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인증처得人憎處에 대한 단상
득인증처得人憎處는 그 출처를 확인하기가 매우 어렵다. 또한 해석하기도 쉽지 않다. 연대갑자를 따라 차서를 매겼다. 아래와 같다.
1. 접시꽃의 득인증처得人憎處
2. 여시마함驢腮馬頷의 득인증得人憎
3. 몽산법어蒙山法語의 득인증처得人憎處
4. 결어, 오도吾道의 일이관지一以貫之 (2026. 5. 3. 09:41, 丙午 壬辰 丁丑 乙巳)
1. 접시꽃의 득인증처得人憎處
문헌상 득인증처의 최초 출현은 아마도 당나라 위현韋絢의 유빈객가화록劉賓客嘉話錄이 아닐까 한다. 이를 유공가화劉公嘉話 또는 빈객가화賓客佳話라 일컫기도 한다. 유공은 당대문호唐代文豪로 유우석劉禹錫이고, 세칭 시호詩豪라 일컫기도 한다. 유공과 그의 빈객과의 가화를 수록하여 유빈객가화록이라 제명한 듯하다. 득인증처와 괸련한 문단은 아래와 같다.
“사람들이 학은 태생胎生이라 말합니다. 그러므로 부賦에 태화선금胎化仙禽이라 이른 것입니다. 지금 가마우지도 또한 태생이라 하니, 포박자나 본초강목의 설도 동일합니다. 이것이 어찌 또한 선금이겠습니까?”(人言鶴胎生 所以賦云胎化仙禽也 今鸕鷀亦是胎生 抱樸子本草說同 此豈亦仙禽者乎)
위현韋絢이 말한다. “아마도 세인은 단지 학이 태생인 줄만 알고, 가마우지도 또한 태생인 줄을 알지 못하기에 학이 곧 태생이라 이를 것입니다. 만일 가마우지가 비린 생선을 먹는 것을 반연하여 비록 태생이지만 학과 동류가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지금 양학養鶴하는 이를 보건대, 그 학이 비리고 더러운 것을 먹기를 다시 가마우지보다 더욱 심하다고 말합니다. 만일 색깔이 학보다 검은 것으로 말하면, 바로 백학은 천만년을 지나야 비로소 전변하여 현학이 된다고 하는데, 또 하필 숭상崇尙하겠습니까?”(絢曰 但恐世只知鶴胎生 不知鸕鷀亦是胎生 鶴便謂胎生也 若緣鸕鷀食腥魚 雖胎生不得與鶴同 今見養鶴者說其鶴食腥穢更甚於鸕鷀 若以色黑於鶴 則白鶴千萬年方變為玄鶴 又何尚焉)
유공劉公이 웃으며 말한다. “그래서 군자는 하류下流에 거주함을 싫어하니, 그것이 가마우지를 이른 것이겠습니까?”(公笑曰 是以君子惡居下流 其鸕鷀之謂乎)
위현이 말한다. “학은 보기가 어렵고, 가마우지는 보기가 쉽습니다. 세인은 귀를 귀하게 여기고 눈을 천하게 여기는 연고입니다. 만일 난봉鸞鳳으로 하여금 학처럼 늘 보게 하면 비로 학도 또한 가마우지와 같을 것입니다. 희소한 것을 귀하게 여기고, 세인은 신성하거나 상서로움을 보는 것으로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표陳標 진사가 접시꽃을 영탄詠歎한 시에 이르기를, ‘모란과 함께 얼마나 다툴 수 있을까? 중인衆人의 증혐憎嫌을 얻는 곳은 단지 흔한 연고로다.’라고 하니, 가마우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絢曰 鶴難見也 鸕鷀易見也 世人貴耳而賤目之故也 若使鸞鳳如鶴之長見 即鶴亦如鸕鷀矣 以少為貴 世不以見為聖為瑞而貴之也 所以陳標詠蜀葵詩云 能共牡丹爭幾許 得人憎處只緣多 鸕鷀之謂也)
해설: 진표 진사의 접시꽃 중에 기승전결의 사구를 모두 인용한다.
눈앞의 접시꽃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노라.
옅은 자색에 짙은 홍색의 꽃송이가 수백 그루로다.
모란과 함께 미추를 얼마나 다툴 수 있을까?
중인衆人의 증혐憎嫌을 얻는 곳은 단지 흔한 연고로다.
(蜀葵 眼前無奈蜀葵何 淺紫深紅數百窠 能共牡丹爭幾許 得人嫌處只緣多)
가마우지는 강가에 자주 나타나지만 학은 희소하며, 접시꽃은 들판에 널려 있지만 모란은 부자의 정원에 있다. 새의 능력을 비교한 것도 아니고, 꽃의 미추를 견준 것도 아니다. 귀천의 판단 기준은 오로지 희소성에 있다. 득인증처의 원의가 그러하다. 중인의 증혐을 얻는 곳은 단지 흔한 연고로다.
