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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예술의 죽음에 부치는 ‘예술의 미래’에 대한 급진적 선언
자크 랑시에르의 미학 강의 모음집 『이미지의 운명』 출간
“랑시에르의 글쓰기는 어떻게 저항을 지속할 것인가에 대한 개념적 해석을 제공한다.”
-슬라보예 지젝
『이미지의 운명: 랑시에르의 미학 강의』(김상운 옮김, 현실문화, 2014)는 자크 랑시에르가 영화, 회화, 사진, 비디오 작품 등 현대 예술에 대한 비평을 바탕으로 예술의 종언 시대에 예술의 해방적 가능성에 대해 다룬 책이다. 1990년대부터 미학과 정치의 관계를 사유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랑시에르는 2000년을 전후해 미학을 주제로 강의하고 글을 발표했는데, 이를 모아 이 책(원제: Le Destin Des Images)를 출간했다. 랑시에르는 이 책에서 20세기 예술사를 지배한 패러다임을 비판하며 예술의 미래에 대한 그만의 독창적인 사유를 전개한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랑시에르의 미학이지만, 고다르와 브레송, 히치콕과 같은 영화감독과, 17세기 근대 초기 회화나 현대 사진 및 비디오 설치 작품들, 푸코, 샤르트르, 바타이유, 들뢰즈, 칸트와 실러, 바르트, 그린버그, 리오타르와 같은 철학자들을 끌어들이며 전개되는 그의 미학 강의를 한국어판에서만 새롭게 추가?구성한 50여 장의 작품 이미지들과 함께 만나볼 기회다.
“예술은, 그것을 예술로 보는 눈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지칭되는, 혹은 자칭 예술이라고 하는 여러 부류의 작품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렇게 번창하거나 혹은 쇠퇴하고 있는 오늘날 예술 세계의 지표는 과연 무엇일까? 예술은 진리의 담지자로서의 표면일까, 아니면 실재를 재현하는 매체일까? 혹은 미학적인 오브제로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놀이일까, 설명할 수도 없는 아우라와 가슴을 찌르는 감동을 선사하는 독보적인 작품 세계일까? 현대 예술을 둘러싼 ‘말’들은 무수하다.
이 가운데 20세기 예술 비평의 대표적인 예는 예술을 매체의 특성으로 구분함으로써 예술의 자율성을 추구해온 클레멘트 그린버그식 형식주의와 리얼리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 구분을 통해 예술사를 읽어내려는 흐름이다. 랑시에르는 이 책에서 이와 같은 비평의 예들이 예술의 각종 매체와 형식을 통해 사실상 시대 구분 없이 지속되어왔던 장르 간 혼합을 은폐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와 같은 주장은 새로운 비판은 아니지만 급진적인 파문을 함축하고 있다.
랑시에르는 예술의 자율성, 순수성, 자동사성이란 사실상 ‘비평적 언어’에 의존했다고 말한다. 이미지는 해석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적 표현은 사회 세계의 나머지와 고립된 채로 정의되지 않는다. 그것의 의미와 가치는 모두 다른 활동들, 그 활동들의 의미 및 가치와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예술적 조작은 사회적 실재의 변동을 낳으므로 정치적인 것이 된다. 여기에서 랑시에르 미학의 독창성이 발휘된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정치와 예술적 조작은 실재에 관한 헤게모니적 지각을 재배치할 수 있다. 즉, 예술과 정치는 사회 문화적 삶의 현재적 의미가 난공불락이라거나 불가피하다는 식의 모든 감각을 파열 낼 수 있는 잠재력을 공유하고 있다. 해방의 관건은 바로 이 기존의 ‘감성적인 것의 나눔’을 파열 내는 것에 달려 있다.”
예술의 종언이란 ‘예술사’의 종언일 뿐, 예술의 죽음은 아니다
리얼리즘-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사 해체
랑시에르는 그동안 미학 저작들을 통해 미학과 정치의 관계, 그리고 사회적 지각의 정치적인 지반을 가리키는 ‘감성적인 것의 나눔’, 또 예술의 세 가지(윤리적?재현적?미학적) 체제에 대해 논의해왔다. 랑시에르가 예술과 관련하여 ‘체제’라는 개념을 제시하는 이유는, ‘위대한 예술가의 대단한 예술 작품’이라는 식의 예술사에 대한 인물 중심적 접근 방식을 버리고, 예술가들의 개인적 실천들에 집단적인 가능성의 조건을 제공하는 것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개개의 작품들은 특정한 예술의 체제 안에서만 제작되고 가치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체제들은 결코 역사적 시대를 규정하는 개념이 아니며, 기본적으로는 공존하면서 서로의 위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 이 책 『이미지의 운명』은 그의 예술의 세 가지 체제에 대한 규정 가운데 재현적 체제와 미학적 체제에 관한 규정을 주로 논의한다.
