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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믿음의좋은글 스크랩 9강. 믿음과 장자의 축복
jtr28114 추천 0 조회 56 18.07.07 17:1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9강. 믿음과 장자권의 축복 (히 11:20)

 

히 11: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서 가장 방해되는 것이 인간의 생각과 상식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각과 상식은 항상 자기 몸 중심으로 이해하고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죄가 자기 몸을 중심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으로 살게 합니다.

하늘 위에나 하늘 아래나 오로지 자기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상태를 죄인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고 하였습니다.

 

롬 1:28-31=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자기가 왕 노릇하겠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를 꼬일 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같이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같이 된다는 것은 왕 노릇하고 싶고 누구로부터 간섭 받기 싫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천상천하유아독존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죄인이 왕 노릇하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29절 이하에 나타나는 갖가지 현상들입니다.

하나님께선 간섭하지 않기 때문에 짐승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죄인이 자기 마음대로 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죄 짓는 일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은 불교 용어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석가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일곱 발짝을 걸어가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는 좋은 의미로서는 이 우주만물 중에서는 내가 가장 존엄한 존재라는 뜻인데, 실제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로는 “천하에 자기만큼 잘난 사람은 없다”고 자부하거나 또는 그런 아집(我執)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는 석가모니의 제자들이 불교를 종교화 하면서 교주를 신성화시키려고 지어낸 말이라고 사료됩니다.

암튼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사상은 인간들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 불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왕 노릇하고 싶어하는 죄인들의 마음에 딱 들어맞는 것입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불교는 자신이 신(神)이 되는 것이고,

기독교는 예수님(신, 神)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신(神)이 되어가는 것은 항상 나라는 존재는 살아 있는 것이지만, 예수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나라는 존재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교 끝에는 내가 있지만,

기독교의 끝에는 내가 없고 예수그리스도만 있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나를 남기느냐?

예수그리스도를 남기느냐? 의 차이입니다.

 

죄는 인간을 하나님처럼 만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불교가 훨씬 죄인들의 마음에 와 닿는 것입니다.

반대로 기독교는 싫습니다.

자기를 부정하는데 누가 좋아하겠어요.

사람이 자기 알아주는 재미로 사는데 기독교는 자기를 부인하기 때문에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독교가 불교가 되어 버렸어요.

교회가 인간들이 욕구를 채워주는 종교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긍정해 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잘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예수를 이용해서 세상 사람보다 더 영웅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마다 인간들의 흔적들이 난무하는 것입니다.

 

성화론이라는 이름으로 교인들을 거룩한 신(神)의 자리로 이끌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름을 떨치게 만듭니다.

마치 바벨탑을 쌓듯이 자기의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목사들의 설교가 꼭 스님들이 가르치는 설법(說法)과 같습니다.

실제로 기독교 방송을 듣다가 불교 방송을 들어 보세요.

똑 같아요.

사용하는 용어만 다를 뿐이지 그 내용은 동일해요.

 

얼마나 같은지 한번 살펴보기로 합시다.

불교계의 주장이 오늘날 교회에서 주장하는 것과 얼마나 동일한가 잠시 살펴봅시다.

 

불교의 핵심은 “마하반야바라밀다 (摩訶般若波羅蜜多)”에 입니다.

“마하(摩訶)” 라는 것은 “절대적 존재” 를 말하고,

“반야(般若)” 라는 것은 “지혜” 를 말하고,

“바라밀다(波羅蜜多)” 라는 것은 “극락의 세계로 건너감” 을 말합니다.

 

종합하면 “최고의 지혜를 깨달아 신이 되어서 극락(極樂)의 세계로 나아가라” 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신선(神仙)처럼 살라는 말입니다.

불교는 바로 이것을 실행하는 종교입니다.

마치 뱀이 하와에게 선악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맞아요.

 

절간에서 스님들이 중생들에게 인사 할 때 성불(成佛)하십시오! 라고 하지요.

성불하라는 말은 부처님처럼 지혜를 깨달아서 절대적 존재가 되어 극락의 세계로 넘어가라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신(神)이 되라는 겁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 를 이룬 사람을 일컬어 “부처” 라고 합니다.

부처는 인도에서 붓다(budda)라고 하는데 이는 “도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부처는 곧 신(神)과 같은 존재입니다.

 

불교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최고의 종교입니다.

그러니 불교의 교리는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세상이치를 사색하는 하나의 철학(哲學)입니다.

불교는 인간이 생각하고 인간이 깨달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이란? 인간의 깨달음을 학문화 한 것입니다.

 

그러니 불교 교리는 인간의 지혜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인간적이고 인간을 편하게 해줍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과 딱 맞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인간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교리는 누구든지 배우면 깨치는 것이지만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예수님의 십자가 도는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시는 계시(啓示)가 있어야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가능과 불가능의 차이입니다.

한마디로 부처는 누구든지 노력하면 이룰 수 있는 경지이지만, 예수를 믿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합니다.

아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보면 불교와 같이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하다고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이름 하여 성화론입니다.

 

예수님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본 받으라고 합니다.

성화론을 주장하고 행함을 강조하는 부류들도 따지고 보면 거의 다 이런 계통들입니다.

 

불교의 지혜인 반야(지혜)를 요약한 경전이 “반야경 (般若經)” 입니다.

반야경에 보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관세음(觀世音)이라는 말은 모든 사물의 이치를 보고 깨닫는다는 말이고,

보살(菩薩)은 깨달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불교에선 깨달음을 해탈(解脫)이라고 하는데 이는 곧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신처럼 사는 사람이 보살인 것입니다.

그러니 불자들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고 주문을 외우는 것은 보살이 되라는 뜻입니다.

꼭 교회에서 의미도 모른채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보살은 깊은 “반야바라밀다” 를 수행하는 자입니다.

득도(得道)하여 속세(俗世)를 떠나 신(神)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교리입니다.

신적 세계가 인간 안에서 구현되는 것이 극락세계(極樂世界)입니다.

결국 인간이 신이 되는 것입니다.

 

보세요.

뱀이 하와에게 한 말과 딱 들어맞지요.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고 하였잖아요.

여러분 뱀이 거짓말 하지 않았어요.

사실 대로 말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본능적으로 신처럼 되고자 합니다.

그러니 불교 교리가 선악과 사상과 맞는 것이지요.

불교 교리가 죄인에겐 맞아요.

죄인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추구하는 바를 이루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석가는 최초로 세상 이치를 깨닫고 신처럼 살았던 사람입니다.

