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월의 삽화 외 1편
김사륜
사내가 고구마 속에서 푸른 선로를 뜯어낸다
덜컹,
늙은 선로 깊숙이 침범한 바람과 햇살이
바퀴에서 풀려난 둥근 속도에 잘려나간다
제 상념 속 로프에 걸려 비틀거리는 사내
소실점을 끌어오던 직선의 시간들이 코일처럼 감겨 둥글어진다
허수아비도 짐을 싼, 기찻길 옆 묵정밭
철거가 진행 중인 선로와 침목이 사내의 하루를 해체하고
흔들리는 코스모스 그늘을 방석처럼 깔고 앉은 아낙이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독백을 해대는, 간이역
철둑 깊숙이 녹슨 들판이 박혀있는 가난한 땅에
사내의 새파란 정수리 위로 서리 맞은 노을이 낮게 내려온다
살점이 다치지 않게 고구마를 캐는 사내
덩굴을 찾아 기우뚱 넘어가는 비탈길, 애벌레처럼
기어가는 서울행 기차 저 멀리
열차객실에서 한 아이가 고구마 칩을 먹으며 창밖을 내다본다
늦가을,
전화기 속으로 황급히 달려든 인사계 장부에 붉은 불이 켜지고
석양을 끌며 멀어지는 기차 꽁무니를 재빨리 지워버리는 터널
저 열차처럼
내일쯤은 사무실 책상에서도 누군가가 삭제될 것이고
십일월 들판은 그의 충혈 된 눈처럼 한 뼘은 더 붉을 것이다
인주 묻은 태양의 행방
뉴타운 소문을 태우고 마을버스가 들어왔다
미숫가루처럼 흙먼지만 내려놓고 폐교를 한 바퀴 돌더니
제비처럼 고샅길을 빠져나갔다
언젠가부터 절개지 묵정밭엔 어린 의혹들이 심겨지기 시작했다 깨진 항아리 속에 갇혀있던 뻐꾸기 소리에 둔덕 까마중 몇, 복부인 같은 선글라스를 끼고 귀고리를 흔든다 전과자인양 담장 안을 기웃거리던 햇살, 굴다리 밑으로 잠입하고 배 밭으로 달려간 그림자 하나가 이른 아침부터 풍선 불 듯 바람의 평수를 후후- 부풀린다
두부장수 확성기에 귀를 열던 도토리들 일제히 상수리나무를 버린다 선거벽보 어지럽게 붙어있는 축대 아래, 사방치기 놀이를 하던 아이들 오후가 오랜만에 찾아온 밀짚모자 주위로 몰려든다
뻥튀기 소리에 놀란 해바라기, 발밑에 검은 태양들을 투투둑- 파종하고 늦게 외출한 채송화는 발뒤꿈치를 높이 꺼내 분꽃의 망설임을 흔든다 태양이 시작되면 빨간 인주통이 열렸다 몇 평 봄이 처분되는 계약서 그 끝, 마을경로당에선 코스모스와 금잔화가 형광빛 포스트잇처럼 끝도 없이 유예되고 있었다
이장 집 옆 모과나무가 늙은 귀띔이라도 들은 걸까 오래된 우물 속에다 노란 주먹을 툭툭 박았다 내가 헐값에 처분했던 그 시절 변두리 네온사인과 외딴집에 세를 든 귀뚜라미의 지하 방엔 오래도록 해가 들지 않았다 지난밤 거처를 잃은 두견새와 갑작스레 약수터에서 쫓겨난 달빛은 창문 틈에 허리가 끼어 아침까지 웅웅거렸다
누가 분실한 것일까
공사 중인 안테나처럼 힘껏 꼬리를 세운 고양이 한 마리
방금 눌러 찍은 붉은 태양이 채 마르지도 않은 부동산 계약서를 입에 물고서
인적 드문 논밭을 검은 천 조각처럼 가로질러 어디론가 재빨리 구겨지고 있다
김사륜
1968년 충남 연기 출생, 본명 김종태.
2022년《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디카시집 이주민 사건의 발단.
웹진 시인광장 디카시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