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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경의 골수, 환화幻化와 청정淸淨
부제 : 왜 구상垢相이 영멸永滅하면 시방十方이 청정한가?
1. 서문序文
원각경은 어떠한 경인가? 아마도 부처님의 해설은 무엇보다 으뜸에 상당할 것이다. 현선수보살장을 인용한다. “선남자여, 이 경은 백천만억 항하사 제불이 연설하시는 바이고, 삼세 여래께서 수호하시는 바이며, 시방 보살이 귀의하는 바이고, 십이부경의 청정한 안목이니라. 이 경은 대방광원각다라니大方廣圓覺陀羅尼라 칭명稱名하고, 또한 수다라요의修多羅了義라 호명呼名하며, 또한 비밀왕삼매祕密王三昧라 명명命名하고, 또한 여래결정경계如來決定境界라 정명定名하며, 또한 여래장자성차별如來藏自性差別이라 착명著名하나니, 너희들은 마땅히 봉지奉持할지니라.”(善男子 是經百千萬億 恒河沙 諸佛所說 三世如來 之所守護 十方菩薩 之所歸依 十二部經 清淨眼目 是經名大方廣圓覺陀羅尼 亦名修多羅了義 亦名祕密王三昧 亦名如來決定境界 亦名如來藏自性差別 汝當奉持) 이 5개의 경명 중에 첫째와 둘째를 조합하여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이라 약칭略稱하고, 원각경圓覺經이라 간칭簡稱한다.
함허스님의 원각경설의를 인용하여 원각경의 대의를 부연한다. “무릇 오수증화悟修證化는 바로일경一經의 대지大旨이고, 군경群經의 조종祖宗이다. 그러나 제부諸部 중에 어떤 경은 본각과 시각의 이각二覺을 설언說言하고, 어떤 경은 자각과 각타의 이각을 설언하는데, 해행증화解行證化에서는 호현互現하지만 미진未盡하다. 만약 사리事理가 주원周圓하고 상진詳盡하여 실비悉備한 경이라면 대화엄경 밖에는 오로지 이 일부一部의 경뿐이다. 화엄경과 다른 점은 단지 광략廣略이 부동不同할 따름이다.”(夫悟修證化 乃一經之大旨 而群經之所宗也 然諸部中 或有以本始二覺言 或有以自他二覺言 而於解行證化 互現而未盡 若事周理圓 詳盡悉備者 大華嚴外 唯此一部而已 與華嚴異者 但廣略不同耳) 혹유或有는 혹자或者로 해석하고, 어떤 경이라 번역하며, 일경과 이 일부는 바로 원각경을 의미한다. 호현은 영략호현影略互顯의 약어로, 이쪽에서 생략한 부분을 저쪽에서 보완하여 상호 완벽한 설명이 되는 방식을 말한다. 화엄과 원각의 광략은 비유하면 6백권 반야부와 심경과 그 양상이 유사하다.
이 원각경을 부처님은 십이부경의 청정한 안목이라 찬탄하시고, 함허스님은 군경의 조종이라 드높이 휘날리신다. 나는 어떻게 원각경을 거량擧揚할 수 있을까? 단지 핵심어를 끌어내어 원각경의 대의를 구명하고자 한다. 무엇이 있는가? 아마도 신심 환화 무명이나 청정 허공 원각 등이 아닐까 한다. 여기에 평등과 망념을 빼놓을 수 없다. 이 8개 용어를 칭법稱法하게 해설하면 원각의 거량에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 중에 환화와 청정을 평등으로 회향하는 것은 이 글의 핵심이며, 이는 이 글의 제명 “원각경의 골수, 환화와 청정” 그리고 “부제 : 왜 구상이 영멸하면 시방이 청정한가?”라는 표제와 완벽하게 부합한다. 정안으로 보면 일체 환화가 바로 청정하고, 이에 일체법의 그 법성이 평등하다. 청정은 청정각지나 청정각상 또는 청정진여의 대명사이다. 특히 청정수순이나 수순청정의 청정이 그러하다. 이 글의 소제명은 아래와 같다.
1. 서문序文
2. 청정각지清淨覺地
3. 무상묘각無上妙覺과 무상대각심無上大覺心
4. 보장론寶藏論 중에 본제本際
5. 청정진여淸淨眞如와 청정각상淸淨覺相
6. 환화幻化와 공화空華
7. 본기무명本起無明
8. 실화생처實花生處의 본의
9. 지시공화知是空花는 제일관문第一觀門
10. 지환즉리知幻即離는 제이관문第二觀門
11. 시방청정十方清淨은 제삼관문第三觀門
12. 무방청정無方清淨은 제삼관문의 전변무궁轉變無窮
13. 무방청정과 무상정각의 상호대비相互對比
14. 시방허공의 평등본성平等本性과 평등법성平等法性
15. 불기망념不起妄念은 구경관문究竟觀門
16. 결어結語
2. 청정각지清淨覺地
경은 서분과 정종분 그리고 유통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체로 서분은 그 경의 유래와 인연을 서술한다. 원각경 서분은 아래와 같다.
경문 전석前釋: “이와 같이 나는 들었노라. 한때 바가바께서 신통대광명장에 들어가시고, 삼매를 바로 수용하시니, 일체 여래도 광명으로 장엄하여 주지하시고, 모든 중생의 청정한 근본각지이며, 신심과 적멸이 평등한 본제이다. 시방세계를 원만하게 하고 불이를 수순하시며, 불이의 경계에서 일체 정토를 나투시니라.”
경문 금석今釋: “이와 같이 나는 들었노라. 한때 바가바께서 신통대광명장 삼매정정三昧正定에 들어가시니, 일체 여래의 광명으로 장엄하여 주지하시고, 모든 중생의 청정한 근본각지이니라. 신심과 적멸은 본제에 평등하고, 시방에 원만하여 불이를 수순하시며, 불이의 경계에서 일체 정토를 나투시니라.”(如是我聞 一時婆伽婆入於神通大光明藏三昧正受 一切如來光嚴住持 是諸衆生清淨覺地 身心寂滅平等本際 圓滿十方不二隨順 於不二境現諸淨土)
해설: 위 경문은 신심적멸 이전과 이후로 양단한다. 전석과 금석은 무엇이 다른가? 신심과 적멸을 후문 전체의 주어로 삼은 점이다. 이 때문에 불이를 수순하고 정토를 나투는 주체는 바가바가 아니고 신심과 적멸이 된다.
신심과 적멸은 본제에 평등하고 시방에 원만하다. 중생의 신심과 여래의 적멸은 본제와 시방에 평등하고 원만하다. 본제는 시제時際를 취하고 시방은 공간을 취한다. 일시 일제一際 본제 근본시제는 평등세平等世 곧 찰나제삼매刹那際三昧나 무제지제無際之際와 상응한다. 바가바께서 신통대광명장 삼매정정에 드신 한때의 일시一時도 또한 이 본제를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이 중생의 신심과 여래의 적멸은 모두 시방 허공에 두렷이 충만하고 있다.
통상 제가諸家의 해석은 “신심은 적멸하여 평등한 본제이다.”(身心寂滅 平等本際)라고 하는데, 어째서 나는 “신심과 적멸은 본제에 평등하고 시방에 원만하다.”(身心寂滅 平等本際 圓滿十方)라고 해석하는가? 수행문의 차제에서 보면 중생과 여래는 천양지차이지만, 이 절대평등의 본제에서 보면 중생의 신심과 여래의 적멸은 조금도 차별이 없이 평등하다. 이 때문에 한 중생이 찰나에 성불하고, 그 본제 곧 찰나제삼매에서 보면 일체중생도 또한 일시성불一時成佛한다.
보안보살장을 인용한다. “선남자여, 이 보살과 말세 중생은 이 마음을 수습하고 성취한 자이니라. 그러나 이 당처에는 수습도 없고 또한 성취도 없으며, 원각이 보조해도 적멸과 다름이 없느니라.”(善男子 此菩薩及 末世衆生 修習此心 得成就者 於此無修 亦無成就 圓覺普照 寂滅無二) “비로소 알지니라. 중생이 본래 성불이니라.”(始知衆生 本來成佛) 이 중생의 본래성불 바로 평등한 본제의 차원에서 신심적멸을 관조하라. 바가바께서 일시에 신통대광명장 삼매정정에 드신 서분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중생의 신심이 적멸하여 일체 여래와 평등한 것이 아니고, 본제에서는 중생이 본래성불이라 일체 여래와 평등하다. 이 때문에 신심과 적멸은 본제에 평등하다고 한 것이다.