“반야바라밀다” 를 이룬 사람입니다.

불교에서는 누구든지 깨달음을 통해서 다 부처처럼 보살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부처가 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혼자 깨달았다고 잘난 척 득의앙양(得意昻揚)하면 안 되고 그 깨달음으로 중생들에게 덕(德)을 끼쳐야 된다고 합니다.

깨달음으로 그치지 말고 사회에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즉 득도한 사람은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웃을 이롭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합니다.

즉 자기이익을 도모하지 말고 남의 이익을 도모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자리이타(自利利他)란? 자신을 비우고 남을 이롭게 하라는 뜻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는 말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씀 아닙니까?

맞아요.

 

산상보훈에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라는 말씀과 같지요.

다르다면 성경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인 반면에, 불교는 인간을 기쁘게 하는 것이 다릅니다.

 

이렇게 되면 진리를 기쁘게 하느냐? 인간을 기쁘게 하느냐! 로 귀결되지요.

성경이 말하는 진리란? 예수님입니다.

그럼 인간이냐? 예수냐? 가 되지요.

그러니 불교에선 인간이 중심이고, 성경에선 예수님이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제쳐 놓고 인간이 그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진리와 비 진리의 차이란? 예수님이 중심이냐? 내 중심이냐? 의 차이입니다.

교회 다녀도 자아(自我) 중심이면 그 사람은 지금 불교 신자입니다.

성화되고자 하는 사람은 지금 보살이 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것이란 말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예수 안” 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는 말은 너를 위해 날 믿지 말라는 겁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너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것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이건 인간의 본성과 거스려요.

왜냐하면! 죄인의 본성은 자기를 위해 살고자 하는데, 믿음은 예수를 위해 살라고 하니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불교에 대해서 더 살펴봅시다.

이거 마치 불법을 설파하는 시간같이 되어 버렸네요.

그럼에도 해야 되는 이유가 믿음이 도대체 어떤 식으로 일을 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인간의 상식을 반(反)하면서 일을 하기 때문에 인간의 상식을 알아야 해요.

인간의 상식을 바탕으로 가르치는 것이 불교이고 지금은 기독교가 불교가 되었고,

교회가 절간이 되었고,

목사는 주지승이 되었고,

교인들은 불자가 되었기 때문에 살펴보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리가 불교 교리처럼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까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추구하는 자가 보살이라고 했지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 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보살은 이웃을 내 몸처럼 하나같이 여기며 동체대비심으로 사랑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이웃사랑 하라고 하잖아요.

참 아름답습니다.

인간의 정(情)이 물씬 묻어나오잖아요.

 

강도 같은 사람도 이런 말씀을 들으면 개과천선(改過遷善)이 되는 겁니다.

개과천선이란 지난날의 잘못은 뉘우치고 이제 새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걸 교회에선 회개했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누구든지 마음만 먹고 작심을 하면 곧 보살처럼 이타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잖아요.

실제로 순수한 마음으로 열심히 수행정진을 하면 누구든지 보살이 될 수가 있어요.

 

이걸 교회식으로 말하면 강도가 변하여 목사가 되었다는 말과 같아요.

글자 그대로 개과천선이 되었잖아요.

아! 이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강도가 변하여서 밥 퍼주는 사랑을 하다!

멋지지요.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 하는 보살이 되라는 말은 테레사 수녀처럼 이웃 사랑하는 성자(聖者)가 되라는 말입니다.

보살이나 성자나 같은 의미입니다.

교회에선 성자가 되라고 하지 않고 예수를 본받으라고 하지요.

성령 충만을 받아서 예수님처럼 살라고 가르치는 것과 동일합니다.

 

이게 얼마나 사특(邪慝)한 말인가 하면 예수님을 주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자신이 주의 자리에 앉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분으로 두지 않고, 본받을 분으로 두고 있는 무서운 마귀의 궤계입니다.

 

성경은 개과천선하라고 하지 않아요.

도리어 개과천선 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해요.

예수님은 인간을 개과천선시키려고 십자가에 죽지 않았어요.

개과천선이 안 되기 때문에 죽으신 겁니다.

 

인간이 개과천선이 될 것 같으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지 말고 열심히 가르쳐야 했어요.

애들아 내 말 잘 들어라!

그리고 날 잘 따라 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날 따라오라고 하지 않고 날 믿으라고 했어요.

 

인간이 개과천선이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필요가 없어져요.

바리새인들처럼 열심히 말씀을 지켜서 의를 만들어 천국에 가면 되요.

그러나 예수님은 주와 그리스도이시지 선생이 아닙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주와 그리스도를 몰라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예수그리스도라고 말을 하지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이 무슨 뜻인 줄 몰라요.

하기야 가르치는 목사가 모르는데 교인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주와 그리스도란 말은 요한복음 강해 때 하였으니 넘어갑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믿을 분이지 본받을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 누가 예수님을 본받읍시다 라고 하면 가짜라고 보면 틀림없어요.

그 사람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목사가 예수를 본받으라고 설교하면 저 인간 복음 모르는 소경이구나 생각하세요.

예수님을 믿는 것하고 예수님을 본받는 것하고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고 차이가 납니다.

믿는 것은 내게 가능성이 없는 것이고, 본받는 것은 내게 가능성이 열려 있어요.

 

마귀는 교묘하게 예수님의 자리에 인간을 앉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지금 이 시대 교회를 완전히 장악하고 말았어요.

거짓말하는 영(靈)이 목사들 입에 거짓말을 넣어 버렸어요.

 

그러니 교회마다 예수를 본받자고 지랄을 떠는 겁니다.

이웃사랑을 실천하자고 떠드는 것입니다.

교인들을 완전히 보살을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웃사랑한다고 죄사함 받는게 아니고 주 예수를 믿어야 죄사함 받아요.

마귀는 이웃사랑으로 이기지 못해요.

마귀는 오직 예수의 피로서만 이길 수가 있어요.

그러니 이웃사랑을 외칠게 아니라 주 예수를 믿으라고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며 사는 자리이타의 삶을 살되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타적 삶을 산다고 주장하거나 자랑하지 않을 때 진정 보살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과 똑 같지요.

참으로 겸손도 하지요.

 

산상보훈이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구제를 하고 나팔을 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문자적으로 보면 불교나 성경이나 다를게 없어요.

그래서 이젠 교회와 절간이 하나가 되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종교가 하나가 되어 이웃사랑을 실천하자고 합니다.

 

성탄절엔 절간에서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 해주고, 석가탄신일엔 교회에서 연등 달아주며 아기 부처 탄생을 축하 해주고 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인간적으로 얼마나 관대하고 멋있습니까?