이렇게 랑시에르가 예술의 세 가지 체제를 제시하고 세공하는 이유는 리얼리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20세기 예술론에 널리 유포되어 있는 ‘시간적 범주들’을 의문에 부치기 위해서다(이 책의 3강과 4강). 랑시에르가 보기에 리얼리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대립은 완전한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랑시에르는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두 예술의 자율성을 표방하는데, 예술의 각 장르가 자신의 고유한 매체의 특성을 따름으로써 일종의 자율성을 얻게 된다고 전제한다. 이런 주장은 예술의 정치적 역량을 작품에 한정시킴으로써 감상자가 지닐 수 있는 능동적인 미적 태도의 가능성을 간과하게 만든다. “예술은, 그것을 예술로 보는 눈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랑시에르가 주장한 까닭도 이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예술의 정치적 역량은 작품이 아니라 작품을 지각하고 사유하는 감상자의 감성적 경험 형태에 있다. 즉, 진정한 문제는 감상자가 미적 경험(교육) 속에서 기존의 감성적 경험 방식을 중지시키고 제거함으로써 그것을 새롭게 구성하는 데 있으며, 더 나아가 그렇게 구성된 새로운 감성적 경험 방식을 작품 너머에 이르기까지 확장하는 데 있다.
“새로운 삶에 대한 실천으로서의 예술”
그는 이 책의 4강에서 근대적 문화 전통에서 서로 대립된 문화적 실천으로 간주되었던 것, 즉 상징주의의 시인인 스테판 말라르메와 모더니즘적 디자이너인 피터 베렌스로부터 공통적인 것을 끌어내고자 한다. 문학사에서 말라르메의 예술은 흔히 모더니즘적 미학주의의 극치로 간주되곤 한다. 이에 반해 독일공작연맹의 창립 멤버이자 독일전기회사 아에게 AEG의 디자인 고문인 베렌스는 집단적 삶의 공간과 오브제를 변형시키려 했던 모더니즘적 디자인 운동의 계보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보기에 이들은 “새로운 공동생활을 형성하는” “어떤 감성적인 공동체의 형상을 그리는” 예술적 형태나 ‘전형’을 창조하고자 하는 ‘정신적’ 사명을 공유하고 있다. 즉, 말라르메의 시적 실험은 베렌스의 응용은 새로운 삶의 형태를 상징하는 미학적 자율성이라는 관념과 아방가르드적인 예술적 실천이라는 관념이 흔히 생각되는 것처럼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예술에는 분명한 정치적 선택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급진적 민주주의를 강화하거나 반동적 신비주의를 만들어낸다.
랑시에르가 이 책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미학적 혁명은 항상 평등주의적 이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예술의 해방적 가능성에 대한 독보적인 주장이다.
컨템포러리 총서 소개
현실문화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컨템포러리(Contemporary) 총서’는 21세기 동시대의 사유와 실천을 한데 엮는 시리즈이다. 정치와 사회, 철학, 미학 등을 넘나드는 동시대 사상가들의 논의는 우리 사회에 지적 자극이 되어줄 것이다. 이와 더불어 검증된 번역자의 공들인 번역과 해설이 단단히 얽혀 있는 사유의 매듭을 풀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문제의식의 발전과 확장을 촉발할 수 있도록 출판사로서도 최선을 다했다. 컨템포러리 총서의 목록은 아직 확정되어 있지 않다. 글의 분량이나 문체, 탐구 영역에 엄격한 선을 긋지도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서로 다른 다양한 목소리들이 자유롭게 만나고 부딪고 뒤섞이면서 지금 이곳, 우리가 가진 문제들을 풀어내는 데 유용하고 유익한 질문을 던져줄 것이라고 믿는 탓이다. 이 총서를 통해 독자들이 더 넓고 깊고 즐겁게 소통하며 다양한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기를 기원한다.