원각이 보조하면 원각의 적멸은 또한 어떠한가? 원각이 보조해도 그 보조함이 원각의 적멸과 다름이 없다. 무이無二는 유일무이唯一無二 또는 독일무이獨一無二의 무이가 있고, 또 가장 뛰어나고 훌륭하다, 비할 바가 없다, 두 마음이 없다. 두 양태가 없다, 똑같다, 다르지 않다 등의 뜻이 있다.
“원각은 보조하고 적멸함이 다름이 없다.” 이는 틀리지 않는 해석이다. 오히려 의미상 위와 동일하다. 제가는 통상 “원각은 보조하고 적멸이 둘이 없다.”라고 해석한다. 주체가 원각과 적멸이 된다. 어떻든 근기가 천차만별이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보조적멸을 조적照寂이라 일컫고, 적멸보조를 적조寂照라 일컬을 수 있다. 그러나 조적이나 적조를 분단할 수 없다. 이에 제가의 해석을 수용하지 않는다. 규봉종밀스님의 원각경대소를 인용한다. “영락경에 설하시기를, ‘등각은 조적하고, 묘각은 적조한다.’라고 하시니, 금경今經의 운운云云은 불위佛位가 등각의 대의와 동일하기 때문에 보조적멸이라 말씀하신 것이다.”(瓔珞經說 等覺照寂 妙覺寂照 今云同佛是等覺義故 云普照寂滅)
또한 여래의 십호 중에 하나인 허공신虛空身과 같다. 보현보살의 신상은 허공과 같아서 일체처一切處에 변만遍滿하시며, 이 때문에 보안보살 등이 백천가지 삼매에 들어가서 보현보살을 찾았지만 끝내 보지 못한 것이다. 일체처는 무방 또는 시방 허공과 같다. 화엄경 보현삼매품의 게송을 인용한다.
보현보살의 신상은 허공과 같으시니,
진상眞相을 의지하고 국토를 의지하지 않으시니라.
온갖 중생심이 욕망하는 바를 수순하시며,
보신普身을 시현함에 일체처와 동등하시니라.(普賢身相如虛空 依眞而住非國土 隨諸衆生心所欲 示現普身等一切)
“시방에 원만하여 불이를 수순하시며, 불이의 경계에서 일체 정토를 나투시니라.” 불이를 수순하신다. 수순하는 주체는 중생의 신심과 여래의 적멸이다. 불이는 신통대광명장이고, 평등한 본제이며, 원만한 시방이다. 중생의 신심과 여래의 적멸이 불이를 수순하시며, 이 때문에 이 불이의 경계에서 일체 정토를 나투실 수 있다. 원각경의 서분이 그러하다. 또한 일체 예토를 나투실 수도 있다. 이도 또한 유통분이 그러하다. 어째서 그러한가? 육범사성의 십법계 중에 불지를 제외한 구법계를 중생세계라 하며, 무간지옥 중생부터 십일지보살까지도 중생에 상당하기 때문이다. 정토와 예토는 모두 공업으로 이루어진다. 서분에 한정하면, 여래의 적멸과 중생의 신심이 바로 그 인자이다. 결과는 반드시 원인이 있어야 한다.
3. 무상묘각無上妙覺과 무상대각심無上大覺心
경문: “선남자여, 무상묘각은 모든 시방에 두루하여 여래와 일체법을 출생하고, 동체로 평등하며, 모든 수행에 있어서 실제實際는 둘이 있지 않지만, 방편을 수순하면 그 수는 한량이 없느니라.”(威德自在菩薩 善男子 無上妙覺 遍諸十方 出生如來 與一切法 同體平等 於諸修行 實無有二 方便隨順 其數無量) “위덕자재여, 그대는 응당 알지니라. 무상대각심의 본제는 이상二相이 없지만, 온갖 방편을 수순하면 그 수가 바로 무량하니라.”(威德汝當知 無上大覺心 本際無二相 隨順諸方便 其數即無量)
해설: 이 위덕자재보살장의 경문은 서분과 상응한다. 여래의 광엄주지와 중생의 청정각지는 무상묘각 또는 무상대각심과 호응하고, 원만시방은 변제시방과 상응하며, 평등본제는 평등무이와 수응한다. 특히 게송은 첫째 무상묘각의 무상대각심에서 바로 본제로 이어받는다. 서분은 본체론이라 신심과 적멸에서 본제를 취했지만, 제7장은 수행의 차제를 밝히는 차별문이라 무상묘각을 갖가지 정륜의 본원으로 삼은 것이다.
이는 마치 금강경의 제2장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과 제17장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에서 거듭 동일하게 청법한 바와 같다. “세존이시여, 선남자와 선녀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현현하고자 함에 어떻게 응당 머물게 하고, 어떻게 그 기멸심을 항복시켜야 합니까?”(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경문이 전자는 응운하주應云何住이고, 후자는 운하응주云何應住이며, 그 의미는 동일하다. 응주할 대상은 보리심이고, 항복시킬 대상은 기멸심이다. 원각경으로 대치하면, 바로 청정과 환화이다.
4. 보장론寶藏論 중에 본제本際
본제란 개념은 난해하다. 이에 승조법사僧肇法師의 보장론 중에 본제허현품本際虛玄品을 인용하여 그 이해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한다. “무릇 본제란 바로 일체중생의 무애한 열반의 체성이다.”(夫本際者 即一切衆生無礙涅槃之性也) “무릇 불생不生이란 바로 본제이다. 불출불몰不出不沒함이 오히려 허공과 같아서 어떤 것으로도 비유할 수 없다.”(夫不生者 即本際也 不出不沒 猶如虛空 無物可比) “그러나 그 본제는 자성이 청정하고 미묘하며 심심甚深하여 그 체성이 진구塵垢가 없다.”(然其本際 自性清淨 微妙甚深 體無塵垢) “그러므로 본제는 무명無名이지만 무명에서 본제라 칭명하고, 본제는 무상無相이지만 무상에서 칭명한다. 명상이 이미 세워지면 망혹妄惑이 마침내 생기生起한다.”(是以本際無名名於無名 本際無相名於無相 名相既立妄惑遂生) “이 때문에 경에 ‘삼라와 만상은 일법이 낙인烙印한 바이다.’라고 하니, 낙인이 바로 본제이다.”(故經云 森羅及萬象 一法之所印 印即本際也) “그러나 본제의 상리常理는 자타自他가 없고 동이同異한 것이 아니다.”(然本際之理 無自無他 非一非異) “무릇 눈으로 보면 곧 방위가 있고, 귀로 들으면 바로 처소가 있으며, 피부로 느끼면 곧 마음이 있고, 의식으로 알면 바로 현량이 있다. 본제를 명료하지 못하면 방소가 없고 심량이 없으니, 곧 견문각지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夫見即有方 聞即有所 覺即有心 知即有量 不了本際 無方無所 無心無量 即無有見聞覺知也) “무릇 관신실상觀身實相이란 곧 일상一相이고, 일상이란 바로 공상空相이다. 단지 공상은 무상이기 때문에 곧 구상垢相이 없고, 청정도 없으며, 범성凡聖도 없고, 유무도 없으며, 사정邪正도 없다. 그 체성이 상주하여 불생하고 불멸하니, 곧 본제이다.”(夫觀身實相者 即一相也 一相者 即空相也 但空無相故 即非垢非淨 非凡非聖 非有非無 非邪非正 體性常住 不生不滅 即本際也) “그러나 저 진일眞一은 바로 갖가지 명자名字가 있다. 비록 갖가지 명자가 있지만, 결국은 동일한 명의名義이다. 어떤 때는 법성이라 칭명하고, 법신 진여 실제 허공 불성 열반 법계나 본제 여래장에 이르기까지 무량無量한 명자가 있지만, 모두 진일의 이명異名이고, 함께 일의一義를 생발生發한다.”(然彼眞一 而有種種名字 雖有種種名字 終同一義 或名法性 法身 眞如 實際 虛空 佛性 涅槃 法界 乃至本際 如來藏 而有無量名字 皆是眞一異名 同生一義)
승조법사는 위에서 진일眞一을 표제어로 제시했지만, 원각경이라면 청정이 대표할 수 있고, 화엄경이라면 십이유지를 내세울 수도 있으며, 만일 통현장자라면 중생심을 현시할 수도 있다. 또한 화엄경 사성제품의 관점에서 보면 어떠할까? 일체 언어문자 중에 하나를 제시해도 또한 옳다.