 

지난번 한국교회의 부흥 침체에 대하여 세미나를 했는데 부흥이 안 되는 첫째 이유가 타 종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기독교는 타 종교에 대해서 너무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전도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젠 마음 문 열고 타 종교도 인정하고 포용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치마폭에 폭 싸서 쌈을 싸먹자는 말입니다.

천주교가 여기에 앞장서서 모든 종교를 비빔밥을 만들어서 쌈 싸먹고자 하는 겁니다.

너와 나를 따지지 말고 어울렁 더울렁 어울려서 좋은 세상 만들자는데 누가 반대하겠어요.

 

이러면 예수님은 완전히 정신병자가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일부러 세상을 두 쪽으로 갈라놓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울렁 더울렁 함께 잘 살자고 하지 않았어요.

 

예수님 때문에 부모형제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예수님 때문에 친구사이가 갈라지고,

예수님 때문에 민족이 두 쪽으로 갈라졌어요.

 

그러니 지금 교회들이 종교끼리 서로 존중해주고 싸우지 말자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완전히 바보 만드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시대 종교화합을 이루는 목사만도 못한 분이 되고 말았어요.

아주 편협한 싸이코패스가 되고 말았어요.

 

몇 해 전에 조용기 목사가 동국대학교 승가 대학원에 가서 강연을 할 때 그랬어요.

불교나 기독교나 추구하는 바가 같기 때문에 서로 배타할 필요가 없다고 했어요.

자기는 은퇴하면 종교 통합 운동을 벌리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중들로부터 엄청 박수를 많이 받았어요.

그들이 그랬을 거예요.

참으로 앞서가는 목사는 다르구나.

저러니 세계 최고의 교회가 되었지! 라고 덕담을 했을 겁니다.

 

이제 불교 이야기를 하나만 더하고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보살이 “반야바라밀다” 를 가능케 하는 수행에는 6가지가 있는데 간단하게 설명할게요.

 

첫째가 보시(布施)입니다.

 

보시라는 말은 이웃을 사랑하고 나누고 베푼다는 말입니다.

베풀되 보상이나 성과를 바라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보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가 지계(持戒) 입니다.

 

지계란 말은 계명을 유지하는 것 즉 계명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계” 라는 말은 경계를 뜻하는데 사람이 살아가면서 넘지 말아야 될 선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웃을 해하려는 것을 금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삶에는 경계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될 부분이 많이 있는데 말과 뜻과 행동에 있어서 언제 어디서든지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탐, 진 ,치 멀리하라고 합니다.

탐, 진, 치란?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을 말하는데 사람은 이 세 가지 독성으로 인하여 몸과 입과 의지의 행위로 죄를 지어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나친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어지지 않기를 경계하라는 말입니다.

 

셋째가 인욕(忍辱) 입니다.

 

인욕이란? 인내를 말합니다.

화가 나도 참고 욕을 먹어도 참으라는 말입니다.

그럴 수 있지 라고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조금만 양보하면 다 이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 모두 내 탓입니다 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한국교회에서 대표적으로 성화론을 주장하는 박00 목사는 화나는 일이 있거든 집에 가서 이불 뒤집어쓰고 입 깨물고 참으라고 합니다.

훈련하다가 보면 참아 진다는 겁니다.

대단한 성불이지요.

 

넷째가 정진(精進) 입니다.

 

게으르지 말고 꾸준히 수행을 계속해 나가라는 뜻입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 되어서는 안 되고 죽는 날까지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다섯째가 선정(禪定) 입니다.

 

선정이란? 마음을 고요히 하여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번뇌와 염려, 그리고 산란한 마음을 떠나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면서 참된 이치를 구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문제의 해결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큐티하고 말씀을 묵상하라는 겁니다.

 

여섯째가 지혜(知慧) 입니다.

 

모든 것의 실상을 통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상대적 세계의 분별지(分別智)를 넘어서 평등하고 무분별(無分別)한 지식에 이르는 것을 말하는데, 상대와 차별을 두지 않고 평등으로 바라보는 지식입니다.

무집착의 지혜이니 비움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비우는 것을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극락의 세계는 무아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자신으로부터의 집착에서 벗어나면 비로서 극락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무아사상이 마음에 이루어 질 때 비로서 마음에 극락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불교교리를 살펴보았습니다.

 

불교의 6계는 기독교의 십계명(十誡命)과 같아요.

한마디로 기독교의 성화주의 사상과 똑같습니다.

한국교회가 가르치는 성화론은 불교의 이 6가지 수행론을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성화론은 인간의 행함을 강조합니다.

한마디로 신자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신자답게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예수를 본받고 닮아가는 것입니까?

 

한국교회에서는 신자다움을 예수님을 본받는 것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신자다움이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본받는 신자다움은 내가 이루어야 하는 것이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신자다움은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최고의 신자다움은 난 죄인이고, 예수님 안에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에게서는 선(善)이 나올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심에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 대속해 주신 그 은혜와 사랑이 감사하여서 사나 죽으나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예수님 십자가 피로서 용서 받은 것을 자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라는 색체를 덧 입혀서 복음이라고 외친다 한들 자기에게 가능성을 열어두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불교입니다.

불교의 끝에는 내가 있고 기독교의 끝에는 예수님이 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어찌 보면 모두가 불교신자들입니다.

말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앞에 나와서 자기 생각을 버리지 않습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과 맞짱뜨고자 합니다.

왜? 내 소원을 안 들어 주느냐 라고 악악 댈 수는 있어도,

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는가 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을 어찌 신자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신자란? 예수님에게만 관심을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에게만 관심을 두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누구를 사랑해 본 적이 있지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마음에 두고 관심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만 생각하면 행복해지고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서로 떨어져 있어도 마음속엔 오직 그 사람만이 가득 차지하고 있어요.

그게 사랑입니다.

 

신자란? 이처럼 예수님을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누구든지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한 겁니다.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신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를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사랑은 억지로 되지 않아요.

사랑은 자기 능력 밖에서 밀려 들어와서 마음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은 이용대상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좋아하게 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야 하기 때문에 조건적인 사랑을 하게 됩니다.

조건이 채워지면 언제 보았느냐 하며 떠나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들의 생각을 비껴가는 방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이는 인간들의 생각이 마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 땅에 인간의 흔적을 남기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흔적(약속)을 남기기고자 하십니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충돌이 일어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흔적(약속)을 남기기 위하여 선택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흔적들이 남게 됩니다.