컨템포러리 총서는 1권 자크 랑시에르의 『이미지의 운명』을 시작으로 2014년 6월 발간 예정인 『인민이란 무엇인가』, 이어 조디 딘의 『코뮤니즘의 지평』과 알랭 바디우의 『프랑스 철학으로의 모험』, 루이 알튀세르의 『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 아비탈 로넬의 『루저 아들』 등을 소개할 예정이다. 특히 2014년 6월에 발간될 『인민이란 무엇인가』는 알랭 바디우, 피에르 부르디외, 주디스 버틀러, 자크 랑시에르 등이 2011년 월스트리트 점거운동 이후 정치적 주체와 민주주의에 대해 되묻는, 대표적인 서양 사상가들의 글 모음집으로 학계와 인문교양 독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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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강 이미지의 운명 이미지의 이타성
이미지, 유사성, 원-유사성
이미지성의 한 체제에서 다른 체제로
이미지의 종언은 우리 뒤에 있다
벌거벗은 이미지, 직시적 이미지, 변성적 이미지
2강 문장, 이미지, 역사
공통의 척도 없이?
문장-이미지와 거대병렬
가정부, 유대인 아이와 교수
변증법적 몽타주, 상징적 몽타주
3강 텍스트 속의 회화
4강 ‘디자인’의 표면
5강 재현 불가능한 것이 있는가
재현이 말하고 싶은 것
반-재현이 말하고 싶은 것
비인간적인 것의 재현
재현 불가능한 것의 사변적 과장
옮긴이의 말
랑시에르의 미학과 정치
부록
본문중에서
[‘이미지의 운명’이라는] 이 강의 제목은 이미지에 관한 새로운 오디세이[모험담]를 기대하게 만든다. 라스코 동굴벽화라는 [회화의] 여명기에서 미디어 이미지가 게걸스럽게 집어삼킨 리얼리티라는, 그리고 모니터와 합성이미지에 바쳐진 예술이라는 동시대의 황혼기로 우리를 데려가는 모험담 말이다. 하지만 내 얘기는 이것과는 다르다. 운명이나 이미지에 관한 어떤 특정 관념이 오늘날 문화적 시대 풍조에서 보게 되는 묵시록적 담론들과 어떻게 서로 묶여 있는지를 검토함으로써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고 싶다. 즉, 그런 관념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정말 단순하고 일의적인 리얼리티일까? 이미지라는 이름을 똑같이 써도 거기에는 여러 기능(그 기능을 문제 틀에 맞게 짜맞추는 것이 바로 예술 작업이다)이 있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이 질문에서 시작할 때에야 우리는 더 확고한 토대 위에서 예술의 이미지가 무엇인지, 또 그 지위에서 일어난 동시대적 변화가 무엇인지를 숙고할 수 있을 것이다.―9쪽 ?1강 이미지의 운명? 중에서
한편으로 이미지는 허구적[픽션적] 행위들의 배치, 즉 이야기라는 고전적 질서를 해체하는 해방적 역량, 순수한 형태, 순수한 파토스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미지는 어떤 공통의 역사의 형상을 구성하는 연결에서 하나의 요소로서 가치를 갖고 있다. 이미지는 한편으로는 통약 불가능한 특이성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공통성을 초래하는 조작이다. 이미지와 말의 관계에 할애된 어떤 전시회의 틀은 우리에게 이미지라는 동일한 이름 아래에 놓인 이런 이중적 역량을 성찰할 것을 자연스럽게 촉구한다. 이 전시회는 《공통의 척도 없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 나는 이 제목을 질문을 다시 제기하고 다음과 같이 자문하도록 만드는 초대장으로 간주할 것이다. 즉, ‘공통의 척도 없이’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가? 어떤 척도의 이념이나 어떤 공통성의 이념과 관련해서? 어쩌면 여러 종류의 통약 불가능성이 있을 것이며, 어쩌면 이 통약 불가능성들 각각이 그 자체로 어떤 형태의 공통성을 가동시킬 수도 있다.―68쪽 ?2강 문장, 이미지, 역사? 중에서
“말이 너무 많다.” [사람들이] 예술의 위기나 미학 담론에 대한 맹종을 비난할 때마다 [이런] 진단이 반복된다. 회화에 관해 말이 너무 많다. 회화의 실천에 대해 논평하고 이것을 걸신들린 듯이 먹어치우는 말들이 너무도 많다. (…) 언뜻 보기에 사태는 명료한 것 같다. 한편에 실천이 있고, 다른 한편에 그에 대한 해석이 있다. 한편에 회화적 현상이 있고, 다른 한편에 철학자, 작가 또는 예술가들 자신이 그 위에서 쏟아냈던 담론이 있다. 이런 것은 헤겔과 셸링이 회화를 (절대자가 전개되는 하나의 형태와 그 자체로 동일시되었던) 예술 개념의 현시 형태로 만들었던 이후의 일이다. 하지만 이 단순한 대립은 다음의 질문을 제기할 때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즉, 담론의 보충과 대립되는 이 ‘회화적 현상’은 정확히 무엇에 있는가?―133~134쪽 ?3강 텍스트 속의 회화? 중에서
