않은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때 바울의 심적인 상태를 잘 표현한 곳이 고린도전서 2장입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바울은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외부의 대적자들로 인한 어려움이야 이미 예견된 것이었지만, 사역의 중압감과 홀로 외로운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은 아마도 바울을 어렵게 만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바울만 이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울 이외에도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부부는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에서 태어나 나름대로 꿈을 가지고 땀 흘려 일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 그 덕에 이 부부는 자그마한 사업장을 운영하면서, 이미 로마에 세워진 교회를 출석하며 하나님을 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부에게도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기원후 49년에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는 로마에서 모든 유대인을 추방하는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로마 황제가 그러한 칙령을 내렸던 이유는 그 시기에 일부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도 삶의 터전을 잃고 이탈리아를 떠나 고린도로 이주해야만 했습니다. 이 부부에게 뜻하지 않은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이 부부가 낯선 고린도 땅에 정착한 지 2년이 지났을 때, 우연히 이 부부는 바울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도 막 아덴에서의 전도사역을 마치고 고린도에 이르러 새로운 사역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이미 로마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나갔던 사실을 알고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바울은 당장 생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할 처지였습니다. 바울은 이전에도 데살로니가에 있으면서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마침 천막을 만드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지역에서는 2년마다 한 번씩 큰 축제가 열렸는데, 그때는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천막을 쳐 놓고 그 안에서 지냈습니다. 마침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도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던 터라, 바울은 그들과 함께 살며, 함께 천막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평일에는 아굴라 부부와 함께 천막을 만들고, 안식일에는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아굴라 부부와 함께 일하는 동안 바울이 느꼈던 외로움은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바울이 천막을 만드는 동안에는 잡념도 사라지고, 일을 하면서 보람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바울이 날마다 사람들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일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에게는 제일 나은 선택이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바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일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아굴라 부부의 가정에서 함께 기거하며 일을 하는 사이에, 마침 실라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가지고 바울을 찾아왔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로부터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편지를 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기록된 성경이 데살로니가전서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기록한 편지이었습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온 이후에, 바울은 이제 본격적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5절에 보면,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붙잡혀”라는 헬라어 단어(쉬네이케토)는 미완료 과거 수동태를 사용해서, “어떠어떠한 일에 집중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온 시점부터 바울이 말씀을 전하는 일에만 집중했다는 의미입니다(조배현, 생명의 삶 플러스, 2023년 8월호, 33).
바울이 말씀을 전하는 일에만 집중하기 위해서는 평일에 천막 만드는 일을 내려놓아야 했고, 자연스럽게 바울의 생계 문제는 그의 동역자 실라와 디모데가 책임을 져야만 했을 것입니다. 실라와 디모데는 오직 바울이 말씀을 전하는 일에만 집중하도록 바울을 도왔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에서 바울을 도왔던 사람이 실라와 디모데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린도에 살던 하나님 경외자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도 바울을 도왔습니다. 바울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전하자, 유대인들은 바울을 대적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자기의 옷을 털면서 “이후에는 내가 이방인에게로 가리라.”라고 선언했습니다.
바울은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는 일을 그치고, 회당 옆에서 살고 있던 디도 유스도의 집에 들어가서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디도 유스도는 자기의 집을 공개해 바울이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고린도에서 누구보다 바울에게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 사람은 바울이 처음에 만났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였습니다. 이 부부는 바울이 고린도에 정착할 때 바울에게 실제 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부부는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이나 고린도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이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과 함께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이 부부는 바울이 떠난 후에도 에베소에 남아 교회를 섬겼습니다.
특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에베소에서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이었던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도를 더욱 정확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 부부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했던 아볼로를 말씀으로 양육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부는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로 사역할 수 있도록 격려하며 추천해 주었습니다.
이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로마로 건너가 로마 교회를 섬겼습니다(롬 16:3).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통해 고린도 교회와 에베소 교회와 로마 교회가 큰 유익을 얻게 되었으니 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부부가 이처럼 귀하게 주를 위해 쓰임을 받게 된 계기는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이 부부와 바울과의 만남이 우연이었겠습니까?
우리는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2절)”라는 구절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만나니”라는 헬라어 단어(휴론)는 부정 과거 능동태 분사로 사용되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에서 바울과 아굴라 부부가 만났던 일이 겉으로 보기에는 우연한 일처럼 보여도, 이 만남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해 두셨던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글라우디오 황제가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모두 쫓아내었을 때부터, 하나님은 바울과 아굴라 부부의 만남을 미리 계획해 두고 계셨을 것입니다(조배현, 33).