 

오늘 본문도 하나님과 이삭의 충돌 내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삭은 믿음으로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를 축복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은 믿음이 이삭으로 하여금 장래 될 일을 위하여 축복케 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언뜻 들으면 이삭이 먼 장래를 내다보고 알아서 야곱과 에서를 축복하였구나! 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은 이삭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고 믿음이 이삭을 어떻게 간섭하셨는가를 말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삭이 이 일을 했다가 아니라 믿음이 이렇게 하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결국 이삭은 이럴 생각이 없었는데 믿음이 이삭으로 하여금 이렇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삭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책망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럼 이삭이 야곱과 에서를 축복한 그 시절로 돌아가서 오늘 본문과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창 27장입니다.

 

창 27:1-4=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 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2 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 3 그런즉 네 기구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4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본문을 보면 이상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삭이 축복하고자 한 것은 에서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삭의 안중에 없습니다.

 

지금 이삭이 장자에게 축복을 한다는 것은 집안을 맡기는 것입니다.

마치 회장님이 자식에게 회사를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회사를 누구에게 맡기겠습니까?

회사를 경영 잘할 똑똑하고 유능한 아들에게 맡기지 않겠습니까?

아니 지금 가문을 맡기는 일인데 도나 개나 아무에게나 맡길 순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삭은 평상시에 에서와 야곱을 눈여겨보아 왔습니다.

눈여겨보다가 이젠 나이가 들고 죽을 때가 가까워 오니 집안을 자식에게 맡겨야 하겠다고 생각하여서 두 자식 중에 누구에게 맡겨야 이 가문이 흥왕할 것인가를 따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일을 실행하려고 합니다.

 

그럼 에서와 야곱이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봅시다.

 

창 25:27-28=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28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에서는 용감하고 씩씩한 사냥꾼이고,

야곱은 집안에만 틀어박혀서 살아가는 소심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용감한 에서를 사랑하였고, 엄마는 부실한 야곱을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보통 보면 아버지는 씩씩한 자식을 좋아 합니다.

이는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수컷들의 본성입니다.

마치 짐승들이 좋은 종족을 보존키 위하여 강한 놈을 살리고 약한 놈은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들은 말이에요.

자식이 밖에 나가서 얻어터지고 오면 화가 나요.

때리고 오면 오히려 칭찬합니다.

 

그러나 어미는 반대로 부실한 놈에게 더 정을 쏟습니다.

왜냐하면! 부실하게 된 것이 꼭 자기 책임인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통 엄마는 큰 놈이 동생을 괴롭히면 화를 내는 겁니다.

동생을 돌보지 않고 괴롭힌다는 뜻에서입니다.

 

부성애(父性愛)는 강자에게 쏠리고,

모성애(母性愛)는 약자에게 쏠려요.

이로보건데 이삭이 강한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마마보이 같은 야곱을 사랑한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암튼 두 자식을 가만히 살펴보니 이삭의 눈에는 에서가 아주 강한 놈이었습니다.

야곱은 마마보이처럼 엄마 치맛자락이나 붙잡고 다니는데 비해서 에서는 혼자 사냥도 잘하고 든든했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볼 때마다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야~ 저 놈은 멋있어!

역시 내 아들이야!

그럼 사내 자식이란 저 정도는 되어야지!

내가 자식 하나는 잘 낳았어! 라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자식 자랑하고픈 부모의 마음은 동일합니다.

그래서 이삭은 에서가 짐승을 사냥 해오면 동네 사람들을 불러서 잔치를 하면서 자식 자랑을 했을 것입니다.

 

당시엔 집안을 사나운 짐승이나 적들로부터 든든히 지키려면 힘 있는 자식이 최고였습니다.

힘은 곧 자기 집안을 지키는 능력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는 잘나고 똑똑하고 힘 있는 자식을 바랍니다.

 

그래서 이삭은 장자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삭은 부모 도움 없이도 스스로 사냥도 잘하는 에서가 가문을 이어가기를 바랐습니다.

이삭이 에서를 축복하고자 한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삭의 이러한 사상 속에는 선악의 법인 힘에 논리가 자리 잡혀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죄인을 짐승이라고 합니다.

고로 죄인이 살아가는 이 세상을 일컬어 짐승의 나라라고 합니다.

짐승의 나라란 힘의 논리로 다스려지는 나라란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세상은 힘의 법칙으로 다스려져 가는 것입니다.

힘 있음이 곧 사는 것이고, 힘 없음은 곧 죽음입니다.

죽음에 쫓기며 살아가는 인간에겐 어찌하든지 살고자 하는 본능에 끌려가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선 힘을 붙잡게 됩니다.

 

인간에겐 죽음은 악이고, 사는 것은 선입니다.

죽는 것은 못남이고, 사는 것은 잘남입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선 힘이 곧 선이고, 힘 없음이 곧 악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라 할지라도 힘 없는 자식을 보면 속이 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모는 이 세상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에겐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힘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으면서 터득해온 진리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강하게 키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출세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신앙을 떠나서 인간의 본능적인 생각입니다.

여러분들은 왜? 뼈 빠지게 일하면서 자식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합니까?

좋은 대학이 곧 출세할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삭 시대엔 사냥이었지만 지금은 돈 버는 것입니다.

돈이면 모든 것을 다 얻을 수가 있습니다.

돈이 힘을 발휘하는 세상에서는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철주야로 눈만 뜨면 돈 되는 일을 쫓아다닙니다.

교인들도 교회를 정할때 돈 되는 교회로 찾아갑니다.

 

장사를 해 보세요.

제가 아는 집사님은 조그마한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명예퇴직을 하고 식당을 하게 되었습니다.

식당을 오픈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큰 교회로 옮겼습니다.

왜? 옮겼느냐고 물으니 목사님 장사를 하니 어쩔 수 없데요 라고 합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돈 벌자니 그럴 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 개척교회엔 돈 있는 사람이 붙어 있을 수가 없어요.

돈 있을 땐 전부 큰 교회가 있다고 빌어먹게 되면 창피해서 큰 곳엔 못 있고 작은 교회로 숨어드는 겁니다.

 

우리교회도 그런 사람이 많았어요.

먹고 살만 하니 다 떠나요.

이젠 큰 물에서 놀겠다는 겁니다.

복음에 관심이 없으니 그렇습니다.

그러니 큰 교회는 돈 많은 사람들이 몰리게 되어 있어요.

교인들을 돈 벌이 수단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힘은 곧 교인들 숫자입니다.