5. 청정진여淸淨眞如와 청정각상淸淨覺相
경문: “선남자여, 무상법왕은 대다라니문이 있으니 이름이 원각이며, 일체 청정한 진여와 보리 열반과 바라밀을 밖으로 드러내 보살을 가르쳐주시니라.”(善男子 無上法王有大陀羅尼門 名爲圓覺 流出一切清淨眞如 菩提涅槃及波羅密 教授菩薩)
해설: 청정각상은 청정각淸淨覺 또는 청정각지 청정각해淸淨覺海 청정원각 등과 동의어이고, 청정진여나 청정열반은 청정의 또 다른 모습이다. 문수보살장을 의거하여 청정각지와 청정진여 청정각상을 대표로 삼아 소제목으로 제시한다. 청정각지와 청정각상은 청정의 각체이고, 청정진여는 청정의 묘용이다. 이 진여는 원각이란 각체에서 보리나 열반 바라밀과 함께 유출하기 때문이다. 감산스님은 직해에서 “비록 물들여도 물들지 않기 때문에 청정이라 말하고, 종래로 허망하지 않고 전변하지 않기 때문에 진여라 호칭한다.”(雖染而不染故曰清淨 從來不妄不變故稱眞如)라고 정의한다.
경문: “일체 여래의 본기인지는 모두 청정각상을 원조함에 의하여 영원히 무명을 끊고 바야흐로 불도를 성취하셨느니라.”(一切如來本起因地 皆依圓照清淨覺相 永斷無明方成佛道)
해설: 여래의 본기인지는 본기청정과 인지법행을 합쳐서 간략히 말한 것이고, 모두는 인지의 법행을 이어받는다. 이미 성불한 일체 여래와 차후 성불할 온갖 중생은 그 수행차제가 동일하지 않다. 일체 여래는 먼저 청정각상을 원조하고, 원조하는 그 공력으로 무명을 영단하고 성불하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성불하지 못한 온갖 중생은 무명이 앞을 가리고, 이 때문에 먼저 무명을 제멸하는 방법을 강구하며, 연이어 청정각상 또는 청정각지를 원조하여 성불할 수 있다.
이 원조圓照는 원수圓修와 같으며, 바로 변음보살장의 25종 청정정륜清淨定輪 중에 구경의 정륜을 의미한다. 곧 “만일 온갖 보살이 원각의 정혜靜慧로 일체 24종의 정륜을 원합圓合하고, 갖가지 성상에서 각성을 여읨이 없으니, 이 보살이란 이는 3종의 자성을 원수하여 청정각상을 수순하시니라.”(若諸菩薩 以圓覺慧 圓合一切 於諸性相 無離覺性 此菩薩者 名爲圓修 三種自性 清淨隨順) 이 문단도 제가의 해석이 분분하다. 규봉스님의 원각경대소석의초圓覺經大疏釋義鈔를 인용한다. “제륜의 말문에 이르기를, ‘만일 온갖 보살이 원각의 정혜로 일체를 원합하고, 갖가지 성상에서 각성을 여읨이 없으니, 3종의 자성을 원수한 것이니라.’라고 하시니, 자성이란 각체에 칭합稱合하여 본래 구족한 것이다.”(諸輪末文云 若諸菩薩 以圓覺慧 圓合一切 於諸性相 無離覺性 名爲圓修 三種自性 自性者 稱體本來具也) 제성상諸性相은 제법실상諸法實相과 제법실성諸法實性을 합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체법의 성상에서 각성을 여읨이 없다.
문제는 무엇인가? 삼종의 정륜을 원수하느냐? 아니면 삼종의 자성을 원수하느냐? 나는 후자를 취한다. 그러나 이 원수의 원조는 이미 성불한 일체 여래의 전유물은 아니다. 현재 중생일지라도 바로 청정정륜의 관문에 들어서면 청정각상을 원조할 수 있다. 청정각상은 청정각성清淨覺性과 다르지 않다. 실상과 실성도 다르지 않다. 종경록에 “일심이란 바로 제법실상이고, 또한 제법실성이다.”(一心者 即諸法實相也 亦諸法實性也)라고 설파한 것과 같다. 중생의 분상에는 원조보다는 회광반조廻光返照의 반조가 더 어울릴 듯하다. 화두 참구도 또한 청정각지를 반조하는 또 하나의 유형이라 말할 수 있다.
6. 환화幻化와 공화空華
경문: “선남자여, 일체 중생의 갖가지 환화는 모두 여래의 원각묘심에서 나오느니라. 비유하면 허공꽃이 허공을 좇아서 있지만, 환화幻花는 비록 사라질지라도 허공의 체성은 무너지지 않는 것과 같이, 중생의 환심幻心도 또한 환화幻化에 의해 사라지지만, 모든 환화가 남음이 없이 사라질지라도 원각묘심은 요동하지 않느니라.”(善男子 一切衆生 種種幻化 皆生如來 圓覺妙心 猶如空花 從空而有 幻花雖滅 空性不壞 衆生幻心 還依幻滅 諸幻盡滅 覺心不動)
해설: 보현보살장의 위 원각묘심은 금강장보살장에도 나오고, 이는 제14장의 주제이기도 하며, 묘원각심妙圓覺心이란 용어도 있다. “선남자여, 일체 여래의 묘원각심은 본래 보리와 열반이 없고, 또한 성불한다거나 성불하지 못함도 없으며, 망령되게 윤회한다거나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도 없느니라.”(善男子 一切如來 妙圓覺心 本無菩提 及與涅槃 亦無成佛 及不成佛 無妄輪迴 及非輪迴)
원각묘심이나 묘원각심은 그 의미가 동일하다. 원각은 진여와 보리 열반 바라밀 등을 내보내기도 하고, 중생의 갖가지 환화가 원각의 묘심에서 나오기도 한다. 중생의 갖가지 환화나 신심 등은 공화에 비유하고, 원각묘심은 허공에 비유한다.
불광사전佛光辭典은 묘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사의할 수 없기 때문에 묘심이라 호칭한다. 천태종의 교판에 의거하면, 별교 계통은 여래의 진심을 묘심이라 하고, 원교는 바로 범부의 망심妄心을 묘심이라 한다.”(不可思議 故稱妙心 依天台宗之判敎 別敎係以如來之眞心爲妙心 圓敎則直以凡夫之妄心爲妙心) 이를 의거하면 천태종의 장통별원藏通別圓 사교 중에 원교는 화엄경이나 법화경에 상당할 것이다. 원각경은 어떠할까? 서분의 본제나 변음보살장 중에 제25정륜의 원수圓修를 취햐면 원교에 상당하고, 만일 원각의 묘심을 여래의 진심으로 해석하면 별교에 상당할 듯하다.
7. 본기무명本起無明
경문: “무엇 때문인가? 무시이래로 있는 본기무명이 자기의 주재자가 됨으로 인하여 일체중생은 태어날 때부터 지혜안이 없으니, 몸과 마음 등의 체성이 모두 무명인 것이다.”(何以故 由有無始本起無明爲己主宰 一切衆生生無慧目 身心等性皆是無明)
해설: 위 문단은 재9장 정제업장보살장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본기무명은 문수보살장의 본기청정과 대비되고, 환화도 또한 청정과 대비하여 설명할 수 있다. 무명과 환화는 그 부류가 동일하다. 보현보살장에 “만일 저 중생이 환화와 같은 것이라 안다면, 신심도 또한 환화일 것인데. 어떻게 환화로 다시 환화를 수습할 수 있습니까?”(若彼衆生 知如幻者 身心亦幻 云何以幻 還修於幻) 또한 보안보살장에 “응당 신심이 모두 환구인 줄을 알지니라. 구상이 영멸하면 시방이 청정하니라.”(當知身心 皆爲幻垢 垢相永滅 十方清淨)라고 한다. 이를 의거하면 경문의 말구 “몸과 마음 등의 체성이 모두 무명인 것이다.”(身心等性 皆是無明)라는 구절 중에 무명을 환화로 대체해도 크게 허물은 없을 것이다. 이에 위 경문을 이 장에서 인용한다.