우리에게는 뜻하지 않은 인생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래서 낙심도 하고, 두렵고 떨기도 합니다.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도도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두려움과 심한 떨림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로마에서 추방되어 고린도로 이주해 왔을 때도 그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위기의 순간에 우리를 도우십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위해 돕는 자들을 보내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도 돕는 자들을 보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기의 시간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주의 복음이 더욱 많은 사람에게 전파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기의 순간에 우리를 도우시지만, 반대로 누군가 위기를 당할 때 우리를 통해 누군가를 돕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돕는 자를 보내주셨듯이, 누군가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우리를 보내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니 저와 여러분은 위기에 처한 누군가를 돕기 위해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때 주의 복음이 더욱 많은 사람에게 전파될 것입니다.
과연 고린도 교회에 어떤 결과가 있었습니까? 아덴과는 달리 고린도에서는 많은 사역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특히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게 되었습니다. 당시 회당장은 유대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울의 전도를 받고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게 된 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수많은 고린도 사람이 주를 믿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사역의 열매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가장 약할 때 풍성한 사역의 열매를 허락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청년이 우연히 알게 된 아름다운 아가씨에게 한눈에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소심한 성격이어서 그녀에게 다가설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고백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좀처럼 다가서지 못한 채 그녀의 주위만 맴돌았습니다.
청년은 마침내 결심을 했습니다. 용기를 내어 그날부터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깨알 같은 글씨로 종이를 가득 메웠습니다.
한 통, 두 통, 세 통… 편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같이 그녀에게 배달되었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여전히 그녀 앞에 나설 용기가 없었습니다. 청년은 혹시 그녀에게 거절당하지 않을까 염려하며 전전긍긍했습니다.
편지를 받은 여자는 누군가가 자기를 이렇게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설렘에 잠을 못 이루며 날마다 날아오는 편지와 함께 어서 그 주인공이 눈앞에 나타나 주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녀는 “편지 왔습니다!”라는 우체부의 목소리가 들리면 기쁨에 달려 나갔습니다. 그러면 우체부는 정중히 편지를 건네면서 눈인사를 전했습니다. 그런 우체부의 눈빛은 언제나 진지하고 성실했습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편지를 받아 쥐었습니다. 그렇게 우체부는 날마다 편지를 배달했습니다.
그런 시간이 어느덧 2년이나 계속되었고, 청년이 보낸 편지도 500통 넘게 쌓였습니다. 그 편지가 꼭 600통째 되던 그날은 마침내 그녀의 결혼식 날이었습니다.
순백의 드레스 차림의 그녀는 꽃처럼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그 눈부신 신부를 맞아들인 사람은 다름 아닌, 날마다 편지를 배달했던 그 우체부였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그녀의 사연을 아는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날마다 당신에게 편지를 보낸 그 청년과 결혼한 것은 아니군요.”
수줍게 웃으며 신부가 대답했습니다.
“제겐 백 마디 아름다운 사연보다 한 번의 따스한 눈빛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저는 그런 눈빛을 무려 600번이나 받았는걸요.”
‘김 하’라는 작가가 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느낌」 (뜻이있는사람들, 2017)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2675213532631208&id=100004277616324&mibextid=Nif5oz).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것을 느끼셨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꼭 돈이나 선물 같은 물질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방금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린 이야기처럼, 우리의 백 마디 아름다운 사연보다 한 번의 따스한 눈빛이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에게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우리가 10평짜리 399개의 침실을 가지고 있더라도, 거대한 궁궐이 우리를 지켜 줄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셔야만 합니다.
잠자리가 무려 만 개의 눈을 가지고 있더라도, 밖으로 나가는 길을 볼 수 있는 단 한 개의 눈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결정적인 한 가지 지식은 오직 여호와를 아는 지식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떠한 위기를 겪을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뜻하지 않은 인생의 위기를 겪으면서 낙심하고 두려워 떨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위기의 순간에 우리를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돕는 자를 보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 주변에 뜻하지 않은 인생의 어려움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이 바울을 도왔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그를 도우십시오.
여러분이 따뜻한 말과 따뜻한 눈빛을 전함으로 그를 도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그 일을 행해야 하는 이유는 은혜를 나누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져 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