2. 여시마함驢腮馬頷의 득인증得人憎
응암담화應庵曇華 스님은 호구소륭虎丘紹隆의 법을 이어받아 밀암함걸密庵咸傑에게 전법한 남송시대의 임제종 양기파의 저명한 선사이다. 그의 게송을 인용한다.
삼십삼주를 밟고 칠십여 고승을 배방했는데,
나귀뺨에 말턱이라 중승衆僧의 증혐만 받았노라.
제방의 석덕이 새장을 펼쳐내는 수완이 있었다면,
금일 정명암에 이를 만한 인분因分은 없었으리라.
(三十三州七十僧 驢腮馬頷得人憎 諸方若具羅籠手 今日無因到浄明)
위 사구게는 완산莞山 정명암浄明庵에서 소참시중小参示众으로 하신 법문이다. 제2구에 대한 기존 해석은 이러하다.
“나귀뺨에 말턱이라 중인衆人의 증혐만 받았노라.”
나와 기존의 해석은 어떻게 다른가? 칠십여 고승석덕의 생김새가 나귀뺨에 말턱과 같아서 세인의 증혐만 받고 있다. 말하자면 담화스님이 선인의 용모를 비방하는 모양새이다. 그러나 나의 해석은 담화스님이 스스로 자기를 비하한 것이라 전혀 문제가 없다. 금일 해탈하여 자유자재로 정명암에 이르렀다. 정명浄明이 머무는 암자라면 어떠한 곳인가? 자명하다. 만일 칠십여 고승이 탁월한 수완이 있어서 담화스님을 새장에 가두어버렸다면 어찌했을까?
불광사전의 해설은 이러하다. “득인증처란 득도자得悟者의 경지를 가리킨다. 득도자는 상인常人의 기세와 다름이 있기 때문에 타인이 그를 보고 쉽게 증혐을 내며, 이 때문에 이 호칭이 있게 되었다. 한결같이 파주把住하는 곳과 의향이 동일하다. 응암담화선사어록 제십권에 있다.”(得人憎處 指得悟者之境地 因得悟者具有異於常人之氣勢 他人視之易生憎厭 故有此稱 與一向把住處意同 應庵曇華禪師語錄卷十)
“삼십삼주를 밟고 칠십여 고승을 배방했는데, 나귀뺨에 말턱이라 중인衆人의 증혐만 받았노라. 제방 석덕이 새장을 펼쳐내는 수완이 있었다면, 인일因日 정명암에 이를 만한 인분은 없었으리라.”(三十三州七十僧 驢腮馬頷得人憎 諸方若具羅籠手 因日無因到浄明)
불광사전은 기존 해석의 결정판이다. 인용한 게송 중에 말구의 인일因日은 금일이 옳은 듯하다. 중인은 세인이고, 중승은 칠십여 고승이다. 사람인人자 하나가 조화를 부린다.
나귀뺨에 말턱이라는 여시마함驢腮馬頷은 어떤 조화가 있어서 득도자로 둔갑하는가? 선지식의 행에 팔십일행이 있다고 한다. 그 근거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선재동자의 오십삼 선지식의 행 중에 총상은 청정행이고, 탐진치貪瞋痴 삼독심의 삼행은 별상이다. 삼십삼주의 칠십여 고승이 어찌 한결같이 여시마함처럼 별상이 되랴. 내기 기존의 통설을 취하지 않는 이유이다. 이 별상 중에 승열바라문은 치행癡行을 보이고, 무염족왕은 진행瞋行을 쓰며, 바수밀녀는 탐행貪行을 행하며 수행인을 제접한다. 약석신화엄경론略釋新華嚴經論 중에 해설을 인용한다.
이 아홉째 법왕자주의 선지식 승열바라문과 무염족왕과 바수밀녀는 자유자재한 방편으로 비도非道를 행하는데 도가 같아야 바야흐로 그 경계를 아는 것이다. 청량국사의 대소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구주 가운데 승열바라문은 사견을 보이고, 무착행의 선지식 무염족왕은 성냄을 보이며, 한없는 공덕장 회향의 선지식 바수밀녀는 탐욕을 보인 것이니, 삼독에 나아가서도 정법正法을 함께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려 하기 때문이다. 정명경에 이르기를, ‘생사대해에 들어가지 않으면 곧 일체지의 보배 등을 얻을 수 없다’라고 하고, 무행경無行經에 이르기를, ‘탐욕이 바로 열반이고 성내고 어리석음 또한 이와 같다. 이러한 삼법 가운데서 한량없는 불법을 갖추고 있다.(貪欲是涅槃 恚癡亦如是 於此三事中 有無量佛法)’라고 한 것이 또한 이러한 뜻이다.” 이 게송은 구마라집이 번역한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 하권에 있다.
