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세번째 수요집단상담모임 안내드립니다.
<마음건강- 무엇이 잘 자라길 기대하는가> 발제글 읽고
반갑게 만났으면 합니다.
무엇이 잘 자라길 기대하는가?
문은희_한국알트루사 여성상담소 소장, 심리학박사, 계간 「니」 편집장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우리 아이가 서너 살 적, 운동화를 사 신기려 어린이신발 전문점에 들렀다. 아이의 발 치수를 재고 아이들의 성장속도를 감안해 적합하다고 하는 크기의 신발을, 권하는 대로 사왔다. 그런데 한 주 만에 아이가 발이 아프다는 것이다. 다시 갔더니 아이신발 전문인 점원이 몹시 미안해하면서 더 좋은 신발로 바꾸어주며 돈도 받지 않았던 일이 있었다. 아이가 그의 생각보다 빨리 자라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유난히 크게 태어나고 젖을 먹이면 남들보다 빨리 커서 미국아이들보다 늘 빨리 자라던 건강한 아이였다.
몸이 건강하면 잘 자라고, 몸이 아프면 더디 자라거나 아예 자람이 멈추게 된다. 그러기에 자라는 아이들을 잘 살피고 그들이 자라는 속도를 어른들이 방해해서는 안 된다. 몸만 그런 것이 아니다. 마음도 건강하면 잘 자라고 잘 바뀐다.
<잘 자라는 것과 잘 바뀌는 것의 중요성>
몸의 성장은 어느 시기가 되면 멈추지만 마음의 성장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늘 같은 생각에 머물지 않고 다른 생각을 가지려 하고, 스스로도 바뀌려 노력한다. 하나님을 영접한 사람이 시작할 때의 신앙에 그대로 머물러있다면 건강하다 할 수 없는 것이다. “장성하여서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한 바울의 이야기는 그런 믿음의 성장을 말하는 것이다. 지난 글들에서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는 어느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다. 이렇게 각기 달리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것을 살려서 각자 자기답게 제 속도로 자라고 성숙해야 한다. 다른 아이들의 평균속도와 다른 속도로 자라는 아이들의 자람을 방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 아이에게 잘못 골라준 어린이신발 전문가같이 말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마음이 아픈 것을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의 상처로 병들어 산다. 얼마 전 몸은 건장하게 잘 자란 젊은 여성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픈 마음을 말하기 너무나 힘들어했다. 묻어두었던 마음을 시원스레 말하지 못하니까 걷잡을 수 없이 기침이 나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겨우 일의 내막을 말하기 시작하니까 신통하게도 기침이 뚝 그쳤다. 그런데 이 여성은 어린 시절을 전혀 기억해낼 수 없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유치원 시절의 일이 간간이 기억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학교 다니던 일은 꽤 정확하게 기억해내곤 한다. 그런데 이 여성은 초등학교 시절에 있었던 어떤 일도 전혀 머리에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견디기 어려울 만큼 마음아픈 경험을 했음에 분명했다.
우리의 마음은 아주 묘하게도, 일부러 의식해서 “그래야지”하지 않아도, 기억해내기에는 너무나 마음아픈 일들은 마치 없었던 것인 양 마음 깊숙이 넣어두어 의식하지 못하곤 한다. 자신을 지탱하기에 위험하다고 무의식적으로 판단해서 기억의 세계에서 억눌러, 없었던 것처럼 자기방어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나 상담과정에서 과거의 경험이 그렇게 위협적인 것이 아니라는 현실감을 회복하게 되면, 과거의 경험을 기억의 선(線) 위로 떠올릴 수 있게 된다. 언젠가 심리학공부모임(3개월 과정, 주1회, 심리학이론의 교육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변화를 추구하는 심리학공부)에서 한 모람이 갑자기 잊고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고 했다. 가족 가운데 한 분이 목매달아 자살하셨던 것을 몇 해 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이야기 중에 문득 의식선 위로 떠오른 것이다. 그 일은 자기가족이 중요하게 여겨왔던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용납되지 않는 사건이었다. 자신이 그 가족의 가치관에서 풀려나면서 비로소 자신을 눌러왔던 끔찍한 사건에서 자유로워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삶의 단계마다 그 단계에 어울리는 경험을 하면서 자라고 성숙해야 한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균형있게 각 단계에 맞게 자라고 성숙해야 한다. 