그래서 교회들마다 목사를 청빙할 때 교회를 부흥시킬 목사를 찾는 것입니다.

교회를 살아남게 하려면 복음 전하는 목사가 필요 없고 교인들 비위 잘 맞추고 부흥시킬 목사가 필요합니다.

 

에서 같은 목사를 찾는 것입니다.

이게 모두가 짐승들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짐승의 사고방식을 마귀적 생각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삭이 힘 있는 에서를 축복하고자 한 것은 바로 마귀의 사상인 것입니다.

 

만약 이삭의 생각대로 에서를 축복하여서 집안을 맡겼다고 한다면 이삭의 집안은 세상 사람들이 집안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이삭의 집안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담겨져 있는 집안입니다.

 

이삭의 가문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어져 가는 가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삭의 가문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가문입니다.

이삭 자신이 태어난 것과 같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배여 있어야 할 가문이라는 겁니다.

 

알다시피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난 자입니다.

원래 인간의 혈통으로 본다면 이삭은 없는 자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생산 할 수 없는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삭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일하심 때문에 생겨난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럼 이삭의 가문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유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늘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피조물은 있는데서 있게 하는 일을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이삭 자신이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에 의하여 태어난 자입니다.

그렇다면 이삭의 가문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가문으로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에서같이 힘 있는 자가 가문의 대를 이어서는 안 됩니다.

잘난 자가 가문을 이어간다면 이는 곧 인간의 힘이 그 가문을 이어간 것으로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에서가 만약 이삭의 가문을 이어 간다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에서가 그 가문을 지켜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하심에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야 할 가문에 인간의 흔적들이 남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삭의 방식대로 가문이 이어지지 않도록 개입을 하신 것입니다.

이삭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에서에게 가문을 넘기고자 한 것은 모두가 눈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눈이 어둡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는 의미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둡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시를 잊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단절 되니 인간의 방법으로 가문을 이어갈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삭의 뜻에 반하는 일을 벌이신 것입니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리브가가 간섭을 합니다.

 

리브가는 야곱과 에서를 잉태하였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습니다.

 

창 25:21-23=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22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 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리브가가 받은 계시는 인간의 틀을 벗어난 역리적인 계시입니다.

일반적으로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장자가 집안을 계승하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엄마 뱃속에선 모르겠지만 태어나서 야곱과 에서를 따져 보면 에서가 가문을 물려받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에서가 야곱보다 훨씬 유능했으니까요.

 

하지만 아직 이들이 태어나기 전엔 누가 낫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알려 준 것입니다.

이제 리브가의 뱃속에 있는 두 아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심겨졌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그들 뜻대로 살아지지 않고 하나님이 담아 놓은 약속대로 살아질 것입니다.

 

아까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신다고 했지요?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식으로 일하신다고 했지요.

이 일을 보여주기 위해서 야곱과 에서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리브가는 잘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의 계시가 그렇게 떨어진 것뿐입니다.

리브가도 가문이 잘 이어져 가야 한다는 생각은 이삭과 다르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찾아와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긴다고 할 때에 인간적인 생각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대로 큰 놈이 작은 놈을 섬기게 된다고 하면 인간적으로 생각해서 아! 큰 놈은 뭔가 결격사유가 있고 둘째가 건강한가 보다! 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이삭이나 리브가나 동일하게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태어나고 보니 큰 놈이 훨씬 낫고 둘째가 못났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분명히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긴다고 했는데 막상 자식을 낳고 길러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틀린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아무리 봐도 야곱이 형보다 잘하는 구석이 없습니다.

 

도저히 큰 놈이 작은 놈에게 빌붙어서 살 것 같지가 않습니다.

도리어 작은 놈이 큰 놈에게 빌붙어서 살아야 할 팔자입니다.

형이 동생을 보살피고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세월은 흘러 이제 이삭이 죽을 때가 가까웠습니다.

 

이삭이 야곱과 에서를 60세에 낳았습니다.

지금 이삭이 나이가 많아서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수십 년이 지났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나이가 많아서 어느 날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장자의 축복을 하겠다고 하는 걸 보아서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 것만은 사실입니다.

이 때 이삭의 나이가 137세이고 야곱은 77세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약속하신 일이 야곱과 에서를 잉태하여서이니 77년이 지났다는 말입니다.

이삭은 77년 동안 살면서 두 자식을 달아보고 또 달아보고 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달아보아도 야곱이 가문을 맡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 험한 세상 속에서 한 가문을 맡아 이어간다는 것은 미약한 야곱으로서는 도무지 불가능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이 틀린 것이라 생각하고 자기 생각대로 에서에게 가문을 맡기고자 장자의 축복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리브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신 것은 리브가이지 이삭이 아닙니다.

리브가가 에서에게 돌아갈 축복을 야곱에게 돌렸다는 것은 한시도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한다는 말을 듣고 화들짝 놀라서 야곱에게 복을 받으라고 일을 꾸민 것을 보아서 리브가의 마음엔 항상 하나님의 계시가 초롱초롱 살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삭은 눈이 어두운(계시가 단절됨) 반면에 리브가는 눈이 밝았다는(계시가 연결됨) 말입니다.

이는 마치 엄마들이 자식의 태몽을 평생 동안 기억하듯이 리브가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였기 때문입니다.

 

리브가가 77년 동안 이삭과 살아오면서 수많은 일들을 경험하였습니다.

창세기 25장에서 야곱과 에서가 출생하였고,

27장에서 장자의 축복을 합니다.

그럼 창세기 26장이 77년간의 일들을 담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창세기 26장의 내용을 보면 이삭이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리브가를 빼앗길 뻔한 사건이 있고, 이삭의 집안과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는 내용과 에서가 장가가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한마디로 격동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리브가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아 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산 반면에 리브가는 기억하고 살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작은 자가 장자권의 축복을 받도록 일을 주도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 할 것은 야곱이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리브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그 약속을 야곱에게 돌아가도록 일을 한 것입니다.

 

장자권의 축복이란? 신약적인 의미에선 구원 권과 같습니다.

그러면 이삭의 가문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신약의 교회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하는 내용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그럼 축복하는 이삭은 지금 하나님 입장에 서 있는 것이고, 축복을 받는 야곱은 성도 입장에 서 있다는 공식이 성립됩니다.

 

그런데 야곱이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은 것은 리브가 때문이었습니다.