본기무명과 대대하는 본기청정은 무엇인가? 본기청정은 바로 청정법신 중에 최초일념을 말한다. 본기청정의 본기는 처음 일으킨다는 뜻이고, 청정은 청정심이다. 청정심을 처음 일으키니, 곧 정각을 성취하는 초발심이다. 본기청정을 알지 못하면 인지법행을 수습할 수 없다. 처음 청정심을 일으킨 이후 수행하는 차제를 인지법행이라 한다. 십이유지 중에 순행하는 유전문을 따르면 중생이 되고, 역행하는 환멸문을 따르면 성불한다. 본기청정 인지법행은 환멸문에 배대할 수 있고, 본기무명은 유전문에 배대할 수도 있다. 이 인지법행은 문수보살장의 핵심이다.
8. 실화생처實花生處의 본의
경문: “선남자여, 허공에는 실로 꽃이 없는데 눈병 있는 자가 무턱대고 고집하느니라. 무턱대고 고집하기 때문에 이 허공의 자성을 미혹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다시 저기 실로 꽃이 생기는 곳도 미혹하느니라.”(善男子 空實無花 病者妄執 由妄執故 非唯惑此虛空自性 亦復迷彼實花生處)
해설: “허공에는 실로 꽃이 없다.”(空實無花) “실로 꽃이 생기는 곳”(實花生處) 이 양구의 실實자는 모두 부사로 쓰인다. 공화空花나 가화假花와 대비되는 실화實花로 볼 수 없다. 만일 허공에서 유출하는 실화라면 청정진여나 보리 열반 등에 상당하기 때문이다.
이 실화를 규봉종밀스님의 원각경대소에서 가장 정확하게 해설하고 있다. “또한 다시 저기 등등을 미혹한다는 것은 어떠한가? 이미 공화가 허공을 좇아서 생긴다고 망집하면, 곧 눈병을 좇아서 환영幻影이 일어나는 줄을 알지 못한다. 바로 실實자는 공화의 생처이고, 진실로 실재하는 꽃을 일컫는 것은 아니다. 만약 구체적으로 법에 칭합하고자 하면, 마땅히 ‘오로지 이 진공의 자성을 미혹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다시 저 신심이 생겨난 곳도 미혹할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亦復迷彼等者 既執華從空而生 即不知從瞖而起瞖 則實是華之生處 非謂眞實之華 若具法合 應云 非唯惑此眞空自性 亦復迷彼身心生處)
남송 효종황제孝宗皇帝의 원각경어주圓覺經御註는 다음과 같다. “중생은 망집을 기인한 연고로 오직 자기 허공의 체성을 미혹할 뿐만 아니라, 또한 저 예목翳目의 실체가 공화의 생처인 줄을 알지 못한다.”(衆生因妄執之故 不唯迷惑自己虛空之性 亦且不知彼之翳目實是空華生處也) 이는 대소를 요약한 것이다.
9. 지시공화知是空花는 제일관문第一觀門
경문: “선남자여, 여래는 인지에서 원각을 닦는 분이라, 이 몸과 마음이 공화인 줄 알자마자 바로 윤화가 없느니라.”(善男子 如來因地 修圓覺者 知是空花 即無輪轉)
해설: 후구는 전구의 전제조건에 따라 그 경계가 다를 수 있다. 만일 최상승 근기이거나 대심범부라면 여래와 함께 인지법행에서 원각을 닦는 분이라, 바로 이 지시공화知是空花가 곧 원조청정각상圓照清淨覺相과 같을 수 있다. “일체 여래의 본기인지는 모두 청정각상을 원조함에 의하여 영원히 무명을 끊고 바야흐로 불도를 성취하셨느니라.”(一切如來本起因地 皆依圓照清淨覺相 永斷無明方成佛道) 만일 전제조건이 다르면 어떠할까? 일정하지 않다. 천변만화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함허스님의 설의를 인용한다. “보살이 이 인지법행을 말미암아 염원하면 본래 부처와 동일하지만, 습기로 인하여 바로 다르다. 모름지기 습기를 다스리면 구경이 청정하다. 이는 청정심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중생도 또한 이 인지법행을 의지하여 발심하고 청정행을 닦는 것이니, 이 때문에 사견의 구렁텅이에 떨어지지 아니한다.”(菩薩因此作念 本同於佛 因習乃異 要須治習究竟淸淨 是爲發淸淨心也 衆生亦依此發心 修淸淨行 所以不墮邪見坑也) “습기로 인하여 바로 다르다.”라는 인습내의因習乃異를 제시한다.
10. 지환즉리知幻即離는 제이관문第二觀門
경문: “선남자여, 환화인 줄 알면 곧 여의므로 방편을 쓰지 않으며, 환화를 여의면 바로 원각이라 또한 점차도 없느니라.”(善男子 知幻即離 不作方便 離幻即覺 亦無漸次)
해설: 이 보현보살장의 지환즉리知幻即離 이환즉각離幻即覺은 문수보살장의 지시공화知是空華 즉무윤전即無輪轉과 함께 원각경의 백호광명이다. 양자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즉무윤전을 원각으로 대체하면 지시공화가 바로 원각이고, 이를 적용하면 지환즉각知幻即覺이 되어야 한다. 후자는 하나의 단계가 더 있다. 지환과 즉각의 중간에 이환離幻의 절차가 있다. 이 이환은 영단무명永斷無明이나 구상영멸垢相永滅 또는 멸영상滅影像 등과 그 의미가 상통한다. 지환은 지시공화와 동의어이다. 또한 어째서 백호광명인가? 이는 일체 여래가 본기청정 인지법행에서 청정각상을 원조하기 때문이고, 바로 일심을 돈오하고 찰나도 옮기지 않으며 그 자리에서 원각을 증득하기 때문이다.
11. 시방청정十方清淨은 제삼관문第三觀門
경문: “선남자여, 응당 몸과 마음은 모두 환구幻垢와 같은 줄 알라. 구상垢相이 영원히 없어지면 시방이 청정하니라.”(善男子 當知身心 皆爲幻垢 垢相永滅 十方清淨)
해설: 왜 구상垢相이 영멸永滅하면 시방十方이 청정한가? 바로 여기에서 이 글의 부제를 취한 것이다. 시방과 청정에 초점을 맞추었다. 시방이나 무방 무변허공의 허공은 비유가 아니고 각체이다. 허공신은 여래 십호 중에 하나이다. 여기 중생은 범부이지만, 저기 중생은 이미 범부가 아니다. 신심이 환구인 줄 아는 바로 그 찰나에 전변한다. 보리살타는 각유정이라 번역하는데, 정각중생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십일지 등각위도 또한 중생이라 말할 수 있다. 원각경의 기본 취지가 그러하다.
함허스님의 설의를 인용한다. “지금 정념으로 관찰하고, 환화인 줄을 알면 바로 여의기 때문에 구상이 영원히 없어지면 시방세계가 청정하다. 마치 저 고경古鏡에 구상이 다 없어져 밝게 나타나서 장애가 없음과 같다. 그래서 이르기를, ‘응당 몸과 마음은 모두 환구와 같은 줄 알라. 구상이 영원히 없어지면 시방세계가 청정하다.’라고 한 것이다.”(今正念觀察 知幻卽離故 垢相永滅十方淸淨 如彼古鏡垢盡明現而無障碍也 所以云 當知身心 皆爲幻垢 垢相永滅 十方淸淨)
12. 무방청정無方清淨은 제삼관문의 전변무궁轉變無窮
경문: “선남자여, 이 보살과 말세중생이 제환諸幻을 증득證得하여 영상影像을 제멸하기 때문에 이때 무방無方의 청정을 얻나니, 무변허공의 원각이 현발하는 바이니라.”(善男子 此菩薩及 末世衆生 證得諸幻 滅影像故 爾時便得 無方清淨 無邊虛空 覺所顯發)
해설: 문단을 나눔에 고인마다 그 견해가 동일하지 않다. 위는 규봉스님의 원각경대소를 의거한 것이고, 함허스님은 무방청정에서 끊으며, 감산스님은 각원명고覺圓明故 현심청정顯心清淨의 양구가 더 있다.