내게 흥미로운 것은 선을 긋거나 단어를 배열하거나 표면을 배분함으로써 공동 공간의 나눔을 디자인하는 방식이다. 즉, 사람들이 단어나 형태를 조합?배치함으로써 그저 예술의 형태들만이 아니라 볼 수 있는 것과 사유할 수 있는 것의 어떤 짜임새, 감성적 세계에 거주하는 어떤 형태들을 정의하는 방식인 것이다. 상징적인 동시에 물질적이기도 한 이런 배치는 예술들, 장르들, 시대 구분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이것은 기술의, 예술의, 또는 정치의 자율적 역사 같은 범주들을 가로지른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다가설 것이다. 즉, 20세기 초에 발전된 ‘디자인’의 실천과 이념은 어떻게 공유된[분배된] 감성적 세계를 배치하는 실천들의 총체 속에 예술적 활동들의 자리[위치]를 재정의하는가?―169쪽 ?4강 ‘디자인’의 표면? 중에서
어떤 조건 아래서 우리는 어떤 사건을 재현 불가능하다고 선언할 수 있는가? 어떤 조건 아래서 우리는 이 재현 불가능한 것에 특정한 개념적 형상을 부여할 수 있는가? 이 탐구가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탐구는 재현 불가능한 것이라는 통념 및 이와 인접한 통념들(제시 불가능한 것, 사유 불가능한 것, 다루기 불가능한 것, 속죄 불가능한 것)의 배치를 남발하여 사용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에 의해 유발된다. 따라서 문제는 경험의 모든 영역을 일의적으로 포괄할 수 있는 그런 개념을 구축하는 것이 어떻게 그리고 어떤 조건 아래서 가능한가를 아는 것에 있다. ―197쪽 ?5강 재현 불가능한 것이 있는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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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에 반짝이는 약간의 먼지, 파라솔의 물결무늬
위로 떨어지는 녹은 눈의 물방울, 당나귀 주둥이의
잎사귀, 이것들은 물질에 의한 비유로, 이것들은 사
랑의 이유를 사물들의 근거의 커다란 부재와 필적
하게 함으로써 사랑을 발명한다. [83p]
모든 이야기가 문장으로 흩어지고, 이 문장 자체도
단어로 흩어지는 세계. [83p]
중요한 것은 영화가 그 시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세계를 만든다는 것, 영화가 세계를
만들어야 했다는 것을 확정하는 것이다. (…) 이 연
쇄의 역량은 동질적인 것의 역량, 즉 어떤 공포스런
이야기를 이용해 나치즘과 절멸에 관해 말하는 역
량이 아니다. 그것은 이질적인 것의 역량, 즉 샷의
고독, 사진의 고독, 그리고 완전히 다른 문맥에서
완전히 다른 어떤 것에 관해서 말하는 말들의 고독
이라는 세 개의 고독 사이의 무매개적인 충돌의 역
량이다. 이질적인 것의 충돌이야말로 공통의 척도
를 제공하는 것이다. [101p]
연속적인 분절법, 이것은 무한을 잡아매는 거무칙
칙한 주름이며, 모든 이질적인 것에서 모든 이질적
인 것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연한 선이며, 해방된
연결 해제된) 것의 역량, 결코 시작된 적이 없었던
것의 역량, 결코 묶여진 적이 없었던 것의 역량, 모
든 것을 나이 먹지 않는 리듬으로 실어 나를 수 있
는 것의 역량이다. [108p]
내가 말을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나는 말에 의해 둘
러싸여있고 싶으며, 모든 가능한 시작 너머에 이르
고 싶었다. 말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름 없는 하나
의 목소리가 오래전부터 나보다 앞서 있었음을 깨
닫고 싶었다. 마치 이 목소리가 한 순간, 자신을 잡
고서, 주저하면서, 내게 신호를 보낸 것인 양, 나는
문장을 연쇄시키고 문장을 쫓아다니고,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게 그 목소리의 틈새에서 눌러앉아사는
것으로 충분했다.
-미셸 푸코, 담론의 질서, 재인용 [11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