리브가가 야곱에게 장자의 옷을 입히고 이삭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서 야곱의 손에 들려 보내서 축복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리브가는 신약적인 의미로 보면 성령이라고 볼 수가 있어집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성도에게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리브가가 해 주는 음식을 들고 나간 것은 성도가 예수님이 주신 피를 들고 나가는 것과 동일합니다.

 

리브가가 이삭이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알고 야곱 손에 들려주었듯이, 성령께서도 아버지 하나님이 바라는 의(義)는 예수님의 의(義)라는 것을 아시고 성도들에게 주어서 하나님 앞에 들고 나아가라고 해 주신 것입니다.

야곱이 복을 받게 된 것이 리브가가 간섭하였기 때문이었듯이, 성도가 구원 받는 것은 성령이 개입하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축복을 받는 내용을 보면 재미있는 것은 이삭은 야곱에게 축복한 것이 아니고 야곱의 옷을 보고 축복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 속에 복음에 진수가 담겨져 있으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집중하고 들으세요.

 

창 27:5-29= “이삭이 그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 6 리브가가 그 아들 야곱에게 일러 가로되 네 부친이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7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나로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 8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내가 네게 명하는대로 9 염소떼에 가서 거기서 염소의 좋은 새끼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부친을 위하여 그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10 네가 그것을 가져 네 부친께 드려서 그로 죽으시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11 야곱이 그 모친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12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13 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 14 그가 가서 취하여 어미에게로 가져왔더니 그 어미가 그 아비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었더라 15 리브가가 집 안 자기 처소에 있는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취하여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16 또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그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꾸미고 17 그 만든 별미와 떡을 자기 아들 야곱의 손에 주매 18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른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19 야곱이 아비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청컨대 일어나 앉아서 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의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20 이삭이 그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21 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지려 하노라 22 야곱이 그 아비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가로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23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24 이삭이 가로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25 이삭이 가로되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 야곱이 그에게로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26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27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리브가가 이삭이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리브가는 야곱에게 얼른 양을 한 마리 잡아 오라고 합니다.

그러자 야곱은 엄마가 시키는 대로 양을 잡아 왔습니다.

리브가는 양고기를 이삭이 좋아하는 온갖 양념을 다하여서 요리를 합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야곱이 엄마가 평상시에 하는 것하고는 너무 다르게 하니 왜 그러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리브가가 네가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야곱이 엄마에게 엄마 난 매끈매끈 하고 형은 털이 많은데 아버지가 만지면 대번에 들통이 나서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 텐데 라고 어떻게 하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리브가는 만약 잘못된다면 모든 저주는 엄마가 받을 테니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곤 집안에 감추어 두었던 에서의 옷을 입히고 손에 염소 털로 가리고 별미를 들고 아버지께로 나가라고 합니다.

 

한 가지 당부하는 것은 절대로 야곱이라 하지 말고 에서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야곱은 에서의 옷을 입고 엄마가 만든 별미를 들고 아버지 이삭에게 아버지의 맏 아들 ‘에서’ 로소이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자 이삭이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서’의 손이라고 합니다.

그리곤 결정적으로 옷에 향취를 맡고서는 축복을 해 줍니다.

축복의 내용이 만민의 주가 되고 복과 저주가 야곱으로부터 갈라진다는 메시야의 축복을 합니다.

 

자 정리해 봅시다.

 

중요한 것은 야곱은 본인이 저주 받을 자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리브가가 저주로부터 피할 길을 마련해 줍니다.

복을 받고 저주를 피하는 방법이 맏아들의 옷을 입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분명이 야곱인줄 알면서도 옷의 향취를 맡고 축복을 한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야곱은 죄인인 우리들을 상징합니다.

리브가가 입혀준 장자의 옷은 예수님의 대속에 옷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지 않고 우리가 입고 간 예수님의 옷을 보시곤 축복을 해 주십니다.

야곱은 마치 천국 잔치 집에 입고 간 예복을 입고 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축복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보고 축복을 하십니다.

야곱이 아비에게 나갈 때 아버지의 맏 아들 ‘에서’로소이다 라고 나간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소이다 라고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이게 복음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또 하나 간과치 말아야 할 것은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은 엄마가 만들어주는 것이지 자기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엄마만이 아버지가 좋아하는 것을 알아요.

 

이걸 지금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은 성령님만 알아요.

우리가 만든 것을 들고 나가면 안 되어요.

우린 하나님 식성(뜻)을 몰라요.

하나님 식성(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은 오직 성령만 알아요.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이 만든 것을 들고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들고 나가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들이 인간의 성화를 들고 나가라고 하니 환장할 노릇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어찌 화를 내지 아니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욕을 들어 먹더라도 고발을 해 주어야지!

 

여러분 이런 말씀을 들으면 소름이 끼치지 않습니까?

이미 수천 년 전에 이삭이라는 한 집안에 일어나는 일을 가지고 성도가 예수님의 피로서 구원 받을 것을 미리 계시해 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이런 약속이 믿어지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옷을 입혀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육적으로도 십자가에서 발가벗김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로마병정들이 제비를 뽑아서 가졌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들에게 입혀주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발가벗김 당하고 우리는 그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구원의 축복을 받은 밑바탕엔 예수님의 피가 뿌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목사라고 하는 작자들이 피를 부정한 것으로 돌려버리고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느냐 이 말입니다.

이걸 어찌 두고 보란 말입니까?

싸워야지요.

고발해야지요.

 

이해가 되시는가 모르겠네요.

어렵지요.

그러나 예수님 사건으로 보면 그리 어렵지가 않습니다.

 

야곱이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아 내는 것을 인간의 상식과 윤리적으로 보면 안돼요.

그렇게 되면 야곱은 에서의 복을 가로챈 것 밖에 안 됩니다.

야곱은 에서의 복을 가로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진행이 된 결과로 받은 것뿐입니다.

 

이미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야곱에게 축복이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야곱이나 에서가 모르고 살았을 뿐입니다.

에서는 당연히 자기가 장자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가문을 이어 받을 것이라고 믿었어요.

장자가 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세상의 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은 자가 복을 받는다고 하면 반드시 작은 자가 복을 받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삭이 인간적으로 에서에게 복을 주려고 하자 리브가가 개입을 하여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일하심의 원리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방법으로 일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삭의 눈에 바보같이 보이는 야곱이 이삭의 가문을 이어가야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약한 자를 들어서 쓰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사실을 알았어요.

 

고전 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선 세상의 지혜가 미련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일하신다고 하십니다.

세상 지혜를 부끄럽게 하려고 배우지 못한 자에게 복음을 깨닫게 하여 배운 놈을 소경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하십니다.