나는 무변허공 각소현발을 무방청정의 부연으로 본다. 후자를 주체로 보고, 전자를 객체로 본다. 또한 이 무방청정은 전장前章의 시방청정과 그 구성이 완벽하게 일치하며, 무변허공 각소현발 이후 청정의 전변이 무궁하게 전개된다. 이에 소제목을 제삼관문의 전변무궁이라 일컬은 것이다. 안이 없고 밖이 없는 허공을 무방이라 호칭한다. 안과 밖이 있다면 방위가 있기 때문이다.
일단 함허스님의 설의를 인용한다. “시방에 모든 염정染淨의 신심은 저 원각에서는 모두 환구가 된다. 청정을 얻지 못한 것은 다만 중생이 망집하여 진실로 여기는 연고로 멀리 여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미 환화인 줄 알고 바로 여의며 영상이 멸진하면 다시는 정견情見을 생기하지 않기 때문에 시방이 청정하여 모두 장애가 없다.”(十方所有 染淨身心 於彼圓覺 皆爲幻垢 不得淸淨者 只緣衆生 執以爲實 不能遠離故也 今旣知幻卽離 影像滅盡 更不生情故 十方淸淨 皆無障碍也)
13. 무방청정과 무상정각의 상호대비相互對比
경문: “경계가 환화와 같고 꿈과 같으며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으며 또한 변화와 같은 줄을 명백히 알지니라. 만일 모든 보살이 이와 같은 관행觀行과 상응하고, 모든 법 가운데서 두 가지 견해를 내지 아니하면, 일체 불법이 즉시 현전할 수 있고, 초발심시에 곧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느니라.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心自性인 줄을 알면, 혜신慧身을 성취하되 타인으로 인하여 깨달은 것이 아니니라.”(了知境界如幻如夢如影如響 亦如變化 若諸菩薩能與如是觀行相應 於諸法中不生二解 一切佛法疾得現前 初發心時即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知一切法即心自性 成就慧身 不由他悟)
해설: 위 경문은 화엄경 범행품의 맨 끝에 있다. 말하자면 범행품의 결구結勾이다. 어째서 범행품을 인용하는가? 상하 문단이 서로 그 구조가 의미상 유사하며, 이 때문에 상문 중에 무방청정을 무방 청정각상으로 보고, 이를 하문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상호 대비하여 구명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무상정각의 각상도 또한 청정각상과 함께 “무변허공의 원각이 현발하는 바이니라.”라고 말할 수 있다.
함허스님처럼 독립한 문장으로 보면, “무변허공은 원각이 현발하는 바이니라.”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이는 또한 함허스님의 견해이기도 하다. 설의를 인용한다. “왜 그러한가? 허공은 원각이 현발한 것이기 때문이다.”(何則 虛空是覺所顯發者也) 월봉 외도의 견해라 전래하는 “무변허공에서 원각이 현발하는 바이니라.”라는 해석은 경의經意와는 거리가 십만팔천리나 떨어져 있다.
14. 시방허공의 평등본성平等本性과 평등법성平等法性
경문: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허공은 잠깐이라도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잠깐이라도 없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다시 여래의 원각수순은 허공의 평등한 본성이 되는 것이랴.”(善男子 當知虛空非是暫有亦非暫無 況復如來圓覺隨順 而爲虛空平等本性)
해설: 금강장보살의 의문은 셋이다. “만일 모든 중생이 본래 성불이라면 어째서 다시 일체 무명이 있습니까? 만일 모든 무명은 중생이 본래 있다면 어떤 인연 때문에 여래께서는 다시 본래 성불이라 말씀하십니까? 시방의 이생異生이 본래 불도佛道를 성취했지만 이후에 무명을 일으킨다면 일체 여래께서는 어느 때에 다시 일체 번뇌를 생기生起하십니까?”(若諸衆生 本來成佛 何故復有 一切無明 若諸無明 衆生本有 何因緣故 如來復說 本來成佛 十方異生 本成佛道 後起無明 一切如來 何時復生 一切煩惱)
“허공은 잠깐이라도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잠깐이라도 없는 것도 아니다.” 함허스님의 해설은 허공의 유무에 초점을 맞추고 금강장보살의 둘째 질문에 배대한다. “원각과 수순의 용어는 아마도 도치된 듯하다. 응당 ‘수순원각’이라 일컫고, 또한 마땅히 ‘하물며 다시 여래의 원각묘심은 허공의 평등한 본성이 됨이랴.’라고 일컬어야 한다. 중생이 본래 부처이고, 본래 무명이 없다. 이미 결정된 뜻이면 곧 중생과 부처도 본래 원각묘성이 있는데 유무를 갖고 의심해서는 안 된다. 왜 그러한가? 허공은 원각이 현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릇 허공은 잠깐이라도 있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면, 하물며 허공의 본인은 원각묘성인데, 어찌 유무를 갖고 논란할 수 있으랴. 이는 둘째 질문에 답변한 것이다.”(圓覺與隨順之言 恐倒置 應云隨順圓覺 亦當云 況復如來圓覺妙心 而爲虛空平等本性 生本是佛 本無無明 旣決定義 則生佛本有圓覺妙性 不可以有無疑也 何則 虛空是覺所顯發者也 但是虛空非暫有無 況虛空本因圓覺妙性 豈可以有無論也 此答第二問也)
“하물며 다시 여래의 원각수순은 허공의 평등한 본성이 되는 것이랴.”(況復如來圓覺隨順 而爲虛空平等本性) 감산스님의 직해 해설은 원각수순을 중시하여 셋째 질문에 배대한다. “이는 상주하는 묘원진심妙圓眞心이 생사열반에 속하지 않음을 특시特示한 것이며, 부처가 되어도 번뇌를 일으키는가 하는 의심을 거듭 없애준 것이다. 의견은 이러하다. 허공도 오히려 환화의 기멸을 수순하지 않는데 하물며 묘각명심妙覺明心은 허공의 본성이 됨이랴. 또 어찌 생사열반의 기멸을 수순하겠느냐?”(此特示妙圓常住眞心 不屬生死涅槃 以重釋佛起煩惱之疑也 意謂 虛空尚不隨於幻華起滅 何況妙覺明心 而爲虛空本性 又豈隨於生死涅槃起滅耶)
규봉종밀스님의 원각경대소는 어떠할까? “허공은 세간법으로 보아도 오히려 공화의 기멸起滅과 동일하지 않는데, 하물며 여래께서 수순하신 원각은 담연하고 진상眞常하여 바로 허공의 체성인 것이랴. 원각이 허공의 본성이 된다는 것은 불정수능엄경에 ‘허공이 대각 중에 생긴다.’라고 일컫고, 또 ‘적조는 허공을 머금는다.’라고 일컫는 것과 같다. 다시 평등이라 말한 것은 어떠한가? 그런데 원각이 비록 허공의 본성이지만, 명합冥合하여 분단하지 못해도 법계를 주변周徧하며, 능의能依와 소의所依를 분한分限하지 못하고 분별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평등이라 일컫는다. 이 뜻은 허공이 대각 중에 있다고 일컬은 것이니, 허공도 오히려 상적常寂하거늘, 하물며 원각은 허공의 본성이 되는데 어찌 증감增減하랴. 비유로도 오히려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하물며 다시’라고 운운한 것이다.”(解曰虗空世法尚不同華起滅 況如來隨順圓覺湛然眞常 是虗空之體性耶 覺爲空性者 佛頂云空生大覺中 又云寂照含虗空 復言平等者 然圓覺雖是虗空之性 而冥合不分周徧法界 無分無限無別能依所依 此意云空在覺中 空尚常寂 況覺爲空性 豈增減耶 喻猶不及故云況復)
나의 견해는 이러하다. 둘째 질문이다. “만일 모든 무명은 중생이 본래 있다면 어떤 인연 때문에 여래께서는 다시 본래 성불이라 말씀하십니까?” 여래의 원각수순은(또는 원각묘심은) 허공의 평등한 본성이 되기 때문이다. 허공이 상적한 것처럼 여래의 원각도 또한 상적한다. 이를 평등본성 또는 평등법성이라 호칭할 수 있다.
