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지만 장자가 아니니
효종이 승하했을 때 장례를 주관하는 예조판서 윤강과 참판 윤순지는 현종에게 자의대비의 복제 기간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이 물음이 장장 15년 간에 걸친 예송논쟁의 시발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의 질문은 소박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자의대비의 상복 착용 기간에 대해서 '국조오례의'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지 않습니다. 혹은 3년복이라고 하고 혹은 1년복이라고 하는데, 결정할 만한 예문이 없으니, 대신과 유신들에게 의논케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당시 만 열여덟 살의 현종으로서는 갑작스런 부왕의 죽음에 경황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 만큼 예론에 대한 지식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대신과 유신들에게 의논해 아뢰라고 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명령에 따라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 영돈녕부사 이경석, 연양부원군 이시백, 완남부원군 이후원, 영중추 원두표 등의 대신들이 복제 문제를 상의한 후 헌의했다.
"신 등이 옛 예법에 능통하지는 못하지만 시왕의 제도로 상고해 보니 대왕대비께서는 1년복을 입으시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자의대비의 복제는 3년이 아니라 1년복이 맞다는 주장이었다. 현종은 국왕이 승하했는데 3년복이 아니라 1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대신들의 현의에 불만을 가졌다. 왕조국가에서 임금이 승하했는데 어째서 3년복이 아니라 1년복이냐는 생각이었다. 현종이 1년복으로 결정하기 전에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다시 의논하게 한 것은 이런 불만 때문이었다.
현종이 생각하기에 양송은 유학으로 발탁된 유신자 예학의 계승자로서의 학문적 권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선왕으로부터 지극한 총애를 받은 인물들이기 때문에 3년설을 지지할까 해서 묻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양송에 대한 현종의 소박한 믿음일 뿐이었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현종의 하문에 이렇게 답변했다.
"여러 대신들이 이미 시왕의 제도로 결정하기로 의논했으니 신 등은 감히 다른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1년복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의례'의 (상복소)에 '비록 승중한 아들이라도 그 아들이 죽었을 때 3년복을 입을 수 없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따라서 대행대왕(효종)이 비록 왕통을 이었으나 다음 적자 서열이니 이번 국상에 대왕대비께서 입으실 복제는 1년을 넘을 수 없습니다."
증중이란 조상의 제사 받드는 중임을 이어받거나 장손으로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을 말하는데, 양송이 여기에서 쓴 승중이란 전자를 뜻한다. 즉 효종이 소현세자의 뒤를 이은 차자지만 역대 선왕 등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중임을 이어받은 임금이란 뜻이다. 그러나 결국 장자가 아니니 아무리 임금이라 해도 자의대비 복제는 3년복이 아닌 1년복이라는 의미였다.
송시열.송준길의 견해는 비록 임금이라 해도 예법에 초월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출처] <25> 4부 왕위에 올랐다고 가통까지 이은 것은 아니다 - 예송논쟁(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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