 

쉽게 말해서 신학교 나온 목사는 눈을 가리고 성도에겐 눈을 뜨게 해 주셨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 자랑치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아는 것엔 세상 지혜와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셔야만 합니다.

 

이 말은 가난하고 못 배워야 복음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가난하든 부자든 배웠든 못 배웠든 복음을 아는 데는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잘났다고 자랑할 것도 못되고 못 났다고 기죽을 이유도 없다는 말입니다.

 

성령은 인간을 차별해서 오시지 않아요.

차별할 필요가 없는 것은 모든 인간은 다 바퀴벌레 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선 인간의 방식으로 일하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서 태어난 자들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조건과 상관없이 약속이 성취가 되어야 해요.

하나님의 약속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보면 절대로 그럴 수가 없어요.

큰 자가 훨씬 낫고 작은 자가 못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앞에선 잘났다 못났다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조건은 문제가 안 된다는 의미에서 못난 놈을 축복한 것입니다.

 

만약 에서가 하나님 이건 너무 억울합니다.

아니 내가 어디를 보아서 야곱만 못합니까? 라고 따질 수 있겠지요.

에서가 이렇게 따질 수 있는 기준이 뭡니까?

자기가 야곱보다 우월하다는 것이잖아요.

 

에서가 야곱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그 기준이 누구 기준입니까?

인간 기준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난 인간들 기준을 안 봐!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서같이 따지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모두가 죄인이고 바퀴벌레야!

에서 네가 야곱보다 잘났다고 하는 그 것이 바로 죄란 말이야!

난 너희들을 모두 똑같은 바퀴벌레로 보는데, ‘에서’ 너는 바퀴벌레를 가지고 등급을 나누고 있는 거야!

그게 바로 죄라는 거야!

똑 같은 바퀴벌레라는 것을 안다면 원망하거나 불평 하면 안 돼!

 

나는 인간들 방식으로 일하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야곱을 선택한 것이야!

야곱이 너희 가문을 이끌고 가야 내가 너희 가문을 지키고 잇다는 것이 드러난단 말이야!

너 같이 잘난 놈에게 가문을 맡기면 모두가 너 잘났다고 하지!

내가 끌고 왔다고 하지 않을 것 아니냐?

그래서 못난 야곱에게 가문을 맡긴 거야!

저런 못난 놈이 가문을 이끈다면 그것은 야곱이 이끈 것이 아니고 내가 이끈 것이라는 드러난단 말이야!

 

이런 방식의 일을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선택 할 때 그대로 적용을 하십니다.

12제자들을 보면 전부 찌지리들이에요.

잘난 놈이 하나도 없어요.

잘난 놈은 오히려 바리새인들 속에 있어요.

그래서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복음을 전하자 업신여기는 말로 학문이 없는 자들이라고 조소를 한 것입니다.

무식한 놈들이 뭘 안다고 율법을 운운하느냐 이 말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평신도들이 목사에게 복음을 말하면 코 방귀 뀌는 것과 같아요.

당신이 알면 뭘 안다고 까부느냐고 합니다.

이게 바로 이삭과 같이 인간적인 기준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바퀴벌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 똑똑함을 자랑하지 않아요.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만 이해가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아요.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면 귀해요.

그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그 사람 배후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을 보기 때문에 존경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 주려면 바보 같은 야곱이 이삭의 가문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삭의 뜻대로 되지 않도록 믿음이 개입 하여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해 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이삭으로 하여금 자기 뜻대로 하지 못하도록 하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이삭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장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아! 내 생각이 틀렸구나!

그러니 야곱은 이삭에게 있어 이삭의 불신앙을 고발하는 자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삭은 야곱을 볼 때마다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산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은 어느 시대나 동일합니다.

지금도 이런 일들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백성이 인간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그 일을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언약백성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움직여지도록 되어있습니다.

약속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언약백성이란? 글자 그대로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지금도 성도에겐 믿음이 일을 하고 계십니다.

성도에게 하나님의 믿음이 간섭하지 않으면 에서와 같은 삶을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에서의 삶이란? 장자권보다 팥죽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

 

히 12:15-17=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에서의 삶이란? 복음보다 세상에서 먹고사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기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육신을 가지고 잇기 때문에 에서같이 팥죽을 좇아가려고 합니다.

이럴 때 간섭하시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에서의 길을 걷지 못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믿음 때문에 세상 일이 잘 안 풀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시면 세상 일이 꼬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신다는 말은 우리 뜻대로 살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우리 뜻대로 살게 되었으면 이렇게 여기 와 있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믿음이 간섭하였기 때문에 여기 잇는 것입니다.

저 역시도 믿음이 간섭해 주시지 않으면 이런 목회 안합니다.

이게 뭡니까?

 

복음을 전하는데도 아르바이트 해야 먹고 살수가 있잖아요.

만약 믿음이 저를 간섭해 주지 않았다면 전 지금쯤 큰 교회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복음과 상관없는 목회이지요.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믿음이 간섭을 해 주셔서 교회는 찌그러들더라도 복음을 증거케 하시니 감사할 일이지요.

 

믿음은 성도의 세상 삶을 육적으로 고달프게 합니다.

이를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행하는 징계라고 하십니다.

 

히 12:5-13=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징계란? 다름 아닌 우리 뜻대로 안 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뜻대로 안 살아지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훼방 놓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방해를 하면 우리는 여지없이 광야 이스라엘처럼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난 이제부터 하나님 뜻대로만 살 거야 하지 마세요.

그건 아직까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줄 몰라서 그래요.

그 어떤 인간도 육신을 이길 인간은 없어요.

아무리 복음! 복음 하여도 자기 몸은 거역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도는 늘 삶 속에서 십자가 사건이 터지는 겁니다.

내가 예수를 죽인 인간이구나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 뜻을 거역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터져 나와요.

야! 내가 이렇기 때문에 예수님께 죽으셨구나! 를 알게 합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러나 우리는 눈만 뜨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해요.

이 염려를 떨쳐 버릴 수가 없어요.

밥 먹고 돌아서면 또 밥 달라고 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도 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내 말을 안 듣는 인간들이라고!

믿음이 좋다는 것은 자기가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많이 아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겁니다.

그래서 범사에 예수님이 나 대신 십자가에 죽어주심이 감사하여야 해요.

 

하나님 말씀대로 못 산다고 낙망하지 마세요.

우린 죽었다 깨어나도 안돼요.

우리가 만약 하나님 뜻대로 산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놓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롬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놓았다고 하잖아요.