재론한다.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 원각이냐? 아니면 허공이냐? 금강장보살의 질문을 의거하면 원각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인용한 문단만 의거하면 허공이 주체가 될 수도 있다. 만일 허공에 방점을 두면 원각묘심도 또한 허공의 평등한 본성일 따름이다. 허공평등본성이 주체가 되고 원각묘심은 객체가 된다.
원각의 수순 또는 원각의 묘심을 간단히 원각이라 말할 수 있고, 이를 허공과 대비하여 평등본성을 구명할 수 있다. 서분의 말미를 인용한다. “모든 권속과 함께 모두 삼매에 들어가고, 여래의 평등법회에 동주同住하시니라.”(與諸眷屬皆入三昧 同住如來平等法會) 원각경대소를 인용하여 평등법회를 해석한다. “이에 상당한 때에는 범성凡聖의 체성이 동일하고, 인과가 일상一相이며, 이 때문에 평등법성平等法性의 회상會上이라 일컫고, 법회法會라 칭명한다.”(當爾之時 凡聖體同 因果一相 故云平等法性之會 名法會也) 나는 평등본성과 평등법성을 동일시하고자 한다.
화엄경에 “보살의 평등법성을 요달了達한다.”(了達菩薩平等法性) 또는 “제불의 평등법성에 안주安住한다.”(安住諸佛平等法性)라는 구절이 있다. 또한 종경록에 “이와 같이 일체 여래의 형상이 평등함을 시현示現하시니, 이와 같은 평등이 바로 법성이며, 이 때문에 명칭을 평등법성이라 말씀하시니라.”(如是示現一切如來形相平等 如是平等即是法性 是故說名平等法性) 또는 “이 평등법성의 일승묘심一乘妙心은 일체 중생이나 성문 연각 보살 제불이 모두 다 함께 품수稟受하시니라.”(此平等法性 一乘妙心 一切衆生 聲聞緣覺 菩薩諸佛 悉皆共稟)라는 구절도 있다. 일체법의 본성은 평등하다. 일체법의 법성은 평등하다. 양자에 조금도 차별이 없다.
“선남자야, 일체 장애가 곧 구경각이니, 정념과 망념이 해탈이 아님이 없고, 성법과 파법이 모두 열반을 일컬으며, 지혜와 우치가 죄다 반야가 되고, 보살과 외도가 성취한 법이 함께 보리이며, 무명과 진여가 다른 경계가 없고, 모든 계정혜와 음로치가 다 범행이며, 중생과 국토가 한가지로 법성이고, 지옥과 천궁이 모두 정토가 되며, 유성과 무성이 가지런히 불도를 이루니, 일체 번뇌가 구경의 해탈이다. 법계해의 지혜로 조견하면 모든 형상이 마치 허공과 같다. 이를 여래의 수순각성이라 일컫느니라.”(善男子 一切障礙 即究竟覺 得念失念 無非解脫 成法破法 皆名涅槃 智慧愚癡 通爲般若 菩薩外道 所成就法 同是菩提 無明眞如 無異境界 諸戒定慧 及婬怒癡 俱是梵行 衆生國土 同一法性 地獄天宮 皆爲淨土 有性無性 齊成佛道 一切煩惱 畢竟解脫 法界海慧 照了諸相 猶如虛空 此名如來 隨順覺性)
법계해의 지혜로 모든 형상을 조견하면, 모든 형상이 마치 허공과 같다. 이는 총상이고, 나머지는 모두 별상이다. 이 총상으로 인하여 별상이 성립한다. 중생과 국토가 한가지로 법성이다.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心自性인 줄을 안다.(知一切法 即心自性) 중생과 국토 그리고 허공은 법성이고 동시에 심자성이기도 한다. 이를 정안淨眼으로 보면 평등법성이 되고, 예안穢眼으로 보면 차별법성이 된다. 차별법성差別法性이란 용어는 일기지사一期之事로 쓴 것이다.
유마경을 인용한다. “그러므로 보적이여, 만일 보살이 정토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하라. 그 마음의 청정을 따라서 바로 불국토도 청정하니라.”(是故寶積 若菩薩欲得淨土 當淨其心 隨其心淨 則佛土淨” “이때 부처님께서 발가락으로 땅바닥을 누르시자, 즉시 삼천대천세계에 약간의 백천 가지 진보로 엄식嚴飾하니, 비유컨대 보장엄불의 무량한 공덕의 보배로 장엄한 불국토와 같으니라.”(於是佛以足指按地 即時三千大千世界 若干百千珍寶嚴飾 譬如寶莊嚴佛 無量功德寶莊嚴土)
내가 좌정하고 있는 바로 이 당처에 십법계가 동시 출현한다. 지금 나무로 만든 좌상 위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지만, 나의 청정각지는 일찍이 보련화좌寶蓮華座를 여읜 적이 없다. 일심이 청정하면, 바로 이 육신은 법신이 되고, 사면의 방장은 정토가 되며, 창밖에 허공은 평등법성이 된다.
15. 불기망념不起妄念은 구경관문究竟觀門
경문: “선남자여, 다만 모든 보살과 말세 중생이 일체 시각에 머물러 망념을 일으키지 말고, 모든 망심妄心에 대하여 또한 가라앉혀 없애지도 말며, 망상 경계에 머물러 명백히 알려고 힘쓰지도 말고, 명백히 알려고 함이 없는 곳에서 진실을 변별하지도 말지니라. 저 모든 중생이 이 법문을 듣고서 신해하고 수지하며 두려움을 내지 않으면, 이것이 곧 청정각성을 수순하는 것이니라.”(善男子 但諸菩薩 及末世衆生 居一切時 不起妄念 於諸妄心 亦不息滅 住妄想境 不加了知 於無了知 不辨眞實 彼諸衆生 聞是法門 信解受持 不生驚畏 是則名爲 隨順覺性)
해설: 청정혜보살장의 이 문단은 진실로 부사의한 경계이다. 먼저 함허스님과 감산스님의 고견을 개진하고, 차후 나의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설의: “이전 문단은 지위의 점차 차별을 밝혔고, 이 문단은 돈기頓機가 망심忘心하고 돈증頓證함을 밝히신 것이다. 이른바 자성은 본래 망념이 없는지라 응당 일부러 일어나지는 않는다. 비록 다시 망념이 일어날지라도 망념의 체성은 저절로 공적하므로 또한 응당 없에려고 해서는 안 된다. 비록 망상의 경계에 머물지라도 망경이 본래 자심自心인지라 응당 분별해서는 안 된다. 이미 분별이 없으므로 다시금 정견情見을 생기하지 않으며, 이것으로 실제를 삼고자 한다. 부처님께서 이러한 사불四不을 말씀하신 것은 망심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며, 바로 이 방편은 상정常情을 초월하여 들으면 간혹 의심을 생기한다. 만일 듣자마자 바로 결정신을 내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행지行持하면 곧 차별의 계위를 밟지 않고 진실한 수순을 성취한다. 이는 바로 이 육신을 여의지 않고 보살신菩薩身을 현성現成하는 것이니, 이미 과거에 중덕衆德을 적집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이 이를 수 있다. 이미 망심할 수 있다면 공덕도 이미 원만하고, 이를 칭명하여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했다고 하며, 이는 이른바 돈증이기 때문이다. ‘원각의 자성은 자성이 없는 자성이 있다.’로부터 ‘여래의 수순각성’에 이르기까지는 차별이 없는 중에 차별이 있음을 드러냈고, ‘일체 시각에 있으면서’로부터 ‘일체종지를 성취한다.’에 이르기까지는 차별의 지위를 취하여 차별이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평등 가운데의 차별과 차별 가운데의 평등을 현시하니, 지위와 본말이 제등齊等하게 이름을 밝힌 것이다.”(前明位地漸次差別 此明頓機忘心頓證也 謂性本無念 不應故起 雖復起念 念體自空 亦不應息滅 雖住妄境 境本自心 不應分別 旣無分別 更不生情 將以爲實 佛言此四不 以顯忘心 卽此方便 越於常情 聞或生疑 若聞卽生信 如說行持 則不涉差別 成眞隨順 此則不離此身 現成菩薩 已於過去 積集衆德 故能致是 旣能忘心 功德已圓 名爲成就一切種智 此所謂頓證也 自圓覺自性 非性性有 以至如來隨順覺性 於無差別 顯有差別 居一切時 至成就一切種智 就差別位顯無差別 此示平等中之差別 差別中之平等 以明位地本末齊致也)