3. 몽산법어蒙山法語의 득인증처得人憎處
선사의 어록에서 득인증처를 확인하지 못했다. 무지한 탓이고, 검색에 활발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에 몽산화상의 스승 완산정응皖山正凝 선사가 몽산에게 보인 법어 중에 득인증처를 그 효시로 삼고자 한다. 이와 관련한 구절을 인용한다.
“다만 이 무자無字로 반드시 자기를 알고, 모름지기 조주를 알며, 종요로이 불조를 간파하고, 당인當人의 증애憎愛하는 곳을 증득한다.”(只這個無字 要識得自己 要識得趙州 要捉敗佛祖 得人憎處) 몽산화상이 각원상인覺圓上人에 보인 법어를 인용한다. “조주를 감파하고, 당인의 증애하는 곳을 증득하면, 법마다 원통하다.”(勘破趙州 得人憎處 法法圓通) 나의 해석은 이와 같다.
신미대사 이후 우리나라의 고승석덕은 위에서 인용한 5구 중에 제4구와 제5구를 합간合看하여 독해하는 경향이 있다. “종요로이 불조가 인증처를 얻음을 간파하라.”(要捉敗佛祖得人憎處) 또는 “모름지기 불조가 중인의 증혐憎嫌을 얻는 곳을 간파하라.” “조주가 중인의 증혐을 얻는 곳을 간파하라.”(勘破趙州得人憎處) 이는 응암담화 스님의 게송 중에 “나귀뺨에 말턱이라 중인의 증혐만 받았노라.”(驢腮馬頷得人憎)라는 제2구의 기존 통석通釋과 유사한 일면이 없지 않다.
연이어 몽산화상이 총상인聰上人에 보인 법어를 인용한다. “자기를 통명하고, 불조를 간파하며, 당인의 증애하는 곳을 증득한다.”(通明自己 捉敗佛祖 得人憎處) 몽산화상의 무자십절목을 인용한다. “자기를 통명하고, 조주를 간파하며, 불조를 감파하고, 당인의 증애하는 곳을 증득한다.”(通明自己 捉破趙州 勘破佛祖 得人憎處) 만일 통명자기가 평등지라면 득인증처는 차별지에 상당한다고 보아도 좋다.
덕소국사德韶國師와 광효안선사光孝安禪師의 문답을 인용한다.
“삼계에 법이 없는데 어느 곳에서 마음을 구하며, 사대가 본래 공적한데 부처는 어디에 머무는가? 그대는 어느 곳을 향하여 노승을 보는가?”(三界無法 何處求心 四大本空 佛依何住 你向甚麽處 見老僧)
광효안 선사가 대답하였다. “금일에 화상의 견처見處를 간파했습니다.”(今日捉敗和尙見處)
착패捉敗나 착파捉破를 어렵게 볼 것이 없다. 식득識得이나 통명通明 감파勘破와 동일하게 보아도 또한 옳다.
4. 결어, 오도吾道의 일이관지一以貫之
진표 진사의 접시꽃과 담화스님의 정명암 소참시중의 게송, 그리고 몽산법어 중에 득인증처를 인용하고 해설했다. 나는 신미대사 이후 기존 통설의 득인증처 삼전어三轉語를 수긍하지 않는다. 오도의 일이관지를 천명한다. 득인증처에 대한 나의 견해는 하나로 일관된다. 평상화平常話의 법문을 그대로 쓴다.
단지 인人자에 대한 해석만 달리한다. 첫쩨 접시꽃의 득인증처得人憎處는 중인衆人으로 해석하고, 둘째 여시마함驢腮馬頷의 득인증得人憎은 중승衆僧으로 해석하며, 셋째 몽산법어蒙山法語의 득인증처得人憎處는 당인當人으로 해석하고 증혐憎嫌을 증애憎愛로 확장한 점이 다를 뿐이다.(2026. 5. 3. 10:21, 丙午 壬辰 丁丑 乙巳)
2026. 3. 29. 14:28, 길상묘덕일 초련원주草蓮園主 정덕성 씀
첫댓글 희소한 것을 귀하게 여기고, 세인은 신성하거나 상서로움을 보는 것으로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표陳標 진사가 접시꽃을 영탄詠歎한 시에 이르기를, ‘모란과 함께 얼마나 다툴 수 있을까? 중인衆人의 증혐憎嫌을 얻는 곳은 단지 흔한 연고로다.’라고 하니, 가마우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세인은 귀를 귀하게 여기고 눈을 천하게 여기는 연고입니다. 世人貴耳而賤目之故也 이를 귀이천목貴耳賤目이라 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