아기를 눕혀놓았는데 어느 순간엔가 뒤집는다. 뒤집기에 필요한 만큼 몸이 성숙해졌기 때문이다. 근육의 성장뿐 아니라, 천장만 보던 세계에서 방바닥과 함께 삼차원의 입체공간을 인식하는 느낌과 생각의 기능도 갖추게 된다. 기어다닐 때가 되면 기는 데 필요한 몸의 발달뿐 아니라 다가가고 싶은 목표물에 대한 호기심도 발달해야 한다. 그런데 아이를 돌보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경험을 지나치게 제한하거나, 무관심하게 내쳐두면 아이들이 제대로 각 시기마다 성숙하는 데 필요한 경험을 하지 못하고, 따라서 제대로 자라지 못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것’이 잘 자라고 잘 바뀌는가?>
우리 문화에서 아이를 돌본다고 할 때 몸을 살찌워 건강하게 우량아로 키우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경향이 있다. 정상체중과 정상키에 마음 쓰고, 다른 아이들이 하는 짓을 얼마나 빨리 하는가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리고 나중에는 조기교육에 혈안이 되고, 학교에 가서 좋은 성적을 올려주기를 기대한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에만 치중해서 자라온 젊은이들의 마음은 어떨까 궁금하지 않은가? 공부 이외의 여러 가지 삶의 면이 통 자랄 수 없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공부를 해도 아이의 호기심 때문에 공부한 것이 아니니 대학에 가려고 전공을 택하려 할 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젊은이가 된다. 그냥 점수에 맞추어 가서 꾸역꾸역 공부한다. 음식을 입에 채 넣기도 전에 “맛있지?”하고 묻는 어머니의 물음에 쫓겨 자라다 보면 자기 입맛도 모르게 된다. 자기만의 느낌을 잃게 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자기만의 마음의 세계를 지우개로 지워버린 것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온 아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마음에 입력되어있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컴퓨터에 입력해 저장하지 않고서 무엇을 찾아 꺼낼 수 있겠는가? 마음의 내용이 텅 비어있는 상태로 멈추어있을 뿐이다. “돈이 제일이다,” “우리 가정이 제일 중요하다,” “출세해야 한다,” “우리 교회, 우리 지역, 우리나라의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이런 것만 입력되어있지 않은가? 이렇듯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것에만 목표를 두는 이 사회 속에서 마음이 자라는 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마음의 영역이 전혀 자라지 못한 채 청소년기를 거치고 어른이 되면 몸과 물질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누구나 부자 되고 싶은 것 아닌가?”며 당연하게 여긴다. 요즘 아이들은 너도나도 연예인이 되어 왕창 돈 벌고 싶단다. 머리 쓰는 작가는 되고 싶지 않다며, 헐리우드나 일본작품을 얻어 쓰면 된다고 한다. 허기야 대학총장도 표절하고도 관행이라며 다른 교수들까지 끌어들이는 몰골을 보이는 세상이니…. 남녀가 사귀며 나눌 만한 마음의 영역이 도통 없으니, 데이트한다면 성관계만 하게 되는 것이 당연해진다. 맛있는 것 먹고, 장난치고, 같이 자는 것밖에는 공유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밖에 뭐가 있나요?”라고 오히려 묻는다. 부모님이 남자친구와 여행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시지만, 여행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부모님은 모르신다고 도리어 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늘 자라고 바뀌어야 건강하다. 자라고 바뀌는 것이 멈춘 상태는 건강하지 못함의 종착역인 ‘죽음’의 상태에 이른 것이다. 몸으로는 살아있으면서도 마음의 자람과 바뀜이 멈춘 상태로 살고 있는 많은 여성들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학교 졸업하는 여학생들에게 “책상을 동생에게 물려주지 말고 결혼할 때 혼수로 가져가라”고 말하곤 했었다. 커다란 경대는 없어도 된다. 자기의 삶을 살찌우고 바꾸어갈 노력을 아끼지 말라는 당부였다. 하나님께서 이제 세상의 수고를 그만두고 오라고 하시는 순간까지 우리는 자라고 바뀌며 살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 서로 자람과 바뀜을 돕고 도움받으며 함께 건강하게 살기로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