직지: “이는 평등한 안심安心의 묘법을 확실히 보이신 것이다. 위에서 지위에 고하가 있고 수증에 차제가 있음을 말한 것은 모두 적멸하는 심체心體를 요달하지 못하고 망집하여 수증이 있다고 여기며, 능소와 대대를 잊지 못하기 때문에 증오에 심천이 있다. 지금은 평등한 일심이 임운任運하여 합도合道함을 보이시니, 바로 원오하고 돈증하는 묘지이다. 중생이 일용日用하는 현증現證은 전적으로 여래의 평등법신平等法身이다. 만일 일념도 생기지 않으면 전체가 저절로 나타난다. 이 때문에 ‘일체 시각에 머물러 망념을 일부러 일으키지 말라.’라고 한 것이다. 일념을 일으키자마자 바로 현량現量을 미혹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중생의 망상은 본래 자체가 무성無性이고 원래 진심眞心이다. 만일 망상을 쉬고 진심을 구한다면 머리를 베고 활로를 찾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모든 망심에 대하여 또한 가라앉혀 없애지도 말라.’라고 한 것이다. 망상 경계는 본래 일진一眞이기 때문에 의의擬議를 용납하지 않는다. 만일 다시금 명백히 알려고 하는 마음을 더하면, 바로 목소리를 높여서 메아리를 그치게 하려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망상 경계에 머물러 명백히 알려고 힘쓰지도 말라.’라고 한 것이다. 명백히 알려고 힘쓰지 않는 곳이 바로 진지眞知이다. 만일 마음을 일으켜 다시 변별하고 따로 진실을 구하려고 하면 바로 머리 위에 다시 머리를 얹어주는 것과 같으니, 더욱 전도만 늘어난다. 이 때문에 ‘명백히 알려고 함이 없는 곳에서 진실을 변별하지도 말라.’라고 한 것이다. 이는 도인이 일용에 안심하는 요결이다. 진실로 이와 같이 임운하면 바로 심심心心마다 도에 계합하고 염념마다 진여를 증득하며 멸진정을 일으키지 않고 도생度生하는 사업을 나툴 뿐이다. 예전부터 모든 조사들은 이 법문에 들어가지 않은 이가 없다. 이는 참선의 향상일로向上一路이니, 이른바 납승衲僧의 파비巴鼻이기 때문이다. 이는 돈오하는 안심법문을 직지直指한 것이니, 바로 수행의 요결이다.”(此的示平等安心之妙也 上言 位有高下 證有次第者 皆爲不了寂滅心體 妄有修證 不忘能所對待故 悟有淺深 今示平等一心任運合道 乃圓悟頓證之妙旨也 以衆生日用現證全是如來平等法身 若一念不生 全體自現 故云居一切時 不得故起妄念 以纔起一念 即迷現量故也 謂衆生妄想 本自無性 元是眞心 若息妄求眞 似斬頭覓活 故云於諸妄心亦不息滅 以妄想境界本是一眞不容擬議 若更加了知之心 即是揚聲止響 故云住妄想境界不加了知 不加了知處即是眞知 若起心更辨 別求眞實 則頭上安頭 彌增顚倒 故云於無了知不辨眞實 此道人日用安心的訣 苟能任運如斯 則心心合道 念念證眞 不起滅定 而現度生事業矣 從上諸祖 未有不入此法門者 此參禪向上一路 所謂衲僧巴鼻也 此直指頓悟安心 乃修行之要也)
“이 법문은 곧 위에 ‘일체 시각에 머물다.’라는 등류이고, 이 법문은 신해하기 어렵고 수지하기 어렵다. 만일 듣고서 경포심驚怖心을 내지 않는 이라면 각성을 잘 수순할 수 있다고 이를 만하다.”(此法門即上居一切時等 以此法難信難解難持 若聞而不生驚怖者 可謂善能隨順覺性也)
나의 견해는 이러하다. 이 글의 소제목이 “불기망념不起妄念은 구경관문究竟觀門”이다. 사불법문四不法門의 제일구 “일체 시각에 머물러 망념을 일으키지 말라.”라는 불기망념은 사구四句 중에 절창이다. 범부나 성현을 막론하고, 지금 현전하는 나의 일념은 바로 청정한 원각묘심의 현현顯現이다. 다시 강조한다. “일체 시각에 머물러 망념을 일으키지 말라.” 이 제일구는 세존의 대사자후大獅子吼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일체 시각에 머물러 망념을 일으키지 않으면 어떠한가?” 적멸보조寂滅普照한다. 이것이 바로 회심시안廻心是岸이고, 이것이 또한 구경관문이 되는 연유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일체 시각에 머물러 있는 그 현전하는 일념이 바로 구경의 관문이다. 어찌 다시 망념을 일으켜 구경의 관문을 어지럽히랴.
보각보살장을 인용한다. “만일 선남자가 저 선우에 대하여 악념을 일으키지 않으면, 바로 구경에 정각을 성취할 수 있고, 심화가 발명하여 시방의 불찰을 보조하니라.”(若善男子 於彼善友 不起惡念 即能究竟 成就正覺 心華發明 照十方刹) 중생의 성격은 천차만별이다. 선지식도 또한 그러하다. 어떤 때는 종잡을 수가 없다. “사위의 중에 언제나 청정행을 드러내기도 하지만,”(四威儀中 常現清淨) “더 나아가서는 갖가지 허물을 보여주기도 한다.”(乃至示現 種種過患) 또한 “어떤 때는 술에 취하여 사람들을 꾸짖다가, 홀연히 향을 사루고 예배를 올리기도 한다.”(有時醉酒罵人 忽爾燒香作禮) “저 선우에 대하여 악념을 일으키지 않는다.” “일체 시각에 머물러 망념을 일으키지 말라.” 양자의 경계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다시 대비한다. “이때 무방無方의 청정을 얻는다.”(爾時便得 無方清淨 “바로 구경에 정각을 성취할 수 있다.” 이 양자도 동일하다. “무변허공의 원각이 현발하는 바이니라.” “심화가 발명하여 시방의 불찰을 보조하니라.” 이 경계는 어떠한가?
몽산화상蒙山和尙의 무자십절목無字十節目을 인용한다. “화두를 들기 이전을 향하여 착안하고 홀연히 다시 소생甦生하라.”(向未擧以前着眼 忽然再甦) “일체 시각에 머물러 망념을 일으키지 말라.” 화두의 거각擧覺과 망념의 생기生起는 그 용심의 양상이 동일하다. 그러하다면 미거이전과 불기망념도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조주를 간파하고 불조를 감파하여 당인當人의 증애하는 곳을 증득한다.”(捉破趙州 勘破佛祖 得人憎處) “오로지 증애하지만 않는다면, 통연하여 명백하다.”(但莫憎愛 洞然明白) 망념이 일어나고 증애가 생기는 곳이 또한 다르지 않다. 원각다리니에서 일체 청정진여와 보리 열반 바라밀 등을 유출하고, 일체중생의 갖가지 환화는 모두 여래의 원각묘심에서 생기한다. 화두와 망념이 생기하는 곳도 또한 원각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착안하여 소생하는 곳이 바로 원각이고, 망념을 일으키기 이전의 일체 시각에 머물러 있는 현전일념도 또한 원각이다. 이에 불기망념은 구경의 관문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
여래 수순각성의 십대十對 중에 마지막 “일체 번뇌가 구경의 해탈이다.”(一切煩惱 畢竟解脫)라는 구절의 번뇌를 취하여 이 문단은 망념이나 망심 망상으로 표출한 것이며, 이는 또한 여래 수순각성의 양광陽光과 음암陰暗의 십대 중에 음암을 대표한다. 이 때문에 번뇌에 국한하지 않는다. 장애나 실념失念 파법破法 우치愚癡 외도 무명 음노치婬怒癡 국토 지옥 무성無性 중에 어느 하나를 취해도 이 문단의 취지와 동일하게 전개할 수 있다. 어째서 그러한가? “선남자여, 일체 중생의 갖가지 환화는 모두 여래의 원각묘심에서 나오느니라.” 이 때문에 그러하다.