하나님이 순종 할 수 없도록 해 놓았기 때문에 순종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순종이 안 되도록 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령충만으로 하나님 말씀 지키겠다고 덤비는 인간들은 천지를 모르고 깨춤 추는 겁니다.

자기 주제가 어떤 줄인 줄도 모르고 까불 대는 겁니다.

 

여러분 구약에 사울 왕이라는 사람을 알지요

사울은 다윗을 안 죽이려고 했어요.

다윗이 사위잖아요.

아니 어느 놈이 자기 사위를 죽이려고 합니까?

 

그런데 악신(惡神)이 들면 자기도 모르게 다윗이 미워지고 죽이고 싶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다윗을 죽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는 사울을 움직이는 것이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사울에게 악신을 보낸 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이지요.

하나님이 마귀를 가지고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 베드로를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라고 한 것이 누구입니까?

마귀지요.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마귀가 밀까부리듯이 한다고 하지요.

맞아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한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시험 중에도 살아남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마귀를 가지고 성도를 시험해요.

 

마귀가 야! 미워해 그러면 미워져요.

마귀가 야! 술 쳐 먹어! 그러면 술 먹게 되어 있어요.

마귀가 야! 도적질 해! 그러면 도적질 하게 되어 있어요.

 

이건 우리 의지 밖에 문제에요.

우리 힘으로 어찌 할 수가 없어요.

물론 성령께서 간섭해 주시지만 본능을 완벽하게 제어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늘 탄식하는 겁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보고 한 눈에 반해 버리지요.

왜? 하필 그 시간에 홀라당 벗고 목욕을 하느냐 말입니다.

목욕을 하려면 집 안에 꼭꼭 숨어서 하지!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과 하필 그 시간에 다윗이 옥상에서 바람 쐬러 왔느냐 입니다.

 

누가 그렇게 했겠어요.

하나님입니다.

왜? 그랬겠어요.

넌 죄 지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그랬어요.

벌거벗은 여자를 보면 본능적으로 음욕이 일어나는데 어찌합니까?

이건 다윗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고자 한 것이에요.

그래서 넌 이런 존재라고 알려주는 겁니다.

 

여러분 누구를 미워한다고 하면 그 미움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본능적으로 온 겁니다.

본능은 인간이 제어 할 수가 없어요.

아니 짧은 치마를 입고 지나가는 아가씨를 보면 본능적으로 눈알이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눈알이 돌아가고 난 다음에야 아! 잘못이구나 를 압니다.

잘못을 알았을 때는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자 그럼 왜? 하나님께서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셨는가요?

이는 바로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고 하잖아요.

 

롬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왜? 불쌍히 여깁니까?

안 되기 때문입니다.

잘하면 불쌍히 여기지 않아요.

안 되기 때문에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못 살기 때문에 용서가 필요하고 불쌍히 여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죄가 뭔 줄 아세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줄 모르는 겁니다.

난 말씀을 지킬 수가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모르는게 죄입니다.

하나님 난 참 나쁜 놈입니다! 를 모르는게 죄입니다.

 

반대로 의란 뭡니까?

하나님이 용서 해주지 않으면 나 같은 인간은 지옥에 가야 마땅합니다! 를 아는 것입니다.

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아는게 신자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고 산다는 것을 아는게 신자에요.

 

참 재미있는 것이 천당 간다고 생각하는 놈은 지옥에 가고, 지옥에 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 놈은 천당에 간다는 겁니다.

그런다고 일부러 난 지옥 갈 놈이야! 라고 하지 마세요.

그건 쑈 하는 것이고 가짜에요.

 

진짜들은 성령께서 자기 주제를 알게 해 주시기 때문에 늘 곤고하고 상한 심령이 일어나요.

술 안 먹고, 바람 안 피우고, 도적질 안 해도, 늘 곤고해요.

열심히 주님 뜻대로 산다고 해도 늘 곤고해요.

비관이 아니고 상한 심령이 된다는 말입니다.

상한 심령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성도들은 항상 예수님 십자가만 자랑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 앞으로 잘해 보겠습니다! 라고 하는 자입니다.

이런 놈에겐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고 싶어도 베풀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해주려고 하다가도 스스로 잘한다고 하는데 어찌 용서해 주겠습니까?

 

성화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항상 갈고 닦아서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라고 하니까요.

그러니 예수님의 대속이 필요가 없고 용서가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에겐 의지할 것을 안 주는 겁니다.

심지어 자기 인격조차도 의지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마음이 시궁창이고, 생각이 시궁창이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겉으로 나타난 범죄나 속으로 품고 있는 것이나 동일합니다.

그러니 그 어떤 인간도 범죄치 않는 인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면 손가락질 하지 마세요.

우린 모두가 바퀴벌레들이니까요.

우린 모두가 하나님의 용서하심으로 살 수밖에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들에게 의지할 것을 안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면 너무도 야속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바울같이, 제자들같이, 모든 걸 빼앗아 가시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건강한 몸도 의지할 대상이 될까봐 안 고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신 것은 철저히 간섭하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손에 붙잡힌 제자들은 육적으로는 괴롭고 고달픈 인생 이였습니다.

하나님 손에 붙잡혀서 한 사람도 자기 인생을 살아 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내어주고 우리를 샀는데 그대로 두겠습니까?

하나님은 성도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모습들이 튀어 나오도록 간섭하고 부려 먹습니다.

 

지혜로움이란? 빨리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자기 뜻을 포기하는 것임

하나님은 성도가 천국을 놓치고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아버지로서 고기(천국)대신 전갈(세상)을 줄 수가 없고, 떡(말씀)대신 돌(재물)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자 옛날로 돌아가 평범하게 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여 끝까지 찾아가서 붙잡고 오십니다.

하나님은 요나처럼 지구 끝까지 따라가서 시킨 일을 하도록 기어코 하시고야마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심어준 약속을 실현시키고야 마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심어준 약속이란? 예수의 피로 구원해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이름하여 새 언약입니다.

그러니 우린 실패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구원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마치 믿음이 이삭을 간섭해서라도 축복이 야곱에게 돌아가도록 하시고야 마는 것처럼 우리 역시 믿음이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을 수 밖에 없도록 몰아가십니다.

그러니 현실이 내 뜻대로 안 살아진다고 짜증내지 마시고 다 하나님이 간섭하시니 그렇구나 라고 생각하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천지가 개벽을 해도 변할 수 없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우리 몸에 심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변할 수 없는 약속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도록 할 것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끊어지지 않는 지독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 답게 담대하게 살게 되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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