“모든 망심妄心에 대하여 또한 가라앉혀 없애지도 말며, 망상 경계에 머물러 명백히 알려고 힘쓰지도 말라.” 어째서 그러한가? “고집苦集의 실성을 체달하면 진성眞性이라 염오厭惡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통현장자의 명문이다. 그 출처는 아래와 같다.
화엄론을 인용한다. “또 염부제에서 성취하신 정각불正覺佛은 목수초좌木樹草座로 화신불이고, 상방上方의 마혜수라천 홍련화상불紅蓮華上佛은 실보불實報佛이니, 지혜가 모두 흔염忻厭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삼승의 사제는 고집을 염오하고 멸도를 흔락하며, 이를 사제법륜四諦法輪이라 칭명한다. 이 일승경은 사성제라 말하는 것이니, 바로 그 실의實義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고집의 실성을 체달하면 진성眞性이라 염오가 없기 때문이고, 타방에 별도의 불찰佛刹이나 별도의 정토가 없기 때문이며, 오염되거나 청정한 열반과 생사의 흔염忻厭이 없기 때문이다.”(又閻浮提成正覺佛 木樹草座 是化佛 上方摩醯首羅天紅蓮華上佛 是實報 智皆有忻厭故 是故曰三乘四諦厭苦集忻滅道 名四諦法輪 此一乘經言四聖諦者 是其實義 何以故 達苦性眞無厭故 無有他方別佛刹別淨土故 無有染淨涅槃生死忻厭故)
다시 부연한다. “고집의 실성을 체달하면 진성眞性이라 염오가 없기 때문이다.” 일체 세간은 고집을 여의지 않고, 일체 출세간은 멸도를 여의지 않는다. 삼승의 교법에 의하면 고집은 제멸해야 할 대상이고, 멸도는 수습해야 할 구경이다. 그러나 여래의 수순각성에서 “일체 장애가 곧 구경각이다.”(一切障礙 即究竟覺) “일체 번뇌는 구경의 해탈이다.”(一切煩惱 畢竟解脫)라고 일갈한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이냐? 서 있는 그 곳이 관건이다. 성당시기盛唐時期 저명시인著名詩人 왕지환王之渙(688-742)의 등관작루登鸛鵲樓를 인용한다.
백일은 산을 기대다가 끝없이 떨어지고,
황하는 바다로 들어가서도 흘러가리라.
천리안을 다 펼치고자 하느냐?
다시 일층루를 더 올라갈지니라.(登鸛鵲樓 白日依山盡 黃河入海流 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
생멸을 체달하면 이것이 바로 무생이어서
대원을 일으키고 자비를 행해도 생멸이 없으며,
세간의 생멸하는 체성을 잘 알기만 하면
상념이나 정식이 지혜가 아님이 없도다.(是達生滅是無生 起願行慈不生滅 善知世間生滅性 想念情識無非智)
다시 통현장자의 게송을 인용하여 그 명언과 비교한다. “고집의 실성을 체달하면 진성이라 염오가 없다.” “세간의 생멸하는 체성을 잘 알기만 하면, 상념이나 정식이 지혜가 아님이 없다.” 진성과 지혜는 모두 본제의 영역이라 털끝만큼도 차별이 없다.
“십개지불은 부동지불을 근본으로 삼고, 부동지불은 보광명지를 근본으로 삼으며, 보광명지는 무의주지를 근본으로 삼고, 무의주지는 일체중생을 근본으로 삼는다.”(十箇智佛以不動智佛爲本 不動智佛以普光明智爲本 普光明智以無依住智爲本 又無依住智以一切衆生爲本)
“무릇 범부지로 좇아서 십신심을 수학하고 제불 정각의 불과가 자심自心과 다름이 없음을 믿으니, 본성의 청정함이 제불의 각성과 같다. 모든 분별의 본성이 청정함을 무의주지라 일컬으니, 제불의 근본지와 같다.”(從凡夫地修學十信心 信諸佛正覺之果 無異自心 本性清淨 如諸佛性 所有分別本性清淨 名無依住智 如諸佛根本智)
“모든 분별의 본성이 청정함을 무의주지라 일컫는다.” “고집의 실성을 체달하면 진성이라 염오가 없다.” 이를 요약한다. “분별의 본성이 청정하다.” “고집의 실성을 체달한다.” 그 경계가 어떠한가? 동일하다. 이에 무의주지와 진성이 바로 등식화한다. 모든 분별은 중생심이고, 또한 일체중생의 청정한 근본각지이며, 이 때문에 모든 분별의 본성이 청정할 수 있으며, 이를 무의주지라 한다.
16. 결어結語
나는 이 글의 결어를 종이부시終而復始로 삼고자 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와 같이 삼청三請하여 마치고 다시 시작하고자 하시니라.”(如是三請 終而復始) 문수보살을 위시하여 모든 보살의 청문하는 법도가 이와 같다. 일체 보살행은 종이부시하고 또 종이부시하며 무한 반복하여 끝이 없다. 이를 무시무종이라 호칭한다. 일체 여래의 과후果後 보현행도 무시무종한다. 또한 중생의 생사도 무시무종하고, 탐진치 삼독의 일체 번뇌도 무시무종한다. 어찌 이뿐이랴. “삼세가 일념이고, 일념이 삼세이며, 이어 십세에 이르는 것이니, 이와 같은 등의 법이 자재하고 무애한다. 이 경의 법문은 무시무종하며, 법명法名을 상전법륜常轉法輪이라 한다.”(三世一念 一念三世 乃至十世 如是等法自在無礙 此經法門無始無終 名爲常轉法輪) “법계가 원적하여 무시무종한다.”(法界圓寂 無始無終) “무명의 제멸을 보지 못하고, 지혜의 생기를 보지 못하니, 생멸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법이 또한 이와 같다. 무생무멸하고, 무시무종한다.”(不見無明滅 不見智慧生 以無生滅故 一切法亦如是 無生無滅 無始無終也) 이상은 통현장자의 어록이다. 십신만심의 초발심시에 찰나제삼매로 무상정각을 성취할 때 바로 무명의 제멸을 보지 못하고, 지혜의 생기를 보지 못한다.
원각경의 골수, 환화幻化와 청정淸淨
부제 : 왜 구상垢相이 영멸永滅하면 시방十方이 청정한가?
제명과 부제를 이끌어와서 다시 시작한다. 모든 중생의 환화와 일체 여래의 청정을 시방허공의 평등법성으로 회향한다. 이는 서문의 “환화와 청정을 평등으로 회향한다.”라는 핵심 표제를 부연한 것이다. 이도 또한 종이부시의 한 유형이다.
환화는 무명을 대표하고, 청정과 허공의 평등은 법성을 표방하며, 망념은 중생을 상징한다. 이를 모두 포괄하는 자는 바로 원각이다. “백성은 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한다.”(百姓日用而不知) 백성의 일용사日用事가 바로 원각묘심의 현현인 줄을 누가 알랴. “무명의 실성은 곧 불성이고, 환화의 공신은 바로 법신이다.”(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영가스님의 증도가도 또한 이를 증명한다.
대비주大悲呪는 무시무종하고, 화엄경도 무시무종하며, 나의 일용사도 또한 무시무종하다. 내가 좌정하고 있는 바로 이 당처에 십법계가 동시 출현한다. 일심이 청정하면, 바로 이 육신은 법신이 되고, 사면의 방장은 정토가 되며, 창밖에 허공은 평등법성이 된다. 과연 그러한가? 나는 나를 속이지 않는다. 속지 말지니라.
2026. 3. 22. 11:18, 길상묘덕일 초련원주草蓮園主 정덕성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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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깨달았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자성불 착어를 부탁히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